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오사화(戊午士禍) 1
연산군이 등극하던 해 삼월 십육일의 일이었다. 성종이 승하한지도 어느덧
삼개월이 흘러 연산군은 선릉(宣陵)에 써서 올릴 지문(誌文)을 읽어 보고
있었다. 지문을 얼마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침 그 지문속에 판봉상시사
(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이 나오고 또 폐비에 관한 사실이
나왔다.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
"윤기무가 무엇하는 사람인데 대행왕의 지문에 나오게 되느냐?"
하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승지는 얼른 대답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판봉상시사 윤기
무란 폐비 윤씨의 친정 아버지로서 신왕 연산군에게는 바로 외조부(外祖
父)가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윤기무는 자기 딸 윤비가 왕비로 책봉되기 이전에 죽었으므로 연산군이 외
조부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만, 연산군에게 만약 그 사실을 그대
로 알렸다가는 연산군이 아직도 전연 모르고 있는 생모 윤씨에 대한 모든
비밀이 대번에 탄로(綻露)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신하된 몸으로 임금
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난처한 입장이었다.
승지는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된 채로 엎드려 있기만 했다. 그러자 연산
군은 답답하다는 듯 어탑(御榻)을 한 손으로 두드리며
"왜 대답을 못하느냐? 윤기무가 어떤 사람이냐?"
하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승지는 마침내 할 수 없다는 듯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윤기무는 폐비 윤씨의 아버지로서 윤씨가 아직 왕비되기 전에 세상을 떠
난 분으로 금상전하(今上殿下)의 외조부가 되는 분입니다."
"뭐? 윤기무라는 사람이 과인의 외조부라고?"
연산군은 깜짝 놀랐다.
"과인에게는 외조부가 따로 있는데, 어째서 윤기무가 과인의 외조부가 된
단 말이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이제는 비밀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승지
는 폐비 윤씨의 비밀을 연산군에게 낱낱이 다 말하고야 말았다.
"여쭙기 황공하오나 전하의 생모는 따로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아직 어리
셨을 때 선왕께서 전하의 생모님에게 폐위의 분부를 내리셨는데, 그때 선
왕께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는 특명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인의 생모는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이미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승지는 폐비 윤씨가 약사발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차마 알리지 못했
다.
"으음--."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에 땅이 꺼질 듯
한 한숨을 쉬었다. 연산군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눈 앞이 캄캄하여 그날
부터는 수라도 들지 않고 슬퍼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인수대비를 찾아뵈고 생모 폐위의 경위를 물어보았다. 인
수대비는
"선왕께서 왕세자의 생모에게 폐위의 분부까지 내리게 되었을 때는 본인에
게 그만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하고 암암리에 생모 윤씨에게 좋지 못한 행실이 있은 듯이 말했다.
'나의 생모에게 반드시 무슨 잘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어머니가 아니더냐..'
연산군은 그날부터 생모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
각을 했다. 자기의 생모 윤씨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필경 사헌부
(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이나 홍문관(弘文館)의 유생들이 소위 칠거지악
(七去之惡)이니 뭐니하는 유학의 이론으로 임금께 자꾸만 상소(上疏)질을
하여 마침내는 부왕도 어쩔 수 없이 폐비시킨 것이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짐작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연산군은 유생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
다.
"이 씹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앙심을 먹은 연산군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어려서부터
자기에게 잔소리만 헤오던 조지서 선생이었다. 조지서! 모든 유학자들이
조지서 선생같이 밉기만 했다.
그때 유학자들은 대개 김종직(金宗直)이란 사람의 제자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간(大諫)에 이른 사람들이 많았다. 성종 때에 폐비 윤
씨를 옹호한 사람도 그들이었고, 연산군을 가르친 이도 모두 유학자들이었
다.
김종직은 조선 유학계(儒學界)의 사표(師表)로 비록 야인(野人)으로 있을
때에도 그의 일거일동은 당시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어, 선왕 성종은 그를
일부러 서울로 불러 올려서 형조판서(刑曹判書)의 벼슬을 시킨 일까지 있
었다.
유학자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따른다하여 모든 것을 중국에 의뢰하고
중국을 모방하기에 힘썼다. 특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
한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 사상이었다.
만약 임금이 유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죽음에 이를 지
라도 기어이 그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여야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임금
이 듣지 않는다고 그만두어서는 충성이 아니라고 믿었다.
특히 이러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소위 삼사(三司)라고하여 사헌부, 사간
원, 홍문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청백
하고 학문으로나 인격으로나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
다.
