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원도 정선의 한 산골이다.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었다. 김삿갓은 어디 잠자리를 찾던 중, 서당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니 10여 명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었고 늙은 훈장이 아랫목에 앉아 위엄을 떨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금강산 구경 가는 길입니다."
"글은 좀 읽었소?"
"네, 사서삼경 정도 읽었습니다."
"네? 사서삼경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 하나가 선생님 이게 무슨 글입니까 하고 묻는다. 훈장은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다가 말했다. "내가 돋보기가 없어서 글자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일 가르쳐 줄게."
김삿갓이 보니 별로 어려운 글자도 아니었다. 훈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날 저녁은 거기서 하루 신세지기로 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아까 글 읽던 아이 하나가 찾아 왔다. "무얼 좀 물어보러 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보니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글자풀이를 좀 해주십사 하고요."
"너의 선생님한테 물어 보면 될게 아니냐."
"우리 선생님은 글이 짧으셔서 물어봐도 모릅니다. 아까 선생님하고 하는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난들 아느냐. 보기나 하자." 하고 보니 하얀 한지에 '籍'자 한자만 적혀있다.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소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쉰다. "이 편지에 제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운명이? 그게 무슨 소리냐?"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소년은 산 너머 마을에 현 진사 댁 고명딸인 보옥이라는 처녀를 혼자 사모해 왔는데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학식도 대단하였다. 몇 달 전부터 그 집 계집종을 매수하여 그 처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닷새에 한 번씩 열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이'籍'자 한자뿐이라 한다.
그 말을 들은 김삿갓은 ‘籍’자를 한참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빙그레 웃는다. "이 부근에 혹시 대나무 밭이 있느냐?" "네, 있습니다.
현 진사 댁 뒷동산에 무성한 대나무 밭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무 하룻날 대나무 밭에서 만나자는 말이다."
"어떻게 아세요?"
"籍자를 파자하면 竹 來 十十 一 日 이 된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스무 하룻날 대나무 밭으로 오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김삿갓이 자고 있는데 소년의 아버지인 조 풍헌이라는 영감이 찾아 왔다. "선생께서 우리 집 아이가 현 진사 댁 규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헌 영감은 현 진사 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양반과 상사람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의 집에 간단한 조반상을 준비했으니 가십시다." 김삿갓은 풍헌 영감과 같이 집에 가보니 산해진미가 가득하였다.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습니다만 많이 잡수십시요."
"차린 것도 없으면서 무엇을 먹으라는 말씀입니까. 차린 것도 없다고 하셨으니 내게는 술이나 한 잔 주면 고맙겠습니다."
풍헌 영감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하인들을 꾸짖는다. "여봐라, 술은 안 내오고 무엇하고 있느냐?"
며칠 후.
"선생님 덕분에 현 낭자를 기쁘게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뜻대로 되었느냐?" "네, 자기는 글자 한자만 써 주었는데 글자풀이를 누가 해 주었느냐고 물어봐서 내가 3일 동안 끙끙 앓으면서 사연을 알아냈다 하니 낭자는 기뻐했습니다."
"그래, 본인한테 직접 구혼이라도 해 보았느냐?"
"그 비슷한 말을 해 보았습니다만 양가 부모님의 승낙을 받기 전에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올해가 현 진사의 환갑이어서 준비도 있고 하니 앞으로는 만날 수가 없고 부모님을 통해서 청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풍헌 영감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깝고 안타까워서 몸이 바짝 달았다. 대책 없이 김삿갓만 붙잡고 늘어진다. "삿갓선생, 기왕에 도와주시는 길에 끝까지 도와주십시오." 하며 옷소매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김삿갓은 조용히 생각하며 작전을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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