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6
8월18일[연중 제1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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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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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KSrhKp6dnQ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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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혼인은 성사입니다. 하느님 안에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이혼 앞에서 더욱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느끼셨던 보람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예수님 당신의 손길을 통해 치유되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생명수 같은 당신의 신선한 말씀을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감사하고 환호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예수님 역시 무척 기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오랜 악습과 죄에서 돌아서 회개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힘이 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크게 실망하시고 슬퍼하신 적도 부지지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니고 있던 완고함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리셨습니다. 특히 당신 수난과 죽음이 이제 바로 코앞인데, 끝끝내 당신의 강력한 구원 의지와 당신 백성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몰라주는 사람들의 완고함 앞에 그분께서도 굵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슬퍼하시고 눈물 흘리십니다.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조금도 몰라주는 우리의 냉담함과 완고함에 앞에 슬피 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못마땅해 하시는 완고함과 냉담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된 특징이었습니다. 사실 모세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혼생활을 지탱해나가기가 힘들 때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라고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한번 맺은 혼약은 절대로 갈라서서는 안 된다고 그토록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집요하게 떼를 쓰고 하다 보니,
아주 특별한 케이스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허락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확대해석해서 너무나도 당연히 이혼장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아전인수의 대가인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아주 강경하게 결혼과 관련된 불변의 원칙을 재천명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오 복음 19장 6절)
예수님 시대 당시 ‘이혼장’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신명기 24장 1-4절에 근거한 것이지요. 거기 제시된 율법에 따르면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쫒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장을 손에 쥔 여인은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혼장은 또한 재혼을 위해 필요한 서류였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문란한 결혼생활, 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이혼장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남용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이 관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혼장은 점점 더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란 원래 아내의 불륜만을 지칭했지만, 후에는 그에 대한 적용이 더 확대되었습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아내, 남편과 말다툼 하는 아내, 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아내, 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한 아내, 다른 남자와 말을 하는 아내, 고기를 지나치게 바싹 구운 아내, 국을 끓였는데, 간을 제대로 못 맞춘 아내, 가정사를 남에게 퍼트린 아내 등, 별의 별 이유를 들어 아내를 내쫒게 되었습니다.
이혼장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집 센 기질, 굳어진 마음, 문란한 생활, 끝도 없는 타락 때문에 겨우 예외를 허락해 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입법자로서의 모세는 당연히 이혼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히브리 민족의 윤리적 타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돌아봅니다. 숱한 이혼들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합니다. 물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결혼생활보다는 이혼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예외적인 규정을 정해 이혼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억할 것은 혼인은 성사입니다. 하느님 안에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이혼 앞에서 더욱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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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ffWEfcaz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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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은 이에겐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혼에 관해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주신 성경 말씀을 들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그들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라며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성경 말씀이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법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새롭고 완전한 법이 와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알았던 말씀이 완전하다고 하며 새로운 법을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경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도로의 표지판과 같습니다. 지금의 나의 처지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나 자신을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을 멈춥니다. 두 살 이후로 자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라면 몸은 자랄 뿐 영혼은 두 살에 머뭅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완고해져서는 안 됩니다.