이런 까닭에 임금도 이 사람들의 말이라면 꺾지를 못했고, 동시에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대신들보다도 이 사람들의 의견을 더 많이 참작하
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유학자들을 연산군은
가장 미워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유자광(柳子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세조대왕(世祖大王)
시절에 이시애(李施愛)를 정벌함으로써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 장수와
함께 나라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허나 후에 강순과 남이는 원훈(元勳)이 되고 유자광은 차훈(次勳)이 되었
다. 유자광은 그 점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 사회제도는 첩의 아들 즉 서자
(庶子)는 아무리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는 재주가 있더라도 행세할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바로 유규(柳規)라는 사람의 첩(妾)의 아들이었던 까닭에 차훈에
라도 들게 된 것은 세조대왕이 그의 공이 크다하여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
이었다.
유자광은 은근히 남이를 시기하였다. 강순은 나이도 많고 군사에 대한 경
험도 많은 소위 원로(元老)격인 만큼 원훈이 되더라도 나무랄 점이 없지
만, 남이로 말하면 자기보다도 나이도 어리고 재주도 부족한데, 또는 이번
싸움에 자기의 활약으로 남이의 이름이 드러났는데 지위가 자기보다 위요,
상을 받는데도 자기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이 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이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격하여 그 흥청대는 꼴을 유자광으
로서는 눈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어디까지나 남이가 그렇게
된 것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문벌(門閥)이 좋아 출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손자요, 세조대왕을 도와 혁명에 공을 세
운 권남(權擥)의 사위인 것이다. 당시의 사회제도로 남이에게는 유자광과
같은 서자(庶子)쯤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남이를 사랑하고 아껴주던 세조대왕이 돌아가고 예종(睿宗)이 임금
이 되었다. 예종은 남이가 태종대왕의 외손자로 대궐 안에서 모두 떠받치
는 사람이지마는 공주와 연애 사건이 있은 후로는 남이를 몹시 괘심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남이 장군이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는데 그날 밤 혜성(彗星)이 나
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고있
는데, 남이는 그것은 [除舊布新之象] 즉 옛 것을 없이 하고 새로운 일이
나타날 기상아라고 말했다. 옆방에서 이 말을 들은 유자광은 예종에게 달
려 나아가 이번 혜성을 보고 남이가 한 말은 역모를 경영하는 사람의 말이
라고 모함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이를 좋게 여기지 않던 예종은 곧 남이를 잡아다가 극형
을 내려 죽여버리니, 남이는 순전히 유자광의 고자질로 인하여 죽었던 것
이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유자광이 임금에게 고자질한 것이 나쁘다고
소인(小人)이라고 했다.
김종직도 유자광을 "치사한 새끼"라고 욕했다. 하루는 김종직이 함양군수
(咸陽郡守)로 있을 때 동헌(東軒) 누마루에 유자광의 시(詩)가 현판에 걸
려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있는 동헌마루에 유자광이 같은 소인의 시를 걸
어둘 수 없다하여 그 현판을 당장에 떼어내려 불을 질러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풍문으로 들은 유자광은 내심 크게 분개했으나 감히
김종직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속으로만
"흥, 어디 두고 보자!"
하고 앙심을 먹고 앙갚음의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 후 김종직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다가 당시의 왕세자인 연산군의
눈 모양이 사나움을 보고 그가 암만 해도 장차 나라에 큰 일을 저지를 인
물이라하여 자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다가 성종 이십삼년 팔
월에 세상을 떠났다.
유자광은 김종직이가 죽었으니 이제는 그의 제자들에게라도 앙갚음을 해야
겠다고 암암리에 계획했다.
이때 김종직이가 가장 사랑하면 제자 김일손(金馹孫)이란 사람이 사관(史
官)으로 있었다. 사관(史官)이란 곧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즉 그날 그날
대궐에서 일어난 일이나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벼슬을 말함인
데, 지금 우리가 조선실록(朝鮮實錄)이니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니 하는,
그러한 종류의 역사책들이다. 따라서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史草)는 어
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써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이 이것을 함부로 볼 수
없고 임금도 자기 시대의 사초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2
성종이 승하하고 신왕 연산군이 들어 앉은지 얼마 아니하여 김일손은 사관
을 사직하고 이극돈(李克墩)이란 사람이 성종 실록을 편찬할 사국당상(史
局堂上)이 되었다.
이극돈이 사국당상이 되어 선왕 때의 사초를 읽어 보니, 그 사초 중에는
놀랍게도 이극돈 자신의 불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 일찍이 이극돈이가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정희왕후(貞
喜王后) 즉 세조대왕비 윤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국민이 경조(敬吊)의
뜻을 표하여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특히 이극돈은 지방장관으로서 관기
(官妓)를 불러 연락(宴樂)을 한 것은 풍교(風敎)에 매우 어그러지는 일이
라는 내용이었다.
