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실록 열국지」, 「순자」 등 20여 권.
士林 世道정치의 파행
勢道(세도)정치의 「勢道」는 「世道」를 풍자한 데서 나온 말이다. 世道는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뜻하는 말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통치인 治道(치도)를 의미한다.
조선조가 開國(개국) 이래 줄곧 내세운 王道(왕도)정치는 곧 世道정치를 말한다. 이를 孟子(맹자)의 王道정치에 가장 가깝게 구현코자 한 인물이 바로 中宗(중종) 때의 趙光祖(조광조)였다. 그는 反正功臣(반정공신)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世道의 구현은 어디까지나 士林(사림)세력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비록 勳臣(훈신)들의 반격으로 희생되었으나 그가 내세운 世道정치의 이상은 이후 모든 士林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退溪(퇴계)와 栗谷(율곡)이 등장한 이후 모든 臣權(신권)세력이 士林을 자처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君子黨(군자당)을 기치로 내건 각 朋黨(붕당)세력은 趙光祖가 내세운 世道정치를 하나의 철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世道정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形骸化(형해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光海君(광해군) 때의 鄭仁弘(정인홍)을 필두로 孝宗(효종)과 顯宗(현종) 때의 宋時烈(송시열)에 이르는 동안 在野(재야)의 山林(산림)세력이 조정의 公論(공론)을 좌우한 데 따른 것이었다. 公黨(공당)을 표방한 私黨(사당)이 권력의 중심축에 서는 소위 山林정치가 빚어낸 기현상이었다.
肅宗의 「換局(환국)정치」는 바로 이에 대한 反動(반동)으로 나온 것이었다. 肅宗 초기에 빚어진 宋時烈(송시열) 賜死(사사) 사건은 「山林정치」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肅宗의 換局정치는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換局정치는 비록 朋黨 간의 갈등을 교묘히 활용해 王權강화에 크게 기여하기는 했으나 臣權세력 간의 극단적인 유혈투쟁을 촉발시킴으로써 훗날 戚臣(척신)세력에 의한 勢道정치의 단초를 열어 주었다. 換局정치를 변용시킨 英祖와 正祖의 蕩平정치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世道정치의 풍자에서 비롯된 勢道정치는 당시의 통치가 理想(이상)과 현실 간의 극심한 괴리에 기초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金祖淳 등의 勢道정치의 주역들은 世道를 내걸고 파행적인 勢道를 자행했다. 원래 통치이념은 理想的인 측면이 강하면 강할수록 현실과 더욱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허위와 부패를 확산시켜 마침내 국가의 쇠락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勢道의 출현은 바로 理想的 治道인 世道를 역설해 온 조선 성리학의 이념적 파탄과 국가패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哀絶陽
英祖의 蕩平정치를 비판한 趙觀彬.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조의 勢道정치는 중국의 戚閥정치나 宦官정치보다 훨씬 가혹했다. 이는 田政(전정)·軍政(군정)·還穀(환곡) 등 소위 「三政(삼정)의 문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례로 갓난아기에게 군포를 거두는 黃口簽丁(황구첨정)이나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거두는 白骨徵布(백골징포)를 들 수 있다. 당시 15~60세의 병역의무를 진 남자가 해마다 베 두 필을 내 병역에 갈음하는 軍布(군포)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수령들은 황구첨정과 백골징포 등의 불법을 자행하며 사복을 채웠다.
기댈 곳 없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찍이 純祖(순조) 연간에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은 「哀絶陽(애절양)」이라는 詩를 지어 당시의 참상을 이같이 폭로한 바 있다.
舅喪已縞兒未燥 (시아버지 이미 죽고 아이 갓 낳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 (조손 삼대의 이름을 군적에 올리다니) 薄言往虎守? (호소코자 해도 문지기 범같이 서있고) 里正咆哮牛去 (이장은 포효하며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 (칼 갈아 방에 들어간 뒤 피가 낭자하니) 自恨生兒遭窘厄 (양근 자른 남편은 애 낳은 죄 한탄하네)
이는 茶山이 직접 목도한 사실을 읊은 詩이다.
이미 죽어 탈상을 한 시아버지와 이제 갓 낳아 사흘밖에 안 된 아이를 군적에 올려놓고 군포를 내라고 윽박지르며 유일하게 남은 소까지 끌고 갔다. 이를 보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는 남편이 마침내 방 안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陽根(양근)을 칼로 잘라 자식 낳은 것을 통탄했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양근을 들고 관청 문 앞에 와서 울부짖으며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이내 문지기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茶山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보낸 純祖 연간은 수령들의 苛斂誅求(가렴주구)로 백성들이 신음하던 시기였다. 크고 작은 民亂(민란)의 接踵(접종)은 바로 조선조의 통치기반이 심각한 붕괴상태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흉조였다. 권력에서 밀려난 南人세력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은 이를 끊임없이 경고했다. 茶山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正祖 사망 후 英祖妃 정순왕후 수렴청정
勢道정치의 元祖인 英祖 때의 權臣 金錫胄.
