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번뜩이는 휴머니즘의 온기
- 장웨이량, 인요우차오의 <백의창구>
관찰자적 시선을 위한 대사와 음악의 절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에 초청된 대만 영화 <백의창구>(2024, 장웨이량, 인요우차오 공동 연출, 130분)는 벼랑 끝에 다다른 사람들, 즉 해외 이주민 노동자와 자국에서 한계적인 상황을 살고 있는 빈민들의 삶을 관찰자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영화이다. 해외 아주민 노동자들은 자국의 정치적인 불안한 상황이나 막다른 삶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밀입국하는 사람들로, 이 영화에서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그런 막다른 생존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등쳐먹은 부류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는 밀입국하는 그들을 다른 산업체에 돈을 받고 팔아넘기거나, 자신들이 요양 병원이나 값싼 노동력을 원하는 빈민들의 부모를 요양하는 곳에 취직시켜 돈을 갈취하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상황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임금을 몇 달치 못 받아 불만인 해외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딴 곳으로 가거나 고발하겠다는 비열한 수법으로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다큐멘터리 적인 기법으로 막다른 골목에 처한 해외 이주민들의 한계적인 상황을, 감정 이입을 하지 않은 채 철저한 객관적인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연출자는 될 수 있으면 다른 배경을 배제한 표준 스크린에 담고 있는데, ‘웅’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대사를 절제하고 행동이나 표정을 비롯한 마임 연기를 하게 한다. 음악을 사용하면 관객이 영화 속 상황이나 인물이 감정 이입되기 쉬워 아예 음악을 배제하고 있다.
또한 이주민의 밀입국이라는 상황이나 관객의 초점 심도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인 밤 장면을 시간적인 배경으로 시종일관 선택하고 있다. 음악이라고 해 봐야 해외 이주민들을 환영하는 디스코 텍 장면에서만 음악과 노래를 삽입하고 있을 뿐이다. 음악 대신에 긴장감을 유발하는 비 오는 소리, 자동차 달리는 소리, 환자의 신음, 부딪치는 소리 등 파찰음을 주로 사용하고 있어 현장감을 고조시키는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대사의 절제 대신 표정을 비롯한 마임 연기 일관
이 작품에서 서사의 추동력이 되는 인물은 ‘움’이다. 움 역시 해외 이주민 노동자로 밀입국한 인물이지만,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만 업자인 ‘싱’ 사장의 수행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밀입국 노동자와 사장의 다리 역할을 하는 인물로 임금 체불 때문에 같은 노동자들로부터 원성을 사지만 사장에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곧이곧대로 수행하는 다소 유약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그는 차츰 노동자들이나 빈민들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로 서서히 변해 간다.
이 작품에서 움은 거의 대사를 하지 않고 표정을 비롯한 마임으로 표현한다. 이는 어중간한 입장으로서의 역할의 성격이나, 자기 일만 충실하게 수행하면 된다는 식의 방관자적인 이기심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사를 절제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졌을 의도가 다분히 있는 것 같다. 그는 대사가 절제되는 대신 표정이나 시선, 또는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사건 속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밀입국자 중 노동자들의 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같은 여자 노동자 인드라가 죽어 산에 암매장당한 뒤부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후반부에 움이 인드라가 암매장되어 있는 산을 찾아가 무릎 꿇은 채 사죄하는 장면에서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 땅속에 묻어준다. 그 모습을 초목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개 한 마리가 보이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품은 신의 시선이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은 움의 마음속 풍경으로서의 휴머니즘이 발동하는 모티프를 개의 시선으로 은유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그 후부터 움의 휴머니즘적 행동이 표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가 요양 보호하고 있는 메이 아주머니를 도와주는 장면에서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메이는 자신 역시 심한 당뇨로 다리를 절고 있는데 아들 후이는 정신지체 장애자로 교회에 맡겨져 있다. 메이의 아들인 후이를 움이 집으로 데려오면서 그는 후이와 그와 그의 어머니인 메이를 인간적인 태도로 돌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절정은 후반부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움은 움쭉달싹 못하는 메이 아주머니의 인간적인 삶의 영위를 위해 후이를 주사약으로 안락사시킨다. 뒤이어 메이마저 안락한 표정으로 비로소 눈을 감는다. 메이의 한 식구로 존재하던 반려견은 두 사람의 죽음을 마치 확인이나 한 듯이 집을 떠나며 그들을 아쉬운 듯 뒤돌아보는 장면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그래도 희망은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관객의 답답한 영화 보기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주민 노동자들의 환영 파티가 디스코텍에서 열리는 과정에서, 권력자인 싱 사장과 피 권력자며 하수인인 움이 술에 취해 노래하는 장면에서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싱이 1절을 부르는 대목의 가사를 보면 나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자기변명을 하는 가사가 소개되고, 2절에서는 움이 이를 맞받아치며 나는 이제부터 내 길을 가야 하겠다는 뜻이 가사가 소개되면서, 지금까지 거의 숨을 못 쉴 정도의 압박감에 시달리던 관객들에게 비로소 한 줄기 웃음을 선사한다. 이 장면에서 앞으로 움이 어떻게 변해갈 거라는 복선으로서의 암시가 언뜻 내비치기도 한다.
