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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맹)
점술에 뛰어난 맹인은 관상감 소속 관원인 명과맹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맹인은 ‘판수’로 생업을 삼았다.
판수(判數)는 민가에서 활동한 독경과 점술 전문가였다.
판수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명통시(맹인 교육 및 집회소)에 모였다.
명통시에서 독경 기술을 전수했고, 정기적으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맹인 판수)
나라에서 거행하는 전례를 정리한 ‘태상제안’에 판수를 동원한 의례가 나온다.
판수는 기우제나 임금이 거처를 옮길 때 동원됐다.
동원된 판수는 ‘옥추경’이라는 도교 경전을 외웠다.
이로써 비를 불렀고 임금이 거처할 곳에 있을지 모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중국에서 도교 도사가 하던 일을 조선에서 판수가 담당했던 셈이다.
(맹인 판수)
판수는 무당처럼 현란한 몸짓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대신 듣는 이가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전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외웠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추재기이’에 판수 유운태의 삶을 정리했다.
유운태는 100번 점을 쳐 단 한 번도 실수가 없던 당대 최고 판수였다.
점 풀이로 하는 말도 범상한 판수와는 달랐다.
운수를 묻는 이에게 효의, 공손, 충성, 신의를 말해 사람 된 도리를 일깨웠다.
조선후기 문신 성대중은 유운태를 만나 운수를 물었던 일을 ‘청성잡기’에 쓰면서
“죽을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도 처벌할라치면 유운태의 말이 떠올랐다”
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맹인의 삶은 지금처럼 고단했지만 비장애인이 맹인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조선 사람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맹인이 보고 느낀다고 여겼다.
이러한 믿음 아래 관현맹의 연주에 감탄했고, 판수의 목소리를 신뢰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