그렇다면 조선조 백성들로 하여금 원래의 世道를 勢道로 풍자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였을까? 통상 洪國榮(홍국영)을 勢道정치의 元祖(원조)로 들고 있다. 正祖의 寵臣(총신)이었던 홍국영은 正祖의 신변보호를 내세워 궁중의 宿衛所(숙위소)를 중심으로 모든 政事(정사)를 독단하면서 누이를 正祖의 元嬪(원빈)으로 입궐시켜 장기집권의 기반을 굳히고자 했다. 당시 일개 비서실장에 불과한 홍국영은 사실상 재상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이를 두고 당시 세인들은 그를 「勢道宰相(세도재상)」으로 꼬집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원조는 肅宗 때의 戚臣인 金錫?(김석주)로 보아야 한다. 그는 肅宗의 무조건적인 寵任(총임)을 기반으로 두 차례에 걸친 禮訟(예송)논쟁과 庚申換局(경신환국) 등을 배후조종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김석주와 홍국영의 世道정치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났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勢道가 어디까지나 王權의 비호下에 행사된 데다가 왕실과 맺은 國婚(국혼)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純祖 이래의 세도정치는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일까.
正祖는 24년(1800) 6월에 들어와 갑작스레 자리에 누운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正祖가 급서하자 綏嬪(수빈) 朴씨 소생인 11세의 어린 세자가 23代 군주인 純祖로 즉위했다. 이에 老論 僻派(벽파)를 지지하는 貞純王后(정순왕후) 金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英祖妃인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개입한 金龜主(김귀주)의 누이였다. 그녀는 수렴청정 즉시 老論 僻派의 거두인 沈煥之(심환지)를 영의정, 李時守(이시수)를 좌의정, 徐龍輔(서용보)를 우의정에 임명해 僻派일색으로 換局을 단행했다. 이어 왕실수호 차원에서 자신의 6촌 오빠인 金觀柱(김관주)를 이조참판에 중용하고, 金日柱(김일주)와 金龍柱(김용주) 등을 요직에 포진시킴으로써 왕실과 가문을 동시에 지키고자 했다.
信西派와 攻西派
당시 僻派세력은 자신들의 정권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正祖 때 득세한 時派 및 信西派(신서파)를 차제에 모두 숙청코자 했다. 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던 僻派정권은 의도적으로 가장 약한 세력인 南人세력을 제거하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이들이 구상한 것이 바로 「斥邪(척사)」였다. 이는 邪學(사학)으로 몰린 西學(서학), 즉 천주교를 믿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의미했다.
당시 조선조의 朋黨세력은 西學과 관련해 크게 두 派가 존재했다. 西學을 용인하는 세력을 흔히 「信西派」, 西學을 邪敎(사교)로 간주하는 세력을 「攻西派(공서파)」라고 한다. 信西派의 대부분은 야당인 南人과 일부 時派였고, 攻西派는 대부분 老論 僻派였다.
원래 正祖는 재위 기간 중 老論 僻派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 천주교 서적 등에 대한 焚書(분서) 조치를 취하면서도 천주교에 대한 극단적인 탄압을 피했다. 이는 「時派」와 「南人」, 「蕩平派」를 자신의 후원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들 세력은 正祖의 암묵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老論 僻派를 상대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들은 正祖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서로 합세해 正祖의 지원을 배경으로 하여 老論 僻派와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正祖의 急逝(급서)로 힘의 균형이 갑자기 무너지자 南人세력이 이내 老論 僻派가 내건 「斥邪(척사)」의 덫에 궤멸되는 것을 신호로 연계고리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南人세력에 이어 蕩平派와 時派가 僻派정권의 각개격파 대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斥邪의 선봉장은 영의정 심환지였다. 그는 천주교 문제를 이단으로 몰아 南人세력을 제거한 뒤 장차 時派세력을 無力化(무력화)하고자 했다. 당시 僻派정권은 수사의 책임자로 南人인 大司諫(대사간) 睦萬中(목만중)을 내세웠다. 목만중은 비록 南人이었으나 南人의 주류인 蔡濟恭(채제공) 일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辛酉邪獄
이로 인해 南人 時派의 거물인 李家煥(이가환)과 李昇薰(이승훈), 丁若鏞(정약용), 丁若銓(정약전), 李基讓(이기양), 權哲身(권철신) 등 200여 명의 南人이 대거 유배되는 등의 화를 당했다. 이를 제1차 「辛酉邪獄(신유사옥)」이라고 한다. 邪獄(사옥)은 「邪學을 금하기 위한 獄事」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老論 僻派가 붙인 것이다. 천주교 쪽에서는 이를 「辛酉迫害(신유박해)」라고 한다. 당대의 실학자인 茶山 丁若鏞은 이미 천주교에 대한 背敎(배교)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8년에 달하는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正祖 때 獨相을 지내면서 南人의 정신적 지주로 작용한 蔡濟恭은 관직을 追奪(추탈)당하고 말았다.
이때 사도세자와 肅嬪(순빈) 林씨 사이에서 태어난 恩彦君(은언군) 李?(이인)을 비롯한 왕실의 일족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신유사옥의 와중에 은언군은 처와 며느리 등이 淸나라 신부 周文謨(주문모)에게서 영세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賜死(사사)되고 말았다.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憲宗(헌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강화도령 哲宗(철종)이다.
제1차 신유사옥이 일어난 지 불과 몇 달 뒤인 이해 9월에 이보다 더한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것 바로 黃嗣永(황사영)의 「帛書(백서)사건」이다. 이는 정약용의 셋째 형인 丁若鍾(정약종)의 姪壻(질서)인 황사영 등의 천주교도들이 신유사옥에 대한 전말과 대응책을 비단에 적어 비밀리에 중국 北京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적발된 사건이다.
황사영의 帛書사건
黃嗣永 帛書.
