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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 생각] ㅡ 뫼비우스의 띠
기레기들이 문제 제기에 대해 김남국 의원이 해명하면, 의혹이 해명됐다는 말 대신,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래도 의혹은 남는다"는 꼬리표를 붙인다.
거의 모든 기레기들의 공통점이다. 어제 유튜브 방송에 나온 코인 전문가라는 사람도 똑같다. "다 살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의혹은 남는다."는 식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하게 되는데, 의혹의 끝이 없는 근거 없는 의혹들을 무한궤도에 올린 듯.
조국 장관 때도 그랬었다. 매일 5만 건 이상씩 한 달 내내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들에 한 개인이 어떻게 대응하나? 해명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게 된다.
조국 장관을 비난하던 강훈식 의원이, 유튜브 방송에서 "혹시 조국 장관이 며칠 전 무죄 판결 난 거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강훈식은 당황해 하며 "몰랐습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결국 조국 장관 사건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내부총질)에 앞장섰던 셈이다.
이렇게 '묻지마 의혹제기'와 '묻지마 비난'이 민주당 내에서 계속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김남국 의원에 대한 비난에 앞장선 8인의 정치 초년생(정치 초보)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 윤미향 의원 사건과 조국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내부총질의 일상화'가 되어버린 민주당이 됐다.
조응천 이상민 김종민 이원욱 초선 8인 등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민주당을 중요한 고비에서마다 계속해서 뒤에서 잡아끌어당겨 주저앉히려는데 앞장서는 대표적 내부총질러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민주당은 계속 내부분열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200석도 가능한 다 이긴 게임이라고 보이는 내년 총선도 이자들 때문에 불안불안하다.
kjm _ 2023.5.15
2.
[과학의 미래]
우리는 지금 주술에 의존하던 시대에 사는 게 아니라 과학에 의존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주술의 허접함에 정밀한 과학을 비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나 과학 또한 만능은 아닙니다.
과학이 오히려 우리의 미래를 파괴로 이끄는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고 그 확률은 더욱 커갑니다.
과학의 발견이 주는 신기함으로 우리를 유혹해서 점점 과학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심증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과학이 기술을 동반해서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고, 다른 한편으론 파괴를 더욱 용이하게 하는 사악한 도구가 됩니다.
과학이란 결국 지식이고 앎입니다. 사악한 앎은 우리를 더 빠르게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돈 냄새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등쳐먹기 쉬운 정교한 방법을 과학적 앎을 통해서 찾게 된다면, 그리고 당한 사람들이 다시 이를 흉내내기에 몰입한다면 끝없는 경쟁으로 나아가 전쟁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결국 무한루프와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는 상황이 되어 시지프스의 21세기 신화에로 퇴행하게 되겠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더이상 과학으로 도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아마도 과학에 의해 석기시대로 되돌아가는 국면에 처해있다고 봐야 합니다.
단순 계산상으론, 적들을 10명 죽이기 위해 우리편 5명을 희생해도 좋다는 확고한 신념으로서 옳다고 여기며 자랑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옆에서 보기엔, 아무 쓸데없이 15명씩 계속 그냥 죽어나가는 모습입니다.
과학이, 신념이, 확신이, 경쟁이, 효율이, 만용이, 궁극에 가서는 모두를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코 과학의 미래는 밝지 못합니다. 그것을 사용할 자격 미달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격미달자들로 이루어져 운영되는 우리 현 정부의 미래도 밝지 못합니다. 어쩌면 석기시대로 우리가 가장 먼저 빠르게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kjm _ 2022.11.3
3.
《철학산책》
맨 밑으로 아메바에서 시작해서 맨 꼭대기까지 오르면 '존재'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존재의 껍데기를 한 꺼풀 벗기면 '실존'이란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실존의 모습,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고독, 슬픔, 고통, 신음 소리, 꽉 찬 고뇌, 아픔의 상처들로 한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본 나의 모습입니다. 나의 실존을 대하는 순간, 어느덧 욕망도 이성도 다 사라져버리고, 남는 건 좌절과 절망을 불러오려는 것들 뿐입니다.
