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229. 묵상글 (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 어둠이 있다면. 등 )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둠이 있다면
요한의 서간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둠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둠과 어둠의 종류에 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어둠 할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과 암울함을 말함입니다.
두 번째 어둠은 죄의 어둠입니다.
이 어둠이 어제와 오늘 요한의 서간이 얘기하는 어둠인데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제일 처음 한 짓이 숨고 감추는 거였듯
죄짓게 되면 스스로 어둠 속에 숨기에 어두워지는 어둠입니다.
세 번째 어둠은 미움의 어둠입니다.
미움의 어둠은 일명 지옥의 어둠입니다.
미워하면 우리의 마음은 지옥이 되지요.
오늘 요한의 서간은 이 어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둠의 종류가 이렇게 다르지만,
셋 다 빛이신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빛이신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우리가 절망하는 것이고,
죄가 드러나는 것을 감추려고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숨다가 어두워지는 것이며,
우리 마음 안에 미움만 있고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에 어두워지는 겁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의 사랑은 불과 같습니다.
불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하느님의 사랑에서도
우리를 따듯하게 하는 열정과 우리 앞을 비추는 빛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어서
열정이 식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힘이 없고,
비전(Vision)이 사라져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영어의 Vision이라는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Vision은 라틴말 본다는 말 Video 동사에서 나온 것이며,
이 말에는 본다는 뜻이 있고 특히 앞을 내다본다는 뜻이 들어 있지요.
사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 뭔가 할 열망과 의욕도 있고 미래비전도 있는데
온돌이 냉골이 되듯 하느님의 사랑이 없어서 우리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우리는 미워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구들을 데우는 불과 같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을 데우지 않으면
우리 사랑은 온돌에서 냉골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이 없어서 우리 사랑이 온돌에서 냉골로 바뀌지 않았는지
그래서 미워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할 수도 없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루카 2,30)
성탄 팔부 축제 제5일 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이 모세의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굳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4,4-5)
사실, 율법(속량법)에 따른다 하더라도 굳이 성전에 가지 않고 어디서든 사제에게 성전비용(다섯 세캘)을 바치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간 것은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후 남편 엘카나와 함께 나이 많은 사제 엘리를 만나는 이야기를 반영해줍니다(1사무 24-28).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랍비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했듯이(루카67-79),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도 시메온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루카 2,28-32).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Nunc Dimittis)로 시작되는 이 찬미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주며,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풀어주셨다. 쉬게 하다‘, 죽게 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합니다. 또한 “모든 민족들, 다른 민족들”은 이방인을 뜻하며, 그들에게도 “계시의 빛”이 비추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는 예수님은 “모퉁이 돌”로서 믿는 이들에게는 요긴한 돌이지만, 배척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것을 말해줍니다(이사 8,14-15;28,26;로마 9,33;1베드 2,6-8). 그리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의 “마음 속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이라는 예고는 마리아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이러한 시메온의 눈은 관상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주보고 있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의 눈이 되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루카 2,30).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인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3,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빛을 기다리고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 그리고 그 빛을 누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시메온에겐 구원이 전부였고,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삶의 여러 가치 중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제일 먼저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삶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위해 제 삶을 다듬고 고치고 정리하는 데 열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함께유).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에 보면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죽게 한 것, 그의 아내 바세바를 취한 것은 왕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선량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도록 한 것은 왕이었을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왕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왕이기에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왕이기에 앞장서서 싸워야 합니다. 백성들이 이방의 신을 섬기면 왕이기에 이방의 신을 쫓아내고 참되신 하느님을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신하들이 있다면 왕이기에 공정과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왕은 왕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는 왕입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왕은 설령 잘못을 했을지라도 곧 뉘우치고 참회하는 왕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왕은 왕으로서의 본분과 의무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왕입니다. 이런 왕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백성들은 따르기 마련입니다.
