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은 한국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도자다.
만주 최초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이후,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책임자로서,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서, 대한민국 독립군의 총수로서 지대한 지도력과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백포는 단군의 대단한 도력을 지닌 종사로, 청산리 대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로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였다. 백포는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서재운(徐在云)의 독자로 태어났다. 1890년 10세 때부터 고향인 함경도 경원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서일은 1900년 초부터 다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함경북도 경성군 소재 함일실업학교(咸一實業學校)의 전신(前身)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1902년 졸업하였다.
백포는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1911년 나라를 건질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汪淸縣) 덕원리에 자리 잡았다. 그는 그 곳에 청일학교(靑一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여 청년동지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시키기에 진력하였다. 마침내 백포는 1911년 3월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 병력을 대종교인인 현천묵(玄天默) 계화(桂和) 백순(白純) 등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일의 '군 정부'란 이름이 마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하여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동시에 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실질적 군무 총장이였다.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짝을 이루어 간도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백취 현천묵, 김좌진은 사령관이었다. 1920년 9월 9일,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어 298명의 사관이 배출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징모국을 통하여 모집되었다. 북간도 현지와 국내 혹은 러시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설립 후 불과 1년 만인 1920년 10월경에는 간부와 병사를 합하여 약 1,600여 명의 인원을 거느린 유력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마적단이 훈춘(琿春) 시가를 습격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하였고 이를 빌미로 대규모의 정규군을 간도로 출병시켰다. 일본군이 간도로 들어오기 전부터 독립군들은 근거지를 떠나 겨울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로 군정서는 주력 부대를 백두산록의 이도구(二道構) 방향으로 이동시켰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끄는 부대도 이 지역으로 이동해 있었다.
10월 21일, 백운평 부근에서 아즈마(東)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를 만나 싸웠다. 독립군 부대들은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청산리 일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했다. 이 중 백운평, 천수평, 맹개골, 만기구 전투는 북로 군정서가 단독으로 수행하여 승리하였고 어랑촌, 천보산 전투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수행하였다. 이 전투를 청산리 대첩이라 하며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하여 1,200여명이 사살되었고 독립군 측의 피해는 미미했다.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라고 불린 서일이 직접 임시정부에 청산리대첩을 보고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의 영웅은 서일총재, 홍범도장군과 김좌진장군이다. 청산리 독립전쟁 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의 전 병력이 북만 밀산(密山)으로 옮겨갔으며 국민회 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모두 3,500명의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란 대 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전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군단은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주하고 그는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갔다. 기회를 기다리며 근무의 여가를 타서 교서(敎書)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청년동지들이 다 희생되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겹쳐 부하들마저 무참히 희생됨에 통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이튿날 8월 27일(음력) 아침 마을 뒷산 산림 속에 정좌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41세의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유서를 남겼다. 서일총재의 유해는 청산리가 멀리보이는 작은 구릉우에 서일의 묘소가 대종교 제1대와 제2대 교주들인 나철, 김교헌 묘소와 함께 “삼종사 묘소”를 이루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청산리 대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로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무장 독립운동가였다. 서일총재의 장남 서윤재와 사위 최관 선생도 항일독립운동 공로 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서일의 공적으로 보아 건국훈장 독립장은 승격 서훈되어야 할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이사 노경래)
첫댓글 리광인 교수 연락처를 알고 싶습니다.
서울 한글학회 리대로 아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