帛書는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무려 1만3000여 자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을 만주 길림성에 있는 寧古塔(영고탑)에 예속시킨 뒤 총독부인 撫接司(무접사)를 개설해 황실의 親王(친왕)이 조선을 감독한다. 둘째, 조선왕의 나이가 어려 결혼할 시기가 못 되었으니 황실의 여인을 조선왕에게 출가시켜 장차 황제의 外孫인 조선왕의 충성을 확보한다. 셋째, 서양의 군함 수백 척에 정예병사 5만~6만 명과 대포 등을 싣고 와 敎皇(교황)의 命을 내세워 조선을 강압한다.
이는 조선을 淸나라에 병합 내지 예속시키라고 주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국가존립을 위협하는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겠다는 뜻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당시 천주교도內에서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제기되었으나 황사영은 이를 일축했다.
백서사건을 접한 조선 사대부들은 격노했다. 조정 역시 황사영을 大逆不道罪(대역부도죄)로 처결하면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純祖실록」 원년 11월5일조에 실려 있는 황사영에 대한 決案(결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다. 군주를 향해 不道한 말이 아님이 없고, 국가에 원수가 되려는 계획이 아님이 없다』
제1차 사건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던 수많은 南人들이 대거 화를 당했다. 이를 제2차 辛酉邪獄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畿湖(기호)지역의 南人은 정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신유사옥이 마무리된 이듬해에 이르러 왕실에서는 純祖妃의 간택 문제가 현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원래 純祖는 正祖 때 時派인 金祖淳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다. 僻派정권은 이를 저지코자 했으나 정순왕후 金씨는 先王인 正祖의 결정을 번복하고자 하는 이들의 움직임을 왕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金祖淳의 등장
60년에 걸친 안동 金씨 勢道의 문을 연 金祖淳.
당시 僻派정권은 비록 壯勇營(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나름대로 時派에 대한 타격을 가했으나 金祖淳 일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金祖淳은 僻派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결국 先王인 正祖의 권위를 최대한 활용해 마침내 純祖 2년(1802) 10월에 자신의 딸을 純祖妃로 입궐시키는 데 성공했다. 순조의 나이 12세였다. 이로써 金祖淳은 세도정치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 조정은 僻派정권에 의해 수많은 人材들이 대거 쫓겨난 까닭에 극심한 인물난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僻派정권의 少數 가문만이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정순왕후가 純祖 4년(1804)에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純祖의 親政(친정)이 시작되었다.
純祖 5년(1805) 1월에 들어와 僻派정권의 후견자인 정순왕후가 죽었다. 僻派의 영수인 김관주는 純祖가 장성해 親政에 나설 경우 정치보복을 감행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 두고자 했다.
그는 僻派인 우의정 金達淳(김달순)으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두둔해 온 영남만인소의 주모자 李瑀(이우)를 처벌하고 사도세자로 하여금 잘못을 시인하게 만든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했다. 純祖는 영문을 몰라 가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純祖는 이듬해인 재위 6년(1806) 1월에 正祖가 이미 사도세자와 관련한 壬午禍變(임오화변)에 대해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건으로 마무리한 점을 들어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평소 김달순과 정적 관계에 있던 승지 金明淳(김명순)이 김달순을 공격하고 나섰다. 김명순은 같은 안동 金씨였으나 김달순과 달리 時派였다.
김명순이 임오화변에 대한 再論을 엄금한 正祖의 遺命(유명)을 들먹이며 김달순을 공격하자 純祖가 이에 동조했다. 김명순은 여세를 몰아 형조판서 趙得永(조득영)을 사주해 김달순을 탄핵케 했다. 이어 대사간 申獻朝(신헌조)를 위시해 三司(3사)가 합동으로 김달순을 탄핵하고 나서자 마침내 김달순은 경상도 남해현의 한 섬에 보내졌다가 이내 賜死되고 말았다.
이때 대사간 李審度(이심도)가 상소를 올려 時派와 僻派를 싸잡아 비난하면서 洪鳳漢(홍봉한)을 공격하자, 純祖의 祖母인 惠慶宮(혜경궁) 洪씨가 이를 듣고 식음을 멀리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심도는 犯上不道(범상부도)의 罪로 처형됐다.
金祖淳은 곧 김관주를 「왕비의 삼간택을 방해한 죄」와 「正祖를 배신한 죄」로 귀양 보낸 후, 경주 金씨 세력에 대한 소탕작업에 들어갔다. 결국 탄핵을 받은 김관주는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죽고 말았다. 金祖淳은 여세를 몰아 죽은 金대비의 오라비인 김귀주도 「正祖를 해치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역률로 다스렸다. 이로써 英祖 이래 막강한 外戚세력으로 존재했던 경주 金씨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안동 金씨 勢道 정치의 개막
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金尙容.
마침내 김관주와 심환지 등의 僻派정권의 핵심인물이 대거 권력에서 축출되자 金祖淳을 중심으로 한 時派정권이 권력을 완전히 틀어쥐게 되었다. 당시 金祖淳을 정점으로 한 안동 金씨 세력은 박종경의 潘南(반남) 朴씨와 趙得永의 풍양 趙씨 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僻派세력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마침내 명실상부한 최고의 實勢(실세)로 등장했다.
趙得永의 풍양 趙씨는 僻派세력의 제압에 공을 세움으로써 훗날 조득영의 8촌인 趙萬永(조만영)의 딸이 純祖의 세자인 翼宗(익종)의 妃로 간택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翼宗은 대리청정 기간 중에 요절함으로써 풍양 趙씨의 세도는 翼宗의 아들인 憲宗 때에 안동 金씨와 더불어 일시 힘을 쓰는 수준에 머물렀다.