이극돈은 그 사초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만약 그 기록을 그대로 둔다면 오
명(汚名)을 천추에 남기게 될 것이므로, 이극돈은 곧 김일손을 찾아가서,
사초에서 자기에 관한 대목을 좀 고쳐 줄 수 없는가 하고 간청하였다. 그
러나 강직한 김일손은 이극돈을 책망하여
"그대도 사관이 아닌가? 사관은 사실 그대로 쓰는 것이 직책이 아닌가?
그대가 사관이 아니라면 혹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관으로서 어떻
게 한 번 사초에 씌어진 것을 고치라고 하는가?"
하고 단단히 타일렀다.
이극돈은 그의 위엄있는 말에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났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분개하여 언제든지 김일손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극돈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유자광이 김일손 등에게 깊은 원한
을 품고 있음을 알고 마침내 유자광을 찾아갔다. 유자광도 일찍이 김종직
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는지라 그의 제자인 김일손에게 평소의 원한을
풀어 볼 생각에서 이극돈과 함께 그들에게 복수할 방도를 강구했다.
유자광은 이극돈에게
"김일손 등에게 복수할 방도를 세우자면 내가 그 사초를 한 번 읽어봐야겠
소."
하고 말했다.
원래 사초는 임금도 마음대로 못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극돈은 김일손에
게 복수할 생각에만 눈이 어두어 유자광에게 사초를 보여 주었다.
유자광이 그 사초를 읽어본즉 세종대왕(世宗大王)에 대한 기록에서 세조
(世祖)를 비방하는 대목이 많았다. 즉 세조가 한 번은 자기 아들 덕종(德
宗)의 후궁(後宮)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라든지, 또 후전곡(後殿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듣고 세상일을 근심한 것
이라든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가 죽은 것을 사절(死節) 즉 절
개를 위하여 죽었다든가, 또는 성종 때 일에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
응대군(永應大君) 부인 송씨(宋氏)가 군장사(窘長寺)에 가서 설법을 듣다
가 시비(侍婢)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학조(學祖)라는 중과 정을 통했다
는 등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유자광은 이것을 보고 노기를 띠어 이대로 있을 수 없다하여 곧 노사신(盧
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 중신들을 찾아 보고
"당신들은 세조대왕에게 사랑을 받은 중신들인 만큼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묵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충동질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중신들은 이것을 임금께 알린다면 당장 큰 사건이 벌어질 것
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한편 알고도 잠자코 있으면 지정불고죄(知情
不告罪)라는 중대한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할 수 없이 임금께 고발
하게 되었다.
연산군 사년 칠월 초하룻날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등은 차비문
(差備門)으로 나아가 임금께 비밀한 일을 여쭙겠다고 청했다. 중신들이
임금에게 비밀한 일을 여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都承旨) 신수근
(愼守勤)이가 부랴부랴 마중을 나왔다.
"대감들께서 어떻게 이렇게 함께 오셨습니까?"
도승지 신수근이가 묻자 유자광이 얼른 신수근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뭐라
고 한동안 소곤거렸다. 도승지 신수근은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연신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광이 속삭이는 내용은 이
미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손을 비롯하여 선비들을 없애버리자는 유자광
의 말에 신수근이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도승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비(妃) 신씨(愼氏)의 원척(遠戚)이었다. 그가
도승지로 임명될 때에 대간(臺諫)들은 만일 신수근이가 도승지가 되면 외
척(外戚)이 권세를 휘두를 우려가 있다하여 그를 극력 반대했었다. 이런
관계로 신수근도 유신(儒臣)들인 대간들에게 앙심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신수근이 유자광의 속삭임을 듣고 앞장 서서 중신들을 곧 대궐 안으로 인
도했다.
연산군은 유자광이가 늘어놓은 말을 듣고 노기가 충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웁기 짝이 없던 유생들이다. 가뜩이나 미웁던 판에, 사초에 세조대왕에
게 대한 추문까지 기록하였다니 연산군의 노여움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
랐다.
연산군은 곧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 도사(都師) 신극성
(愼克成) 등을 경상도 청도(淸道)로 보내 김일손을 붙들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칠월 십일일에는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궐 안으로 가져
오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때 이극돈은 그것을 전부 드린다면 다음날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른
대로 쓸 사람이 없을 것이라하여 김일손이가 쓴 사초 중에서 왕실에 관계
되는 부분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냈다.
