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서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과 에우다이모니아 모두에 관한 논의를 계속 하고 있다. 그 두 번째 공격인 즐거움이 단지 수많은 유익 중의 하나라는 주장에 대하여 방어하며 지속적으로 즐거움은 영혼의 방해받지 않는 활동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결과임을 주지한다. 에우다모니아의 두 번째 분석은 테오리아(theoria) 즉 관상으로 설명된다.
1-2장
즐거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에우독소스의 견해로 추정된다. 즉 즐거움이 최고 좋은 것이라는 견해다. 이는 두 가지로 논증된다. (1) 하나는 모든 동물이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이는 추구할 만하다는 것 (2) 또 하나는 좋은 것에 또 다른 좋은 것이 더해지면 더욱 선택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지혜로운 사람은 훌륭한 행동을 생각해 낼수 있음응로 더욱 큰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라 말한다. 실천적 이성의 추가에 의해서 즐거움은 추가되는 것이다.
3장 즐거움의 정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은 과정적인 것이기에 완전할 수도 목적이 될수도 없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오히려 즐거움이나 완전함은 과정 자체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즐거움은 일종의 복원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 자체로 지향되어야할 목적인 셈이다. 그러나 여러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즐거움을 배제하는 작업을 통해 고귀한 즐거움을 가려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즐거움 자체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4장 즐거움에 대한 설명
즐거움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어느 시점에서나 완벽한 것이다. 이 주장은 즐거움이 실제 쾌락과 과정에서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즐거움은 감각대상들중 최선의 것에 관계할 때 가능해진다. 좋은 상태의 감각 혹은 사유가 자신의 감각 혹은 사유에 해당하는 대상 중 가장 충실한 대상에 관계할 때 가장 완전하다. 정리하자면 좋은 대상과 관계하는 활동은 보다 완전한 즐거움을 낳는다. 보다 좋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즐거움은 좇아 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즐거움은 단지 행위를 완벽하게 하는 부가적인 것이 아닌가? 분명한 분석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완벽하게 느끼게끔 즐거움은 좋은 것의 추구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즐거움은 일종의 선과 관련되어 있는 우리의 인식구조일지도 모른다.
5장 중립적인 즐거움
즐거움 자체는 선하고 악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에 수반된 행위가 고귀하며 저열하냐에 따라 고귀한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저열한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능동적 행위가 결함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완벽하게 기능하며 훌륭한 대상들과 관계할 때 그 완벽한 행위의 수반으로 즐거움은 따라와서 행위를 ‘완전’하게 한다. 이 ‘완전’이라는 가치의 부여를 행위와 결합하여 즐거움이 수행하는 듯 하다.
6장 에우다이몬적인 삶의 본성
에우다이몬적인 삶이 완전하고 자족적이다 해서 스스로 즐거움이 되는 오락적인 삶을 자족인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그것이 이성을 활용하는 오락이다 하더라도 가장 완전한 삶의 목적과 결합하지 않는 활동을 자족적이라 하지 않는다. 오락 활동은 육체적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은 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탁월함을 소유한 품성의 상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노력과 인내로서 닦여진 탁월한 일관성으로 이해된다. 오락적인 삶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자체로 때론 의미를 갖기도 하다. 다만 인생이 겪는 의미의 함량에 비해 빈약한 의미로 인해 품성 상태로 여겨지지 않을 뿐이다.
7-8장(최종의견과 같이)
에우다이몬적 삶은 ‘관조의 삶’ 곧 지식의 소유와 지식의 반성으로 간주된다. 이 세상에 대한 필연적인 지식을 소유함으로 우리에겐 영구적이고 영속적인 탁월성이 작동하게 된다. 즉 여타 탁월성의 삶들과 같이 외부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관조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 자족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관조의 삶이 최고로 좋은 것이라면 행위의 탁월성 같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동은 두 번째의 것이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지속적인 관조의 삶을 살수 없는 일반에게, 그리고 실천적 지혜없이 효과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닐까?
인간의 속성 중 가장 분석적이고 면밀하며 항구적인 지식을 바라보는 것이 직관적 이성이라곤 하지만 우리는 행위와 실천이 없는 사람을 훌륭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실사구시 되지 않고 허황된 의식의 정교함을 꾸미다가 극적인 부정의에 틈을 내어준 것은 우리 조선시대에도 보이는 일 아닌가?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우다이몬적인 사람이 모든 것을 관조의 극대화에 종속시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품성적인 탁월성을 수행하는 한도내에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즉 인간의 삶과 모순되지 않게 능동적으로 세계의 본성에 관한 진리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직관적 이성이 실천적 지혜에서 활용되는 경우와 관조적 삶에서 활용되는 경우 얻어지는 결과는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은 상태는 그저 어정쩡한 결합으로 보인다.
관조의 삶이 어떻게 가장 뛰어난 것인지 실질적으로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고양시키는 지에 대해 결과로 드러나지 않음에 대해(탁월한 실천에 대해 직접적인 연결이 없음에) 우리는 과연 칭송할 수 있는가? 에우다모니아적 단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기술한 탈세속적 단계인건 아닌가? 종교적인 느낌이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