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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종교를위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홍익인세
신교총화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先生曰 九月山 貝葉寺 達摩菴 阿沙峰 乃神祖西巡而升天時遺跡之地 不可不敬而尊之 선생왈 구월산 패엽사 달마암 아사봉 내신조서순이승천시유적지지 불가불경이존지
스승께서 말씀하시되 “구월산 패엽사 달마 아사봉은 곧 우리 신조(神祖)께서 서쪽을 다니시고, 하늘에 오르실 때의 유적지이니 공경하여 받들 곳이다.” 신조(神組)는 '포명본교대지서 원본신가의 대조신(大祖神)'을 말하는 듯 합니다. 대황조(大皇祖)라고도 하였고, 신사기에는 치화주 환검(桓儉)으로 나옵니다. 대종교에서는 한배검이라고 하는데 원본신가에 의하면 대조신(大祖神)의 우리말 번역이죠. 즉 한배검께서 어천하신 곳이 구월산 패엽사라는 말이 됩니다. 어천절은 3월 15일인데 이곳 민간전승에는 9월 9일이라고 전해진답니다. 구구절이죠. 즉, 어천하신 곳이 구월산 패엽사라는 말이죠. 국토부에서 브이월드라고 3D지도 만들었다해서 검색해 봤습니다. 구월산이 남포시 밑에 있고 아사봉과 패엽리, 삼성리가 보이네요. 패엽사는 현존하지 않는 듯 합니다. 해상도가 떨어져 확인불가고요. 산 정상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네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궐산(闕山)이 변하여 구월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먼옛날 이 산에 임금님 머무시는 대궐이 있었나 봅니다. 아사봉은 아사달과 관계가 있을까요? 북서풍을 막아주는 구월산 정상과 좌청룡, 우백호가 잘 뻗었고, 멀리 무령산이라는 안산이 있어 풍수적으로 아주 좋은 지역에 속하네요. 다만 배산임수는 맞지만 앞에 흐르는 개천이 작은 것이 흠이네요. 패엽리앞 저수지는 옛날부터 있었을까요? 현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저수지있는 곳이 대궐터였을 수 있습니다. 다른곳보다 평지로 지대가 낮다는 것은 땅을 다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다음은 백과사전과 인터넷 자료입니다. 패엽사 [貝葉寺]31본산 중 하나로 황주(黃州) 성불사(成佛寺)와 함께 황해도에 있는 여러 절을 관장했다. 신라 중기에 법심(法深)이라는 고승이 창건했다는 설과 애장왕(哀莊王:800~809 재위)대에 패엽조사(貝葉祖師)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신라말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스님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패엽경(貝葉經:패다라엽을 엮어서 필사한 경전)을 가지고 돌아와 이 절에 두었기 때문에 본래 한산사(寒山寺)였던 절 이름을 패엽사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1303~1424년에 화재로 황폐화된 것을 신균(信均)과 천오(天悟)가 재건했으며, 조선 말기에는 하은(荷隱)이 대규모의 가람으로 중건했다. 현재 경내에는 한산전(寒山殿)과 삼성전(三聖殿) 등의 당우가 남아 있으며 단군 유적도 있다. 구월산은 조선 4대명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경치가 좋으며 단군이 말년에 이 산에 입산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패엽사 옛사진 삼성전 아사봉과 월정사 위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minoksigi/8927385 한반도 구뤌산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구월산 삼성사] 1. 삼성사란?
삼성사(三聖祠)는 삼성(三聖)을 모시는 사당(祠堂)을 말한다. 여기서 삼성은 세 사람의 성인(聖人)이란 말로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檀君)을 가리킨다. 여기서 단군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초대 임금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을 가리킨다. 삼성사는 황해도 구월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단군조선시대부터 단군조선 땅에 있어 왔다라고 보인다.
2. 황해도 구월산
구월산은 현재 한반도 황해도 서쪽지역인 은율과 신천 사이에 구월산이 실제로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954m이다. 구월산에 대하여는 고려사(高麗史), 응제시주(應製詩註), 세종실록(世宗實錄) 등 많은 사서(史書)들이 언급하고 있다. 구월산에는 단군대(檀君臺), 어천석(御天石), 사왕봉(思王峰) 등 단군의 사적(史蹟)이 즐비하여 있다 한다. 그러나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조시대(李朝時代) 문종(文宗) 때에 삼성사를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는 문종실록을 보면 늦어도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3. 상춘의 구월산
상춘(常春)에도 구월산(九月山)이 있었다라고 한다. 상춘은 지금의 장춘(長春)을 가리킨다. 그런데 상춘은 고구려의 수도 눌현(訥見)을 말한다. 고주몽은 수도를 졸본(卒本)에서 눌현으로 옮겼다. 구월산 밑에 장당경(藏唐京)이 있다라고 한다. 장당경은 단군조선의 말기 때 수도였다. 그런데 장당경은 원래 개원(開原)이라고 하며 또한 평양(平壤)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개원은 발해만 동북쪽, 요동반도 북쪽에 위치한 땅이다. 그래서 장당경은 원래 요동반도 북쪽에 있었으며, 상춘은 장당경의 동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되고, 아사달(阿斯達)은 송화강 유역에 있는 지금의 하얼빈을
가리킨다.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은 상춘 근처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중국 지명에는 하얼빈 서쪽 지역에 부여라는 땅이
있는데, 이 곳은 아마도 해모수가 북부여를 일으키면서 근거지로 삼은 곳이라 보인다. 북부여(北夫餘)의 수도는 웅심산(熊心山)