金祖淳의 집권은 안동 金씨에 의한 60년 勢道정치의 개막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원래 안동 金씨는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斥和派(척화파)의 거두로 淸나라 배척에 앞장섰다가 강화도에서 殉節(순절)한 金尙容(김상용)과 심양으로 압송되어 구금생활을 한 金尙憲(김상헌)의 후손이었다.
김상헌의 손자인 金壽興(김수흥)과 金壽恒(김수항) 형제는 그 후광에 힘입어 肅宗 때 영의정을 지냈다. 안동 金씨는 김수흥의 아들 대에 이르러 金昌協(김창협)과 金昌翕(김창흡) 형제가 大학자가 되어 文名(문명)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소위 六昌(육창: 昌集·昌協·昌翕·昌業·昌緝·昌立)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안동 金씨는 老論의 중심세력이 되어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당시 六昌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宋時烈 등의 충청지역 학자들과 달리 이론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교동 시절」
肅宗 때 영의정을 지낸 金壽恒.
이로써 권력은 오로지 서울을 중심으로 한 老論 時派인 안동 金씨 일문에 집중되었다. 金祖淳은 景宗 때 英祖의 대리청정을 주청하다가가 죽임을 당한 老論 4大臣 중 한 명인 金昌集의 4代孫이었다. 金祖淳은 孝宗 때 만주族과 대결을 벌일 것을 주장했던 선조 金尙憲이 내세웠던 명분론을 즐겨 말하면서 「世道」를 기치로 내걸었다. 「勢道」는 바로 金祖淳이 내세운 世道를 풍자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원래 純祖 치세만 하더라도 純祖의 처족인 안동 金씨 이외에 여러 세도가들이 병립했다. 대표적인 세도가로 純祖의 母系族인 반남 朴씨와 며느리 가문인 풍양 趙씨 등을 들 수 있다. 안동 金씨가 사실상 君王을 無力化한 가운데 실질적인 통치권력을 휘두르며 憲宗과 哲宗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넘게 세도정치를 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 가문과의 연계가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는 세도가는 아니나 조선조에서 정승을 가장 많이 낸 東萊(동래) 鄭씨와 같은 명문가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동래 鄭씨는 김상용과 김상헌이 鄭惟吉(정유길)의 外孫이었던 까닭에 시종 안동 김씨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老論 4大臣의 한 명인 金昌集.
당시 안동 金씨는 金祖淳이 壯洞(장동)에 거주한 까닭에 통상 「壯金(장김)」으로 불렸다. 이후 金祖淳이 校洞(교동)으로 이사한 뒤에는 그의 아들 김유근과 金左根(김좌근), 손자 金炳冀(김병기) 등이 차례로 모두 교동에서 살았다. 金祖淳의 7촌 조카인 金汶根(김문근)이 哲宗의 장인이 된 이후에는 ?洞(전동)에 사는 그의 조카 金炳學(김병학)과 金炳國(김병국) 등이 정권을 잡았다.
당시 서울에서는 ?洞과 校洞을 통칭해 「?校洞(전교동)」이라고 했다. 舊韓末(구한말)까지 이들 안동 金씨의 勢道정치 시절을 일컬어 소위 「전교동 시절」이라는 유행어가 퍼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안동 金씨의 勢道정치하에서 왕족인 전주 李씨는 평민과 다름없을 정도로 몰락했다.
勢道정치는 朋黨정치와 戚閥정치가 지닌 병폐를 동시에 드러냈다. 君王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로 추락하면서 賣官賣職(매관매직)과 가렴주구가 횡행했다. 지방 수령들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동 金씨에게 상납한 巨金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民亂의 빈발
英祖와 正祖 때 활성화되었던 유통경제가 다시 후퇴하고 백성들은 수령들의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해 이내 유랑민이 되어 걸식했다.
당시 勢道정치의 당사자들은 18세기부터 활발히 전개된 유통경제로 인한 새로운 富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들은 모든 利權을 독점하며 富를 쌓았다. 市廛(시전) 상인들 중 이들 세력과 결탁하는 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방 역시 관직을 사서 내려온 관원들이 아전과 결탁해 官穀(관곡)을 장사 밑천으로 삼아 高利貸(고리대)를 일삼으며 백성들에게 고율의 이자를 强徵(강징)했다.
궁지에 몰린 백성들은 民亂을 일으켜 저항했다. 純祖 8년(1808)에 함경도 북청과 단천에서 봉기가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純祖 11년(1811)에는 西北의 평안도 지역에서 洪景來(홍경래)가 지휘하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일어나 다음해까지 이어졌다. 이듬해인 純祖 12년(1812)에는 제주도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 밖에 크고 작은 봉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었다.
조선조가 勢道정치하에서 급속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茶山은 「通塞議(통색의)」에서 안동 金씨의 왜곡된 인사를 이렇게 질타했다.