오노다 히로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 정보장교였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필리핀 전역) 막바지인 1944년 겨울, 필리핀 마닐라 근처의 작은 루방섬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250명의 훈련되지 않은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오노나 소위는 미군의 루손섬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한 후,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8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는 필리핀으로 떠나는 오노다 일행에게 “항복은 물론 옥쇄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버텨야 한다. 반드시 데리러 오마. 병사가 한 명이 남더라도 야자수 열매라도 따 먹으며 끝까지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항복은 물론 옥쇄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듬해 봄 미군이 상륙하면서, 화력에서 밀린 일본 주력군은 패퇴하였습니다. 오노다의 고집으로 부대는 불리한 상황에도 전투에 나서야 했고 첫 전투에서 207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43명은 산속으로 흩어졌습니다. 미군이 살포한 삐라 전단을 읽고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게 된 나머지 20명은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미군의 전단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던 시마다 오장과 고즈카 상등병을 데리고 유격전을 계속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봄, 오노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일찍이 투항했던 오노다의 옛 부하들이 필리핀으로 가서 섬 전체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오노다, 오노다! 전쟁은 끝났으니 숲에서 나오거라. 어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오노다는 그들의 외침을 분명하게 거듭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간사한 미국군이 자신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까지 와서 전쟁이 끝났다고 외쳤으나 가족까지 미군에게 속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얼마 후 오노다 일행은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여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격전을 전개한 것이었지만, 실상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한 공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사람 30명을 죽이고 100여 명에게 다치게 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이라 괜찮다고 여기며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필리핀 정부는 토벌대를 섬으로 보냈고 1954년에 시마다 오장이 토벌대에게 사살되고 1972년에는 고즈카 상등병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개의치 않고 단신으로 유격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필리핀의 정글에서 행방불명된 오노다 소위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직접 찾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74년 루방섬을 방문한 스즈키는 결국 오노다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즈키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2차대전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오노다를 설득했으나, 오노다는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투항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일본 언론에 오노다 소위의 아지트를 공개했고 일본 열도는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오노다 소위의 귀환을 위한 작전이 펼쳐졌으며 제대 후 도서 판매상이 된 직속상관 타니구치 소령을 겨우 찾아내어 타니구치가 항복 명령서를 가지고 필리핀 루방섬에 있는 오노다를 만나 투항을 명령했습니다.
투항 당시 오노다는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99식 소총을 정비해 놓고 500여 발의 탄환과 대여섯 개의 수류탄도 가지고 있었으며 칼은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등 장비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 국민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은 오노다에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라며 열광했고 극우파들은 오노다야말로 옛 일본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려 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노다의 모든 범죄를 사면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노다는 현대화된 일본이 미국의 속국처럼 보여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고 1975년 브라질로 떠나서 목장을 경영했으며, 이듬해에 결혼하였습니다.
1984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오노다 자연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루방섬을 다시 찾아가 현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참조: ‘오노다 히로’, 위키 백과]
오노다가 종전되었다는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전쟁이 종식되면 들통나고 벌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일탈을 즐기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말씀으로 매일의 등불을 삼지 않을까요?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거룩함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 목적지입니다.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니 표지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와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고 심판도 기다림을 알 때 우리는 방향을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표지판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 표지판은 말씀입니다.
매일 하루 하나의 말씀을 찾아 나의 새로운 발걸음을 인도하게 합시다. 저는 본당이나 지인들 사이에서 성경이나 하.사.시, 혹은 다른 좋은 영성 서적이라도 하루에 한 문장씩 예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말씀을 찾아 카톡으로 공유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경험으로 큰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매일 말씀을 찾아 오늘의 나에게 적용하는 삶이 내가 목적 있게 사는 사람임을 증명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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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결국 끝까지 해내는 사람의 비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결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유가 합당하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은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맺어주셔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러면 어째서 모세는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율법을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것에 맞는 음식을 준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결국엔 끝까지 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결혼은 끝까지 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끝날 때 변한 나의 모습이 목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습니다. 분명 그 두 분 어르신들이 살아오면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많은 실수도 서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갔기에 많은 분으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비도 죽고, 조조도 죽고 손권도 죽었습니다. 세 나라의 건국 영웅들이 다 죽었지만, 중국은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비의 ‘제갈량’과 조조의 ‘사마천’만이 마지막 두 영웅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항상 제갈량에게 패했습니다. 당대 제갈량을 이길 영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제갈량과 겨루어 승리다운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마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도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 가지 길로 끝까지 가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여기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도에 실패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일등이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뛰어 결승점을 통과하면 그것이 이기는 것임을 압니다.
사마의와 제갈량의 전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시간만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의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 선물을 보냅니다. 그 비단으로 싼 상자 안에는 여인의 장신구와 옷이 들어있었습니다. 여자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당당하게 한 판 붙자는 말이었습니다.
사마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 상자를 들고 온 군사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군사는 제갈량을 자랑하였습니다. 음식도 반밖에 안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며 업무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생각했습니다.
‘얼마 못 가겠군!’
