2014년 6월 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요한 6,51-58)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remains in me and I in him.
말씀의 초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상기시킨다. 마음이 교만해져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구해 내신 하느님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성찬례의 의미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친교를 이루기 때문에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며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실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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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마지막 만찬을 다시 한 번 성대히 기념합니다. 교회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는 일체의 화려함을 피하고,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뒤에 거행하는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예수님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명에 대하여 감사하고 마음껏 기뻐합니다. 이러한 기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신심 행위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 뒤에 이어지는 성대한 성체 거동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쉽게도 여러 이유로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으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교회에서는 이날의 성체 거동을 공동체의 중요한 신심 행사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체 거동의 화려한 행렬을 하는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체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온 이유를 생각해 보았을까?’ 비록 외적인 성체 거동을 하지 않더라도 성체 성혈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하는 오늘 우리도 이러한 질문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리로 나가(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시절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성체 거동에 앞서 행한 강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강론에 따르면,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간직하고 그 안에 머물기 위하여 거리로 나간다고 합니다. 곧, 길이신 주님 안에 머물려면 단지 제자리에, 제 보금자리에 ‘머물러서’ 안 되므로 거리로 나선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근본정신을 ‘머물고 기억하며 걷는 것’이라고 요약하시며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하여 걸으면서 그분의 행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유념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억 속에서 걸어야 하고, 기억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이 기억은 사랑의 기억일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안락한 곳에 머무르는 사랑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투신과 아픔을 아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벗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봉헌하는 미사’를 두고 여러 말이 있었음을 압니다.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과 함께 ‘거리’로 나서게 하며,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머물고 기억하며 행하라
-조재형 신부-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 속에 당신의 몸을 담아 주신 성체성사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는 빈첸시오회가 있었습니다. 빈첸시오 정신은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웃과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빈첸시오 회원들은 본당과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김장 김치를 담가서 나눠 주기도 했고, 설날에는 불고기를 양념해서 드리기도 했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이발 봉사도 시작했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차량 봉사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질적 도움만이 아니라, 쓸쓸하고 외로운 분들에게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지만, 지역 사회에 있는 소외된 이웃들과 가난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출산율이 감소하며, 자살률이 증가하고 성범죄가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족 간에 대화가 사라지고, 주변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물질을 먼저 생각하고, 경제적인 부의 창출을 생각하고, 나만의 행복과 성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민기씨가 불렀던 ‘작은 연못’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 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깊은 산 속 작은 연못에 살던 물고기가 서로 싸웠고, 한 마리가 죽어 한 마리만 남아서 연못을 독차지하고 잘 살 것 같았는데 결국 물도 따라 썩어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연못이 되었다는 노래입니다. 우리 사회도 성공과 행복, 돈과 명예를 찾아 서로에게 독을 품었기 때문에 세상이 썩어가고 썩어가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고 그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이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배고픈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마리아의 노래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우리는 2000년 동안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의 그 약속이, 주님의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우리 모두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치고, 외롭고 가난한 이웃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서공석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 말씀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성찬에 대해 믿고 있던 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마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서 머무른다.’ 신앙인들은 성찬으로 예수님이 그들 안에 계시게 하고, 그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신 실천들이 그들 안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자, 제자들은 각자 자기의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각자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하였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의 식탁에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루가 22, 19)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식사 중에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들의 스승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상한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회상은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되었고, 후에 그것이 책으로 엮어져, 오늘 우리가 가진 네 개의 복음서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성찬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며, 이야기한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고를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치던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친 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겨서 하신 일이었다고 복음서들은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이 고친 이야기가 요한복음서(9장)에 있습니다. 그 불행이 누구의 잘못으로 주어진 벌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저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며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유대교가 하느님이 버렸다고 낙인찍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율법을 주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율법을 범하면서, 율법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절대적 잣대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하고, 우리는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였고, 신앙인은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이 하신 일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그 믿음과 그 실천 안으로 제자들을 초대하는 성사(聖事)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자비를 생애 끝까지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여, 우리도 그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우리도 그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 피라는 포도주를 마셔서,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은 인간관계이고, 피는 생명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졌던 인간관계와 예수님이 사셨던 생명을 우리 안에 살려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신 일은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불쌍히 또 측은히 여기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외면하고 쉽게 버립니다. 그런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극복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기념하여 행하는 성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던 하느님이 달라집니다. 하늘 저 멀리, 높이 홀로, 고고히 계시면서 우리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분이라고 믿었던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변합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사는 그분의 자녀로 변합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자고 재물과 권력을 탐하던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아무런 대가없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이웃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겨야 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성찬은 대자연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변하게 합니다. 대자연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하고, 버리고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 삶의 무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이기에, 우리가 깨끗하게 보존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는 대자연입니다.