합리적 계산이나 공정을 요구한다거나 정의를 찾는다는 건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고, 치유를 필요로 하는 지금. 여기. 나. 아파.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실존의 모습 나.인 것입니다.
존재에 이르기까지, 존재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고 다양한 천차만별의 모습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를 통일시키려는 계획들은 지극히 무모한 시도였을 뿐입니다.
보편 아래에 두고, 일반으로 묶고, 논리로 풀면, 삶에 관한, 실존에 대한 답이 나옵니까?
존재로서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인생에 존재에 대한 설명이나 이해보다 더 차원 높은 답을 필요로 합니다.
존재를 초월해 있는 그 무엇, 그것을 신(god)이라 부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또 다시 '신의 존재' 여부의 문제로 뫼비우스의 띠에 갇힙니다.
존재를 넘어선 해답을 찾으려다, 다시 존재 문제에 함몰하고 맙니다.
신은 고급 관념인 이념으로서만 취급되고, 실존의 치유와 해답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20세기를 통과하고, 다시 21세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실존의 시간들 / kjm _ 2022.3.13
4.
[미국 권위의 추락]
19세기가 유럽 제국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2차세계대전과 미소 냉전시대를 거쳐, 소련 붕괴와 함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 패권 국가의 시대였으나, 21세기에 들어와, 약해진 미국은, 동맹국들을 앞세워, 미국의 20세기 패권을 계속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미국은 힘(권력, 패권)의 약화를 스스로 드러냄과 동시에, 온갖 반칙들과 오만함으로 신뢰를 잃고 권위마저 추락시키고 있다.
권위란, 싸우지 않고도 다스릴 수(통제할 수) 있는 힘이며, 권력과 패권이란, 끊임없이 싸워야만 유지되는 힘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속에 갇혀, 끝없이 싸워 이기려는 미국의 애처로움을 보고있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굥의 검찰쿠데타 정권은 한미동맹에 목매고 매달리는 듯해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든다.
kjm _ 2022.5.30
* [침팬지 동맹보다 못한 한미동맹]
kjm _ 2021.5.30
"동맹 구성원 간의 결속은 매일 이뤄지는 친밀한 접촉에 기반을 둔다. 껴안고 만지고 키스하고 털을 다듬어주고 서로 호의를 베푸는 행위 말이다.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 돌아다니면서 악수를 하고 아기에게 입을 맞추듯이, 최고의 지위를 원하는 침팬지들은 다른 침팬지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고 아기침팬지에게 입을 맞추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알파 수컷이 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보통 육체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크고 안정된 동맹을 이끌기 때문이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중에서
짝사랑만큼 비루한 사랑도 없다. 한미 동맹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은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미국의 요구를 거절 못한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결코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오로지 제재와 압박과 간섭 및 관여(참견)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대한민국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북한에게도 오로지 제재와 압박만을 줄기차게 유지한다. 중국에게도 마찬가지다. 또한 중동의 국가들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엔 무관심과 무신경으로 아주 낮잡아 보고 있다. 일본에겐 관심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얕잡아 보는 건 역시 마찬가지다. 유럽 국가들에 대해선 논쟁이라도 하건만(유럽 국가들에 제재와 압박이 들어갔다는 걸 보지 못 했다), 대체로 아시아들에 대해선 논쟁은 커녕 강압과 핍박만 있고, 약속들도 손바닥 뒤집듯이 엎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는 필히 인종차별이 내재되었음이 분명하다.
침팬지들도 동맹을 맺으면 매일매일 친밀감을 표현한다는데, 우리가 미국과 맺고 있는 한미 동맹은 이런 침팬지 동맹보다도 못하다라는 것이다. 미국은 그저 요구사항만 늘어놓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기가 일쑤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대고, 사드 배치 문제도 강압적으로 안 되니 밤에 몰래 처리하려 든다. 고양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미국이요, 신의를 밥먹듯이 저버리는 미국이다.
