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어린이’ 베토벤
세상에 책은 많지만 읽을 만한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몇 달 동안 베스트셀러의 선두를 지키던 유명한 책도 일단
그때만 지나면 영영 읽혀지지 않는 한심한 책이 되어 망각의 늪 속으로
침전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가을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져 다시는
생기를 되찾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뭇잎은 일단 떨어지면 그만인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때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한창 세월이 흐르고 보면 ‘그런 사람도 있었던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화배우나 가수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소위 정치인, 기업인 하고
날리던 사람들도 한번 떨어져 밟히면 그만입니다.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이름이 좋게
훌륭하게 남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
나를 감동시킨 불과 몇 권 안 되는 책 중의 하나가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이고, 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별들 가운데서 내가 지금도 우러러 보는
빛나는 별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베토벤은 과연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일제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베토벤이 어떤 계기로 <달빛>을
작곡하게 되었는가 하는 데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어떤 장님 소녀를 위해 즉흥적으로 지었다는데, 그 소녀의
피아노 앞에 앉아 아름답고 고요한 달빛 아래 그는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밝은 달빛, 피아노, 그 앞의 ‘작은 거인’
밝은 달빛, 피아노, 그 앞의 ‘작은 거인’. 그 방 어디엔가 앉아
그 선율에 도취되어 있었을 눈먼 예쁜 소녀!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또다시 있을 수 있으랴!
음악 해설가는 그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이고 도저히 그렇게
될 수가 없었으리라고 찬물을 끼얹지만, 그 에피소드가 사실이건
아니건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일단 그렇게 마음속에 그려진 장면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과연 천재적 머리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던 때 그것도 일제 강점기였지만 음악 교실의 벽에
죽 걸려 있는 음악가의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물론
베토벤의 얼굴이었습니다.
빗으로 빗었다기보다는 손으로 쓰다듬어 뒤로 넘긴 것 같은
파도치는 머리카락, 그 위엄 있는 얼굴의 굵직한 선, 왜 그런지
그의 초상화 앞에 서면 엄숙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와는 아주 다른 차원의 ‘초인(超人)’을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예비지식이랄까 선입견이랄까 하는 것을 가지고 나는 롤랑의
그 짧은 전기를 몇 번씩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나는 롤랑이 그 책의 서문에서 강조한 ‘정신의 위대함’이라고 한
그 말을 그토록 감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질식할 것 같은 물질문명의 이 탁한 공기 속에 불어온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이 곧 베토벤이라고 <장 크리스토프>의 저자는 자신 있는 한
마디를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롤랑의 그 책은 나로 하여금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작곡가로보다는 한
위대한 인간을 이해하게 하였고, 그런 차원에서
그를 끝없이 존경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나는 대학 2~3학년의 젊은이였는데 ‘정신의 위대함’이라는
그 말에서 받은 충격적인 기쁨은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가 일찍이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 뛰누나.
어렸을 적에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다네.
나이 들어 늙어도 그러하기를. 그렇지 못할진댄 살아 무엇하리오!
자연의 시인 워즈워드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 한 틀을 보고
어려서 크게 감동하였던 모양인데 그 감격이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었지만 무지개만 보면 그 감격이 되살아나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만일 무지개를 보아도 전혀 감격을 하지 않는
노년이 오면 어쩌나 하고 근심하면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대단한 한 마디를 던져 순수한 시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도 ‘영원한 어린이’였고 그런 감격으로
그가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면 범속한 우리들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그런 순수한 감격이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물질주의 때문에 질식할 지경인 이 방 안의
오염된 공기를 몰아내고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싶은
강한 의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웅>을 작곡한 정신의 영웅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아마 수백 명의 음악가들의
생애와 업적을 샅샅이 뒤져 알고 있겠지요.
보통 음악애호가라는 사람들은 그래도 수십 명의 음악가들에 관하여
비교적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밖에 모릅니다. 베토벤은 음악가에 대해서 내가 아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흉상, 석고상을 비롯, 초상화도 수십 장을 모아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서 공부하던 때 구했던 그의 흉상 하나는 피아니스트
신재덕씨 댁에 불이나 모조리 타버렸을 때 그분 마음이 하도
허전할 것 같아 보내드렸습니다.
