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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오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향기와 흔적>
제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토요일과 저녁 8시부터 1시간 동안 KBS1에서 하는 KBS 스페셜입니다.
오늘은 취업난으로 전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시대,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회사 운영이 어려울 때 경영자들은 가장 먼저 머릿속에 감원을 통한 구조조정을 떠올리는데,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강조하면서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노사 간의 대타협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상을 통해 함께 위기를 극복해나가자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좋은 예로 주식회사 "유한 킴벌리" 를 예로 들었습니다. 위기가 닥치자 이 회사는 감원 대신 보다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찾았답니다. 회사를 24시간 풀로 가동시키면서 근무 조를 늘리는 방안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변화의 초기 근무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급여가 약간 줄어들기는 했지만, 근로자들의 양보를 바탕으로 여가활용을 위한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서 생산력은 점점 증대되어갔고 임금 수준은 오히려 더 높아졌답니다.
공장장실에 붙어있는 기구조직도를 카메라맨이 잡았었는데, 아주 특별한 기구조직도여서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보통 회사나 조직의 기구조직도는 최고책임자나 경영자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는 것이 보통인데, 이 회사 기구조직도는 정 반대의 형태인 역삼각형이었습니다.
가장 밑에 공장장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있었고, 위로 올라가면서 중간 관리자, 그리고 평사원순으로 사진과 이름이 붙어있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기구조직도에 대해서 공장장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관리자는 사원들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원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고, 또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양의 조직도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최초이자 공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심을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꼭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똑같은 조건을 취하신 분이 우리 눈앞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와 계십니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 없는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몸에 지니시고 겸손하게 우리 앞에 와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 한계와 나약함을 스스로 선택하신 연민의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미소 짓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온 몸을 통해 구세주 하느님의 겸손과 자비를 이 세상에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감사의 축일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온 몸으로, 우리의 생활로 구세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경영자나 간부들이 직원들의 방패막이,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회사 경영자의 모습에서 겸손하신 아기 예수님의 흔적을 느낍니다.
아랫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각별한 사랑을 지닌 그 회사 경영자들의 인간미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하신 마음을 느낍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그 자체로, 매일의 생활 그 자체로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 앞에 확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일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겸손과 자비를 이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해 주님 공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 주님 공현에 기여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 충실함을 통해서, 복음정신에로 돌아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종함을 통해서 우리 역시 주님 공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 존재 자체를 보고 하느님을 보게 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 고통마저 주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노력은 십자가상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는 일이자 주님 공현에 가장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들이 보건 말건, 우리를 인정해주건 말건, 이러쿵저러쿵 뒤에서 말이 많아도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의 뜻을 찾고, 복음이 제시한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님 공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스로를 교회로 여기는 일, 각자를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자 감실로 여기는 일은 가장 충실하게 주님공현에 참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또 다른 이 한해, 우리가 또 다른 예수님으로 이 세상 앞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향기와 흔적을 발견하고 기쁘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여정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자신의 첫 모습을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 동방박사들에게 드러내 보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육화사건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동방, 더 나아가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할 보편적인 일이란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가 되고, 하느님 구원의 대상이 된 것에만 기뻐하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화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들에게 전하는 이번 한주간이 되길 빕니다.
"주 하느님, 오늘 별의 인도로 성자를 이방인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믿음으로 주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끌어주시어 지존하신 주님을 직접 뵙게 하소서."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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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Where is the new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do him homage.”
(Mt.2.2)
제1독서 이사야 60,1-6
제2독서 에페소 3,2.3ㄴ.5-6
복음 마태오 2,1-12
어제 어디를 갔다가 매우 불쾌한 기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너무나 불친절했고, 귀찮다는 듯이 저를 무시했습니다. 저 역시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항의를 해봐야 저만 손해일 것 같아서 그 자리를 나왔지요. 하지만 불쾌한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한바탕 쏘아 붙이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고, 다시 돌아가서 한 번 붙어볼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나쁜 감정을 품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계단 위쪽에서 “아~~”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를 보는 순간, 어떤 형제님이 계단에서 넘어져서 제가 있는 쪽으로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그 형제님을 잡았지요. 이 형제님은 계단 위에서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구른 것이었고, 다행히 그렇게 많이 구르지 않은 상태에서 밑에 있었던 제가 형제님을 잡은 것이지요.
