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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은 복잡해서 정리가 잘 안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메디치 가문을 조금 상세히 공부하면서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루겠습니다.
정리가 안 되더라도 한 번 읽어 오십시오.
**메디치 家門
메디치가( Medici)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메디치가는 네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비오 4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다. 피렌체 정부를 지배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 출신으로 약업(藥業)으로 재산을 모은 다음 금융업으로 발전했다.
조반니 드 메디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으며, 1434년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장남)가 비공식적인 국가원수의 자리를 인계받아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수 세기 동안의 긴 통치는 민란으로 국외추방을 당한 두 번(1494년-1512년, 1527년-1530년) 중단된 적이 있다. 권력은 차남 계통(대 로렌초의 계통)에게 넘어갔다. 로렌초의 증손자이며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조반니 아들이 아님)와 함께 시작되었다.
2023. 3. 13
이 시대의 배경을보자. (중세는 황제권과 교황권의 다툼의 역사이다.)
황제권이 교황권의 우위를 차지하는 역사적 사건이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 년)이다. 프랑스 왕이 아비뇽에서 세운 교황이 베네딕트 13세(1394-1417)이다. 로마 카톨릭은 반발해서 로마 교황청 교황(그레고리 12세 1406-1415)을 세웠다.
베네딕트 13세(1394-1417) -- 아비뇽
그레고리 12세(1406–1415) -- 로마
알렉산드르 5세(1409-1415) --피사(통합교황)
(이때 피시 교황이 되려고 해적 출신 코사 + 조반니 데 메디치가 손을 잡다)
--> 공작이 성공하여 코사가 요한 23세가 되다.
조반니는 코사의 금고지기가 되어서 교황청 돈을 관리하면서 떼돈을 번다.
이에 추기경들이 피사에 모여서 통합 교황 알렉산드르 5세(1409-1415)를 세워 3교황 시대가 되었다. 피사 교황이 일찍 죽었다. 새 피사 교황을 뽑을 때 해적 출신으로 알려진 코사가 추기경을 매수하기 위해서 조반니 드 메디치를 찾아왔다. 조반니는 자기 돈으로 추기경을 매수하여 코사를 피사 교황인 요한 23세를 만들었다. 코사는 댓가로 조반니에게 교황청 금고를 맡겼다. 교회의 엄청난 헌금을 메디치가에서 관리하면서 금융업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3명의 교황에게 사퇴를 힘으로 밀어붙이자 코사는 겁을 먹고 사퇴했다. 금고지기 메디치 가문도 쫄딱 망했다.
이때 적대 가문들이(파치 가문이 대표격)이 메디치에 도전했다.
이후에도 교황과 관계 설정을 신의를 바탕으로 하여(교황이 어려울 때도 등을 돌리지 않고) 교황의 신임을 얻었다. 교황의 운명에 따라 쫄딱 망했다가, 금방 일어서는 반복이 있었다.
중세의 기독교는 단일 지도체계이다.
한 명인 교황은 중세인에게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다. 그 태양이 동시에 3개나 떠 있으므로, 중세인인 느끼는 혼란은 아주 크다. 이에 흑사병까지 휩쓸고 지나가자 중세인들에게는 고난의 시대였다.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서민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보였다. 서민적인 생활을 하고, 도서관을 짓는 등 대시민 봉사를 많이 했다.
(*금융업자는 귀족이 아니고 시민계급이다. 돈을 많이 벌면 서민을 멀리하고, 귀족 행세를 한다. 코시모는 일부러 당나귀를 타고 다녔고, 시민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면 들어주었다. 귀족이 아닌 시민으로 남아서 피렌체 시민들에게 인기가 아주 놓았다. 피렌체 시민은 아버지라고 불렀다.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의 대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
(*도서관이 왜 시민봉사 사업이었을까. 이때의 책은 양피지에 손으로 옮겨 적는 필사본이었다. 한 권의 책에 양피지가 100장이 필요했고, 수도사가 일년 동안 꼬박 쓰도 책 두 권을 필사하기 어려웠다. 책값이 비쌀 수 밖에, 서민들은 책을 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메디치가도 도서관을 지어 책을 200권 배치했다고 한다. 이때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고전(그리스-로마 문헌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라틴어로 번역되어 책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 라틴어(이태리어)로 번역됨으로 르네상스의 문을 열게 된다.)
로렌초가 메디치가의 관리를 물려받을 때까지 피렌체는 정체되어 있었다.(조반니-코시모-로렌초로(로렌초는 코시모의 손자로, 일찍부터 후계자로 교육시켰다고 한다.)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게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죽은 후에 그는 “위대한 로렌초”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478년 4월 26일 부활절에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에서 미사를 드리던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암살당한다.(파치 음모 사건 – 아래에 상세하게) 로렌초는 죽은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한후 양육하였다. 줄리오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 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메디치 가에서는 피렌체를 로마를 대신할 중심 도시로 만들 꿈이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와 학자를 후원하여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만들려 하였다. (단테, 마키아벨리, 많은 예술가들)
파치 음모 사건은 파치 가문이 주도하여 피렌체의 통치자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사건이다.