난빈(蘭濱)이라 한다. 난빈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개원의 북쪽이나 동북쪽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난빈은 현재의 부여와 하얼빈, 장춘을 잇는 지역의 근처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구월산·장당경·평양·삼성사·문화
장당경 근처에 문화현(文化縣)이 있었다고 한다. 또 황해도 구월산 밑에 문화(文化)라는 땅이 있었다. 구월산 밑에 장당경이 있었다라고도 한다. 장당경은 또한 평양(平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문화류씨의 시조격인 왕수긍(王受兢)은 일토산(一土山) 사람인데 일토산은 왕산(王山)이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펼친 내용을 종합정리한다면, 상춘에 구월산이 있었고, 장당경에 문화현이 있었으며 장당경은 평양이라고도 하였고, 단군조선시대부터 이미 삼성사가 존재하여 왔는 바, 언제부터인가 한반도에 구월산이라는 산이름이 생기고 이곳에 삼성사가 세워졌으며, 근처에 문화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대진국(발해를 말함)의 제3대 문황제(문왕을 가리킴)가 지은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보면, 후조선시대에 기자(箕子)가 일토산 사람인 왕수긍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단목판(檀木板)에 새기게 하여 즐겨 읽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일토산은 우리나라 왕씨의 본향으로 문화(文化)라는 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문화라는 지명은 원래 개원인 장당경에 있었으므로 왕수긍은 한반도 황해도 구월산에서 근거지를 삼은 사람이 아니고
요동반도 북쪽인 장당경에 있던 문화현을 근거지로 삼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화류씨 족보등에서 왕수긍은 기자의 사사(士師)로서
기자를 따라 조선으로 온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왕수긍의 후손인 왕문(王文)이 부여(夫餘)사람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면, 왕씨의 근거지는 원래 한반도 황해도가 아니라 발해만 북쪽의 장당경 부근이라고 보는 것이다. 장당경은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그리고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곳은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부근인 서화라는
땅이었다. 서기전 323년경에 기자의 먼후손인 기후(箕糐)라는 사람이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면서 기씨가 번한이 되어 기준왕(箕準王)에 이르러 서기전 194년에 위만에게 망하였던 것이며, 이때 기준은 배를 타고 이동하여
한반도의 서남쪽인 금마군에 마한(馬韓)을 세웠던 것이다. 위만조선이 서기전 108년에 한(漢)나라에 망한 곳이 바로 발해만
유역인 것이다. 서기전 195년부터 한반도의 평양에는 번조선의 낙랑에서 이동하였던 최씨의 낙랑국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평양에는 기자나 그 후손인 기씨왕(箕氏王)이 머문 적이 없다고 보인다. 평양에 기자(箕子)의 사당이 있게 된 것은 후대의 일이라고
본다.
5. 여론
중국이라는 나라가 팽창하면서 우리의 옛 지명이 대체적으로 차츰 동쪽으로 또는 한반도로 이동되었다라고 보면 된다. 단군조선 말기인 서기전 3세기경에 진(秦), 연(燕)나라가 동쪽으로 팽창하여 번조선 지역을 압박하였고, 급기야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한(漢)나라와 번조선(위만조선) 유민과의 전쟁이 격렬하게 치러졌다. 이후 고구려와 수, 당과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급기야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의 역사자료가 당에게 넘어가 역사를 중국에 유리하게 변작하는 데 사용되도록 빌미를 주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사료를 비판없이 베끼면서 우리의 역사는 졸아들고 중국에 비하여 졸렬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사료에 의하여 우리의 옛 강명과 지명은 차츰 동쪽으로 이동되었고, 단군조선, 번조선 유민들이 이동하면서 한반도에 자취를 남겨 대륙에 있던 지명과 같은 이름을 한반도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월산이 황해도에 있게 된 것과, 한반도 평양을 장당경이라고 하는 것과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게 된 것과, 구월산에 문화라는 지명이 생긴 것 등은 바로 위와 같은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 역사나 유래를 모르면
본래부터 한반도에서만 있었던 것이라고 잘못 알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1987. 삼국유사, 일연 저/ 이민수 역, 삼성미술문화재단, 1987. 동명왕편·제왕운기, 이규보·이승휴 저/ 박두포 역, 을유문화사, 1987. 조선전, 이민수 역, 탐구당, 1983. 부도지, 박제상 저/ 김은수 역, 가나출판사, 1987. 기타 다수 http://handulsetnet.com.ne.kr/history/homejoh/new/guwolsam.htm 구월산 터를 서울과 비교하니 규모가 비슷하네요. 평지가 오히려 더 넓습니다. 다만 한강같은 큰 강이 없음이 흠인데 북동쪽으로 대동강이 있네요. 대동강물 끓어다 쓰면 천만도 가능하겠네요. 옛날에는 천만인구가 아니었을테니 백만이상 도시로는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작은 하천도 많아 식수공급에 문제가 없어 보이고요. 다 좋은데 조산(祖山)을 뭘로 봐야할지... 구월산터가 아사달일지라도 신교총화에 나온 것처럼 서쪽에서 먼저 치화하셨고 말년에 승천하실 때 온 곳이니 이곳을 첫도읍지로 보기엔 무리입니다. |
첫댓글 신교총화 기록이 맞다면 아사달은 황해도 구월산을 주산으로 그 앞 넓은 평야지대에 세워진 것입니다. 아사봉, 삼성사, 궐산(구월산: 대궐의 궐이 구월로 변함)의 지명이 근거가 되겠죠. 첫 도읍은 아니고 말년에 도읍을 옮기신 듯 합니다. 마니산 삼성단과도 거리가 가깝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