그 형제님께서는 제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제가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다면서 저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분명히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에는 불쾌한 감정이 가득했었는데, 계단에서 행한 무의식적으로 행한 저의 행동 하나로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제가 큰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지만, 사실 더 큰 도움은 제가 얻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형제님께서 계단을 구르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해서 이 불쾌한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감정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에게 표현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을 통해서 제 안에 있었던 불쾌한 감정은 완전히 지웠고 기분도 좋아졌으니, 누가 더 이득이겠습니까?
그 형제님은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즉, 미움의 감정을 버리고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에는 나를 예수님께로 이끄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온갖 물건들도 저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끄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이 아닐까요? 동방박사는 막연하게 별만을 바라보고 먼 여행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별을 통해 구세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이 별은 동방박사에게 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의 별만이 아닌, 수많은 별들이 내 곁에서 예수님 계신 곳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접하는 자연을 통해서, 또한 내가 행하는 모든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별을 보지 않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조그만 머리에서 나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고 하고,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가리키는 별을 바라보는 눈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별을 제대로 그리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봉헌하기 위해 저 먼 동방에서부터 여행을 떠난 동방박사처럼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계신 곳을 가르쳐주는 별을 발견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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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 공현 대축일 - 눈을 돌려 주님만을 바라봄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해 한창 뜨거운 논란이 있을 때, 한 유명하신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재물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다윗 왕도 주님의 은총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왜 예수님이 아닌, 다윗을 예로 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구약의 인물이고 구약엔 천국과 지옥의 심판 개념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그 심판이 이루어지는데 세상의 재물도 그 판결 조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즉, 건강하고 부자이고 자손이 많으면 주님께 좋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가장 저주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의 모범보다도 다윗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아직, 신약이 아닌 구약에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니 물질적으로까지 가난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구유 위에 놓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다른 것이 놓여있으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한없는 외로움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이란 ‘공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은 춥고 냄새나는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아닌 세상의 호화로움이었습니다.
아일랜드란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종교로 인해서도 오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국은 헨리 8세의 재혼으로 분열된 성공회를 믿고 있었고 아일랜드는 성 패트릭의 전교로 오래전부터 가톨릭을 믿어오던 나라였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오랜 지배와 박해에서 비록 말은 영어를 쓰게 되었을지라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가톨릭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요 몇 년 사이에 거의 잃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EU에서 못사는 나라들 중 하나였지만 한 10여 년 전부터 급격히 발전하여 지금은 연 개인 소득이 60,000불이 넘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면서 지켜왔던 신앙을 갑자기 잘 살게 된 요 몇 년 사이에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느 유럽 가톨릭 국가와 마찬가지로 성소는 급격히 감소했고 성당에는 노인분들만의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할 일이 많고 즐길 일도 많아서 성당을 찾을 시간이 없어졌고 사실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되지 성당을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계 전역에서 현대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고 그것과 발맞추어 신앙의 위기도 함께 찾아오고 있습니다.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것은 박해가 아닌 ‘세상의 유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배경도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영원한 진리를 찾기보다는 돈과 권력과 현세의 즐거움만을 찾았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은 목자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하셨고(참조; 루카 4,18. 6,20), 돈과 주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마태 6,24),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루카 18,25), 완전해 지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셨고(마르 10,21), 결정적으로 예수님도 돈과 세상과는 무관한 삶을 사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을 멀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십계명판을 섬기기보다는 금송아지를 섬겨서 그 십계명판이 부셔져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대신 금을 섬겼고 그래서 버림받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산산이 부서져야 했습니다.
