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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정부 주도 경제개발 정책은 산업화의 특성상 도시집중화를 야기했고
이로 인해 이촌향도 현상으로 농촌이 상대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지고 있었다.
정부에 대한 지지율도 농촌, 어촌에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1969년 11월에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다.
1973년부터는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관련 조직이 설치되었고,
(내무부 지방국 새마을지도과,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 신설되어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을 살리고 경제를 부흥한다는 목적으로 실시되어 농촌활성화에도 기여하였다.
새마을운동의 계획자는 전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자 농업전문가, 유대인 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 박사였다.
고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류태영 박사는 앞으로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뇌하다가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 제도가 있음을 확인하여
영문으로 자신의 농촌 계몽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 뜻이 수용되어 약 10여년 간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3] 농촌 계몽과 현대화 등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농업교수를 역임한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쌍용양회가 생산하는 시멘트 재고가 쌓여서 회사가 휘청거리게 되자
정부가 이 시멘트를 모조리 사들인 상황이었다.
이것이 마침 세워졌던 새마을 계획과 결합되면서, 전국에 한 마을당 600포씩 뿌리는 식으로 재고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거의 전국의 초가집을 헐고 시멘트집을 짓는데 만약 이걸 다 새로 생산했으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만들 노동력이나 자금 면에서 손실이 컸을 것이 뻔하다.
새마을운동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되었다.
특히 배급받는 시멘트를 당시 안 쓰고 썩힌 마을은 다음 지원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경쟁시킨 것이나,
자발적인 경쟁을 각 마을에 유도한 것은 지금 봐도 경쟁의식을 자극하는 뛰어난 기술.
이 시멘트를 받아서 그냥 안 써먹은 마을도 있었지만, 받은 시멘트를 활용하는 마을에 한해서 철근 등 자재를 보내면서 국민적인 반응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호응을 얻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정부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과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낳았다.
옛날일 정도로 회상하는 경우가 많으나 공식적으로 새마을 운동은 끝난 것은 아니다.
3. 상징물
새마을의 대표적 상징물은 새마을기이다.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안에 초록색 새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담은 로고에
박정희의 글씨로 새마을이라는 흰 글씨를 쓴 깃발로 1970년 새마을운동 초창기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기장학에 상당히 충실하다.
녹색바탕은 농촌의 녹색혁명을 상징하며, 황색원은 협동과 부 및 무한한 가능성을 표시,
녹색의 잎과 싹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 및
희망과 소득을 상징, 줄기의 밑이 넓은 것은 안정과 번영을 표시한다.
1970년 새마을운동 전파와 홍보를 위해서 관공서와 농협,
수리조합(현 한국농어촌공사) 등 유관기관 국기 게양대마다 태극기와 함께 의무적으로 게양되었던 깃발이었기 때문에
관공서와 유관기관 국기 게양대에 새마을기가 게양되어 있었고 깃발 외에 마을 입구 표지판이나 비석 등에도
새마을 마크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현대에는 농촌이나 산촌 위주로 새마을기를 계속 게양하고 있으나
문민정부 출범 이후 새마을기의 공공기관 의무 게양 조항이 사라졌고
새마을운동 정신의 무분별한 강조는 곧 유신정권의 잔재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새마을기를 달지 않는 기관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물론 현재도 농촌지역 지자체 기관들이나 경로당, 또는 농어촌 지역의 작은 다리들에는 새마을기가 걸려있는 곳이 적지 않다.
드물게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농활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체육대회에서 단체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등,
일종의 빈티지/농촌 느낌이 나는 표식으로 사용중인 듯하다. 일례로 과거 봉숭아학당에서 김준호가 마을 이장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는
항상 새마을 모자를 쓰고 나왔으며,
장동민도 개그 콘서트의 다른 코너에서 농촌의 마을 이장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는 카키색 점퍼에 새마을 모자를 착용했다.
4. 결과와 계승
새마을운동으로 전국적인 생활 환경 및 국민 위생 개선, 농로 등의 인프라 구축이 됐고
한국 농촌에서 초가집은 이 시기에 거의 사라졌다.