그런 미국의 실체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백일하에 발가벗겨지자, 이제는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내심 인종차별에 기반해서 좁게는 중국을, 넓게는 아시아 국가들을 겨냥해서 전쟁으로 협박하려 든다. 자기의 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전형적인 패악질이다.
이런 명분도 없고 도덕심도 사라진 미국의 행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세계는 미국의 힘의 논리 앞에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중국이냐 미국이냐'를 양자택일하라는 미국의 억지는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다. 우리 대한민국도 이젠 독자적으로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까짓거 한미 동맹 없으면 죽나? 과거의 은혜를 갚는 것도 정도껏이어야 하고 또 속으로 내켜야 하는 거 아닌가? 미국도 그간 오랜동안 억지를 부려왔으면 이젠 양심 좀 있어야 하지 않나?
'침팬지보다도 못 한 것들'이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려면 미국은 이제 제대로 투명하게 한미 동맹에 임해야 할 거다.
5.
[삶과 죽음 : 민주주의의 성숙, 그리고 혁명과 반역]
우리의 몸 안에는 두 개의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하나는 생명의 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선으로...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생명의 선은 플러스로, 죽음의 선은 마이너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기도 하고,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 마주보고 달릴 때도 있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이 서로 남인 양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같이 마주앉아 서로를 응시하기도 할 게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자기 삶을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경우, 아니면 자신의 죽음에 대입해 보려는 경우, 삶과 죽음이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혹은 뫼비우스의 띠로서 연상하는 경우 등 무수한 자기 해석에 빠져서 나름의 결단을 가지면서 생각을 중간에 접는다고 본다.
나는 한 때 삶은 연속이고 죽음은 불연속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떤 정답을 정해 놓고 자신의 답안지와 맞춰보려는 속성을 가지지만, 오히려 미지의 답을 찾으면서 나아가 몸으로 부딪혀 알게 되는 것이 삶과 죽음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설명과 이해는 무의미한 것 같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은 이기적일 수 있다.
과학자들이 바라보는 생성(삶, 생명)과 소멸(죽음)은 우리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기에 말이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신의 영역까지, 나아가 과학과 기술의 영역까지 확장되게 되면, 앞서의 생각들은 초라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어느 신앙인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어느 나비의 생애와 죽음을 시간적 변화에 따른 변화 과정으로 기술되어질 수 있겠다.
"나부터", "나 먼저", "지금 당장"을 외치는 이기적 인간 혹은 실존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생각이 지배할 것이기도 하다.
또, 개인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으로 나누어 본다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환경 등의 영향들을 배제할 순 없다.
역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 관한 나의 사색을 일단 여기서 멈추고, 최근에 일어나는 문제들 가운데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나의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먼저, 조국과 김진태의 청문회에서의 사상 논쟁을 보고나서 던지는 질문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속 안으로 사회주의 사상까지를 포용해서 감싸 안을 만큼의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가 못 되는 건가?"
다음으로, 윤석열 검찰의 반개혁 검란의 재등장을 보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혁명과 반역! 촛불 시민이 이룬 무혈의 촛불 혁명이 반역의 기치를 들고서 반란을 선동하는 검찰에 의해 또 다시 더럽혀져도 괜찮은 건가?"
"윤석열은, 제갈량이 위연을 가리켜 지적한 '반골'이 아닐까?"
https://v.daum.net/v/20190907223853840
kjm _ 2019.9.8
6.
[함께 잘 사는 길]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30년을 함께 일한 직원을 이 번에 잘랐다는 어느 기업인의 호소를 듣고 유시민 이사장이 한 말은...
"어떻게 30년씩이나 최저임금을 줄 수 있어요?"
라고 유튜브 방송인 '알릴레오'에서 말했답니다.
"왼 손이 장갑 낀 걸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 그것도 30년씩이나요??
이 추운 겨울에 할 소린 아니겠죠?
"함께 잘 사는 나라"...
를 희망하는 저로서는...
절대로 이것이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냥꾼의 노래로 불리워서는 안 된다는 거죠.