성찬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희생적 사랑,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지는 관대하고 희생하는 마음,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실천, 성찬은 그런 현상들 안에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보게 해줍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안에 사는 인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현장을 외면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합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입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우리도 같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고,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로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인간관계와 그 생명이 우리 안에도 충만하여,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입니다. ◆
생명의 빵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다는 정확한 보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6,51-58에서 만찬례를 암시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합니다(51절).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된 음식이자 음료이며 이를 먹고 마시는 사람 안에 예수님이 살게 되며, 그 힘으로 사람이 연명하게 된다고 합니다(55-57절). 만찬례를 암시하기에 다행이지 잘못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아니 실제로 초창기 그리스도교는,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들이 혹시 '식인종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비티니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 2세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낸 바 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날 밝기 전에 모여 서로 번갈아 가며 마치 신과 같은 그리스도를 위해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그런 일이 끝나면 그들은 관습에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음식을 드는데 이는 해롭지 않은 보통 음식입니다"(플리니우스 편지 2장 7항). 틀림없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서 오고 갔던 말들이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주면서 '이는 나의 몸이다',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이는 나의 피다'라고 하신 일, 곧 최후의 만찬을 매주 재연(再演)했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먹는다는 소문이 났을 법합니다. 그러니 플리니우스가 확인을 해본 것이겠지요.
이는 큰 문제로 요한 6,52에 보면 유다인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도전을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셈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이 던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요한 복음이 씌어지던 1세기 말 경에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었던 고민을 대변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명 8,2-3.14ㄴ-16ㄱ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준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을 자상하게 돌보시며 양식을 주셨던 하느님의 은혜를 상기시켜 줍니다. 절대 딴 생각 품지 말라는 것이지요.
1고린 10,16-17에서 바오로는 우상 숭배를 경계하면서 주님의 만찬례를 거론합니다. 우리는 만찬례의 빵과 잔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니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 2독서 모두 어리석은 신앙, 빗나간 믿음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씌어졌습니다.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는 말인가?'라며 예수에게 도전했던 유다인들이 절로 떠오르는 내용들입니다.
유다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나눈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요한 3,1-21).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는 조용히 예수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인간은 누구나 거듭 나야 된다고 했더니, 니고데모는 '도대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다 자란 어른이 다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 언어가 아니라 과학 언어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서에 나오는 내용을 과학적으로 따지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절로 맘 고생을 겪기 마련이지요. 예수님은 훨씬 위대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려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성형 대축일
-이용화 신부-
교회는 6월을 예수 성심 성월로 정하여 우리에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일깨운다. 일반적으로 ‘거룩하다’라는 용어는 ‘성스럽고 위대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국어 사전). 성서에서 ‘거룩하다’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고 말씀하셨고, 신약에서 바울로는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로마 12.1)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일깨운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새겨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거룩함의 첫 걸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삶에서 비롯된다.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자신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소개하신 후에 “이 빵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빵이며 당신의 살”이라고 부연하신다. 성서에서 ‘빵’은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귀중한 것으로 묘사되는 한편, ‘빵’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 만으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당신의 ‘살’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은 최후만찬 때 언급된 ‘피’(마르14,24)와도 연관되어 성체성사를 언급하고 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마신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살과 피’란 육체가 아닌 ‘영으로 가득 찬 살과 피’를 의미한다.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영적인 살과 피를 먹은 자만이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 제1독서에서 저자는 유다인들의 과거를 회상하게 하며 하느님의 은혜 베푸심을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기억은 현재를 반성하게 하고 미래를 설계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기억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준 것은 ‘만나’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강조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촉구하신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로는 이교 문화권에서 우상숭배의 위험에 처한 신자들에게 우상숭배 참여를 금지하고 성체와의 일치를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은 성체성혈 대축일로 성서는 성체성사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체성사는 잔치, 제사,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미사를 의미하며, 미사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잔치와 같다. 이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같은 솥에서 나온 음식(성체)을 함께 나누면서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주님께서 특별히 마련해 주신 음식(성체)은 일회성이 아니다. 이 음식(성체)은 받아 모시면 모실수록 더욱 간절하게 느껴지게 하고, 영적인 고픔과 갈증을 해결해주는 신비스러운 음식이다.