오늘 동방 박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도 보지 못했던 별들을 따라 오랜 시간 여행 후 메시아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보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먼 나라에서 오기 위해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또 먼 여행을 위해서 궁궐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고생과 거친 음식을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왕이며 박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이 사라지자 헤로데 왕에게 메시아가 나실 곳을 물을 수 있는 겸손함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버렸던 것은, 삼구 (三仇: 세 가지 죄의 뿌리), 즉, 교만, 육욕, 소유욕이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진 인간은 뱀의 화려함을 바라보는 대신 하느님께 대한 시선을 잃게 되었습니다. 마치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앞에 자신을 걷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 아닌 거센 풍랑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시선은 이렇게 교만으로 시작하여 성욕, 소유욕에 이르는 죄의 경향 때문에 바로 앞에 계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까지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긴 하느님의 백성은 그 빛을 따라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빛’이 바로 오늘 동방박사들을 이끈 ‘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자신과 세상에만 눈을 고정시키는 사람은 눈을 들어 그 별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 동방에서 온 세 명의 박사들은 돈이 없었던 것도, 권력이 없었던 것도, 즐거움 거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보다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땅만 바라보던 현세주의자들이었던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부자로 살고 있었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들을 찾는 의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보내시어 그 빛의 인도로 예루살렘까지 오도록 만듭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내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던 이 별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는 별이 사람들 마음에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별이 사라졌을 때 그 별의 역할을 대신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 동방 박사들이 성경이나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를 완전한 모습으로 만나 뵙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경과 교회’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고 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권한은 교회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와 성사들을 통해 성령님을 받고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서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동행하기 이전에도 성령님께서는 의인들의 마음 안에서 그 사람도 모르게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기 전에 성령님께서 먼저 성모님 안에 오셔서 성자의 자리를 준비하셨던 것과 같고,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보다 먼저 천사를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에게 보내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보다 먼저 선교하십니다.
독일 쾰른에 가면 거대한 쾰른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는 오늘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세 분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성인들의 시신을 찾아 모아서 그리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그 일을 숨기지 않고 증언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후대에 어떻게 그 시신들을 모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은 이렇게 한 번이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체험이 온 삶에 에너지를 주고, 나 또한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모든 신앙인은 ‘작은 주님 공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이나 동방박사들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분한 성당과 지루한 성경을 읽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어린이들이야 부모의 강요로 어린이미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청소년이 되면서 성당은 가장 재미없는 곳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립니다. 세상은 우리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침투하여 자신들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컴퓨터, TV, 핸드폰 등 이젠 모든 사람의 눈이 번쩍거리는 황금송아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을 찾으라고 소리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세상이란 것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아일랜드의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힘겨운 이 싸움을 이기고 동방박사들처럼 영원한 것을 찾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동방박사들처럼 세상 것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하늘을 바라 볼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고 성령의 빛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과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성경에서는 많은 위안의 말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로 오늘의 결론을 대신하려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 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1요한 5,4-5)
- 로마 유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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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일 강론 글 주님 공현의 진정한 의미..허윤석신부님
작성자 이순정 번 호 51966
작성일 2010-01-03 오후 3:57:32 조회수 268 추천수 4
2010년 1월 3일 강론 글 주님 공현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찬미예수님.
오늘 강론 주제는 “큰 빛” 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공현 대축일은 참으로 중요한 대축일인데,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부활신앙이라고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에서 머물지 않고, 우리 부활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오로 사도는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질문하시면서, 문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는
그런 문체로서 강조하는 점이 있는데…… 부활에 관해서……
성탄에서도 보면,
주님의 탄생, 빛의 탄생, 생명의 탄생이 있었습니다.
우리 없이 그 빛이 되지 않고, 그 빛이 나에게 비춰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의 성탄이 주님 공현 대축일로 끝나는 것은
결국, 나의 빛, 내가 그 빛이 되고,
내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큰 빛이 되는…
서로서로에게 빛이 되는 공적인 현영. 그렇게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주님의 탄생이 나의 탄생.
주님의 빛이 나의 빛.
주님께서 모든 이에게 빛이 되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이
나 역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는 또 하나의 작은 샛별이 되는
나의 성탄으로서 성탄시기는 만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하지 않고, 그 예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받아 모십니다.
재미있게도.. 주님 공현 대축일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매일매일 재현되고 있습니다.
삼왕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했지만, 우리는 받아 모신 그 분을 봉헌하고 동시에 모신다……
대단한 공현이지요…
공현대축일에 2000년 전에 축일을 지금 드리지만, 미사 성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의 목표이지요.
아기예수님이 성장하셔서 결국 십자가에 희생 제사를 통해서 3가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예물이 되시고, 그것을 받아 모신 우리가.. 또 그렇게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연속성을 갖는 것이지요.
주님 공현 대축일은 제가 묵상을 해보면, 일년에 한번 있는 것이 아니라 미사 성제안에 본질적인 요소로서 정주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방인입니다.
