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해설
케이시의 파일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면
의사나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사회사업가들의 임상
기록 전부를 모은 것보다도
그 종류와 범위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방대한 인간고의
파노라마를 보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은 약간 허풍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케이시의 파일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 수 세기에 걸친
일체의 죄악, 과실, 어리석은 행위,
고통들을 담고 있다
케이시 파일에서는 카르마의
소극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케이시에게 도움을 요청해
오는 사람들은 주로 질병과 마음의 고민
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적응성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
인 의미 따위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케이시 리딩의 대부분은
의학이나 심리학, 종교
전문가로서는 해결해 줄 수 없는
아주 현실적이고 때로는 소름이 끼칠
만큼 고통스럽고 개인적인 문제를
지닌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들이다.
이 리딩에 관한 연구는,
이들 방대한 경우들 속에
괴로움과 고통이 지니는
윤리적. 영적 의미가 밝혀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만큼 지겨운 작업이다.
시험 삼아 어떤 리딩의
한 대목이라도 읽어 본다면
그야말로 단테의 『신곡』지옥편
이나 연옥편을 읽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처절함이 느껴진다.
더구나 거기에는 단테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세 신학상의 제약
에서 오는 지적 한계 따위는 없다.
케이시의 리딩은 윤리적.우주적
및 이성적인 관점에서의 괴로움에
대한 평가를 끊임없이 내려준다.
케이시 파일을 끈기 있게 연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다.
인내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재미도
있고 격려도 받으며, 영감을 받기도
하고 그리고 깊은 안도감이 주어진다.
다만 그 계기가 많은 경우에 난치성
질병이나 참혹한 불구 등인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 파일의 모든
경우가 실패나 질병 등
이상 사례뿐만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능력•재능•지혜 .
어떤 면에서의 탁월함 등은
모두가 각자 과거생에서 그런
면에 정진했던 결과라는 것이다
좋은 환경이나 건강한 몸도
적극적인 카르마의 결과이다.
그러나 리딩 가운데는
이런 일에 대한 카르마의
형성이나 작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유능한
신문 기자와 마찬가지로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은
밝은 뉴스가 아니라 어둡고 비참한
뉴스라는 것을 정보
제공자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케이시에게
리딩을 의뢰한 사람들도
행운인 경우에는 구태여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행운인 사람은 대개 그 행운이 타고난
권리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불행에 빠졌을 때
비로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문제 삼기 시작하는 것이다.
육체의 아름다움 역시
적극적인 카르마의 결과이다.
리딩은 흔히 현생에서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과거생에서 영혼의 집인 몸을
가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또 다른 원인을 말해 준
재미있는 경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뉴욕의
인기 있는 모델의 경우인데,
그녀는 뛰어나게 고운 손 덕분에
매니큐어나 핸드 로션 광고와 보석상의
광고 모텔로 으뜸가는 존재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손을 가지게
된 원인은 그녀가 영국
수녀원의 수녀였던 전생에 있다.
거기서 그녀는 아주 천하고
거친 손일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헌신적인
봉사 정신으로 정성껏 했기 때문에
영혼이 정화되었고
그것이 그녀의 용모와 손을
특별히 아름답게 해 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용모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고무
시키는 예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카르마란 반드시 엄격
하고 징벌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카르마의
징벌적인 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그 자애로운 면을 보여주는
경우보다는 훨씬 인상적일 것이다.
인상적인 동시에
현대처럼 도덕적으로 퇴폐하여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혼란한
시대에는 그런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슬기로운 사람은 삶에 대한
올바른 도덕적 바탕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전통적 교리는 이미 비판
정신과 과학 정신으로 단련된
현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통적인 권선징악이나
이상은 이미 깨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에 대치될 새로운 개념이나
과학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약 2천 년 동안 서양의 도덕의식은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죄가 속죄된다는 '대속의 교리' 에
바탕을 둔 신학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 그가
인류에게 준 엄청난 영향을 볼 때
회의적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고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그렇게 고귀하고 자비롭게
살다가 죽었음은 인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진보에 따라
우주의 모든 생명은 극미의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에 있어
하나의 중심 에너지, 곧 '신'
이라는 공통의 유지력에 의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갈수록 뚜렷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하나의 거대한 중심인 태양에서
비쳐 나오는 광선처럼
모두가 그대로 신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인물이 우리와 다른 것은
모름지기 그가 우리들보다는
그 중심인 태양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점라고 느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인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은
역사적으로 독특한 사건은 아니다.
비교종교학을 연구해보면
다른 민족에도 인류를 구원
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구세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구 문화에서도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인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 있다.
마치니, 볼리바르, 링컨, 성프란시스,
젬멜바이스, 성녀 테레사,
그밖의 수많은 남녀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노력이 면제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죄가
사해진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 2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고,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만들어낸 것,
그리고 구원은 이 교리를
믿는 데 있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 그것이라기보다는 일부
신학자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이다.
이것은 보상 내지 속죄의 책임을
자기 밖의 외적인 무엇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심리적인 범죄이다.