또한 메이의 집에서 음란물을 시청하는 장면에서 움은 그런 야한 장면을 통해 억눌려진 성을 일종의 반항의 수단으로 전이시킨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후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보이스 오프의 기법으로 후의 괴상한 신음만 들려주고 있는데. 이는 같은 대상을 두고 다른 생각과 욕망을 펼치는 동상이몽의 희화적인 시퀀스로, 보는 이에게 착잡한 심경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 영화에는 역설적인 장면도 시한폭탄처럼 매설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장면이다. 아마 그 교회에서는 교회 운영과 신도들에 대한 신뢰감 조성의 한 방편으로, 장애자를 수용하고 있는데, 메이의 아들 후이 역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목사는 설교를 하는데 죽음에 대해 얘기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되는데 죽는 순간, 육체는 소멸해 재로 날려가지만, 영혼은 육체에서 빠져나와 하늘나라로 회귀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영혼은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 심판을 받게 되는데, 살아생전 믿음이 온전치 못한 영혼들은 죄 받는다며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할 것을 역설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도들은 가족들 중 거동이 불편한 장애자를 교회 부설 요양 시설에서 맡겨 놓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애도의 마음으로 영화를 빚고 있다
이 영화는 비교적 젊은 나이 또래의 남녀 두 감독이 만들었다. 이 영화가 보는 이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요즈음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해외 불법 이주민을 다루면서, 어느 특정한 시대와 공간에서만 설득력을 주는 소재와 주제가 아닌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작품에 영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이들 두 명의 젊은 남녀 감독은 작품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심적인
고통 속을 헤매었을까를 유추하게 한다. 그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소재로, 그리고 그 불편한 소재 속에 따뜻한 온기로서의 휴머니즘이라는 희망적인 주제를 담았을 것이다. 그런 상치된 감정 속에서 그것도 감정 이입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억제해 가면서 영화를 만드느라 무척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관객들은 마지막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애도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만장의 빛깔 같은 검은색 배경 속에 영화를 만든 스텝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다. 마치 그 검은 배경 속에 이 영화에 등장했던 모든 출연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수백 명의 출연진과 스텝의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 그리고 독창적인 창의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그들은 이 작품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를 얼마나 많이 추체험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을지도 모르며, 주인공 옴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어느새 휴머니즘의 온기를 품은 채 서사의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용기를 얻으며 그에게 용기와 희망의 박수를 보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결코 통속적인 감상주의를 부추기고 쾌락적 재미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주인공 옴의 서사적 추동력인 인간주의 역할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나도 그 주인공처럼 이타적인 모멘트를 취한 적은 있었던가, 나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될 것인가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깨닫는 성찰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을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객석의 관객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또한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행동에 조그마한 변화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본다.
이 영화는 실내의 스튜디오보다는 야외 촬영을, 이름 있는 유명 배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같은 지극히 평범한 배우를 기용했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연기보다는 평범한 생활 연기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후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과 기법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를 만든 두 젊은 감독의 도발적이고 끈질기며 휴머니즘의 따뜻한 온기를 역설적이고 창의적인 기법으로 파고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 리뷰를 쓰는 동안 한국의 50대 중반의 여류 작가 한강이 대한민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노밸 문학상의 영광을 얻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 두 젊은 감독도 빠른 시일 안에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수상하거나. 나아가서는 최고상인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는 쾌거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간『문장』, 2024년 겨울호)
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