1894년에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 됐지만 농촌에서는 양반, 평민 등 혈통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어서
신분제도가 암묵적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전체가 새롭게 변화가 돼서 농촌에 암묵적으로 남아있던 신분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새마을운동 하나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당시에 급속한 이촌향도 현상으로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면서
기존의 집성촌들이 인구유출로 쇠락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옛날에 노비였으니까 우리한테 잘 보여야된다고 갑질을 하려고해도, 사람이 있어야 부리지,
옛날 조상들의 신분이 어떻든간에 다들 일자리 구한다고 도시로 떠나는 판이라,
이전만큼 텃세를 못부리게 되는것이었으며,
기존에 지역유지 역할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종가집은 맏아들 장가보내는것도 힘들정도로 처지가 역전되기도 했다.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에 보면 6.25 이후에도 종들이 사는 '아랫마을'이 남아 있어서
그곳 노인들도 윗마을 어린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썼다는 작가 모친의 증언이 나오는데,
이 아랫마을은 산업화로 인해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며 자연히 소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는 김영순의 '오빠 새와 인삼'이라는 작품에 보면 이 당시 전라북도의 '산수리골'이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4H구락부 운동 전개 묘사에 이 동네의 텃세와 암묵적 신분제가 없어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문구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아예 새마을 모자가 농촌을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로 자리잡았을 정도다.
예시로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고향집 가세"에는 가요로서 드물게 농촌 고향의 상징으로서 새마을 모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TV 예능에서는 이 새마을 모자를 이장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의 "그까이~꺼 이장" 장동민이나
청춘불패의 남희석 등. 물론 원조는 같은 방송국 유머 1번지의 코너 "괜찮아유"에서 최양락이나 김학래가 쓰고 나오던 것이다.
1988년도의 제5공화국 비리규명 청문회에서 밝혀진 문제점에 따라 한동안 새마을운동은 위축되었으나,
제2새마을운동으로 새롭게 사업을 전개해 왔다.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현재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사업이 전개되는 중이다.
2018년도는 사회공동체운동, 경제공동체운동, 문화공동체운동, 환경공동체운동, 지구촌공동체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가정새마을운동, 지역사회새마을운동, 지구촌새마을운동분야에서 활동하며 나라 발전의 기틀 마련과 공동체 의식 제고,
지구촌 공동 번영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새마을운동 관련 조직이 운영되고 있으며, 예전에 비해 역량이 줄어든 감은 있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주관하는 새마을운동중앙회는 1980년 12월 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창립되었다.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은 1980년 12월 13일 법률 제3269호로 제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아버지의 새마을 운동을 계승해 '새마을운동 세계화 사업'을 구상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19년 10월 29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세계는 '새마을운동'이 이룬 기적 같은 성과에 주목하고 있다"며 과거 새마을운동이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4.1. 전파
새마을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정책 중 하나다.
ODA(공적개발원조)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제프리 삭스 역시 새마을 운동의 빈곤 퇴치 효과를 긍정했다. 제3세계 국가들이 새마을운동에 괜히 큰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 것 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의 빈곤 극복과 복지 향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지지를 받는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도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울 것을 권고했다.
콩고, 가나,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새마을운동을 수입해간 주요 국가이며,
다양한 국가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노력하고 있다.
콩고에서는 지천에 널린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흡사 50년대 한국의 신흥주택처럼) 양옥집을 짓는 사업이 꽤 쏠쏠하다고 한다.
특히 르완다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운동인데
르완다의 대통령인 폴 카가메가 박정희를 존경하는 탓에 새마을운동 도입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어로는 한국신촌운동(韩国新村运动)이라 번역하는데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은 중국어로 번역된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당 간부들에게 나눠주며 새마을운동을 배우라 지시했을 정도.
위에 소개됐던 류태영 박사도 새마을운동 전파를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후진타오 주석도 새마을운동을 공부했으며, 이를 모방한 "신농촌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초청 연수나 기타 인재개발원 연수 사업도 포괄해서 새마을운동 전파사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개 이런 초청 연수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농업기술원, 농촌 정보화마을등과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의 산업현장으로 견학을 하게 된다.
페루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새마을운동을 수용하였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던 이후로는 위상에 타격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얀마가 부분적인 민주화를 이룬 직후 새마을운동을 적극 수용하기로 하자 다시 이를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 확대되고 있다.
미얀마의 첫 민선 대통령이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얀마의 경우 새 도읍지인 네피도가 아직 건설이 충분히 끝나지 않아 이에 대한 개혁 의지가 매우 강하다.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그동안 관이 주도하던 새마을운동을 민간주도형으로 전환하는 목적 하에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외형상으로 민간주도였어도 실제로는 반관반민(半官半民)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정권 유지에 복무하는 관변운동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5공 기간 동안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본부 사무총장, 회장을 지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전두환이 퇴임한 직후인 1988년 전경환이 구속되고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이른바 ‘5공 비리’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개칭되었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조정되었다.