<마지막 미사> -양승국신부-
언젠가 꽤 위중한 환자에게 병자성사와 봉성체를 거행하기 위해 한 병실을 찾았습니다. 그날따라 교통체증이 무척 심했고, 또 길을 잘 못 찾아 헤매다가 많이 늦었지요. 그리고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속전속결로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영성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나름대로 엄청 바쁘고 여유 없는, 그래서 무척 성의 없어 보이는 저에 비해 환자의 모습은 정말 진지했습니다. 엄숙하다 못해 거룩해보였습니다. 마치 시가 수억이나 나가는 다이아반지라도 받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성껏 성체를 손에 받으십니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예식을 행하듯이 진지하게 성체를 영하셨습니다. 이어서 눈을 감고 깊은 침묵과 함께 기도를 드리십니다.
일분, 이분, 삼분, 사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대충 성사를 거행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맞아, 내게 부족한 것이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정성, 마음, 진지함이 결여된 미사, 부끄럽게 드린 지난 미사들이 떠올라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침묵 가운데 진심으로 그 환자를 위해, 그리고 부족한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매일 우리의 밥이 되어 오시는 주님, 당신 성체를 통해 매일 우리를 구원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이 곳 저 곳 기웃거리지만 사실 매일 거행되는 사랑의 성체성사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음을 우리가 알게 하십시오.
우리 부족한 죄인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그저 해치워야만 하는 숙제처럼 여기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가 마치 마지막 미사이듯 정성을 다하게 도와주십시오. 매일 봉헌되는 미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임을 알게 도와주십시오.“
부족한 사제이기에 미사를 집전하면 할수록 느끼게 되는 고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과연 언제쯤 미사다운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겠는가?"하는 고민입니다. 하루를 여는 성체성사가 영적 에너지를 부여받는 은총 충만한 순간, 정녕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시간이 돼야 할텐데…. 피곤에 찌든 심신으로 마지못해 습관적으로 미사를 봉헌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성체성사, 정성이 배제된 성체성사, 삶과 연결되지 않은, 단지 통과의례인 성체성사는 주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언젠가 지극한 정성으로 성체성사를 집전한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회피하고만 싶던 '짜증 덩어리', 만나면 속만 상하던 골칫거리로 존재하던 이웃들이 그저 불쌍하고 안쓰럽기에 한없이 감싸 안아주어야 할 '사랑 덩어리'로 변화되는 기적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행복한 언약을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늘 부족한 우리에게 한량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비록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지만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예수님 몸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셨지만 당신 양들을 향한 목자로서 희생과 헌신은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방황하고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측은지심은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부디 성체성사를 소홀히 하지 말길 바랍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더욱 완결된 성사가 되도록 이웃사랑의 실천, 가난한 이웃들과 나눔,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가 생활화돼야 함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해 사랑으로 무장한 우리가 이제 용감하게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사랑의 식탁에서 충만한 에너지를 공급받은 우리가 그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를 슬픔과 절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 누구에겐가 전해주길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이런 영적 점검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영원한 연인이신 구세주 하느님을 우리는 얼마나 정성스런 마음으로, 또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을 즐겨 찾는다고 합니다. 장례식장이 더 즐겁거나 좋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함께 웃어주는 것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인성녀들은 상실의 아픔 앞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진정한 위로를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이러한 위로를 던질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생전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정말로 이 말씀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통해 생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작은 사랑보다는 나의 작은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아닌, 자기 뜻만을 서로들 내세우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떤 때였습니까? 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었을 때, 제자들의 배신을 알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간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장 많이 간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장 큰 선물인 성체와 성혈을 우리 모두에게 내어주신 것이지요.