국민들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친분과 인맥을 통해 요직에 앉도록 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야당의 대표를 무리하게 수사하도록 하고, 이미 지나간 사건을 다시 소환하여 재판에 넘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무리하게 압수수색을 남발하고, 자신의 허물은 모두가 아는 것임에도 애써 감추는 것입니다. 이념의 잣대로 편을 갈라서 외교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국제무대에서 왕따 당하는 것입니다. 분단된 나라에서 조국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정책을 펴기보다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성 발언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50%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자신을 지지했던 50%만 챙기고 반대했던 49%의 국민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서민의 안정과 민생의 안정을 위하지 않고, 재벌과 기득권의 권리만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대통령이 있다면 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외면을 받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바다와 같아서 대통령이라는 배가 순항 할 수 있도록 하지만 때로 험한 파도가 되어서 대통령이라는 배일지라도 침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사제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런 일들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들이 말하는 것은 따르고 지키되 저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마라.” 저들의 행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위선과 허영 그리고 교만과 욕망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속은 썩어 들어가지만 겉만 화려한 삶입니다. 단식한다고 표는 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삶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삶입니다. 자기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삶입니다.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사랑이 없고,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의가 없는 삶입니다. 사제이기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사제 생활 32년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사제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았는지! 나는 사제이기에 꼭 해야 할 일은 외면하지 않았는지!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꼭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나들이 오는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부모의 눈에서는 늘 자신의 아이가 건강하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깃들어 있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 것만 보더라도 쉽게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그 부모는 성전으로 향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를 봉헌하는 이유는 자기 자녀가 행복하기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아기를 돌봐주시기를 간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 날, 아픔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이런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칼이 가슴에 박히는 아픔 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양육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 말의 의미를 이미 온몸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언자들이 들려준 말들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그 아픔을 고스란히 하느님께 봉헌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누군가를 키워내는 길은 이런 것일 것입니다. 편한 길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의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쉬운 길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영원한 행복을 준비하십니다.
그 행복에 들어가신 아기 예수님의 부모,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
뭐 먹을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말라 하셨는데
사실 늘 먹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갑곶 주방이 쉬는 날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은 직원분들과 외식을 합니다.
매주…. 무엇을 먹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게는 걱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입니다.
뭘 먹어야 더 행복할까?
뭘 함께 먹어야 더 맛있을까?
이렇게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지? 누구랑 먹지?
이런 고민이 걱정이 아닌 즐겁고 행복한 고민이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함께하는 모든 사람과 행복한 고민 하세요^^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신부들과 산책을 함께하다가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산책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신부가 “뱀”이라며 급박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함께 걷던 신부 모두는 움찔했고, 그중에 동작 빠른 신부는 다급하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뱀’이라고 말했을 때, 실제로 땅에서 뱀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신부의 장난이었습니다. 도망친 신부는 뱀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노끈을 보고서 놀라서 도망친 것이었지요. 노끈이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신부의 말에 ‘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깜짝 놀라고 공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과 행동으로 자기 생각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즉, 직접 보고 판단하면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말로 바꿀 수가 있을까요? 바꿀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바꿔야지만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직접 활동하셔서 이 모든 상황을 벗어나 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 역시 주님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생명 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도 아닙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위대한 사람인 우리는 우리의 생각 변화로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되십니다. 이 자리에 시메온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복음은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쎄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라고 전해줍니다.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하는 다른 유다인과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평생을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기다렸던 그는 드디어 주님의 그리스도를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또 그 뜻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만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라는 안일한 마음을 버려야 하며, 또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다리는 삶. 성령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
오늘의 명언: 좋은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은 늙어서도 항상 찬사를 듣습니다(삶과 죽음에 대한 연극 중).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의 축복
-"밖으로는 산처럼, 안으로는 강처럼"-
수십년간 휴가없이 지낸 수도생활이지만 어제는 용단을 내려 하루 휴가를 내어 영화 두편을 보고 왔습니다. 얼마전 원장수사로부터 식사시간의 조언이 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순례하는 마음으로 왕복 2시간 거리 우직하게 걸어서 다녀왔습니다.
“한 번 영화보고 오시죠. 햄버거도 잡수시면서 ‘노량’과 ‘서울의 봄’을 보세요.”