결국, 천하의 제갈량은 54세에 과로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통일의 주인공은 사마의가 되었습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것보다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것만이 좋다는 것을 안다면 게으를 수 있습니다. 열매는 맺히겠지만 볼품없을 수 있습니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가정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 끝까지 가기만을 고집한다면 그 결혼생활에서는 끝까지 견뎌낸 상대만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서 안 되는 것은 ‘소명’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결혼의 주체가 자신이라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신 것이니, 당연히 끝까지 가야 하면서도 ‘잘’ 가야 합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갔다 오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여기고 다른 곳을 헤매다가 다음 날 들어온다면 비록 일은 했으나 칭찬을 듣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을 하거나, 누구와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나에게 맡겨진 ‘소명’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 앞에서 그 상대가 주님께서 선택하신 상대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있으면 결혼하고, 일단 결혼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마의가 관직에 올라도 될 나이가 차자 조조가 그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그 벼슬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김정은이 내리는 관직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성격을 알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 흉내를 냈습니다. 이를 믿지 않은 조조는 사마의를 염탐하게 시켰고 사마의는 몇 년 동안이나 중풍 병자 흉내를 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도 이 정도면 하늘의 뜻이라 여겨 결국 받아들입니다. 사마의는 이후 몇 대의 조조 후손을 임금으로 모시며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결과도 좋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습니다. 시련을 잘 견뎌냅니다.
‘끝까지 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다.’ 이 두 믿음만 있다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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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3-12: 남자는 제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절) 바리사이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께서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태 5,31-32 참조). 예수께서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4-5절)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시며, 남자는 아내와 결합하여서 한 몸이 되라고 분부하신 것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혼인으로 하나가 된 부부는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더 큰 결합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절)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둘을 결합하셨다. 하느님께서 결합하신 이 결합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하고 명령하였습니까?”(7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8절) 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9절) 불륜이란 배우자가 아닌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불륜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포함되며, 우상숭배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불륜으로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녀로 표현하는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제 발로 이단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절) 주님은 이 말에 동의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11절)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12절) 이들은 온전한 남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12절) 즉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워서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갈림 없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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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희 세대는 ‘이문세’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는 “광화문 연가, 소녀, 그녀의 웃음소리뿐, 휘파람, 사랑이 지나가면, 옛사랑,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오늘하루’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밥 한 그릇 시켜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 창가에 비추는 건 나를 보는 내 모습, 울컥하며 터질 듯한 어떤 그리움, 그리운 건 다 내 잘못이야, 잊혀질 줄 알았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다시날걸 그땐 알 수 없었어.” 저는 가사 내용 중에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저녁 식사 전에 성당에 모여서 늘 하던 것이 ‘양심성찰’이었습니다. 양심성찰을 하면서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받는데 익숙하다 보니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내 몸 아픈 것은 신경 쓰면서 이웃이 아파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나의 십자가를 남에게 맡기는 이기적인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사목정보’라는 잡지에서 ‘오늘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사제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신부님의 모습을 거울 속에 비추듯이 바라보았던 교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당 신축을 하면서 사제관이 없어서 편안한 아파트를 얻어드리려고 했는데 신부님은 굳이 상가 2층에 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매일 아침 상가 마당을 청소하였다고 합니다. 상가 주인이 무척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젊은이들에게는 유쾌하였고, 어른들에게는 공손하였고, 성가를 부를 때면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고 합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신부님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구두가 낡아서 비가 오면 신발에 물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우들이 주는 옷, 구두, 음식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외투는 20년은 족히 넘어보였다고 합니다. 얼굴이 검게 그을려서 오셨기에 좋은 곳으로 휴가를 떠난 줄 알았는데 시골 본가에 가셔서 종일 밭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따뜻한 마음의 사제가 임기가 되어서 다른 본당으로 떠날 때, 본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사제로서 자랑스러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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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19,3-9)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또는 고발할 명분을 찾으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31-32)
바리사이들은 그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와는 다른 대답을 하셨다고, 즉 앞뒤가 다르다고 비방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신명기의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즉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고발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의 배경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있습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요한이 헤로데의 이혼과 재혼을 비판했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4,3-12)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는, 헤로데의 이혼과 재혼은 정당한가, 아닌가? 라는 뜻도 들어 있고, 동시에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정당한가? 아닌가?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바리사이들은 헤로데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을 옹호하면서 헤로데를 비난했다고 고발했을 것이고, 반대로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시면, 예수님이 헤로데가 한 일은 정당하다고 말했다고 떠들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예수님에게 거세게 반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계셨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혼인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재확인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즉 ‘하느님의 성사’ 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은, “이혼하면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인용한 율법은 신명기 24장 1절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은, “그것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만든 규정일 뿐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하느님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라는 말씀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임시 조치였을 뿐이다, 또는 그것은 과도기의 규정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혼인의 신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던 때의 임시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수긍했는지, 아니면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해서 반감을 품은 채로 그냥 물러났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혼인과 이혼에 관한 ‘우리 교회의 대원칙’이고, 우리 교회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예수님의 법’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혼인이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나? 인간들이 마음대로 한 일인데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바로 그것을 식별하기 위해서 각 교구마다 혼인 법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인지, 아닌지를 개인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판단은 교회의 교도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사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혼인 법원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들과 증언들을 신중하게 심사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인지, 즉 유효한 혼인 성사였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이 아닌 일, 즉 성사로서는 무효한 일이었는지를 판단합니다.
