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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문성길, 오른쪽이 허영모. 문성길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돌주먹'이라고 불릴 정도로 주먹의 파워가 대단한 선수였다. 허영모는 파괴력에서는 문성길에게 떨어지지만 테크닉에서는 우위를 점하였다.
화려한 테크니션 - 허영모
허영모가 복싱에 입문한 과정은 조금 특별하다. 원래 배구를 했던 허영모는 김상모의 눈에 띄어 배구에서 복싱으로 종목을 바꾼 것이다. 이 김상모라는 분이 특별한 인물인데, 이발소를 하면서 공터에서 새끼줄로 링을 만들어 복싱을 가르쳤다. 놀라운 건 복싱 선수 출신이 아니라 복싱 교본을 읽으면서 복싱을 가르쳤으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배출한 복서가 허영모 뿐 아니라 많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 기준으로 김상모가 허영모를 눈여겨 본 것은 허영모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체육특기생이 아니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이는 후술할 문성길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에서, 결국 전국체전에서 우승해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참고로 허영모는 당시 스포츠선수로는 이례적인 케이스로 영어를 독학하여 통역이 없어도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81년, 고등학교 2학년이던 허영모는 몬트리올 월드컵에서 은메달을 따낸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나이에 이룬 결과였기에 허영모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 당시 허영모는 국내에서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8년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 88년 올림픽 대표로 출전한 오광수 등이 번번이 허영모를 넘지 못할 수준이었다. 후술하겠지만, 문성길은 세계선수권에서 우승을 했을 때, '(허영모와 비교해 세계선수권에서 만난 선수들은) 수월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복싱 엘리트 과정을 차곡차곡 밟고 있는 기대주였다. 1982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1984년 한국이 김동길과 함께 금메달 후보로 생각할 수준에 이른다. (정작 금메달을 딴 선수는 미들급 신준섭으로, 한국에서는 다크호스 정도로 보고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허영모는 질병으로 제 기량을 보이지 못하고, 8강에서 탈락한다. 독감에 걸렸던 것인데, 도핑 테스트로 인해 항생제를 먹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허영모는 체급을 올린다. 허영모의 키는 173cm으로, 지금의 기준으로도 작지 않은 키였으며, 플라이급을 하기에는 너무 큰키였다. 그때 올린 체급이 밴턴급이었는데, 당시 한국 밴턴급에는 상당한 강자가 있었다. 바로 문성길이었다.
대기만성형 - 문성길
문성길은 국가대표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국가대표가 되기 전, 국내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6번을 획득한 것이 커리어의 전부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던 한체대 진학에는 실패하고 대신 목포대에 입학하고 나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간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수의 금메달을 가능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라이트플라이급의 김광선, 앞에서 언급한 허영모(플라이급), 김동길(웰터급) 그리고 문성길이었다. 문성길은 1회전에서 로베르트 쉐넌이라는 미국선수를 만나 RSC로 승리하는데, 이 선수가 실은 미국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던 선수였다. 그 정도로 문성길의 주먹은 강했다. 문성길은 이후 경기에서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되면서 올림픽 메달의 꿈은 좌절된다.
허영모와 문성길, 둘 모두 올림픽에서 메달이라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둘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 한국복싱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강자였다. 1986년에는 전체급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이때 금메달을 딴 선수로 오광수, 김광선 그리고 문성길 등이 있다.
어쨌든 허영모가 밴턴급으로 체급을 올리면서, 국제대회에서 1명만 허락된 국가대표 자리를 두고 허영모와 문성길은 지금도 간혹 회자되는 경기를 펼치게 된다. 그 1번째 경기는 1984년 12월 14일에 열린다.
(참고로 당시 허영모에 대한 대우는 상당했다. 한체대 졸업 이후 실업팀인 해태(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해태'가 맞다.)에서 허영모에게 제공하던 월급여가 600만원이었다. 월 600만원은 지금도 큰 금액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대우였다. 허용모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허영모와 문성길의 첫 번째 대결에서, 문성길이 승리하고 이에 허영모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때 문성길을 끝내 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경기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명승부로 꼽힌다. 초반은 패스트 스타터 허영모의 우세였으며, 2라운드 중반부터는 문성길이 가져온다. 최종 결과는 3-2. 문성길의 판정승이었는데, 허영모의 입장에서는 클린치 파울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당시 경기의 심판은 복싱계에서 정확한 판정으로 이른바 '나이프'라는 별명을 가진 채용석 심판이었다. 그는 당시 판정에 대해 '고뇌에 찬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정도로 파울 하나가 허영모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목이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허영모는 문성길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마 그때 문성길을 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1985년 월드컵 선발전에서 둘은 다시 만난다. 이 경기는 허영모의 입장에서 매우 아쉬운 경기였다. 1라운드에만 두 번의 스탠딩 다운을 뺏어냈으며, 허영모에게 RSC 승이 주어도 아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심은 경기를 계속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도록 한다.) 이후 문성길은 1라운드 종반 허영모에게 다운을 뺏어내면서 경기는 추격전 양상으로 바뀐다. 그리고 결과는 또 한 번 문성길의 3-2 판정승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허영모는 문성길을 단 한 번도 이긴 일이 없다. 하지만 지금도 허영모 vs 문성길이 회자되는 이유는 1, 2차전이 국가대표선발전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기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6년 아시안게임 선발전. 이 경기는 1, 2차전과 비교해 싱겁게 문성길의 승리로 끝난다. 심판 전원일치 문성길의 판정승이라는 결과만 봐도 경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의문이 되는 것이 있다. 허영모는 문성길은 넘지 못했지만 오광수, 김광선 등 당시 한국의 강자들도 넘어보지 못할 정도의 선수로, 밴턴급이 아닌 페더급을 선택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173cm라는 점에서 밴턴급(56kg)이 아닌 페더급(현재 아마추어 복싱에서는 없어진 체급으로, 58kg 정도의 체중이었다. 참고로 라이트급은 60kg이다)을 선택했어도 되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허영모가 페더급 국가대표 박형옥과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문성길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을 하는데, 문성길은 세계선수권에서 만난 선수들을 평할 때, 허영모와 비교해 수월했다고 평가했다. 립서비스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 포먼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를 물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알리를 생각했지만 포먼은 조 프레이저라는 말을 했었다. 문성길이 허영모를 상대로 모두 이겼지만, 1, 2차전은 문성길에게도 쉽지 않았던 경기였다. 참고로 문성길은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할 때 대부분의 경기를 KO 또는 RSC로 이겼다.
드라마틱한 라이벌전은 어쨌든 그렇게 3번으로 마무리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문성길은 프로 진출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후 허영모와 문성길의 스토리는 둘의 복싱 스타일만큼이나 달랐다. 문성길은 프로로 전향 2체급을 석권하고, 9번의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지켜낼 정도로 프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문성길이 프로로 전향하면서 무주공산이 되었을 것 같은 밴턴급이었지만, 허영모는 복싱계에 환멸을 느끼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 이후 허영모는 그동안 복싱계에서 얻은 메달과 상장을 모두 폐기했을 정도였다.
(다음 시간에 계속)
1988년 올림픽에서 변정일이 허영모, 서정수를 제치고 올림픽 대표로 출전한다. 메달 기대주였으나 편파판정의 희샹양이 된다. 한편 변정일은 프로에서는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등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