파치 가문이 코시모를 붙잡아 강금하자 코시모 가족은 재빨리 재산을 처분하고 베네치아로 도망갔다. 코시모도 간수를 매수하여 탈옥하여 베네치아로 가서------, 피렌체 시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메디치가의 편을 들자 메디치 가문에 도전한 가문들이 진짜 쫄딱 망한다.
(이때 메디치 시민은 메디치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서 메디치가에 도전하는 가문은
시민이 앞장서서 까부셨다고 한다.)
1478년 4월 26일 파치 가문을 중심으로 3치 가문이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에 대한 살해를 감행하였다. 형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남았으나 동생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파치 가문 일족들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파치 가문이 사라지게 하는데는 메디치 시민의 역할이 크다.
메디치 가문과 적대관계에 있던 교황 식스토스 4세(재위 1471~84)는 이번 반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교황은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고 피렌체와 1478년에서 1480년까지 2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메디치의 바다로 나가는 관문인 피사에 교황이 추기경을 임명하자 메디치가의 로렌조가 쫓아 버리면서, 로마 교황청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이때도 피렌체 시민은 로렌초를 절대 지원했다.
암살 주모자를 조사하니, 교황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주동한 교황의 조카를 위시하여 교황의 신복을 모두 처단했다. 도망자는 오스만 터키까지 쫓아가서 철저히 보복했다.
뿔이 난 교황은 로렌조를 로마로 불렀다. 피렌체 시민은 가면 죽는다고 못 가게 했으나
로렌초가 유명한 연설을 한다. ’교황이 원하는 것은 나의 목숨인데, 나 때문에 피렌체 시민의 목숨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이때 피렌체 시민이 울면서 메디치가에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로마에 간 메디치는 오히려 교황을 설득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고, 무사회 귀환했다.
메디치 은행의 몰락
조반니 디 메디치(1360–1429)가 창업한 메디치 은행은 성장을 거듭하였고 유럽 여러 국가에 지점을 개설하며 다국적 기업되었다. 이로써 은행업은 가문의 핵심사업이 되었다.
1429년 조반니가 사망할 당시 메디치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다. 제조업과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한 후 예술, 문화, 학문, 교회를 후원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가 피렌체를 다스리는 지배가문으로서 위상을 키워나갔다.
조반니 드 메디치의 증손자 로렌초 드 메디치(1449~92)대에는 로렌초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피렌체를 번영하도록 했으며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평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경제 경영에는 무능했다. 유럽 전역에 16개 은행중 15개가 도산했고 1492년에 로렌초가 사망할 당시에는 피렌체 본점만 남아있었다. 가업인 은행업을 물려받은지 25년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이다. 메디치 은행이 파산하자 피렌체의 르네상스도 쇠퇴하였고 예술인들은 하나둘씩 피렌체를 떠났다.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1470~1498)가 나폴리 정복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했다. 프랑스군이 10월에 피렌체를 침공하자 피에르 데 메디치는(무능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에 대해 사보나롤라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봉기가 일어났고 메디치 가문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들은 해외를 떠돌아 다니면서 18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수도원 승려로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교황과 메디치가를 모두 비난했다.
메디치가가 망명하자 3년간 피렌체를 통치한다. 교황을 비난하다가 파문당하고,
붙잡혀서 화형을 당한다.)
메디치 가문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끼쳐 16세기 유명한 두 명의 교황들(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을 배출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가톨릭 교회에서의 영향력으로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살아남게 하였다.
(레오 10세는 면죄부를 무리하게 팔아먹다가 루터의 종교개혁(1517)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26년에 반 황제 방위동맹인 코냑동맹을 결성한후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려고 코냑동맹전쟁을 일으킨다. 피렌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이 15년만에 다시 추방을 당하였다. 가문의 구심점이 되어온 교황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1528년 나폴리 공성전에 프랑스가 패하며(이태리는 프랑스를 지원했다) 전쟁은 황제의 승리로 끝났다. 교황은 1529년 바로셀로나에서 밀약을 체결하며 황제 카를 5세에게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였고 카를 5세(1500~1558)가 이를 수용하였다. 승리한 제국군에 의해서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은 회복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재종손자(再從孫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그곳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프랑스 앙리 2세의 왕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89)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유일한 자녀로 태어나 메디치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후계자가 된다. 피렌체가 안정을 되찾자 재종조부(再從祖父)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3년 카트린을 프랑스 국왕의 둘째 아들 앙리 왕자와 혼인을 성사시켰다.