<혼인 무효 소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소송이 제기된 혼인에 대해서, “그 혼인은 혼인 성사로 인정할 수 없으니 무효다.”라고 혼인 법원에서 선고를 내리게 되면,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그 혼인에서 풀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혼인 법원의 선고는 ‘이혼해도 된다.’ 라는 선고가 아니라, ‘그 혼인 성사는 무효다.’ 라는 선고라는 점입니다.
<혼인 무효 소송은 이혼을 허락받기 위한 소송이 아닙니다. 성사로서 적법하고 유효했는지, 아니면 불법적이고 무효인지를 판단받기 위한 소송입니다.>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했던 다음 말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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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낙원’이란 말은 ‘파라디시’, 곧 페르시아 왕궁의 정원을 일컫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든 식물이 풍요롭고 조화롭게 잘 자라던 그곳을 보고 에덴 동산 이야기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에덴’이라는 말은 남녀가 누리는 친밀한 기쁨을 일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녀들을 자리 잡게 하실 때 그들에게 낙원을 주고자 하셨을까요, 눈물과 통곡의 땅을 주고자 하셨을까요? 그 답은 ‘낙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낙원을 주시고 당신 계획을 알려 주실 때 사람이 어떤 길을 가기를 바라셨을까요? 남녀가 하나가 되어 사랑을 이루는 혼인의 길, 협력의 길, 완성의 길이 아니었을까요? 혼인 생활이 늘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혼인한 뒤 어느 순간 함께하지 못할 위기가 찾아오기도 할 것입니다. 함께함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뿐인 혼인 생활을 과연 하느님께서 계속 요구하시는지 묻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인간적 대답은 망설임 없이 이혼일 것 같습니다. 혼인 생활이 계명이나 법적인 문제로 귀결되면 바리사이들의 주장처럼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을 따지게 됩니다.(3절 참조)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보다 더 엄중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지키도록 명령하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본뜻을 그들에게 상기시키셨다고 합니다. 곧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절; 참조: 창세 2,24)라는 말씀입니다. 혼인은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정이 혼인 성소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진심으로 서로 아끼고 섬기며, 쾌락주의와 상대주의와 소비주의 같은 세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 사랑의 생생한 표징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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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충귀 베드로 대주교님]
인디안 종족 중에 아파치족이 있는데, 그들은 결혼하는 젊은 부부에게 이런 축시를 읽어 주면서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 하리라"
참 아름다운 축시인 것 같습니다. 살아온 모습들이 다르고 성도 다른데, 만나서 서로 지붕이 되고 서로 따뜻함이 되어 주며, 동행이 되고, 하나의 인생을 산다는 것, 외로운 인생길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입니다.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홀로 와서 다시 그분께로 돌아갈 때에도 홀로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이치인데 그 과정에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함으로써 태어나게 되는 생명체인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세상사 안에서 참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같이 각박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함께 할 수 있는 혼인은 참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혼자 살아가는 신부 입장에서 보게 되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 삶 안에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혼인이 많이 퇴색되어 감으로써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혼인을 하지만 스스로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외면하고 단절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단절해서 갈라서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나름대로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자세히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서로 내어주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으로 시작된 보상심리의 냄새가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지붕이 되어주기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그 지붕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따뜻함이 되어주기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따뜻함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동행이 되어주기 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나의 입맛에 맞는 동행이 되어주기만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참 추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그 아름답고 거룩한 것들이 인간 스스로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속을 떠보려고 이혼에 대해 물어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혼인의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에 대해 얘기해주십니다.