밀알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맺은 밀의 줄기는 추수를 위해 잘려야 하고, 추수한 이 밀을 가지고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빻아져야 합니다. 빻아져 반죽을 한 뒤에는 뜨거운 불에 구워야 맛있는 빵이 될 수 있지요. 빵이 되기 위한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이 안에 자기 포기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희생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희생을 본받아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우리도 맛있는 빵이 되기 위해 자기 포기의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특히 죄인의 모습에서도 무한대의 주님 사랑을 계속해서 받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나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닮은 우리의 작은 사랑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끈기는 보통 사람을 특출하게 만들고 무관심과 무기력은 비범한 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든다(와드).
주님을 중심에 모십시오.
어떤 사람이 13년 동안 더러운 악령으로부터 무섭게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견디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시련이 그치기를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오 하느님, 제게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승리해서 더러운 악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그를 괴롭힌 더러운 영이 이렇게 선포하더랍니다.
“네가 나를 이겼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내가 아니라 나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너를 이기신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가 주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닌 주님이 중심이 될 때, 어떤 유혹이 찾아와도 거뜬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실 수 있는 오늘이 되십시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6,55) -김대열신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기도는 두 말 할 것 없이 미사입니다. 왜 미사가 그토록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가 매일 변함없이 저질러지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봉헌되는 성체성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끔 피정 지도를 가는 곳이면 강론 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으신 분은 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물론 성체를 모실 외적인 자격은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내 질문의 의도는 영성적인 차원에서 그 답을 찾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꼭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이 세상에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어 모시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체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께서 거저 주신 선물임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선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두 가지만 허락됩니다. 하나는 “죄송합니다. 애를 썼지만 또 죄 속에서 당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는 마음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오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기억에 있는 상처나 죄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니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 생각 없이, 너무 뻔뻔하게 성체를 모시는 이들이 많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성체를 모셔야만 합니다.
생명의 춤
-인영균신부-
어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한 기도음악회’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겨울 바다처럼 차디찬 우리 마음속에 잠겨있던 영혼들이 기도 음악 소리에 흥겨워 수도원 성당 내부를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는 연도와 레퀴엠 기도 음악에 실려 큰 울림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성체와 성혈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얀 밀떡과 붉은 포도주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모시는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들이 모인 곳에는 더 충만한 생명의 힘이 춤을 춥니다.
죽음과 거짓의 힘은 생명의 춤 앞에 무너집니다.
일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쌍용 자동차 해직 노동자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수없이 목숨을 끊었는데, 대한문 앞에서 사제와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거행한 후에는 단 한 사람의 노동자도 목숨을 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몸의 기적, 생명의 기적입니다.
생명의 빵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립니다.
미사에 와서 성체를 모실 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기적을 느낍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제가 곧 나으리이다”는 겸손한 기도로 주님을 모십시다.
부당한 죄인이지만 주님의 선택으로 우리는 생명의 몸이 됩니다.
생명의 춤으로 살아갑시다.
생명의 기운으로 죽음을 넘어 나아갑시다.
