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든 다섯의 선생은 귀만 조금 어두웠을 뿐 기억이 또렷하고 정정했다. 압록강변 삭주에서 태어나 식민지의 비애와 해방을 겪고, 전쟁과 빨치산 3년을 거쳐 감옥살이 15년 후 출소하여 남쪽에서 반백을 살았다. 가슴 아픈 현대사의 고난, 개인의 삶이 아니라 집단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선생의 수기를 몇 차례에 걸쳐 요약해 싣는다. 피로 쓴 옥고를 흔쾌히 내어주신 선생께 감사드린다. 통일된 조국에서 자서전으로 완성해 펴내고 싶다는 선생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란다. <필자 주> |
1950년 겨울 덕유산 상봉엔 무릎 위까지 눈이 쌓였다. 일주일 이상 이어진 국군의 동계 공세와 혹한 속에 12월 23일 동짓날 아홉 명의 동지가 동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월성 황점에 머물던 경남도당과 105연대는 51년 1월 함양, 산청을 거쳐 지리산 중산 부락까지 이동했다. 선생은 노영호 사령관의 경남 유격사령부에 공병 군사기술지도원으로 차출된다.
이현상 부대가 합류한 51년 5월경 백무동에서 6개 도당위원장 회의가 열렸다. 지휘계통 일원화와 제2전선 구축을 위해 경남 전체 유격부대가 57사단으로 재편되어 거리미골 내대 부락에 진주한다.
여수 봉기 지도부였던 이영회 사단장 휘하에 지방부대와 구빨치산, 인민군 등이 6개 연대로 편입되고, 직속부대로 청년근위대, 여성근위대, 정찰대와 중화기연대 등이 통합되었다. 선생(가명 허형)은 인민군 105연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3연대(연대장 김화성, 동북 의용군 출신)의 작전참모로 전투작전을 위임받아 지휘하게 된다.
▲ 2002년 8월 지리산 유격전적지 답사에서. [사진제공-허찬형]
1951년 8월 15일 해방 기념투쟁의 일환으로 하동 화개지서를 공격하면서 경남 일대 기동투쟁이 시작되었다. 4개 주력부대가 2~3개 경로로 나눠 덕산과 단성, 삼가와 가조 등을 치고 빠지는 순회투쟁이었다. 3일간의 공격으로 화개지서를 점령한 후 음력 8월 14일 단성 생비랑까지 단숨에 삼키고 15일 추석날 합천 삼가지서로 들이쳤다.
정보를 입수한 합천군내 경찰병력 약 200명이 삼가에 집결해 있었지만 기세가 오른 빨치산 대부대를 막아낼 순 없었다. 이 작전에서 120명을 포로로 잡고 G.M. 트럭 두 대와 81mm 포 등 전리품을 얻어 자골산으로 빠져나갔다. 포로는 안병화 정치사령관이 직접 심사해 8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8명은 유격대에 편입되어 후일 산에서 생을 마감한다.
황매산 비상선으로 향하는 길에 추격해 온 토벌대에 사단 전체가 포위되기도 했다. 토벌대의 주력인 206/207 전투경찰대는 강원도 최전방에서 남부군 토벌 임무를 띠고 투입된 부대로, 서북청년단과 변절자 등으로 구성되어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100m까지 접근한 토벌대와 세 시간 여 치열한 전투 끝에 매복과 추격을 따돌리고 황매산 주능선에 올랐다. 그 후 경찰 사이에선 ‘빨치산이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오도산에 도착한 대오는 소를 잡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지리산 첩첩 산악
손아귀에 걷어잡고
험악한 태산준령
평지간을 넘나드세.
기동치던 부는 바람
우재호통 외치고
깊은 골 흐르는 물
승리를 노래한다.
우리는 빨치산
최후의 승리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순회투쟁 중에 생비랑지서장과 합천경찰서장이 전사하자 전투경찰대와 지방경찰이 집중 공세에 나섰지만 57사단의 기동투쟁은 계속되었다. 삼가전투 후 가회, 대병, 신원 등 지역을 통과하면서는 민간인에 빨치산의 승전을 알리고 상호 피해를 막기 위해 선전포고문을 미리 전달해 무혈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영회 57사단이다.
우리의 요구는 너희들의 생명이 아니고 보급물품이다.
너희들 생명을 노리지 않는다는 것은 삼가지서에서 120명의 포로를
전원 집으로 보내준 사실로 입증될 것이다.
O시경에 지서에 진입할 것이니 지서 장비는 두고 몸만 피해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너희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57사단 이영회 사단장 배상>
이런 식으로 별다른 저항 없이 가조면까지 진출했다. 가조지서 공격작전에서는 3연대가 주력을, 선생이 지휘책임을 맡았다. 백주에 삼면에서 지서를 포위했지만 경찰의 저항은 예상보다 완강했고 망루 앞 지형지물은 한 치 전진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리했다. 직접 나서려는 사령관을 만류하고 선생과 돌격대가 불을 지른 망루로 진입하려는 순간 M1 수류탄 유탄이 폭발한다. 2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한 가운데 선생은 20여 군데에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이튿날 동틀 무렵 정신이 들어 보니 모닥불 주위에 군의관과 위생병들, 임순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군의관이,
“사령관께서 출혈이 심한 작전참모를 꼭 살리라고 하셨는데 동지의 혈액형을 알 수도 없고 같은 피를 구할 수도 없는데 5연대 임순이 동지가 O형이라며 달려왔소.”
“오빠, 정신 나요?”
순이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선생과 동갑내기 순이 오빠는 전쟁이 발발하자말자 전주형무소에서 학살되었다. 보광리에서 만난 똑똑한 열일곱 소녀는 40일간 선생을 치료하며 잘 따랐다. 사령관에게 도당학교로 보내줄 것을 건의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이 영영 마지막이었다. <계속>
녹슬은 해방구
글, 가락 : 김석준
노래 : 조국과 청춘
그 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앞서간 죽음 저편에
해방의 산마루로 피었지
그 해 우리 춥지는 않았어
동지들 체온으로
산천이 추위에 떨면
투쟁의 함성 더욱 뜨겁게
산 너머 가지위로 초승달 뜨면
머얼리 고향 생각 밤을 지새고
수많은 동지들 죽어가던 밤
분노를 삼키며 울기도 했던
나의 청춘을 동지들이여
그대의 투쟁으로 다시 피워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 해방의 약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