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21,12-19
내가 말실수를 자주 한다면?
마지막 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박해는 더욱 거세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이 세상을 더욱 강력하게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때가 당신을 증언할 기회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미리부터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리부터 할 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주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언변과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준비해서 잘 말하는 것은 그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증언하고 사람을 변화시킬 강력하고 지혜로운 말은 잘 준비되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솔직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언변입니다.
J. D. 슈람은 스탠퍼드 경영대 교수입니다.
그는 테드(TED) 강의에 나와 자신의 경험에 대해 4분 동안 강의했고 그 강의는 수많은 사람을 자살에서 구하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강연 제목은 ‘자살 생존자를 위한 침묵 깨기’입니다.
그는 두려움으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강연에서 했고 그 강연으로 힘을 얻어 다시 살기로 했다는 사연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가 39세 때 당시 뉴욕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살 시도를 합니다. 원인은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거의 확실시 되었던 한 교육 관련 회사의 사장 자리를 거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상한 것만큼 연봉을 받을 수 없었고 뉴욕으로 오며 산 주택 대출금을 갚을 수 없어 집이 압류되기 직전인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술과 마약에 손을 대었고
그것 때문에 돈은 더 빠르게 탕진되었습니다.
암울하기만 한 자신의 미래를 비관한 슈람 교수는 2003년 6월 11일 뉴욕의 맨해튼 다리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페리 승객이 표류하고 있는 슈람 교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오른팔은 크게 손상되어 치골이 모두 부러져 있었고, 폐는 납작해져 반쯤 죽은 상태였습니다.
병원에서 23일간 입원하여 외상 등을 치료한 다음, 알코올과 약물 의존증 재활 센터에서 28일간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요양센터에서 한 달간 머물며 정신 건강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5개월 동안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을 때 뉴욕대에서는 건강만 괜찮다면 계속 강의를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디 갔다가 왔느냐고 물어보지 않아 자신의 자살 시도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뉴욕의 집을 팔고 시골의 작은 집으로 이사하여 1시간 이상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없으니 마음이 편했고 학교의 강의는 인기가 높아졌으며 학교도 5년간 재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친구가 자살합니다.
자신에게 그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함께 아파해 주었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대중들에게 알리기로 합니다.
동성애자이고 술과 약물 중독자이며 자살 미수자인 자신을 학교에서 계속 받아줄 것 같지 않았고, 학생들도 자신을 정상적인 눈으로 보아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순간만 넘기면 훨씬 나은 세상이 기다린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 직전에 그의 동영상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렸습니다.
누가 좀 도와달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그는 자살했습니다.
그런 슬픈 사연 외에는 많은 이들이 그의 강연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되어 자살을 면했다는 사연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예상외로 좋게 보아주었고 학생들에게도 더 인기 있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참조: 『인간은 탐구하는 수업』, 사토 지에, 다산 북스]
제가 말을 실수한 것들을 되짚어보면 대부분 어떠한 두려움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저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린 것들이었습니다.
말을 잘하거나 영향력 있는 말을 하려면 먼저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때 주님은 그 사람의 말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만난 어떤 자매님은 교리신학원 입학 면접 때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었습니다.
교수님이 두 분 앉아계셨고 5명씩 면접을 보고 있었습니다.
왜 교리신학원에 다니려 하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어떤 신부님의 추천으로, 혹은 더 많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등 준비해 온 말들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신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꾸며대고 싶지 않아서, ‘떨어지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차례가 오자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미사를 아무리 다녀도 죄를 지어서, 왜 그런지 알아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들었어도 가장 솔직하고 가장 마음에 와닿는 답변입니다.
고개만 숙이고 점수를 먹이던 두 교수님이 동시에 머리를 들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고 합니다.
물론 합격을 해서 교리신학원을 잘 다니고 있습니다.
말의 힘과 지혜를 떨어뜨리는 것은 자신의 평가가 저하될 거 같다는 두려움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평가절하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솔직해질 수 있다면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영향력 있는 말이 나옵니다.
말실수는 다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진다면 성령께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시면 다들 지우고 싶은 기억들 한 두 가지 씩 있으시겠죠?
특히 그때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그 한 순간을 참지 못해 오랫동안 쌓아왔던 점수 다 깎아먹은 기억 말입니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그 순간을 넘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 참아서 나도 그도 큰 상처를 입고, 두고두고 부끄럽고 면목 없는 흑역사(黑歷史)는 수시로 떠올라서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저도 잊어먹고 잘 지내다가도 불현 듯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자다가도 크게 한숨을 푹푹 쉽니다.
괜히 죄 없는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서 발로 찹니다.
그리고 혼잣말로 외칩니다.
“그때 내가 대체 왜 그랬지? 정말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런데 다행인 것은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신 위대한 대성인들도 이런 면에서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와 똑같이 어처구니없는 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역대급 과오를 범했습니다.
급하고 과격한 성격 자제하지 못해 일을 저지르고서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인내의 최고봉에 올라간 분들이 성인(聖人)들이었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타고난 결함과 결핍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마침내 자신을 극복하고 벗어나는데 성공한 성인들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합니다.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조만간 골고타 언덕에서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극한의 인내를 앞둔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복음 21장 19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이 세상 안에서 뭔가 대단한 것들을 꿈꾸지만 현실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모두 공감하듯이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순풍에 돛단듯한 나날을 불과 며칠도 안 됩니다.
하루하루가 좋아 죽을 것 같은 호시절은 찰나입니다.
내게 호의적인 주변 환경은 드믑니다.
내 마음에 딱 드는 사람들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의 기대치를 대폭 낮추는 것입니다.
자주 인생의 역풍을 만나더라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크게 낮추는 것입니다.
주변 상황과 타인이 나를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나를 그들과 맞추고 나를 보다 넓히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이런 모든 노력의 기초요 첫 출발점은 인내입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주실 구원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내로써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만이 구원이 가능합니다.
죽어도 양보 못하고, 틈만 나면 내지르고, 여기서 폭발 저기서 폭발, 좌충우돌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은 요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서부터 벌써 지옥이나 연옥 벌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에 대해 인내할 것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 대해 인내할 것인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끝도 없이 인내하신 하느님,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마치 바보처럼 인내하신 예수님의 인내 앞에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인내를 비추어 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나는 표징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에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2-13절)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황제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죽음은 영혼에도 육신에도 올 수 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0-31)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굳은 신앙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 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고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