**지금까지의 메디치 가에 대한 공부를 요약하면
조반니 드 메디치 — 메디치 가문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다.
교황 요한 23세에 투자하여 한 몫을 잡았고, 파멸도 맛보았으나 의리를
지켰다.
2. 아들 — 코시모 드 메디치(1434 - )
많은 공을 들여 피렌체의 지배자가 된다.
--> 코시모의 아들은 피에로 드 메디치이다.
3. 코시모의 손자 — 로렌초 드 메디치(1448-1492)
*코시모는 손자 로렌초를 지도자로 정했다고 한다.
메디치의 지배자가 된다. 저항 세력도 나타났다.
조반니 — 코시모 —(아들-피에로) — 로렌조 – 피에로(로랜조의 아들) 로 이어진다.
*피에로(1472-1503)는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 때 싸움에 지고 망명한다.!494-1512)
이때 사보나롤라가 통치한다.(1494-1498) 1498년에 화형 당한다.)
로렌조 2세(피에로의 아들)가 재집권한다.(1516 – 1519)
(파치 음모 사건-1478))
’치‘로 끝나는 세 가문, 그 중에 파치 가문이 대표적이다.
성당 미사를 볼 때 메디치 가문을 암살하려는 음모로,
형 로렌초는 살아남고, 동생 줄리아노는 죽었다. 로렌초는 복수를 집요하게 한다. 로렌초는 줄아아노의 사생아 줄리오를 입양했고, 나중에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된다.
4. 프랑스 왕 샤를 8세(1470-1498)가 침입햐자 피에로(로렌조의 아들)는
패배하고 쫓겨난다. 이로서 메디치가는 18년 간(1494-1512) 떠돌면서
망명생활을 한다
*샤를 8세 침입으로(1494), 피렌체가 정복당하자 사보나롤라가 담판으로 샤를 8세를 믈러나게 하였다.
이에 피렌체 시민은 지배자로 로렌조의 아들 대산에 사보나롤라를 선택했다.
(1494-98년간 통치했다. 98년에 화형당하다.)
*로렌조 데 메디치 –피에로 데 메디치 – 줄리오 데 메디치 – 로렌조2세 데 메디치의 순서로 지배자가 된다.
로렌초의 손자 로렌초 2세(피에로 데 메디치의 아들 1516-19)가 피렌체의 지배자가 된다.
**이때 메디치가의 족보를 정리하면
로렌조 데 메디치의 아들들
피에로, 조반니(추기경), 줄리아노, 줄리오 순서이다.
삼촌 3명이 의논하여 피렌체 통치권을 끈탕 삼촌 줄리오에게 주었다.
줄리오가 죽고 나서 피에로의 아들 로렌조 2세 데 메디치가 통치자가 된다.
**로렌조 2세 데 메디치는
레오 10세 --- 큰 숙부(조반니 추기경)
클레멘스 7세 — 종숙부(5촌 숙부)
카트린느 데 메디치 — 로론초 2세의 큰 딸, 프랑스 앙리 2세의 왕후
알렉산드르 데 메디치(로렌조 2세의 사생아) ---- 피렌체의 세습 공작이
되다.
(통치기간 1531-37)
5. 2명의 교황이 탄생
1) 클레멘스 7세
2) 레오 10세 – 면죄부를 팔아먹다가 루터의 종교개혁(1517)을 부러오다.
6. 칼 5세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여 다시 추방(1527-1530)당한다.
바로셀로나 조약으로 복귀(1530)
7.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로렌체2세 드 메디치의 유일한 자녀로 메디치가의 상속인이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중매로 프랑스 앙리 2세의 왕후가 된다.(1533)
(카톨릭을 보호하려 신교도를 대거 학살함으로 위그노 전쟁을 유발했다.)
**메디치 가문의 흥망성쇠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본 이유는
부르주아지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정치 권력까지 차지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토지 귀족(봉건 영주)에서 상업 귀족(부르주아지)로 바뀌면서 파당, 음모, 폭력이 난무한다. 이것이 이 시대를 말해주는 역사이다.
(여기에 맞추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의 이면에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욕망도 있었다.
특히 학문과 예술에서
이태리의 피렌체 메디치가의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이로서 부르주아지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토지 귀족에서 상업 귀족으로 권력 이동이 나타났다. 민주사회였던 피렌체는 파당, 음모, 푝력들이 난무하면서 권력 투쟁이 심했다.
메디치의 대표 인물은 코시모 이고, 그는 학문, 철학, 예술에 지원함으로 이태리 인에게 좋은 선물을 했다.(예술에 지원한 이유는 로마의 옛 영광을 실현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정치적 의도도 깔고)
메디치는 성당, 수도원에도 많은 투자를 하면서 종교와 손을 잡았다. 성당,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많은 고전이 수장되어 있었으나 그때까지는 카톨릭 교리에 눌려 찬 밥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