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1 화
내어드림(렘26:1-15)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2절)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인 백성들에게 전할 하나님의 말씀은 재앙과 심판의 말씀이었으므로 혹여 예레미야가 두려워서 축소시켜 전달할 가능성이 있을까 염려하여 하나님께서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명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주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5-6절)
이스라엘의 성전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성전모독죄라는 죄목이 있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고 사실 하나님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 성전에 예배하러 나아 온 무리에게 여호와의 법궤가 있던 실로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무너지고 에루살렘 성은 멸망되어 세계 모든 민족의 저주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9절)
백성들은 예레미야에게 돌이라도 던질 기세로 모여 들었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이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소란을 성전 가까이에 있던 왕궁에서 듣고 고관들이 재판을 위해 왔을 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의 성전 모독죄는 죽기에 합당하다고 알렸고 예레미야는 모든 고관들과 백성 앞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릴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과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고 껍데기만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도무지 견딜 수 없다 말씀하신다. 순종의 마음은 없고 겉치레의 형식만 겨우 남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길과 행위요 그들의 악행과 죄였기에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한 번 그 죄악에서 돌이킬 것을 명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스라엘이 갔던 길과 그들의 행위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행동이나 절제 혹은 금욕이나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 외에 더 큰 은혜는 없다. 다른 은혜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구하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외식에 치우치는 것 아닐까?
이제 심판의 말씀 앞에서 겸허히 말씀을 받아 지나가버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그 사랑과 은혜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 드리자. 이것이 참된 거룩이며 예배자의 길아닐까?
아닌 척 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어그러진 마음과 그 길을 계속 가기 원하는 우리의 악함과 외식을 깨트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은 아닐지 숙고해야한다.
성령님,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예수님, 말씀과 진리인 당신 안에서 생명의 삶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 당신의 사랑에 내 작은 마음을 내어드림으로 거룩함을 재발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