김일손이 억울하게도 큰칼을 쓰고 서울로 끌려 올라오자, 연산군은 김일손
을 친히 국문(鞠問)할 생각으로 그를 수문당(修文堂) 앞으로 끌어내게 하
였는데, 그 자리에는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신수근 등과 주서
(注書) 이희순(李希舜)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뜰 아래 큰 칼을 쓰고 엎드려 있는 김일손을 보고 연산군은 큰 소리로 호
령을 했다.
"네가 성종대왕의 실록을 기록할 때에 어찌하여 세조 때의 일까지 기록하
였는지 바른 대로 그 이유를 말하렸다!"
김일손은 이극돈이란 놈이 사초를 보고서 임금께 고자질을 한 것이라 깨달
았다. 김일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역사를 기록할 때에 전왕(前王)의 사실도 기입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입니다."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어
"그러면 세조대왕께서 예종의 후궁 권씨를 귀여워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불러보려고 했으나 권씨가 듣지 않았다는 일은 네가 꾸며 가지고 세조대왕
을 헐뜯으려고 한 것이 아니더냐?"
연산군의 국문에는 점점 살기가 감돌았다. 김일손은
"아니옵니다. 그것은 소신이 지어서 한 것이 아니라 권부인의 조카뻘 되
는 허경(許磬)이란 사람한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연산군은 점점 대노하여 곧 허경이란 자를 붙들어다가 물어보았다. 허경은
김일손에게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표정이 너무
나 험악한 것을 보고
"소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 김일손 대감이 정신이상이 생
겨서 그런 소리를 하나봅니다."
하고 부인하면서 모든 죄를 김일손에게 씌여버렸다.
임금이 직접 여러 사람을 불러 며칠 동안 계속 심문하는 동안 하루는 유자
광이 소매 속에서 책한 권을 꺼내어 연산군에게 보이면서
"이 책을 좀 보옵소서. 이 책은 김종직의 글이온데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이 넉넉히 세조대왕을 조롱하여 불충(不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증
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연산군이 받아보니 그것은 조의제(吊義帝)라고 쓴 글이었다.
"조의제? 조의제란 말이 무슨 뜻이오?"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물었다.
"조의제라 하옵는 것은 옛날 한(漢)나라의 의제(義帝)가 항우(項羽)의 손
에 시살(弑殺)된 것을 조상한다는 뜻으로, 김종직이가 그런 글을 쓰게 된
본뜻은 세조대왕을 항우에게 비유하고 의제는 단종(端宗)에 비하여 세조대
왕께서 단종을 죽이시온 것을 직접 쓸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돌려서 쓴 글
이옵니다. 한 번 친히 읽어 보옵소서."
이 말을 듣자 연산군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읽어볼 필요도 없겠소. 이제 김종직, 김일손 등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났
으니 그놈들
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하고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중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자광은 연산군이 노한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 원수처럼 여기던 김일손 등
유학자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에서
"김종직이나 김일손 등의 죄악은 무릇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는 불공대
천지수(不共戴天之讐)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을
조사하여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조정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안한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암암리에 다시 일어나 화란(禍亂)을 일으킬 우
려가 있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주장했다.
실로 무서운 주장이었다. 김종직과 김일손의 무리라면 삼사(三司)의 대간
(臺諫)들을 비롯하여 조정 요직에 허다히 있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
자는 것이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신들은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누구 하
나 이의(異議)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임금의 명령이 내렸다.
세조대왕으로 말하면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내란을 일으키려
고 한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역도逆徒)들을 박멸하고 종사(宗社)를 안정
시켜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김종직과 그 문도(門徒)들이
성덕(聖德)을 비방하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초에 무서(誣書)케 하였으니
그 죄는 대역(大逆)이라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내렸다. 즉 부
관참시란 그때 김종직이가 몇 해 전에 죽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서 그 시체
가 들어 있는 관(棺)을 깨치고 시체의 허리를 베는 형벌이니 그것은 인생
으로서 최대의 극형인 것이다.
칠월 이십육일에는 김일손 등의 죄를 정하였는데, 김일손, 권오복(權五
福), 권경유(權景裕)는 대역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이목(李
穆), 허경 등은 참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 김종직의 제자, 친구 등은 형장
(刑杖)을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로써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으로서 이번 혹화(酷禍)를 면한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연산군의 뜻을 거스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삼사의 대
간들이며 그밖의 유학자들이 임금의 하는 일에 대하여 걸핏하면 상소질하
기가 일쑤이더니 이번 무오사화가 있은 후부터는 누구 한 사람 감히 임금
이 하는 일에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제 연산군은 마음 놓고 자기의 생각나는대로 무슨 일이든 행할 수가 있
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