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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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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8.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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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밤에
서늘한 오늘 아침에 몸으로 체감하니 가을이 어느 듯 성큼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추석도 끝났다. 모두들 돌아갔다. 거대한 홍수에 밀려났다가 터전으로 돌아가 일상이 되었다. 아직도 고향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 따뜻함이 지속되어 하는 일마다 발걸음도 가볍다. 새로운 힘이 불끈 나기도 한다. 손주 놈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자녀들은 직장으로 돌아갔다. 자신들이 피땀 흘려 가꾸어온 행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황금들판에 가꾸어온 수확을 맞이하는 것처럼 기쁨이 항상 넘치기를 바란다. 들녘은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은 마치 잔잔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밀려가는 모습이다.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세월에 떠밀러 오는 줄도 모르고 앞만 바라보고 왔었는데 벌써 마음은 조급증이 더하여지는구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지내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세월이다. 들판에 늘려있는 초목들이고 길섶에 이름 없는 잡초에 지나지 않은 자신이다. 무엇이 그리도 잘났는지 세상을 농단(壟斷) 하는 자들이 할 거(割據) 하는 모습에 내 주름진 얼굴이 겹치는구나. 모두가 오십 보 백 보다. 너도 나도 받아놓은 막장을 앞에 두고 있지 않는가. 가을이 익어 가면 나도 또한 늙어가는 것이다. 천국을 보았다면 아마도 가을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가을의 풍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솜씨다. 누가 감히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고개 뻣뻣이 들고 있는 이삭들은 물이 오르고 익어가는 동안에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차츰 고개를 숙여 가는 모습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익어가지 못하는 이삭은 고개를 끝까지 들고 있다. 사람 역시 익어가지 못한 자는 그와 같이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일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 사람이기를 포기하여 대접받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을 나는 온갖 잡새들도 땅을 기는 모든 동식물들도 수중 동식을 비롯하여 모두가 준비 중이다. 길고 긴 엄동(嚴冬)을 지내기 위하여 풍요의 가을에 준비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넘치고 비우는 계절이다.
산정에서부터 물든 오색 칼라는 조용히 소리 없이 하강할 준비도 꼼꼼히 하고 있다. 멀지 않아 산은 불타듯 채색할 때쯤이면 산이 좋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단풍인지 바위인지 사람인지 분별하기도 어렵구나, 조용하던 산은 사람들로 더불어 순환한다. 한 바퀴 돌아서 보니 또 가을이란다. 그래서 가을을 노래한다. 가을이 한번 일 수도 있겠고 두 번 세 번 일수도 있다. 매년 찾아오는 가을마다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가르치고 있다.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는 배움의 교단이 그곳에 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고한 명령이다. 익어가지 않는 만물은 명령을 어기는 것이기에 쭉 정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잊어버릴 까봐 매년 찾아오는 가을이다. 사람이란 허울만 사람처럼 생겼다 해서 사람이 아니다. 사람다워야 한다.
사람답다는 말은 자연에 순화한다는 뜻일 것이다. 거역하고 부정한다면 자연 일수 없을 것이고 이는 곧 사람일수 없다는 말씀이다. 밤하늘에 두둥실 뜬 달은 가을 상징하고 있다. 양귀비 눈썹처럼 초승달도 밤마다 커지다가 맏며느리처럼 둥근 쟁반 같은 달로 차고 넘치는 것이다. 가을의 대명사다. 차고 넘친 달도 점점 작아지기를 반복하다가 서천 하늘로 꼬리를 감추고 만다. 사람의 일생도 이와 같다 할 것이다. 대낮 같은 가을밤은 집안에 있기가 너무도 죄송스럽고 황송하기도 하여 밖으로 나온다. 나도 달빛이 되고자 그림자 따라서 무엇을 찾아다녔다. 잡히는 것 없지만 무엇인지 좋은 일들이 내게 일어 날것만 같아 소리 죽여 사뿐사뿐 걸었다. 밤공기를 가르는 개구리의 울음소리도 먼 옛날이 되었다.
