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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케 하는 직분
고후 5:11-21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1-21 / [화해의 임무]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언제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12) 우리가 또다시 새삼스럽게 자랑을 늘어 놓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우리의 의도가 바르고 성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좋은 무기를 제공하려는 것뿐입니다. 이 무기가 있으면 불성실하고 진실하지 않은 설교자들을 대항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13-14) 자신의 일을 이렇게 늘어놓는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들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 과거에 살아오던 옛 생활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15) 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6) 그러므로 세상적인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나 역시 과거에는 그런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단순히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18) 이 새로운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과 화해하시고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를 지우셨으며 그 대가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부정적인 인간 경험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소명은 화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를 위한 촉매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11-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고후 5:1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이외에는 바울에게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한사코 그 길을 걸어갑니다.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16-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거친 행동이 순화되었다거나 말씨가 세련되게 변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 믿지 않아도 가능한 일들입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일어난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근본이 새롭게 창조된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18-21) 화목보다는 화해라는 단어가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은 단순히 서로 뜻이 맞고 정답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지만 화해는 불화했던 상황이 해결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전제합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우리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과의 분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화해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18절, 19절, 21절에서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화해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알아보고, 놀라워하고, 찬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야말로 인생 실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이 말하듯이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인생에도 실패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적 용 : 예수와 하나 된 사람은 인생의 실패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좋고,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면 좋고,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그 가난한 삶에 이미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일군을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람들 가운데 사신이 되어 하나님의 의를 전함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들과 일꾼들이 이와 같이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스스로를 살피고 또한 서로를 살핀다면 비로소 교회는 하나 되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린도후서 5:11-15 / 손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 사도의 소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소원은 할 수만 있으면 속히 자기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직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데 힘썼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게 될 그 영광을 소망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썼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주의 두려우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앞의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만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주의 두려우심’이란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대하여 바울이 가졌던 경건한 두려움, 즉 경외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거하든지 떠나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울 사도가 가졌던 그 두려우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실 우리 주님을 경외하며, 거하든지 떠나든지 곧 죽든지 살든지 오직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 말씀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한 주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자기만족과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사셨습니까? 우리가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주의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시편 90:7-12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진노 중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분노와 두려움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의 분노와 두려움을 아는 자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두려움을 바울 사도가 안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장차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우리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알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권하고 지금 우리를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보면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양심에 알려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떠난 뒤에 고린도교회에는 거짓 선생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자랑하며 바울 사도를 비난했습니다. 곧 바울의 사도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을 변개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 사도가 지금 다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3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새 번역으로 보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스스로를 치켜 올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고 미친 것이요,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다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곧 유명한 자들의 추천서를 내밀며 자신을 대적하며, 자신이 전한 복음을 부정하는 거짓 선생들에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5절 말씀에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2:9절 말씀에도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절 말씀에도 보면 바울 사도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또한 고린도후서 4:7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에게만 있음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바울 사도가 이처럼 능력의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약할 때에 주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에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10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약하여 지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내가 강해지고, 잘 되고, 성공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주님을 믿는 표시로 주님의 능력을 내 손에 쥐고서 행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저주를 받는 것이 눈앞에 보이고, 누가 내 말을 들으면 복을 받는 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도 다 들어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과 저주를 당근과 채찍으로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외모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복을 받았고, 누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말을 듣고서 그들에게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들도 역시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믿다가 잘 못 믿어서 자식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거나, 사업에 실패 했다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마귀에게 매여 일생 동안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이런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이런 자들이 아닙니까? 이처럼 일생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 인생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14-17절 말씀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으면 안 돼! 실패하면 안 돼! 이것이 두려움인데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것은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이나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판단은 외모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였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로 차 버리는 것이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와 부족을 아는 사람은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왜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지 않도록 권면하는지를 알겠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엄중하게 권고하는지 바울 사도는 삼중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와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왜 바울 사도의 말을 버리고 외모를 자랑하는 거짓 선생들에게 끌리는 것입니까? 그들이 사욕을 좇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욕을 좇을 때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울 사도는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떻게 세상의 영광이 아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도 역시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히 특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을 만나고 나니 배설물에 불과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볼 때는 여전히 저주받아 죽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은 바울의 실력이 아니라 바울을 사랑하셔서 만나주신 주님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줄 수 없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4-15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권한다’는 것은 강제로 권한다는 말인데 난 하주에 보면 ‘끄는 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에 있다 받아가라’는 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받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휘어잡는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게 끌리듯이 우리의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사랑입니다.