늘 이방인의 요소를 갖고 있죠.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나약 때문에…
또, 빛의 자녀라는 특권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대부분 공현 축일에는 황금이 의미하는 것… 유향이 의미하는 것.. 몰약을 의미하는 것……이렇게 3가지를 해설하는데, 그것은 다 아시죠? 그래서 저는 별에 관해서 말씀 드리고 싶은데~~
오늘 제2독서. 성 데레오 교황의 강론에 보면…
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이별은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에게 순종의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려주었던 그 별은 바로 순종의 길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에게로 불려주시는 이 은총의 할 수 있는 대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에게로 불려주시는 이 은총의 길은 은밀한 길이 아니라 보편적인 길입니다.
헤로데까지도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했던 길입니다.
헤로데 왕은 예수님을 죽이고 박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어느 드라마의 필요한 악역을 하는 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헤로데의 마음이 있습니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했지만, 결국은 그렇지 못하지요…
교황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그 빛을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됐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천상에서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여정의 굴레를 계속 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올바른 신앙과 선행으로 인해 이르게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빛의 자녀로서 빛나게 될 수 있도록 이 목표에 이르는데, 서로서로에게 또한 별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이 별을 서로서로 도와주어야 되는……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말로는 문장이 이렇게 되지만, 라틴말로는 “서로서로에게 도와주어야 하는..”
하루를 반성할 때 교황님께서는 “내가 서로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별이 되었나..”
옳고 그른 것이 가톨릭의 판단의 가치가 아니고,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의 심판권을 빼앗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빛의 자녀로서 서로서로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
저 사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려고 했던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세세히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하고 사제는 얘기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빛 안에서 그분이 살아있는 빛이며 인도자이시다.
그분께서 다스리신다.
교황님께서
이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통치수단, 백성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명확하게 다스리시는 진리의 수단, 가장 겸손한 수단, 그 사람들을 스스로 그렇게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은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강요하지 않죠.. 빛은 비출 뿐이지요.
자신의 존재를 내어줌으로써 그 사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서로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어제 세배를 한 가족이 왔어요.
삼 남매의 부모님인데,
막내는 5살 두 번째는 3학년, 첫째는 6학년
6학년 장녀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는데~
“신부님께 세배해야지~” 하니까.. 표정이~~
엄마 아빠가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결국은 아빠가 지혜로우시더라고요.
5살짜리는 식탁 옆에 바닥에 엎어져서 이미 세배를 하고(수녀님들 웃음~^^)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고~~
난감한 거에요.. 빨리 하고 가야 하는데~
그 아이는 뭔가 모르는 사춘기의 긴장감……
그 아버지가 먼저 부인의 손을 잡고 함께 맞절을 하고...
때마침 식복사 아주머니가 와서 같이 맞절 세배를 했는데……
조금 있다가 그 아이가 “저도 세배할래요..” 이러자, 그 엄마 기뻐서 눈물이 글썽한 거에요.
세배 안올거면 왜 따라 왔는지… 그런 복잡한 마음이 있었는데~
주차장에서 배웅을 하면서 아버지가 “ 신부님, 무엇을 봉헌하고 어떻게 지향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봉헌물이 되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난 뒤 우리 딸이 변화돼서 세배를 한 것이 저에게는 희망인 것 같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직접 말은 안 해도, 환하게 웃으시는 데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육아나 봉헌생활, 사제생활이나 사도직이나 맥을 같이 하는구나!
무릎을 먼저 꿇고 허리를 굽히는 것이 인간 성화의 기본적인 힘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서로서로 도와준다는 것이 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께 나아가서 서로 예물을 봉헌하려고 예를 들이는 경신례 이 전례의 힘이라는 것은 세상이 우리 빛을 따라 올 수 밖에 없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영성체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관계된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꾸 갈등구조에 있는 사람들 대인관계나 힘들어 하는 일속에서 그 사람이나 그 일을 마주보고 해결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을 보고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복을 보고 해결해야 한다……
- 의정부교구
동방 박사들의 방문 구원의 별빛을 찾아서 동방 박사들
“그분께 드릴 최고의 선물”
베들레헴 성 마구간의 성가정에 손님들이 오셨네요. 저 멀리, 산 넘고 물 건너서 동방박사 세 분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지요. 고요한 밤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멀리에서 찾아온 박사들에 의해 온 세상에 드러나는 주일입니다.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사랑의 극치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목동들에게는 천사를 통해, 동방박사들에게는 별을 통해, 그리고 헤로데 임금과 유다인 들에게는 율법학자들을 통해 구원자가 태어나실 곳이 유다의 땅 베들레헴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기쁜 소식에 초대를 받았지만 모두가 축복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천사의 지시를 즉시 따랐던 베들레헴 성 주변의 목동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구원자를 제일 처음 만나는 은총을 누렸고,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온 인류의 구원자를 만난 기쁨을 가슴에 안고 헤로데가 요구하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헤로데 임금은 두 살 이하 아기를 학살하는 참극을 저지르고 말지요. 또 누구보다도 구원자를 기다렸으며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려 주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30여년이 지난 후 인간 예수는 만날 수 있었지만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맙니다.