엊그제 같은 여름밤이었는데 그들의 영역을 풀벌레들이 합창으로 매웠다. 이 밤이 짧다고 울어 지새는구나. 마치 교향곡을 감상하듯 나의 착각이다. 온 천지를 비추는 달빛 조명에 사위를 무대로 하였다. 이름 모를 벌레 악사들로 하여금 연주곡은 풍년가란다. 생전에 처음 듣는 곡이지만 귀를 파고 들려오는 소리는 가슴에 머물러 찬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을이며 저 건넛마을도 산 넘어 산촌에도 들려온다. 이 무대는 오직 하나님의 지휘 아래 연출되고 있다. 아파트 창문에 찾아오는 밝은 달빛이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릴 때 보고 즐기면서 자랐던 그 달님이다. 달마다 찾아오는 달빛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날마다 변하여 가는 나의 모습에 세월의 숨결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애애한 달빛은 사람을 뇌살 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창틈을 찾아오신 고운 달빛을 의지하여 글 읽는 소리에 지나는 길손의 발걸음도 잠시나마 멈추게 하는 선비의 달빛이다. 사랑방 안방 새색시 방에도 찾아오는 달님이다. 무릎 세워 길쌈하시는 할머님의 모습은 신선을 보는듯하구나 이 배 짜서 영감님 도포자락 만들어 줄거나, 아드님 주 적삼 입혀 보고자 밤 가는 줄도 달빛 가는 줄도 모르시는 할머님이시다. 안방마님 방에는 밥상 위에 창호지 놓고 열심히 편지 쓰시는 모습에 친정어머님 그리운 정이 밤새 달려와 흠뻑 묻어나는구나. 색시 방에 비친 달은 새근새근 잠들어 미소 짓는 이기 모습에 하늘 천사를 바라보는 새색시의 눈빛은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하구나.
가을밤은 풀벌레 노랫소리에 벼들도 춤을 추고 고개 숙인 조들이며 서숙들도 밤바람에 너울너울 일렁이며 좋다고 춤을 춘다.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도 땅속의 고구마도 익어가고 굵어지며 기어간다. 지천에 늘려있는 것이 먹을거리이니 부족함이 없는 가을밤이다. 휘영청 달밤을 못내 아쉬워 나온 아이들 웃음소리가 천리만리까지 달빛에 실려 펴져가는 천국이다. 어린 소녀들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꿈을 빌었지 계수나무도 보이고 그 아래 토끼 방아 찧는 모습도 보인다면서 작은 가슴 설레는 밤이었단다. 반변천에 뜬 달은 너무도 아름답구나, 잡힐 듯 말 듯한, 한 아름 달을 잡아보려고 노를 저어보기도 하였지 하류로 상류로 밤 가는 줄 모르고 철썩철썩 뱃전을 두드리고 노래하였지,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한다.
가을은 꿈을 이루는 계절이다. 내 가슴에 가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존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세상에 영원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반드시 있어야 할 계절이다. 가을이 없는 사람은 피다 말거나 한 꽃나무가 아니면 잎만 무성하고 가버릴 것이기에 가을의 귀중함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는 세상에는 가을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란다.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더 심하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오늘만 있지 내일은 없다는 사람들이다. 내일 같은 것은 내일이 되어 바야 안다고들 한다. 그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다만 있다면 현재만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다. 내 밥그릇에 손만 대지 않는다면 관여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옆에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내개는 의미가 없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가을이란 계절은 꿈속에만 존재한다. 특히 가을밤 같은 것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오늘만이 존재한다. 복잡한 것 또한 질색이란다. 머리 쓰는 일은 극히 기피하는 그들이다. 없으면 굶고 있으면 먹고 하는 집시처럼 살기를 원한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는 세대들이다. 잊혀가는 가을밤을 생각하였으면 좋겠다.
2019년 9월 18일 수요일 오전에
夢室에서 法珉 씀
#일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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