주의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신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멸시함을 받은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자기를 위하여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직 주를 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의 사랑에 강권된 자는 왜 자기를 위해 살 수 없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써 커다란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삯이 치러졌습니다.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에 강권된 자는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사랑에 강권된 후 구주이실 뿐 아니라 심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도 온전히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이 주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그들을 사랑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된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산 자를 위하여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산 자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떠합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주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삶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삶이라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을 맛보게 되면 우리는 더욱더 그 사랑을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가운데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죄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종노릇하는 삶을 그만 두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강권하시는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린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에 강권될 때에 자기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주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 사도는 참된 사도였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주님의 강권 하시는 이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그 강권하시는 사랑에 사로잡힌바 되어 온전히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16-17 / 손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14-15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고후 5:14-15).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아 이끄시기에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임한 사람은 이제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고, 오직 주를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된 자가 어떤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된 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1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육신의 잣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잣대로 본다는 것은 범죄 한 이후부터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죄악된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외모로 보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의 모습을 보면 그는 하나님이 두렵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나무 그늘 아래 숨었습니다. 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렸습니다. 이것이 범죄 한 이후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을 치장하고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하다는 것은 멀리하고 선하다는 것으로 채워서 자신을 가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율법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가장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 지키려고 아예 도시를 떠나서 광야의 동굴로 들어간 에세네파도 있었습니다만 실제 생활 속에서 율법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에 보면 율법을 잘 지키면 세상의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8:13-14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이렇게 남의 지배를 받는 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반성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이 남은 자들로서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 곧 다윗과 솔로몬시대와 같은 그런 왕국을 만들어 온 세계가 그들에게 굴복하는 그런 나라를 기대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런 말씀을 예언해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사모하며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메시아가 나타났지만 율법을 잘 지킨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눈에는 예수가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고 성전을 무너뜨리는 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고 정죄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잣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것입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한 자요,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자는 자들을 잡아 오기 위해 제사장들로부터 체포명령장을 발부받아 원정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행 9장).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잣대로 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까지 바울 사도는 육신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4-9절 말씀에 보면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4-9).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하도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베냐민 지파 사람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 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을 보아도, 예수님을 보아도 육신의 잣대로 보면 그는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에서도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이 왔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새로운 피조물을 이야기 하면서 육신의 잣대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 5:12). 고린도교회에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수사학적 솜씨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의 추천서와 사역의 댓가로 받는 봉급 명세서와 윤리적, 영적 혈통과 황홀한 영적 경험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자신들의 외모를 자랑하며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부정하였습니다. 이들의 악영향으로 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자신을 자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사도의 직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고후 5:11). 그런데 이 말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이 또 자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자천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사도의 직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보면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 5:12).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천 하는 듯한 글을 쓴 실제 목적입니다. 즉 바울은 자기를 자천하기 위해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다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바울과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주기 위해서 자천하는 듯한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싸움도 바로 이 싸움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대로 보느냐 영으로 보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 축복과 저주, 행복과 불행을 육신의 잣대,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망한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은 사람입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도 다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외모를 바라본다면 지금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다시 창조된 사람만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믿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지만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지 그 외의 것은 모두가 다 헌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 영으로 나야 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이란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다시 만들어진 것을 영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8:40-43절에 보면 제사장의 규례를 말씀하는 것을 보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하나님 앞에서 하체가 드러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찌며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28:40-43). 이 말씀은 인간의 생식의 능력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의 피를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만 드릴 향을 만들어 향을 피워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30:34-3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왜 분향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향을 뿌릴 때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뿌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냄새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기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리는 것입니다. 결국 범죄 한 인간으로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안에서만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인 새 언약 안에 있어야만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여전히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것입니다.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아무리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 옷이며, 헌 부대인 것입니다. 헌 옷에 새 조각을 붙일 수가 없고, 헌 부대에 새 술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찢어지고 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후서 3:10-13절을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옵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의 주로 오셔서 각 사람을 그 선악간에 행한 대로 심판 하십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에 이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8절을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차 때가 되면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그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곧 불에 살라 없어질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삽니까? 그러고서도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내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심사는 늘 어디에 있습니까? 불살라 없어질 이 세상 것들에 있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에 굴복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자기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오래된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새로운 물건,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몸과 마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워지기를 위하여 애를 쓰고 노력을 합니다. 무언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지루해하고 권태로워 합니다. 그래서 취미생활도 이것저것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상품을 만들어도 새로운 상품을 자꾸만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것이 나오는 그 순간 이미 옛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4절을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없는데서 있게 된 것이어야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죽은데서 살아난 것이어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로 행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