오늘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 믿음입니다. 박사들은 구원자가 태어나실 곳에서 대단히 멀리 있었지만 정성된 예물을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은 어느 날 나타난 '별'이 아닙니다. 별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별을 찾아낸 것이지요. 그들의 믿음이 구원자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가득 안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마태2,12) 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들은 메시아 탄생을 온 세상에 알렸을 것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이 아침에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셨기에 인간이 되어 오신 자비의 하느님께 드릴 나의 선물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삶이 그분 앞에 드릴 최고 선물이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헤로데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인도를 따라 미래를 출발한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따르고 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용히 말해줍니다.
세상을 비관한 젊은이가 혼자서 자살하기 억울하다며 훔친 차를 몰고 인파 속으로 돌진해 어린이 2명이 숨지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이 사건으로 손자를 잃은 한 할머니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그 청년을 양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청년을 뒷바라지 하면서 그의 방면을 위해 물심양면 애를 쓰셨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그 청년을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는 입장이셨지만, 그분은 신앙 안에서 청년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청년을 돌보았던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얼굴에서도 성품이 나타날 정도로 아주 착해 보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안경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빴습니다. 그런 그가 가는 일터마다 쫓겨난 것은 이 메마른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지요. 계속되는 고통 속에 청년은 있는 이들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키워 갔고, 술을 마시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잘못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청년은 '제가 교도소에 오고 나서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고 말하였습니다."(「함께하는 여정」 70쪽)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를 베풀 때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이웃 사람들이 체험하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이 주님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이요, 동방 박사들처럼 온 세상에 주님을 알리는 일임을 잊지 맙시다. .......◆
- 서울대교구
김웅렬
오늘은 주의 공현대축일입니다.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불러서 손수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례자들이 오늘 자기 발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불러서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공현이라고 하는 말뜻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을 불러들여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만천하에~~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메시아를 4천년 동안 기다렸던 유대인이었는데
그 메시아가 찾아와서 실제로 만난 백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유다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판단과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자기 재주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의지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공로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머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쪽에서 주셔야 됩니다.
동방박사들을 불러야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지가 지발로 온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인도해서 예수님이 불러들인 겁니다.
오늘 주일미사에 온 여러분들이 여러분 발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양심에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오늘 아버지의 집, 엄마의 집으로 여러분을 불러주셨음을 믿습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은 지금 거리로 환산하면 1200Km가 넘는 먼 거리를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 찾아와서 귀중한 선물로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달랐지요.
분명 동방박사나 헤로데에게나 같은 모양의 같은 빛을 보여주셨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똑같은 별을 보고도 생각과 행동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똑같은 강론을 이 자리에서 들어도 나중에 생각과 행동의 차이는 큽니다.
똑같이 성서를 봉독하고도 누구는 그 성서를 읽고 은혜를 받고 치유를 받지만
어떤 이들은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똑같이 피정 참석해도 어떤 이들은 회개가 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시간에 분심, 잡념 속에서 피정을 보냅니다.
이렇게 똑같은 별을 보고 헤로데와 동방박사들의 행동양식이 달랐던 것은
욕심과 교만이 있을 때는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예수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도/ 우리 집에 나타나도/ 내 옆에 늘 계셔도
욕심과 교만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동방박사의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고 점검하는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합시다.
첫 번째 별을 보고 그리스도를 찾아 나선 동방박사처럼
만사에 있어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더 가까이 지내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예전에 신학교 때 저는 여러 방학을 나환자들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환자촌에 가보면 그 나환자촌에 들어오기 전에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와도 나병이라고 하는 낙인이 찍히면 아무리 좋은 집 자손 .아무리 명문대학 출신이라도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죽으려죽으려 하다가 결국에는 나환자촌까지 들어옵니다.