〈온 나라의 인재를 다 뽑아 올려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스러운데 하물며 그 10 중 8~9는 버린단 말인가. 平民은 버려진 자이고, 中人도 버려진 자이다. 西北(서북: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도 버려진 자이다. 황해도와 개성, 강화도 사람도 버려진 자이다. 關東(관동: 강원도)과 호남도 半쯤 버려진 자이다. 庶孼(서얼)도 버려진 자이다. 北人과 南人은 버린 것은 아니나 버려진 사람과 같다. 버려지지 않은 사람은 오직 문벌 좋은 수십 집뿐이다〉
金祖淳은 안동 金씨의 세도정치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지 않았다. 그는 純祖 19년(1819)에 같은 時派인 趙萬永의 딸이 孝明(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는 것을 묵인했으나 이내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다시 일족인 金祖根(김조근)의 딸을 헌종비로 입궐시킴으로써 國婚(국혼)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는 안동 金씨 일문의 독점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듭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다.
孝明세자의 대리청정
孝明세자의 대리청정을 지원한 趙萬永.
純祖는 27년간 보위에 있는 동안 안동 金씨의 勢道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純祖가 재위 27년(1827) 2월부터 孝明세자의 처가인 풍양 趙씨를 등용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안동 金씨를 제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효명세자는 이후 3년 3개월 동안 대리청정을 했다.
당시 純祖는 왕세손이었던 正祖가 대리청정할 때의 前例를 좇아 「인재등용」과 「형벌집행」, 「군사권」은 자신이 보유하고, 나머지 「서무」는 모두 세자가 처결토록 했다. 대리청정에 나선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4일 만에 종묘에 대한 예식 절차를 트집 잡아 안동 金씨 계열의 이조판서 金履喬(김이교) 등을 감봉에 처했다. 이는 안동 金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효명세자는 淸議(청의)를 내세우며 戚族의 정치참여에 반대해 왔던 老論 인사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새롭게 재편코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측근인 김로와 李仁溥(이인부), 洪起燮(홍기섭) 등을 요직에 앉혀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과 경제권 등을 장악케 했다. 이때 세자의 처가인 풍양 趙씨의 趙萬永과 趙寅永(조인영), 趙秉鉉(조병현) 등이 세자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나섰다.
당시 효명세자의 총임을 받은 인물은 김로였다. 그는 正祖 때 영의정을 지낸 金?(김익)의 손자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백부 金載瓚(김재찬)의 슬하에서 자란 그는 주로 輔德(보덕)과 右副賓客(우부빈객) 등 세자를 보필하는 직책을 맡으면서 효명세자의 핵심참모로 활약했다. 그는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자 곧바로 大司成(대사성)에 임명된 뒤 純祖 28년(1828)에는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내다가 이듬해 7월에는 마침내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했다.
세자의 장인인 趙萬永은 훈련대장과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군사권과 인사권, 경제권 등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세자의 대리청정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던 해인 純祖 27년(1827) 윤5월에 훈련대장과 선혜청 당상을 겸임하게 된 것을 계기로 鑄錢(주전)을 건의해 새로 주조한 돈 73만 냥과 이자 20만 냥을 선혜청과 훈련도감에 배당하게 했다. 이때 호조판서 김로가 주전의 실무를 주관하면서 이를 적극 지원했다. 이 자금이 효명세자의 긴요한 정치자금으로 운용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풍양 趙씨의 勢道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중 세자와 연결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奎章閣(규장각)의 閣臣(각신)들을 들 수 있다. 김로와 조인영, 朴宗薰(박종훈) 등이 규장각 각신을 역임했다. 세자의 처삼촌인 趙寅永은 홍문관 대제학과 규장각 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 통치이념과 관련된 학술기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들이 당시 권력의 핵심기구인 備邊司(비변사)의 전임 당상관으로 배치되어 비변사를 사실상 장악했다. 당시 정승의 자리에는 沈象奎(심상규)와 李相璜(이상황), 李存秀(이존수), 南公轍(남공철) 등 안동 金씨 계열이 포진해 있었으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2년 후인 純祖 29년(1829)에 차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해 7월에는 金祖淳의 7촌 조카인 金敎根(김교근)과 그의 아들인 김병조가 정치적 비리로 탄핵을 받아 김교근이 유배되었다. 이를 계기로 세자의 측근 세력이 비변사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純祖 30년(1830)에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세자의 처가인 풍양 趙씨 세력이 주춤하는 사이에 안동 金씨 세력이 반격에 나서 김로와 홍기섭 등을 대리청정기의 간신으로 지목해 모두 유배를 보냈다. 이로써 王權강화를 위한 절호의 계기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지 2년 뒤인 純祖 32년(1832)에 純祖는 趙寅永을 불러 어린 世孫인 憲宗의 뒤를 당부했다. 이는 왕실의 보존을 위해 안동 金씨 세력을 견제코자 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純祖가 재위 34년(1834)에 죽자 8세의 어린 世孫인 憲宗이 경희궁 숭정문에서 24대 왕으로 즉위했다. 憲宗의 즉위 당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려 金祖淳의 딸인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金씨가 수렴청정을 행하게 되었다. 憲宗은 11세가 되던 재위 3년(1837) 3월에 金祖根(김조근)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그녀가 곧 孝顯(효현)왕후 金씨이다.
이에 榮興府院君(영흥부원군)에 봉해진 國舅(국구) 金祖根은 金祖淳을 대신해 憲宗의 外家인 풍양 趙씨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純祖로부터 託孤遺命(탁고유명)을 받은 풍양 趙씨의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순원왕후 金씨가 憲宗 6년(1840) 12월에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憲宗에게 국사를 부탁하는 懿旨(의지)를 발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憲宗 연간에 새로운 세도가로 등장한 풍양 趙씨의 세력은 純祖 연간에 막강한 힘을 과시해 온 안동 金씨 세력을 압도했다.