지금도 그것을 매우 잘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만 베토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야 더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의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독일 그라마폰이 그의
작품 전집을 음반에 수록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을 때
내가 자진하여 예약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도 베토벤에
대한 나 자신의 정열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영웅>을 작곡한 그가 곧 영웅이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유럽 천지를 한바탕 뒤흔들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영웅이 아니고,
외로운 예술의 가시밭길을 끝까지 가면서 몸과 마음의 아픔을
이겨내어 마침내 삶을 승리로 이끈 베토벤 같은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정신의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가는 신나는 자리, 지휘자
살다 지치거나 낙심될 때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1813년 7월 9일 르마로아(Lemarois)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하가 내게 보낸 편지에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지만 ‘
불가능’이라는 그 낱말은 프랑스어는 아닙니다.”
철이 없을 때는 그런 말이 대단하게 들렸지만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은 이 세상에 불가능이 많고
또 마땅히 안 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면 된다’ - 그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말인가!
물론, 무슨 일이나 하면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렇게 오해될 가능성이 많은 말입니다.
어렵지도 않은 일이 안 되고, 꼭 돼야 할 일이 되지 않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야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나폴레옹 같은 한 시대의 풍운아는 일생에
한 번도 철이 들어 보지 못하고 허영심에만 부풀어서 살다
가버린 한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토벤은 1804년에 완성된 그의 작품 55번에다 ‘ 에로이카’라는 이름을 붙여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당시 위세도 당당하게
대통령 자리에 앉았던 젊은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에게 바치려 했지만,
그가 5월에 대관식을 올리고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실망하고 매우 분개하여 그 악보의 겉장을 찢고
그 악보를 마루에 내동댕이쳤다고 전해집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음악가의 뚜렷한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 통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고난에 싸인 우리 삶에 언제나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평생 프러시아의 군인처럼,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만 자면서 이른바 라일강의 기적의
기본자세를 가다듬게 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수상의 유일한
낙이 침대에 누워 담요를 뒤집어쓰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광경입니까!
나는 어쩌다 대학교수가 되는 길을 더듬어 대학교수가 되었고,
예기치 못한 사정 때문에 들락날락하기는 했지만 이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으며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휘자가 되는 일입니다.
교향악단을 지휘해 보는 일!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 다음가는 신나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감격이 솟구치게 하는 위대한 영혼, 베토벤
무슨 악기이건 들고 무대 위에 자리 잡은 100~200명 되는
그 많은 ‘개체’들을 막대기 하나로 휘어잡아 모두 합심하여 ‘하나’의
아름다움을 창조케 하는 멋! ‘전체’ 때문에 단원 각자의 개성이
위축되는 일이 조금도 없이, 각기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되
바이올린은 첼로와 어울리고 나팔소리는 북소리와
조화를 이루니 기막힐 일입니다.
연습할 때는 몰라도 무대에 나서서 연주할 때는
복장이 또한 멋있어야 합니다.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기도 하기 때문에 지휘자의
옷차림은 무대에서는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람의 지각도 미를 추구하는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파자마바람으로 지휘하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 꼴은 차마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새학기부터는 다시 교단에 서서 강의하게 되었으니
대중강연을 하게 될 기회는 거의 없겠지만, 지나간 10년 동안
연평균 200회의 강연을 하면서 이 나라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고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강연의 요령이나
비결을 어디서 터득했는가 하면 명지휘가의 명지휘에서입니다.
모든 연주자들의 마음의 눈이 지휘자의 지휘봉 끝에 집중되듯,
청중이 수천 명일지라도 강연하는 사람의 코끝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도록 해야만 강연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강연의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렇게 못할 터이면
강연은 단념해야 합니다.
나는 가끔 베토벤이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만년에는 귀도 잘 안 들렸다는데 그런 불행을 딛고 일어나
오고 오는 세대의 수백억 가슴 속에 감격이 솟구치게 하는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 이름은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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