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여기까지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도, 예, 복습으로 읽어오시면 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2. 르네상스의 기본 사상은 인문주의이다. 인도주의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인본주의는 ‘사람이 만물의 근본이다.’라는 사상이다. 따라서 인문주의는 인본주의가 아니다. 오늘의 문과계열과 통하는 공부라고 할까. 그러나 신에서 사람이 중심인 사싱으로 옮겨갔으므로 인본주의의 냄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권과 개성을 중시하면서
사람이 생각해낸 과학과 문화를 존중했다.
천주교의 신권을 반대했다.
인문주의는 이후의 서양 사상에서 핵심 사상이 된다.
*고전을 통해 그리스-로마를 공부해보니, 그 때는 종교가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의 신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신이다. 신의 역할이 워낙 미약하다보니
신화라는 이름으로 문학에 편입되어버렸다.
1) 투쟁성이 있었다. - 과거의 사상을 벗어나려니
특히 교회와 마찰이 심했다.
2) 현실과 실재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정신을 수립했다.
천국이 아닌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 —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신의 뜻대로에서, 인간의 의지에 가치를 둔다.)
3) 과학적이다. -- 과학적(합리적) 사고를 한다.(교회와 마찰을 일으킨다)
과학혁명을 르네상스의 원동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4) 중세 봉건사회에서 --> 근대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시기의 사상을 보여준다.
3.르네상스 시대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
1)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희망봉을 돌아가는 인도 항로 발견), 마젤란
2) 과학-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지동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카톨릭에 도전한 이론이다.
3) 루터의 종교 개혁
4. 영국의 스페인 무적함대 격침
시대를 주도한 국가가 바뀐다.
영국이 중심 국가로 떠오르면서, 카콜릭 국가와 다르게 진보사상을 가졌다.
카톨릭과 마찰을 일으키고, 시민전쟁까지 하면서(크롬웰의) 자유, 민주국가의 탄생을 이끈다.(명예혁명 등)
5. 메이플라워 호의 신대륙 정착
미국이란 유럽과 다른 국가가 탄생하다.
6.아비뇽 유수 시절
( 교황청이 아비뇽에 머문 시기(1309 – 1367)를 말한다.
중세에 일어난 사건이며, 교황권과 황제권의 다툼에서 황제권이 우위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중세가 기우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다루는 이유는 그때의 카톨릭의 위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
===>
*백년전쟁, 페스트의 유행 이후에 재정-군사 국가가 나타났다.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정이 필요했고, 강력한 중앙 집권의 행정력을 필요로 했다.
이 시기는 군사제도가 용병에서 상비군 체제로 바뀌고, 중무장한 기병에서 화기로 무장한 직업 보병이 나타났다. 이들은 기독교의 교파 간의 전쟁에서 참전했다.
--> 15세기에 이르면 유럽에서 국가 간의 군비 경쟁이 나타났다.
전쟁이 능력이 뛰어난 군사를 갖추지 못하면 국가가 소멸한다. 작은 나라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 군비를 갖춘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로 이태리 침범 전쟁을 일으킨다. 밀라노, 나폴리를
점령하고, 이에 대항하는 칼 5세(스페인, 신성로마제국)가 나와서 전쟁을 치룬다.
*** 이제는 교황권이 황제권에게 밀리게 된다.
==> 교황이 추락하는 역사가 전개된다.
(떨어질 때는 발버둥친다)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교황 보니파키스 8세(이태리 인)에 승리하여 교황을 거의 굶겨죽이다시피 하고
프랑스 인을 교황으로 선출했다. 클레멘스 5세이다. (프랑스와 이태리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클레멘스 5세는 이태리로 가기를 두려워했다 한다.
*이태리에 가까운 아비뇽에 자리를 잡았다.(아비뇽 유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카놋사 굴욕),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는 세속 왕을 굴복시키고 신정정치를
펴려고, 투쟁적이었다.
*** 보니파키우스 8세는 자신은 경건한 종교인 생활을 하면서도 전비를 마련하려
성직을 판다든지,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빌미를 제공했다. 성직에 임용되면 수입의
일부를 교황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 교황과 왕이 다툴 때 고위 성직자는 자신의 수입 때문에 교황의 반대편이 되기도 했다.
이탈리아계 추기경은 교황의 로마 귀환을 바랐으나 전체 추기경 23명 중 6명인 그들은 방법이 없었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처음부터 프랑스 왕에게 약점이 잡혀서 도덕적 부패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종교 생활을 충실했다고 한다.
*1367년 — 우르비노 5세는 교황청을 로마로 옮긴다.
(로마로 옮기면서도 이태리인이 자기를 해꼬지 할까 봐서 조심했다고 한다.)
이때의 종교관은
1) 교회를 반대하는 것은 신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다.
2) 교회가 옹호하는 세속 국가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 이런 종교관을 가지고 이단 신앙을 물리쳤다.
이단 신앙이 많았고, 교회는 전통 교리로 대응했다.
교회가 이단을 제압하려 군대 동원도 했고,
수 천 명을 화형에 처한 일도 있었다.(종교재판)
(*교회에서 보면 이단이지만 이들의 입장은 순결한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성 카트리나는 많은 회유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창녀’라고 했다.
오늘은 성 카트리나가 되어 있다.)
*성 카트리나(1347-1380)는 이태리 출신으로, 도미니코 수도원의 수도사이다.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함으로 아비뇽 교황청을 로마로 옮기는 일을 했다.
1461년에 카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했다. 이로서 이태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