먹힘으로써 살리시는 주님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마침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 영원히 지속되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사랑자체이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성 베드로 알칸다라).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 (1코린1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말에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그 동의가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은 1814년 성체성혈대축일에 지방에서는 최초로 성체거동(성체현양대회)을 하였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성체께 흠숭을 드리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며 영성체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많이 생기기를 바랐습니다. 올해가 시작한지 10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00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4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미사를 마치면서 성체현시를 하고 오후4시까지 기도를 이어가며 성체강복으로 마치게 되는데 2013년 5월30일을 시작으로 2014년 6월19일 현재까지 제가 확인한 것만 21차례나 당신의 현존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직 교회의 공식인준을 받지 않았으나 함께 기도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때마다 목격하였고 은혜로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당신이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성체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주기 위해 보여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성체를 흠숭하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이 더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황송하게 받을 뿐입니다
< 성체와 성혈, 왕의 광대 >
-전삼용신부-
2005년 말에 개봉해 천만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 ‘왕의 남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광대로 살아가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공길은 여인보다 더 예쁜 남자 광대입니다. 어느 날 공연 중에 양반이 공길을 원합니다. 이에 장생은 공길을 데리고 도망쳐 한양으로 올라옵니다.
장생은 자신들이 만난 패거리들과 왕을 가지고 놀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이었던 연산군(정진영)은 기생출신 뱀 같은 애첩 녹수(강성연)의 치맛자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것을 풍자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공연이 기대보다 훨씬 히트를 치자 결국 궁궐에서 이 광대들을 잡으러 나왔습니다.
그들이 왕을 풍자하고 비하하였기에 죽음의 위기를 처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보겠소!”
그러나 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왕 앞으로 나갑니다. 물론 왕이 보고 웃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는 말을 들은 상태입니다. 왕은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결국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궁궐 안에 살게 해서 왕의 광대로 삼습니다.
이젠 왕을 대놓고 풍자할 수 없게 되자 썩어있던 궁궐 중신들을 풍자합니다. 뇌물을 받고 부정한 정치를 한 이들을 풍자할 때 왕은 좋아하지만 중신들은 당장 광대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풍자에 따라 탐관오리들을 무참하게 제거해 버립니다.
풍자를 하는 족족 칼바람이 불기 때문에 이젠 경극을 해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경극을 보고도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었던 것을 상기해 내며 선왕의 여자들을 칼로 베어 죽입니다.
왕 또한 예쁜 남자 광대 공길을 좋아해 그에게 쏙 빠져 버립니다. 왕의 눈물을 본 공길도 왕에 대한 연민이 생겨 궁에서 도망을 치지 못하고 남게 됩니다. 신하들 속에서 아무 힘도 없이 휘둘리고 기생과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왕, 이 왕에 대한 연민이 그의 발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에 장생이 줄을 타며 왕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풍자합니다. 그런 장생을 왕은 달궈진 인두로 눈을 짖어 장님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데 눈이 먼 장생과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공길은 다음 생을 약속하며 임금과 녹수를 향해 몰려오는 반란 세력들 위로 줄을 힘차게 튕겨 날아오르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떨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왕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광대는 다시 태어나도 광대를 할 것이라며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을 주는 빵이 당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살’이란 단어는 “말씀이 살이 되셨다.”라고 할 때 쓰인 같은 단어인데 ‘몸’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말씀이 그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말하기 위해 쓰인 육체를 의미하는 구체적인 단어인 것입니다.