이것은 구원을 자기 자신의 본질적
신성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자기
변혁에서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닌 남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의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속을 믿을 것을 요구하며,
믿지 않는 데에 대한 형벌은
영원한 저주라고 선언함으로써
정의감과 심리적 진실성을 어기고 있다.
물질과학.정신과학으로 단단히
단련된 20세기의 인간은 이런 교리를
그리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경직된 신학이
지니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틀림없이 이 세계에서의
선을 향한 위대한 세력이 되어 왔다
더구나 오늘 날 눈을 뜬 교회는
이미 그런 교리를
글자 그대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또 신앙 고백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절대 조건이라고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지녔던 태도의 찌꺼기가
과거와 같은 타협의
여지없는 엄격한 신학이 압도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 교회에서조차
아직도 남아있음이 분명하게 보이며,
그리스도교계는 책임을
행위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맹목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돌리는
독단적 교리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에 있어 근본적으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 카르마와 윤회의
법칙을 연구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고대의 지혜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들이
빠진 빈혈증적 무기력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강장제 역할을 해 준다.
우리가 케이시의 리딩이 말해 준
카르마 법칙의 징벌적인 면을
이렇게 잔인하리만큼
샅샅이 들추어 보는 것은,
윤회의 진실성을 수긍하게
된 사람들을 공연히
겁먹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모든 사건 밑바닥
에는 보편적인 정의가 있다는
확신 위에 세워진 희망과 낙천주의,
그리고 회복된 종교적 신념으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이다.
이런 사례들은,
과학이 종교를 침범하여 그 결과
교회가 움츠러 들고 아울러 인간의 행동
은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가 되었으니
도덕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방해가 될 것이 틀림없다.
잔인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맹인•
빈혈증•천식•마비등을 가져오고,
또 성교 과잉은 간질을,
그리고 사리사욕을 위해
남을 방해하는 행위는 팔다리의
마비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퍼뜩 정신 차리게 하여
선행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그리고 또 케이시
파일 속의 여러 사례들은
오늘날 이 지구에서
괴로워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참혹한 상태에 대해 어떤 해명을
제공해주고 있을 것이다.
절름발이•맹인•정신병•간질•
자리보전하고 있는 불치병자,
한센병 환자나 그 밖에 전쟁이나
사고로 팔다리를 잘린
사람들은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은 그 딱한 가정이나
수용소 같은 시설에 격리되어 있다.
번화한 거리에서는그런 장애자
들을 보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러므로 그 수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될지는
이따금 신문이나 잡지가
그런 문제를 다룬 기사를 읽을 때
간접적으로 알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 수는 엄청나고
참상은 극에 달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정상 상태를 일단 빼앗기면
인간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는
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와
모습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런 비극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설명은 그저 '신의 뜻'
이라는 한 마디가 주어질 뿐이다.
그러나 사랑 그것은 신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처참한 고통을 지우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의 뜻은 그러므로 '불가해' 라고
한다.그러나 '불가해' 만으로는
이 본질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윤회의 원리는 이런 모순을,
신의 뜻은 우주에 있어서의
하나의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저 멋대로의 변덕
이나 불가해한 목적이라는 따위의
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슬며시
보여줌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이것은
차라리 영적 목적의 법칙이며,
괴로움에 빠질 만한 까닭이 있는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삶에서 짊어지도록
주어져 있는 십자가는
그가 전생에서
뿌린 씨에 걸맞는 크기이며,
그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
서양의 전통적 사상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윤회라는 개념이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관찰 가능한 범위를
훨씬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는 이것 말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알에서 올챙이가 부화되어 나온다.
그것이 처음에는
물고기였다가 개구리가 된다.
누에는 명주실로 고운 옷을 스스로
짜내어 입었다가 우아한 나비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생명이 그
자기 동일성同一性을 잃지 않고
연속적으로 다른 육체적 형태
속에 깃들여져 나간다는 참으로
놀라운 본보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일들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탄생 과정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아마도 우리는
현미경으로 그것을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두 개의 미세한 세포가 하나로
어우러지고, 그것이 수학의
법칙대로 쪼개져 늘어나서
마침내
종족적 과정의 반복을 거쳐
인간이라는 눈과 입과 손과 발과
그리고 그 모두를 통솔하는 뇌수를
갖는 생물이 되어 태어난다는사실은,
휘트먼이 그의 시에서
생생히 묘사하듯 어떤 회의론자의
마음도 흔들리게 할 것이다.
'연속적인 삶'은
한 번의 삶과 마찬가지로
전혀 놀라울 것도 없거니와
불합리한 것도 아니다.
볼테르는 말한다.
"두 번 태어나는 것은
한 번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놀랄 것이 못 된다."
심리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는
케이시 리딩은 우리의 회의를
깨뜨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상한 원천에서 이상한
방법으로 주어지는 이들 보고서
우리를 1차원의 지각으로부터
다차원의 지각으로 끌어올려 주는
매개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지금
갇혀 있는 이 조그만 세계보다
훨씬 광대한, 상상을 넘어서는
우주적 짜임새를 갖는 것이고,
우리가 여태껏 생각도 못했던
광대한 의미가 삶에 담겨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