바리사이인들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의 혼인의 주체는 하나의 성에만 국한되어 있고, 다른 성은 하나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과 과오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시며 이성의 동등성과 일치는 바로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혼인의 일치는 인간에 의해 갈라져서는 안 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의 이혼의 모습을 보게 되면 남성의 이기적인 권리가 너무나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고,
오늘날의 이혼의 모습을 보게 되면 남성과 여성, 모두 서로의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적 권리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어디에도 하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있다면 자신의 감정과 이기적인 욕망만이 남아있는 것이죠.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할 혼인이 너무나 추접한 모습으로 서로에게 상처로만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남녀가 만나 이루는 사랑이 맺어지는 혼인에 대해 우리교회는 인간의 그 아름답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보전하기 위해 혼인법을 신자들에게 교육시키며, 혼전 혼인교리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혼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나아가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 있는 인간으로써 성숙되고 완성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거룩한 혼인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녀들에게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이어질 수 있도록 서로 가꾸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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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요셉 신부님]
<사제에게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혼인성사 강론>
사제에게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혼인성사 강론입니다. 그것은 결혼생활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결혼하는 부부에게 강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부터 이혼하는 부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하는 부부가 많아질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돈이 최고가 되어버린 황금만능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엠에프 시기에 이혼이 급증한 예가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의 실직과 박봉으로 인해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자 이혼하는 가정이 늘어났던 것이지요.
씀씀이를 줄이고, 무엇이라도 열심히 해서 살림을 꾸려나가기엔 사회적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할까요. 이혼율이 급증하는 이유를 개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국가의 역할이 미흡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혼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정들을 향한 국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개성이 강하고, 자유가 충만할수록 공동체가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종교의 위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그 말씀을 믿기에 자신부터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나’를 낮춤으로 인해 사랑이 높아지는데 어떻게 갈라섬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고아 수출 1위 국가가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임을 자녀를 가진 모든 어른들은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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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모세 율법을 근거로 하여 이혼을 쉽게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에는 ‘아내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거나 눈에 들지 않는 경우, 남편은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기 24장 1절-4절 참조)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이를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엄격하게 해석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이들은 사소한 이유라도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란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뜻을 밝히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따라 방종주의자 또는 엄격주의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도를 아시고 더욱 근본적인 혼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 참조)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게”(창세기 2장 24절)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곧 사랑의 구조로 만드셨습니다. 사랑의 구조란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랑을 주고자 할 때 받는 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 주고 받아들여 한 몸을 이루고, 죽기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혼인이 부부간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라면, 사제나 수도자들처럼 독신으로 사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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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자>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 ‘성격 차’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밀어붙이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됩니다. 혼인할 때 ‘즐거울때나 괴로울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합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1고린7,10-11)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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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사람은 우울증으로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형제 모두에게 있는 증상으로, 실제로 8남매 중에서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지만 모두 포기하고 조용한 산골에 들어가 홀로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다가 암을 판정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과연 이 사람의 삶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만 들으면 아마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평생 죽음을 떠올렸다고 하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지요. 하지만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이 마지막 말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행복했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무엇을 후회하는지 물으면, 좀 더 즐기지 못했다는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한 후회만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결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 즐거움만을 찾으면 마지막 순간에 후회할 일만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만족이 아닌, 주님께서 만족하실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혼인의 원칙을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혼인은 남녀의 인격적인 결합일 뿐 아니라 혼인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혼인의 의미를 담고 사는 사람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데, 그 반대인 미움의 의미만을 찾습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몸 안에서 함께하시는 주님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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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마태오 19,3-12 (혼인과 이혼, 혼인과 독신)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낯설었던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또 하나의 나로 받아들이고