1989년에는 새마을운동센터를 만들어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을 내세웠으며, 1993년에는 제2단계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기도 했다.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로 선정되어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새마을운동을 지역사회개발 운동의 성공 사례로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2000년에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의 명칭을 새마을운동중앙회로 바꾸고, 유엔의 비정부 기구(NGO)로 가입하였다.
2003년부터는 필리핀 · 콩고 · 몽골 · 러시아 · 중국 · 베트남 · 아프가니스탄 · 우간다 · 미얀마 등
아프리카 · 아시아 저개발국에 적극 새마을운동을 보급하였다.
특히 한국 정부가 공적개발원조사업(ODA)을 시작한 2009년부터는 개발도상국 농촌에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산업화 시기 정책적으로 의도된 불균형 발전에 따르는 비용을 농촌에 그대로 전가시킨 채 농민들을 당대의 지배논리 안으로 포섭하려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개발도상국의 사례에 직접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6. 비판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근대화 정책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위적 근대화라는 차원에서 일맥상통한다.
새마을운동의 경우는 조선총독부와 같은 일방향적인 구도보다는 일반민의 호응을 얻어 시행되는,
앞서 말한 소련, 북한 등의 인민 동원 체제와 유사하다.
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정책보다는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닮아있다.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를 지내며 그 악명을 높이던 시절에 입안했던 것이 바로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이며, 박정희 본인 또한 만주국 소속의 군인이었으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비판점을 볼 때도 이러한 일반민 동원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새마을노래와 함께 아침 일찍 기상하기 등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동원적 수단,
희망적 전망에 대한 적극적 참여 등을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반강제의 체제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새마을 청년회 등에 반강제로 가입을 시킨 후 다리나 제방 공사 당시 자기 마을의 일이므로 적극적인 참여를 당연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때문에 비판하는 측에서는 대개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국민국가 만들기"라는 점을 짚는 편이다.
겉으로 보기 좋은 성과는 만들어냈으나,
새마을운동으로 막고자 했던 농촌 사회의 붕괴는 억제하는 수준에는 머무르지 못했다.
1970년대 농촌 쟁의는 결국 새마을운동이 농촌의 구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강 교육자 겸 동화 작가 문관식이 쓴 <밤나무골 아이들>이라는 창작 동화에서는 새마을운동 당시의 농촌을 묘사하면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이건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 그것도 1980년대에 쓰여진 작품이다. 그때부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봤다는 이야기다.
지붕 교체 사업 당시 지붕을 슬레이트로 했다가 슬레이트가 썩자 석면이 검출된 것 역시 큰 문제가 되었다.
일단 당시의 기술이나 경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석면을 쓴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던 건 아니었다.
석면의 위험성이 영국에서 대두된 시기는 1924년이나, WHO 산하 IARC에서 석면을 발암물질로 확정한 시기는 1987년이다.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1973년~1979년에는 석면의 위험성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고 그 유용성만 알려졌기에 쓰인 것이지,
위험성을 알면서 무작정 혹은 남몰래 쓰는 등 안 좋은 식으로 쓴 것은 아니다.
즉 이후의 시점에서 보면 잘못된 것이 맞지만 이런 앞 뒤 사정을 감안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전통문화의 급격한 상실도 문제가 되었다. 물론 산업화와 그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화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당시 보존해야 할 전통까지 밀어붙이기 식으로 파괴한 경우가 많다. 특히 무속 문화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각 마을마다 존재하던 서낭당, 장승, 마을 굿 같은 것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조차도 미신 타파의 명목으로 금지하면서 하마터면 전승이 끊길 뻔했다. 이를 두고 논했는지는 몰라도 김용옥은 대학생 시절에 "새마을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이다"는 논지의 글을 학교 신문에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또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 교수도 이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당시 전해지던 여러 고택들과 향교들도 상당수 자취를 감추었다.
그 예로 새마을운동 당시 사라진 제주향교 명륜당을 예로 들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당시의 전통문화 파괴를 문화대혁명의 반달리즘에 비교하기도 한다.
또한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에 개혁을 시행해봤다고 보기엔 성과라고 할 것이 전무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다
. 새마을운동이 시행된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농업이 세계적인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이런 시각을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장기적 이농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새마을운동은 농촌 붕괴를 조장하는 것 아니었냐는 비판까지 유발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에서도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이농 현상을 오히려 호의적으로 해석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보다도 훨씬 가파른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의 경우는 정부가 아예 이농 현상을 의도적으로 부추겼으리라는 시각을 가지는 것도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
처음부터 시멘트를 다량으로 동원하는 사업이었기에 전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방공호를 같이 지었다면
더 효율적이었음에도 예비군까지 동원을 추진한 정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 것은 지지부진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