“고마운 조언대로 공부하는 마음, 애국하는 마음으로 하루 휴가내어 먼저번 얘기 나눈 영화 두편 보고 옵니다. 올 해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입니다.”
제가 감동한 것은 영화에서 감지되는 감독이나 영화배우들의 치열하면서도 가열찬 삶입니다. 온힘과 정성을 다해 이뤄진 작품임을 깨닫습니다. 무거운 감동을 안고 1시간 거리를 걸어서 귀원할 때는 평생 숙제를 가슴에 가득 담고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에는 주목되지 않던 관심이 요즘은 온통 사람에 집중됨을 느낍니다. 그래서 즐겨 읽는 책도 평전이나 자서전입니다. 정말 있어야할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그 책임의 본분에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얼마나 고귀하고 감동스럽고 아름다운지요.
이런 성서나 고전같은 분들을 만나면 살아있는 책 한권을 대하는 듯 마음 상쾌합니다. 한마디로 “답게”의 삶입니다. 사람답게, 신자답게, 아버지답게, 어머니답게, 선생님답게, 제자답게, 군인답게, 검사답게, 정치인답게, 수도자답게, 사제답게등 끝이없습니다. 예전 교대학장은 '답게'의 삶을 표방해 호도 '다운'이라 정했다 했습니다. 참으로 각자 제자리에서 제역할의 ‘–답게’의 삶을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노량’ 영화에서의 성웅(聖雄)이라 일컫는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군인다운 삶의 모범이요, 성군(聖君)이라 일컫는 남달리 백성을 사랑하며 훈민정음등 무수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왕다운 삶이 모범이겠습니다. 그래서 두분의 동상은 늘 광화문 거기 그 자리에 서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신학교 시절 교수신부님의 수차례 인용했던 강의중 한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람답게’ 막연하고 추상적입니다. ‘자녀답게’, 즉 ‘하느님의 자녀답게’하면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평범한 듯 하지만 비범한 삶이요 우리가 평생 지향해야할 삶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정주의 삶역시 수도자다운 삶을 목표로 합니다. 수도자다운 삶 역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25년전 1998년도 생활성서 10월호에 소개됐던 인터뷰 내용중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반봉쇄, 반관상의 정주서원 생활은 자칫하면 안주하고 녹슬기 쉬운 삶이예요. 안으로는 강처럼, 내적쇄신을 거듭하고, 밖으로는 산처럼 한결같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수철 원장수사는 안으로는 강이되고 밖으로는 산이 되어야 한다는 말마디에 유난히 힘을 준다. 그는 언젠가 ‘정주’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지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참 좋다. 하느님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 살면 그렇게 좋은 것을, 왜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리저리 헤매는 걸까.”
말그대로 정주의 축복입니다. 제가 썼던 무수한 시들도 정주의 산물이자 정주의 축복입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는 시도 생각납니다. 지금도 읽다보면 저절로 잔잔히 미소짓게 됩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하늘 흰구름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이런 정주의 축복을 사는 이가 바로 오늘 복음의 시메온입니다. 시메온이야 말로 정주의 대가, 정주의 달인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요한1서 다음 말씀은 그대로 루카복음의 시메온에 대한 주석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옛 계명이면서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니다.
빛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이전에 이처럼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처럼 살다가 마침내 때가 되자 어둠은 사라지고 참빛이신 주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주님의 참빛속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시메온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행복해 보입니다. 정주 축복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 들기전 끝기도때 마지막으로 시메온과 함께 바치는 찬미가요 언젠가 맞이할 선종을 위해서도 이보다 좋은 찬미가는 없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이어지는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름다운 강복이 언젠가 있을 우리의 선종의 죽음을 보장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정주 축복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23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리는 사람>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다.”(루카 2,25)
빛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고
늘 빛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은
미움을 떨쳐내고
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쁨을
기다리는 사람은
슬픔을 가로질러
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재물과 권력 너머
늘 사람 품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우상들에 속지 않고
늘 하느님 모신 사람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