너와 나 갈림 없는 하나를 이루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홀로만의 편안함과 자유로움보다
더불어 걷는 여정의 힘겨움과 부담스러움을
기꺼이 짊어지고 나아가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두 분의 여정에서
가짐보다 베풂을 기쁨으로 여기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맘속 깊이 감추고픈 부끄러움마저도
배우자에게 고백하며 통회의 눈물 흘리는
이 세상 가장 큰 용기 지니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씻을 수 없는 배우자의 더러움조차
뜨거운 사랑의 눈물로 깨끗이 하여
그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안아주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갈라설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보다
함께 해야 하는 단 하나 사랑의 소명에
온 몸과 온 마음 내어맡기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죽임에 관대한 세상에서
스스로 죽음으로써 살림을 이루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심에
부부님들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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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젊은 형제들이 저희 공동체에 와 같이 살아주는 것에 대해서. 저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 살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이주민 어머니와 아이들의 합동 연수회가 있었는데 그 피정 집의 고양이를 보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고양이한테 달려드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단순한 애정이 아닌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애정이 사람이 아니라 개에게 더 향하고, 혼족, 혼밥, 혼술이 대세이기에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요즘 수도원에 형제들이 들어온 것만도 고마운데 저와 같이 살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더욱이 저는 저의 수도원에서 어느 시어머니보다 어렵고 살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런데도 저와 같은 사람과 살아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고마움이고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라면 신앙적인 고마움과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도 제게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저희에게 보내주셨다고 믿는 프란치스칸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형제들을 내게 보내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매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보내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이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다 해주셨다는 식입니다.
주님께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 주님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신앙의 눈으로, 성사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독서 여호수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선조들을 통한 주님의 섭리입니다. 조상들이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라 섭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란 우선 무엇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그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취도 아니고 자연의 섭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섭리의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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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 전례; 우정의 여정 -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화답송 시편 136장이 잔잔한 위로를 줍니다. 국민 모두가 공부하고 각성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공부하는 마음, 배우는 마음으로 날마다 강론을 씁니다. 참으로 공부해야할 것이 많습니다. 얼마전 보는 눈, 관(觀)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나눴습니다. 공부의 목적도 이런 보는 눈, 올바른 관점(觀點)을 지니는 데 있음을 봅니다.
특히 올바른 공동체관, 교육관, 결혼관의 교육과 공부는 너무 절실합니다. 이런 교육과 공부가 전무하기에 겪는 혼란과 낭비가 너무 큽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 혼인과 독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결혼관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를 근거로 혼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리사이들의 당신을 시험하기 위한 이혼에 대한 불순한 질문에 개의치 않고 올바로 답변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간음으로 인해 부득이 이혼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결혼관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독신의 경우는 타고난 고자, 사람들이 만든 고자, 하늘 나라 때문에 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는 고자의 경우를 들면서 예외적인 독신도 인정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나 바오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사제와 수도자, 동정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과연 나는 어느 상태에 있습니까? 결혼했다면 결혼관에,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이라면 그 생활관에, 또 독신이라면 역시 그 인생관에 투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참으로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 것인지 고민하고 공부와 자기훈련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은, 부모는 아무나 하나? 결혼도, 부모도 자격시험을 봤으면 좋겠다!”
오늘날의 무책임한, 무자격자 부부들의 빈번한 이혼을 보며, 자녀 교육의 부실함을 보며 저절로 탄식처럼 나온 말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십계명 아홉 번째는 남성이라면 깊이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불륜으로 인한 부부공동체를 깨는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지속적인 불륜은 절대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부부간 무너진 신뢰와 사랑의 상처의 회복이 너무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에 철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서로 마주보며 사는 부부공동체가, 수도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평생 우정의 여정에 항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맞지 않아 이혼할 경우도 있겠습니다. 아주 오래전 부제반때 교회법 교수신부님이 로마에서의 혼인법 마지막 수업시간 스승 신부님이 결론처럼 들려 주셨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해서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말그대로 복음적인 해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상한 경우이고 서로간 관계를 위한 노력은 평생동안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부공동체의 일치도, 수도공동체의 일치도 평생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 또 함께 사는 이들과의 “우정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우정의 여정을 풍자하는 재미난 예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납니다.