그러나 풍양 趙씨는 자체 내의 알력으로 힘을 하나로 결집하지 못했다. 이들은 憲宗 12년(1846)에 趙萬永의 죽음을 계기로 내분이 표면화함으로써 이내 안동 金씨 세력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풍양 趙씨 勢道의 주역 趙寅永.
이는 憲宗이 외가인 풍양 趙씨의 세도정치에 싫증을 낸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憲宗은 특히 외숙인 조병구의 권력남용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병구가 대궐에 왔을 때 憲宗은 조병구의 죄를 조목조목 따진 뒤 이같이 말했다.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대경실색한 조병구는 소름이 끼쳐 황급히 대궐을 빠져나가다가 수레가 뒤집혀 머리를 땅에 박고 죽고 말았다.
풍양 趙씨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斥邪정책을 강력히 전개했다. 憲宗 5년(1839)에는 背敎(배교)를 거부하는 천주교도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이를 「己亥邪獄(기해사옥)」이라고 한다. 기해사옥은 평소 천주교 배척에 소극적이던 안동 金씨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해 10월에 趙寅永은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斥邪綸音(척사윤음)」을 公布했다. 이를 계기로 풍양 趙씨가 마침내 실권을 잡게 되었다.
趙寅永은 憲宗 7년(1841)에 영의정이 되어 풍양 趙씨의 세도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다가 憲宗 8년(1842)에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당시 조득영의 아들 趙秉鉉(조병현)은 조만영의 아들 趙秉龜(조병구)와 함께 풍양 趙씨 세도의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 金씨의 중심인물인 金洪根(김홍근) 등과 권력다툼을 전개했다.
당시 조병현은 헌종 9년(1843)에 김조근의 딸인 헌종비 효현왕후가 죽고 이듬해에 益豊府院君(익풍부원군) 洪在龍(홍재룡)의 딸이 효정왕후로 간택되자 간교한 술책을 구사해 풍양 趙씨의 막강한 힘이 洪씨에게 분산되는 것을 막았다.
그는 金在淸(김재청)의 딸을 慶嬪(경빈)으로 입궐시킨 뒤 궁인에게 몰래 뇌물을 주고 효정왕후의 생리가 있는 기간을 틈타 경빈으로 하여금 憲宗을 맞아들이게 했다. 憲宗은 이런 일이 거듭되자 마침내 왕비의 처소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경빈이 憲宗의 지극한 총애를 받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풍양 趙씨의 세도정치는 憲宗이 재위 15년(1849)에 23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크게 위축되었으나 그 위세만큼은 哲宗 때까지 지속되었다.
哲宗의 즉위
憲宗이 재위 15년 6월에 들어와 건강이 크게 나빠져 자리에 눕자 純祖妃인 순원왕후 金씨는 憲宗의 後嗣(후사)를 왕족 내에서 물색했다. 그는 덕흥대원군의 증손인 李夏銓(이하전)이 항렬상 憲宗의 조카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내 후계자로 내정한 뒤 이름을 李仁孫(이인손)으로 改名토록 했다. 이는 純祖의 능호가 仁陵(인릉)인 점에 착안한 것으로 곧 純祖의 손자로 내정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세자로 지명하는 의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憲宗이 얼마 후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순원왕후 金씨는 곧바로 나인에게 옥새를 가져오게 한 뒤 후계자 발표를 서둘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하전 대신에 恩彦君(은언군)의 손자로 全溪君(전계군)의 제3子인 李元範(이원범)이 후사로 낙점되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친정인 안동 金씨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강화도령 이원범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도저히 보위에 오를 수 없는 몰락 왕족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창졸간에 일개 평민에서 至尊(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원래 哲宗은 家系上 憲宗의 아저씨뻘에 해당했다. 哲宗이 조카뻘인 憲宗의 뒤를 이으면 풍양 趙씨가 계속 정권을 유지할 공산이 컸다. 안동 金씨 세력은 이를 막기 위해 항렬을 문제 삼아 이원범을 수렴청정하는 순원왕후 金씨의 아들로 만들어 純祖의 뒤를 잇게 했다.
『교동 아저씨가 아는 일인가』
哲宗은 재위 2년(1851)에 憲宗의 상을 탈상한 뒤 이해 9월에 순원왕후의 가까운 집안인 金汶根(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가 明純(명순)왕후이다.
이로써 안동 金씨는 재차 勢道정치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永恩府院君(영은부원군)에 봉해진 金汶根이 모든 政事를 좌우했다. 그의 조카 金炳國(김병국)과 金炳學(김병학) 등은 각각 훈련대장과 대제학에 임명되어 勢道정치를 뒷받침했다.
당시 哲宗은 國事의 전권을 외숙부격인 金佐根(김좌근)에게 일임했다. 哲宗은 안동 金씨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 것도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는 金佐根을 「교동 아저씨」라로 불렀다. 신하를 임명할 때도 哲宗은 반드시 좌우에 『교동 아저씨가 아는 일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三政의 문란이 더욱 심해졌다. 哲宗 13년(1862) 봄에 터져 나온 晉州民亂(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 도처에서 民亂이 잇달았다. 이때 조선조는 체제 자체가 근본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哲宗은 슬하에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는 주색을 너무 좋아했다. 哲宗은 일찍이 흥선군 李昰應(이하응)의 아들 命福(명복. 후일의 高宗)에게 보위를 넘기려는 의사를 내보인 적이 있었다. 당시 안동 金씨의 수장인 金興根(김흥근)은 이같이 주장했다.
