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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0일(토)
* 시작 기도
주님...
내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은밀하게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교만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 하셨는데 이 마음에 올라오는 교만의 싹을 자르기 원합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사 은혜를 부어주소서.
세상을 향한 마음을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오직 주만 사랑하는 주의 정결한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사오니 주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주님과 연합하기 원합니다.
죄의 몸은 불구가 되어 오직 주의 말씀의 종, 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올 한 해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잘 쪼개서 계수할 줄 아는 지혜로운 주의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 하루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주의 향기가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31:1-9
제목 : 나의 일상의 영성은 어떠한가?
1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2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4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5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6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8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 나의 묵상
본문에 나오는 르무엘 왕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유대 전승이나 많은 성경학자들은 르무엘을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 즉 별명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북 아라비아에 있는 이스마엘 족속의 땅 맛사에 지혜로 유명한 왕, 즉 맛사의 왕으로 부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정확하지는 않다.
이 말씀은 어머니가 왕인 아들 르무엘을 훈계하는 잠언이다.
이 말씀은 단지 인간 어머니의 교훈을 뛰어넘는 신적 계시로써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벗은 것을 자신의 눈, 즉 자의식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지만(창 2:25), 범법자가 되어 자의식의 눈을 뜨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던 벌거벗음이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것을 가리고 동산에 있는 나무 뒤로 도망가서 숨었다.
그가 부끄러운 것을 숨기고 감추려고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마는 히브리어로 ‘학고레’로써 치마가 아니라 벨트를 의미한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그 벌거벗음을 가린다고 하며 허리에 벨트 하나만 둘렀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꼴불견인지 눈 뜨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무화과 잎으로 만든 그 무엇이며, 치마를 만들어 입으면 입을수록 부끄러움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비참해지고 부끄러워질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사람들이 정욕을 위하여 여자들을 찾고, 포도주와 독주를 찾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또 하나의 무화과 잎이다.
많은 여자들에게 돌아가며 정욕을 풀고, 술을 즐기고 술에 취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하는 자의식의 발로이다.
자신의 눈으로는 자신의 비참함을 도무지 보아 넘길 수 없기에 돈을 주고 산 여자,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여자들에게 가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7:16-17절에서 왕은 병마와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또한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신 17:16-17) 그(왕)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군사의 수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나, 세상의 군왕들은 군사의 숫자가 그들의 힘이요 능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은 군사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힘과 능력이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 군사의 숫자로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 전쟁할 때마다 승리하였다.
(삼하 8:6b) ...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그런데 다윗이 하루는 요압으로 하여금 군사의 숫자를 세도록 명령하였다.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어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벌을 받게 되는데 그가 다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겠다는 징계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맘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자기 맘대로 되는 것도 없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나가서 싸우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 전쟁에서 이겼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한 블레셋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싸우려고 나왔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도 하나님께 물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쟁터로 올라가지 말고 숨어 있다가 기습작전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고 행하였다면, 오늘 동일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래,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니까 어제처럼 하면 되겠지. 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오늘도 이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 전에 블레셋과 똑같은 상황에서 전쟁을 하였다고 해서 오늘 묻지 않고 어제와 동일하게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또다시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다고 해서, 오늘 똑같이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올라가서 싸우라고 하신 주님이, 오늘은 올라가지 말고 숨었다가 기습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렇게 매사에 주님께 묻는 것을 일컬어 ‘일상의 영성’이라고 한다.
이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도 아버지께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어제 하셨다고 해서, 오늘 안 하신 것이 아니라, 매일 새벽에 습관처럼 기도의 자리로 나가신 것이다.
(눅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다윗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이다.
그가 행한 일상의 영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일상의 영성인 것이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예수님보다 1,000년이나 앞서 살았던 조상이지만, 영으로는 그가 계시를 통하여 창세전부터 선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이미 보았던 자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일컬어 ‘主’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主(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육신의 삶을 살면서도 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아내를 여럿 두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여러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이 아버지 다윗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났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의 자리를 빼앗기기도 하였으며, 다른 아들은 배가 다른 여동생을 겁탈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아들은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하여 온갖 술수를 쓰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내를 많이 두므로 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처럼 때로는 육신의 소욕으로 인하여 넘어지기도 하였지만, 다시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는 다윗은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이나 창세전의 세계에서나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사셨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철저히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주님이 하신 일은 다름 아닌 영생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았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자신감이 없었고 남들 앞에 잘 나서지도 못하는 그런 자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이 하다가도 아버지가 보지 않으실 때는 내 마음대로 행하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자였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말 표리부동한 자로 살아 왔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모습이 순간순간 변하였던 것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런 나를 다루셨다.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신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쓴 맛을 보는 것으로 다루셨다.
나는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하나님이 나를 다루어 가신다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을 통해서 언약을 알고 나니까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참 많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나를 나 되게 하신 주님을 지금은 찬양한다.
몰라서 때로는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였지만, 이제 주님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 백성임을 알고, 그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게 되니까 어떠한 상황과 형편도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더 원할 것이 없는 자로 살아간다.
얼마든지 나의 욕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그 무엇들,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주는 도구인 여자들, 포도주와 독주와 같은 무화과 잎이 내 앞에서 어른거리며 유혹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날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그 귀한 보배 피를 흘려 생명 주신 주님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옛날처럼 살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다.
나는 주님의 소유이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이다.
이 세상에서 받는 유한한 유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그 유업이 나의 참된 기업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진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이끄시고 인도하신다.
나의 참된 아버지가 계시고 나의 영원한 맏형 되시는 주님이 계셔서 행복하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무 뒤에 숨어서 나의 비참함을 가리고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과 교제했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였나이다.
그것이 나를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여자들이요, 또한 포도주와 독주였나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심판하셨고 고비마다 나를 다루시며 내 뜻을 깨뜨리시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셨나이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그것이 나에게 실패로만 보였나이다.
어찌 그리 나는 하는 것마다 잘 안 되는지요?
그런 나의 모습이 원망스럽고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그것이 나를 다루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이었음을...
참 많이 아팠고, 외로웠으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복음을 통하여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 이렇게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임을 빋습니다.
나를 만나 주시려고 그토록 혹독한 손길로 나를 다루셨군요.
이제는 옛날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계신데 어디로 가겠나이까?
나를 바라보시는 한없이 온화하고 지긋하신 주님의 눈길 앞에 나는 항복하며 두 손을 듭니다.
나도 용납할 수 없었던 나를 주님은 용납하여 주시고 그 오랜 세월을 참아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내가 주님을 용납할 차례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주님 품속에 들어가나이다.
그곳이 나의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를 받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