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변호사 한 분이 ‘제 설교가 폭력적이라’는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피해자를 오히려 죄책감으로 몰아넣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법을 다루는 변호사에게 ‘원수 사랑’은 이해할 수도 없고 정의롭지도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령의 능력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죄책감을 주는 폭력이라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는 말씀은 어떤가요?
요일 3:14-15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바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구원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사랑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까? 구원은 분명히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것을 믿는다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어야 진짜입니다. 남을 용서할 수 없다면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약 2;17)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 가지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가 아닙니다. 사랑이 안되면 ‘속히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되지 않는 것은 믿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낙심으로 가득한 메일을 보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애를 썼지만 삶에 변화가 없었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붙잡을 복음은 단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떤 죄에서도 구원하시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지 끝까지 사랑해 주신다는 것 뿐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공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기에 거룩하게 변화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속죄함과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주신 것이다’ 이런 말은 언뜻 듣기에는 놀라운 복음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너무나 위험한 주장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을 것이면 성경 전체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3-24) 하셨습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변화된 삶에 대하여 너무나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력구원, 공로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까? 가족도 사랑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니,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원수 사랑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앞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받은 축복은 모든 근심 염려 다 주님께 맡기고 사랑만 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