『흥선군이 살아 있으니 군주가 두 사람이 된다. 그만둘 수 없다면 바로 흥선군이 군주가 되는 게 가하다』
안동 金씨는 哲宗의 病弱(병약)함과 後嗣가 없음을 걱정하면서도 宗室 자손 중 명망 있는 자는 남모르게 없애고자 했다. 그들이 주목한 사람은 莊獻(장헌)세자의 증손인 흥선군 李昰應과 完昌君(완창군) 李時仁(이시인)의 아들인 李昰銓(이하전)을 주시했다.
이하응은 재주와 지략이 뛰어났으나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빈한했다. 그는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한 것처럼 가장했다. 무뢰한과 어울리며 안동 金씨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자 안동 金씨 세도가들은 이하응을 무시했다.
안동 金씨 세도의 종언
勢道정치의 희생양이었던 哲宗.
이에 반해 이하전은 정반대로 직설적인 인물이었다. 이하전은 憲宗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가장 유력한 후계자 물망에 올랐다가 戚臣인 안동 金씨의 반대로 탈락된 불운의 왕족이었다.
그는 哲宗이 즉위한 뒤 안동 金씨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의 관력은 돈녕부 참봉, 도정이 고작이었다. 그는 科試(과시)에 응시할 때 힘이 센 자를 데리고 들어가 부호집 자제들과 자리를 다투기도 했다. 안동 金씨 세도가의 자제들과 다투다 낭패를 당하자 이하전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科場(과장) 밖으로 나와 가슴을 치고 『하늘이여, 원통하다』고 울부짖었다.
哲宗 13년(1862) 7월에 오위장 이제두가 「이하전이 김순성과 이긍선 등과 함께 모반을 도모했다」고 무고했다. 수사가 착수되어 수많은 연루자가 드러났다. 훗날 衛正斥邪(위정척사)운동의 거두가 된 李恒老(이항로)도 관청으로 불려 나가 조사를 받았다. 哲宗은 이하전을 살리고자 했으나, 안동 金씨의 압력에 굴복해 이같이 下命했다.
『여러 차례 생각했고 앞뒤의 조사서류를 참작해 보니 亂의 배후도 그였고 우두머리도 그였다. 지금 국론을 안정시키고 백성의 뜻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니 제주에 유배되어 圍籬安置(위리안치)된 이하전을 사사하라』
그의 죽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백성이 많았다. 안동 金씨는 눈엣가시 같은 이하전마저 제거되자 거침없이 세도를 부렸다.
그러나 哲宗이 재위 14년(1863) 12월에 후사 없이 죽게 되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후사에 대한 지명권을 갖고 있는 신정왕후 趙씨는 안동 金씨를 누르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과 제휴해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李命福(이명복)을 보위에 오르게 했다. 신정왕후 趙씨와 대원군은 일찍이 안동 金씨가 哲宗을 보위에 올릴 때 그랬던 것처럼 宗統을 무시하고 高宗을 翼宗(익종)의 아들로 삼아 보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신정왕후 趙씨는 이명복을 자신의 아들로 삼은 뒤 高宗 3년(1866) 2월까지 수렴청정했다. 신정왕후 趙씨는 수렴청정을 거둔 뒤 그간 비축해 둔 30만 냥을 각도에 나눠 주는 형식으로 재정권을 대원군에 넘겼다.
高宗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풍양 趙씨의 위세는 컸다. 高宗 10년(1873)에 대원군이 실각한 후 이듬해에 趙成夏(조성하)와 趙寧夏(조녕하)가 高宗을 모신 것이 그 실례이다. 高宗은 신정왕후를 어머니로 모신 까닭에 신정왕후의 조카인 조성하를 「內兄(내형·외종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대원군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안동 金씨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오직 金興根(김흥근)만이 성격이 유별나 憲宗 때 時事를 적극 간쟁하다가 유배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벼슬길에 나와 정승에 여러 번 올랐다.
金炳學은 高宗이 등극하기 전에 흥선군의 아들인 高宗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나 대원군이 처족인 閔致祿(민치록)의 딸을 맞아들임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대원군은 한미한 가문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세도정치의 여지를 봉쇄코자 했으나 역사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勢道정치는 대원군이 집권 10년 만에 실각한 후 여흥 閔씨에 의해 부활해 1895년 閔妃가 시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君王과 백성 간의 의사소통 단절
흥선대원군
원래 조선조의 宣祖(선조) 때 朋黨정치가 등장한 이래 모든 朋黨은 권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늘 「世道의 구현」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純祖 이래 世道는 허울뿐인 명분으로 形骸化(형해화)하고 少數의 戚臣세력에 의해 통치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勢道만이 횡행하게 된 것이다.