가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당신의 살이 ‘말씀’이나 ‘은총’을 의미하는 식으로 해석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살’이 되셨듯이, 그 구체적인 ‘살’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살을 어떻게 먹느냐고 많은 이들이 그분을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게 되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을 바꾸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을 말할 때 그 몸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지니고 사셨던 살과 피, 즉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체와 성혈을 영할 때마다 약간은 거북함을 느낍니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궁궐을 풍자하기 위해 들어오는 광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광대가 왕도, 애첩도, 중신들도 모두 풍자를 하여 심기를 괴롭히듯이 예수님도 당신 사랑의 성체로써 그렇게 내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편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합니다. 겸손한 이가 있으면 교만한 사람은 힘이 듭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그 빛 때문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눈을 짖어버리는 것입니다. 내어 쫓고 죽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랑의 완전한 표현인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우리가 그 풍자를 이겨낼, 그래서 우리 자신이 변화될 의지가 없다면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왕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광대, 세상에서 광대보다도 더 낮아진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왕으로써 살던 내가 광대보다 못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니 참 임금을 몰라보고 내가 왕 노릇한 것을 뉘우쳐야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깊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에야 그 땅에 피가 스며들어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보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나의 죄인인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화낼 때 살인죄를 위해 그분이 대신 죽으셨고, 내가 음탕한 눈으로 쳐다볼 때 그분의 눈이 대신 뽑히셨고 내가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대지 못해서 그분이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카인은 아벨이 너무나 싫습니다. 눈에 가시입니다. 카인은 악이고 아벨은 선입니다. 카인이 왕이고 아벨은 광대입니다. 왕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광대가 싫어서 그를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카인도 아벨을 죽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 적셔집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양심으로써 왜 죄 없는 아벨을 죽였느냐고 카인을 나무랍니다. 카인은 자신이 한 짓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 때서야 땅을 포기하고 멀리 떠나갑니다.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한 짓이 들통이 나야합니다. 마치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그렇게 만인 앞에 죄인임이 들통 났을 때 그분은 나에게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광대가 풍자로 사람들의 간악한 마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성체와 성혈도 우리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카인을 그리워한다면 다시 그 곳을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카인을 죽이지 않게 표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내 안의 자아도 뱀도 절대 완전히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그 왕이 물러가고 내 안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 그 피를 통해 그분께서 나의 왕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의 신비입니다.
성체성혈을 받아들이면서도 내 죄가 폭로되지 않는다면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체와 성혈이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믿는 이들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1985년 11월 14일, 전재용 선장이 이끄는 참치 원양 어선 ‘광명 87호’는 1년 동안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SOS를 외치는 조그만 난파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난파선 위에는 96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엉겨있었습니다. 어선 회사로 전화해 보니 상관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선장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표류하던 베트남인들이었습니다. 전 선장은 회사의 방침을 어기고 그들을 끌어올립니다. 선원 25명이 도착할 때까지 먹을 10일치 식량밖에 없었지만 그것들을 96명과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떨어지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치 잡은 것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먹으며 버티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선원들의 침실을 배정하고 노환자와 병자들은 선장실에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부산에 도착하여 난민소에서 1년 반을 수용되어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된 피터누엔이 19년 만에 전재용 선장을 찾으면서부터였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 선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 선장은 그 일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서 퇴사 통지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어떤 해운 회사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양식업자로 통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생동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전 선장은 2004년 8월, 자신이 구조해 준 많은 베트남 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 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25척의 배로부터 외면당하며 죽기만을 기다리던 바로 그 성체와 성혈들, 그 가장 보잘 것 없게 된, 우리 양심을 괴롭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외면당한 채 죽어가는 이들이 곧 광대로써 우리의 죄를 낫낫이 드러나게 만드는 성체와 성혈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와 성혈을 보면서 우리 마음은 풍자를 당할 때의 마음처럼 쓰라려야 합니다. 갈등이 일어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두어 계속 우리를 풍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무관심과 이기심, 세상에 대한 집착, 권력과 돈이나 사람에 대한 애착 등이 만인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은 아니라는 양 그냥 지나친 25척의 배가 아닌, 광명 87호처럼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세상에 존재하는 작은 그리스도인들을 내 안에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
-미사예찬-
-이수철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한 마디로 성체성사, 미사 대축일입니다.
강론 제목 역시 미사가 얼마나 좋은가 하는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미사예찬-'이 되겠습니다.