인생막장을 사는 마음으로 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고난 방을 쓸다보면
손가락 하나가 쓰레받기 위에 올라가 있죠?
“이게 누구 손가락이야?”
그 때야 자기 손가락들을 보며
“어, 내께 떨어졌네....”
그렇게 손마디 하나하나가 똑똑 떨어져 나갑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중에는 그야말로 손발도 없고 배에다가 고무창을 깔고 지렁이처럼 기어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그 몸뚱아리를 가지고 매일같이 미사를 나옵니다.
몸이 성한 사람은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배에다가 고무창을 깔고
오로지 주님만을 만나기 위해서 30분, 한 시간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벌레처럼 기어서 성당에 옵니다.
손이 있어야 성당 문고리를 돌리지요.
문고리를 돌리는 손가락이 없다 보니까 머리로 문을 열려고 하다가
머리통이 터지는 사람도 있고, 일그러진 손으로 성서책을 넘길 수가 없어서
혓바닥으로 성서 책을 넘기면서 성서를 읽습니다.
손가락이 없다 보니까 묵주를 굴릴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팔꿈치에다가 고무줄로 나무때기 하나를 묶어놓고, 땅바닥에다 묵주를 펼쳐놓고,
나무때기로 하나하나 묵주알을 짚어가면서 묵주신공을 바칩니다.
꽃동네에 가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 표현 가지고는 약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묵주를 굴릴 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이요.
내가 내 두 다리로 성당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은총 속에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늘 불평불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묵주 굴릴 손가락이 없습니까?
성당 넘어설 발이 없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하셔야 됩니다.
그 엉망진창의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오늘 동방박사들처럼
‘주님 만나러 가야 된다!’
기도를 놓지 않고 성당을 기를 쓰고 배로 기어서 옵니다.
우리는 너무너무 축복 속에 살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동방박사들이 어떤 고초를 겪으면서도 주님을 만나러 길을 나섰듯이...
그런 마음으로 올 한해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동방박사들은 그 어려운 먼 길을 걸어와서
아기 예수님에게 기쁘게 선물을 드렸습니다.
마지못해 선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성서에 보면 기쁘게 선물을 드렸다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예물과, 눈에 안 보이는 착한 행위를
올 한 해 동안 정성껏 우리는 기쁘게 봉헌합시다.
헌금을 내면서도 마지못해 내는 것이 아니라
교무금을 낼 때도 가장 정성을 드려서 미루지 말고 정성껏 봉헌합시다.
심는 대로 거두신다고 그랬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몸을 움직여서 봉사할 기회가 생기면
남의 눈치 볼 것도 없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하느님께 기쁘게 육적인 봉사도 우리 하셔야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카인은 직업이 뭐였습니까?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였습니다.
하느님께 카인은 뭘 드렸습니까?
쭉정이를 속에다가 이렇게 섞어가지고 하느님을 속이고서는 선물을 드렸습니다.
아벨은 제일 기름지고 살찐 양을 드렸습니다.
머리카락까지 알고 계시는 하느님을 어찌 속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물리치고 아벨의 제물을 받았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카인처럼 그런 제물을 바치는...
그런 봉헌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선물을 드리십시오,
하나를 정성껏 드리면 열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먼저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세 왕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헤로데에게 다시 가지 않고
선의 길, 착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즉 영세를 받고
미사 때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그 후에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다시 옛날 그 죄악의 길로 다시 갈 것인가!
아니면 옛날 과거의 길을 청산하고 천사가 알려준 그 길로 따라 나설 것인가!
동방박사들에게 헤로데는 그 분 만나면
“나에게도 알려 주시오...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헤로데에게 가지 말아라!”
예수님 만난 후에 선의 길, 착한 길로 들어서라!
다시 말하면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됩니다.
그저 듣기만 해서 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새해를 맞는다고 누구나 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새해가 수천 번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새해는 뜨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별이오, 나침반입니다.
올 한해 우리 신자들의 福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나침반으로 보고
주님을 별로 보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십자가가 짓누른다고 해도
올 한해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하지 말고 끌어안으면서
기쁘게 봉헌하도록 합시다. 아멘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당
- 성베네딕도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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