王權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이 가렴주구에 시달린 나머지 民亂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조선조는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勢道정치는 최상의 통치로 간주된 世道가 현실과의 극심한 괴리로 인해 특정 문벌의 私的인 통치이념으로 전락한 기형적인 통치행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純祖를 비롯해 憲宗과 哲宗 모두 표면상 正祖의 蕩平정치를 본받고자 했다. 이는 이들의 잦은 陵幸(능행)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들의 능행 횟수는 正祖 못지않게 많았다. 純祖는 재위 34년간 47회, 憲宗은 13년간 21회, 哲宗은 14년간 29회에 달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그 성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능행은 있어도 正祖 때와는 달리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上言(상언)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純祖 때 그나마 24차의 上言이 있었으나 이 또한 대부분 사대부의 후손들이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伸寃(신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純祖 때 이미 일반 平民의 上言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憲宗과 哲宗 때에는 이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君王은 對民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上言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緣木求魚(연목구어) 격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이웃 중국에는 皇權(황권)을 빙자한 戚閥정치와 환관정치는 존재했지만 勢道정치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皇權이 조선의 王權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明代와 淸代에서는 그 누구도 황제가 전일적으로 행사한 皇權의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皇權의 私權化」와 勢道정치
일찍이 司馬遷(사마천)은 통치권력의 왜곡현상을 「廢王道立私權(폐왕도입사권: 王道를 폐하고 사사로운 정권을 세움)」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는 世道가 폐해지고 皇權이 개인적 권력행사의 수단으로 변질된 현상을 의미한다. 이를 통상 「皇權의 私權化(사권화)」라고 한다.
조선의 勢道정치는 「皇權의 私權化」와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勢道정치는 王權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皇權의 私權化」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조선조의 王權은 中宗反正(중종반정) 이후 臣權에 압도된 이후 士林세력에 의한 朋黨정치가 고착화하면서 300년 가까이 피폐를 면치 못했다. 그 부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이 바로 君弱臣强(군약신강)이었다. 英祖와 正祖의 蕩平노선이 王權과 王威를 강화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勢道정치는 君弱臣强의 산물
둘째, 勢道정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皇權의 私權化」와 달리 구조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皇權의 私權化」 현상은 아무리 戚臣 및 환관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지라도 황제가 戚臣 및 환관에 대한 寵任(총임)을 거두는 순간 泡沫(포말)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戚臣 및 환관의 전횡이 막강한 皇權을 내세운 일종의 狐假虎威(호가호위)에 지나지 않은 데 따른 필연이었다.
그러나 勢道정치는 애초부터 君弱臣强을 기초로 출발한 까닭에 굳이 취약한 王權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나아가 勢道정치의 담당자들은 비록 戚臣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여타 사대부와 하등 다름없는 성리학자들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소위 人物性同異論(인물성동이론)을 비롯해 人心道心論(인심도심론)과 같이 조선조 후기를 뜨겁게 달군 일체의 논쟁에서 나름대로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당대 최고의 禮論(예론)으로 무장한 인물도 있었다.
勢道정치가 세대를 이어 가며 통치권력을 장악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는 戚臣 및 환관 등이 단순히 황제와 지근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화로 통치권력을 장악한 「皇權의 私權化」와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勢道정치와 「皇權의 私權化」의 이런 차이를 간과한 채 勢道정치를 단순히 戚臣세력에 의한 통치권력의 파행적인 운용 정도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조선조 말기에 나타난 勢道정치는 「皇權의 私權化」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惡性(악성)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士林세력의 朋黨정치로 인한 君弱臣强에서 빚어진 것이다. 君弱臣强의 근본 배경이 臣權 우위를 전제로 하여 명분과 의리를 유독 강조한 조선 성리학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성리학 이념을 化石化(화석화)한 조선조의 朋黨정치가 빚어낸 최악의 결과가 바로 勢道정치였다. ●
▣ 時派(시파)와 僻派(벽파)
英祖 때 있었던 사도세자의 죽음(壬午禍變·임오화변)과 正祖가 추진한 탕평책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나타난 당파. 時派(시파)는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고 正祖의 탕평책에 찬성하는 입장, 僻派(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했다고 보면서 正祖의 탕평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時派는 南人, 僻派는 老論이 主流를 이루었으나, 실제로는 南人 內에도 僻派가, 老論 內에도 時派가 있어 종래의 4色 黨爭(당쟁)구도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純祖 이후 권력 다툼은 老論 時派와 老論 僻派의 대결양상으로 전개되다가 老論 時派인 안동 金씨 勢道정치로 귀결되었다.
▣ 辛酉邪獄(신유사옥)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正祖 재위 중에는 1791년(정조 15년) 辛亥迫害(신해박해)가 있기는 했으나, 正祖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한 덕분에 1800년에 이르러서는 천주교도 수가 1만 명에 달했다. 正祖 死後 정순왕후 金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僻派가 정권을 잡자, 南人 時派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것이 辛酉邪獄이다. 1801년 정순왕후가 교서를 내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李承薰(이승훈)·丁若鍾(정약종)·周文謨(주문모·중국인 신부) 등 300여 명이 순교했다. 살아남은 교도들이 경기도·강원도·충청도 등 산간지방으로 숨어들면서 종래 지식인 중심이던 천주교가 서민들 사이로 침투,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 金祖淳(김조순·?~1831)
조선 후기의 文臣. 初名(초명)은 洛淳(낙순), 字는 士源(사원), 號는 楓皐(풍고). 시호는 忠文(충문). 본관은 安東(안동). 1785년(정조 9년) 文科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 대교·이조참의·승지 등을 역임했다. 순조 2년(1802) 총융사·대제학이 되었다. 같은 해 딸이 순조의 妃(純元王后·순원왕후)로 책봉되자 永安府院君(영안부원군)에 봉해지면서 領敦寧府事(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천성이 어질고 후덕했으며 문장에 능해 正祖의 신임을 받았다. 正祖 死後 정순왕후의 命으로 어린 순조를 30년간 보좌하면서 안동 金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으며 저서에 「楓皐集(풍고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