매일 미사의 힘으로 사는 수도자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분명 주님도 오늘 복음에서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결국 오늘 대축일은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날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주님 승천대축일, 주님 성령강림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그리고 오늘 주님 성체성혈 대축일, 모두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이시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밥인 생명의 빵으로 오시는 사랑의 하느님, 바로 이게 오늘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오늘 강론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시절,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의 성체거동에 앞서 행한 강론에서 착안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오늘 대축일의 근본정신을
'머물고 기억하며 걷는 것'이라 요약하셨고(매일미사 책, 오늘의 묵상 149쪽)
저 역시 교황님의 통찰에 그대로 공감했습니다.
오늘 저는 미사가 얼마나 좋은지 이 세 측면에 따라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 안에 머무십시오.
주님 안에 머무는 미사시간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관상이 우선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말씀도,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餘)와 휴(休)를 잃어가는 세상입니다.
멈출줄 모르는 것도 큰 병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여와 휴를, 영육의 건강을 회복하는데 미사보다 더 좋은 쉼터는 없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의 사랑의 성체성혈을 모셔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안에 머뭄으로 완전히 내외적 일치를 이루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바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과 상호내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요
미래에 대한 영원한 보장이 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미사 아닌 어디서 이런 영원한 생명, 영원한 희망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 선물이 미사입니다.
미사예찬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미사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이요,
미사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기억하는 미사시간입니다.
기억보다 더 영성생활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요즘 치매환자들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미사보다 치매예방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정말 깨어 절실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한다면 기억상실의 치매는 없을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본질은 '사랑의 기억'(아남네시스anamnesis)'입니다.
'사랑의 기억' 참 고마운 말마디입니다.
사랑의 기억들로 가득할 때 영적 풍요의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의 기억들로 충만케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사랑의 기억인 아남네시스 미사가 과거를 현재화하고 미래를 현재화하여
지금 여기서 영원한 현재를, 영원한 오늘을,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행복을 살게 합니다.
영적인 '치매현상(dementia)'을, '기억상실(amnesia)'예방합니다.
영성생활은 순전히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여 현재화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의 모세 역시 광야여정을 마쳐가는 당신 백성에게
하느님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광야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여라.
너희를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타성화된 안주와 나태의 삶에서 매일 엑스도스,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영성생활에 망각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하여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이요,
매일 미사때 마다 축복의 잔을 마시며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축복의 빵을 떼며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에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한 자녀들 공동체로, 주님 안에서 한 형제들 공동체로 살게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셋째, 주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사실 걷는 것은 육신의 건강은 물론 영혼의 건강에도 좋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과 하나되었으면 주님과 함께 삶의 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성체거동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렉시오디비나가 들음-묵상-기도-관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의 실행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렉시오디비나의 완성이듯이,
미사 역시 파견에 이어 일상에서의 사랑의 수행을 통한 미사의 완성입니다.
걸으십시오.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머물고 기억한 것이 사랑의 열매를 맺게하는 걸음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향한 우리 삶의 순례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광야여정입니다.
머물고 기억하면서 계속 주님과 함께해야 하는 여정입니다.
제가 성경 표현 중 주목하는 대목이 걷는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서품상본의 성구가 좋습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6,24).
에녹의 승천을 말하는 대목인데,
여기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하느님과 함께 걷다(walk with God)'가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광야여정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역시 마태복음 마지막 대목에서 분명한 약속을 주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얼마 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한 게 있습니다.
그분은 삶을 파도타기에 비유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파도타듯해야 삶의 항해여정에서 익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한 마디 덧붙혔습니다.
"삶 자체는 고해도, 축제도 아니다.
파도타기를 잘할 때 삶은 축제이지만 파도에 휩싸일 때 삶은 고해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파도타기를 잘하여 축제인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로 삶의 파도타기를 잘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어제 만난, 파도타기 대가의 경지에 오른 선배 원로 신부님의 평범한 말씀도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주교님이 용도폐기한 것을 아빠스님이 재활용하셨습니다.
이렇게 불러주어 강의할 수 있음도 감사한 일입니다.
삶을 의무로 알아 억지로 살게 아니라 삶을 즐기며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머뭄-기억-걸음'의 영적 삶의 리듬에 충실함으로 파도타기의 명인이 되어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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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