“십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이십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삼십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사십대 부부는 싸우며 살고, 오십대 부부는 미워하며 살고, 육십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칠십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연인의 연정(戀情)에서 친구의 우정(友情)에 이르는 기나긴 사랑의 성장 여정을 보여줍니다. 저는 그래서 부부는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救援)이요 성인(聖人)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정말 남남의 부부가 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순교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지극한 인내의 기다림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살다보면 깨달음의 은총과 더불어 연민과 감사의 성숙한 우정에 도달할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생활 42년째 70대 중반인 저를 포함해 두 수도형제도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참으로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어느 사이좋은 부부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ME부부 단체 피정시 지도 신부님이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나 지금 배우자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라’ 했을 때 가만히 눈떠보니 자기 부부뿐이었다는 일화입니다. 정말 이런 부부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결혼하면 칼릴 지브란의 잠언이 생각납니다. 비단 결혼한 부부만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귀기울여 경청하고 묵상할 지혜입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놓을 때에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아니 신의 고요한 기억 속에서 까지도 함께 하리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그대들 영혼과 영혼의 두 기슭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하나의 잔으로
함께 마시지는 마라
서로에게 제 빵을 주되 같은 조각으로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따로 있게 하라
비록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 속에 묶어 두지는 마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담아 낼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처럼
참나무와 편백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참으로 공동생활에 깊은 통찰과 깨달음의 지혜를 주는 잠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서는 내일이면 끝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호수아가 대업을 이룬후 열두 지파 연맹의 성읍이며 성소인 스켐 전례 집회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회고하는 연설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 형성에 전례은총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새삼 이 거룩한 공동 미사전례 은총이 결혼 부부 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공히 반듯한 공동체 일치의 형성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거행되는 공동미사전례의 은총이 주님은 물론 서로간의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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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잊지 마라!>
오늘 복음(마태19,3-12)은 '혼인과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설령 법적으로 이혼했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이혼이 아닌 '별거의 상태'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앞에서 혼인관계를 맺고(성사혼과 관면혼), 별거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혼인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됩니다. 이때는 교회 법원에서 이전 혼인이 무효라는 것을 확증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혼인관계를 맺으면 그때부터 '조당'이 됩니다.
오늘 독서(여호24,1-13)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놓고 한 말인데, 이 말의 핵심은 '잊지 마라.'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은총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망각의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기억도 하지만, 잘 잊기도 합니다.
성경 전체(73권)의 핵심도 바로 '잊지 마라.'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기적들을 잊지 마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마라는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미사는 '주님께서 우리를(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랑의 기억이요 재현'입니다.
'잊지 마라!'
첫 마음(초심)을 잊지 마라! 부부 성소 안에 있는 첫 기억, 첫 사랑을 잊지 마라!
지금의 힘듦은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첫 마음, 첫 기억, 첫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고 잊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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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0JKZwdw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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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 19, 11)
몸의 방향이
곧 마음의
방향입니다.
결혼과
독신 사이의
선택은 온전히
자유의지의
몫이며 독신은
허락된 이들의
삶의 방식이며
하늘 나라를 위한
다양한 삶의
존재방식입니다.
삶은 수 많은
길들을 내며
하느님을
향합니다.
모두가
살아내느라
바쁘고 힘겨운
시간입니다.
신앙은
내 멋대로
살아온 길에서
벗어나
삶의 질서를
만나게 합니다.
수 많은 변명과
수식어를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성찰합니다.
참된 관계는
이기적인 거래를
멈추는 데
있습니다.
참된 사랑을
잊고 살았습니다.
참된 사랑은
영혼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결혼도 독신도
모두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모두는
삶의 구경꾼들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단 하나뿐인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사랑이 쓰는
사랑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몸이 영혼이고
영혼이 몸이 되어
하느님을 향합니다.
독신도 결혼도
하느님을
체험하는
다양한 삶의
길임을 압니다.
행복의 길을
사랑의 길을
걸어가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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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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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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