"함께"는 왼 손에, "잘 사는"은 오른 손에~
그렇게 양 손에 장갑을 끼우는, 그래서 온몸 전체를 따뜻하게 보호하려는 그런 희망의 노래가 아니겠어요?
희망이 없는 삶과 미래의 희망이 소멸된 나라는 고통과 괴로움이 지속되는 뫼비우스의 띠 속에 빠져버린 지옥(헬조선)일 따름입니다.
'함께 잘사는 나라 만들기'가 현재 우리의 국정 목표지요?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도 포기할 수 없고 또 "잘 살기"도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최저임금 인상도 포기할 수 없고 일자리 늘리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기업들이 자기들의 이익 늘리기는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나 서민들에게는 포기와 양보만을 강요하면서 임금을 다반사로 착취하고 갈취했거든요.
어느 누가 이것이 진실이며 팩트임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셋인데 빵 하나만 내놓고 이거라도 감지덕지해라 아니면 일감도 없을 테니까 라는 식의 협박을 기업들이 해 왔죠.
사람이 셋이니 빵을 세 개 달라는 게 부당한 요구인가요?
지금 이제 겨우 빵 한 개 얻게 될 뿐인데요.
이런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악성 프레임에서 벗어나야만 우리의 더 나은 미래가 보이게 될 겁니다.
최저임금 올리는 건 정부이지만 일자리 만드는 건 기업이죠.
기업이 최저임금 인상을 핑계로 일자리를 줄이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지금 정부가 앞장서서 자처해서 돌 맞으며 일자리 늘리려고 애쓰고 있는 거구요.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다만 기업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까지 예전처럼 방치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이걸 가지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인 거죠.
일자리 감소에 혹여 불만이 생겨 불평할라 치면 정부에게가 아니라 일자리 책임 당사자인 기업들에게 쏟아야 하지 않나요?
40명 정원인 1반 교실에 담임이 빵 40개를 반장에게 나눠주라고 줘요.
반장이 몇몇 일진들과 함께 20개를 나눠먹고 나머지 20개로 나머지 35명에게 나눠줘요.
일진들의 똘마니들이 이 중 10개를 차지하고 나머지 10개를 30명에게 나눠먹으라고 줘요.
그걸 본 담임이 그 다음부턴 직접 한 명 한 명에게 빵 하나씩 나눠줘요.
그랬더니 뒤로 가서 담임 몰래 폭력을 행사해서 아이들의 빵을 뺐는 일이 생기는 거에요.
그러자 아이들은 담임을 원망해요.
담임 때문에 빵도 못 먹고 매까지 맞았다구요.
과연 이게 정상일까요?
이 담임에게로 향한 원망이 정상적인 판단이고 올바른 비난인가요?
또!
옆의 2반에선 예전처처럼 관행대로 반장에게 맡겨서 불공평한 분배를 해요.
그러면 1반 학생들은 2반을 부러워해야 할까요?
예전이 그립습니까?
예전에 대한 향수가 일어납니까??
또!!
빵이 40개에서 설사 60개까지 늘어났다고 쳐요.
그러면 늘어난 20개의 빵은 과연 누구 손으로 들어갈까요?
잘못된 분배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그 20개는 고스란히 반장과 일진들과 똘마니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필연적 귀결입니다.
여전히 30명의 학생은 빵 10개로 나눠먹어야 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건 잘못되고 오염된 분배 구조, 즉 분배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득주도성장이고 공정경제이고 최저임금인상인 것입니다.
지금의 정부가 이런 시스템의 전환으로 인해 한 분 한 분 각자의 어려워진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바른 시스템이 정착될 때까지는 우리 각자 모두가 인내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현 정부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저도 화가 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사심 없이 무지 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엔 한 자리 차지하면 부정과 불법으로 한 탕 어떻게 해 먹을까만 머리를 굴렸었는데,
지금 관료들은 어떤 댓가나 보상도 없이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하잖아요. 그것도 무지 욕 먹어가면서.
우리가 좀 이해해 주고 또 때로는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
kjm _ 2019.1.13
K / 2026.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