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0년 넘게 수행한 현기 스님이 조계사에서 강론을 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왕눈이와 냉면 먹지 않고 들어볼 것을, 후회했습니다.
겨울, 지리산 上無住庵
임 인택
산속의 산을 간다. 왜 지리산은 그 많은 봉우리를 거느리고도 부족하여 삼정산, 세걸산, 창암산, 덕두산 등을 가슴에 품고서야 다시 산이 되는지. 대설 경보 속에 눈으로 흩날리고 싶어 산으로 간다.
겨울 들어 지리산은 참으로 조용하다. 지리산 사람들도 겨울잠에 들어 조용하고 산을 찾는 사람들도 발길을 끊어 조용하다. 매년 11월 15일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산불 방지 기간으로 입산이 금지되어 저잣거리처럼 소란스러웠던 모든 산길들이 다시 산짐승에게 돌아간다. 산이 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처럼 눈이 온 천지를 하얗게 덮은 어느 해 겨울, 설마하고 산에 들었다가 공원 관리인에게 몹시 어려움을 당했던 적이 있다. 오늘은 아예 공원 관리소에 절에만 가겠노라고 신고하고, 정말 절에만 가기 위해 산에 들어섰다.
상무주암은 ‘영원사’까지 승용차로 가서 오를 수도 있지만, 양정마을 버스 종점에서 계곡을 따라 옛 스님들이 걷던 길을 쉬엄쉬엄 한 시간가량 걷다보면 ‘영원사’에 이르고, 다시 한 시간 더 땀을 흘려야 상무주암에 이를 수 있다.
지리산 품속에서 지리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삼정산(1210m). 삼정산은 산 전체가 부처님 도량이다. ‘영원사’에서 시작하여 도솔암, 상무주암, 문수암,삼불주암, 그리고 견성골을 지나 약수암 ‘실상사’까지 산을 휘감고 천년 고찰들이 불국토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민족의 비극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지리산과 그 속의 크고 작은 사찰들도 어찌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한 때는 선방만도 백 칸이 넘는, 기와 대신 너와로 지붕을 이었던 내지리(內智異)에서 가장 컷 던 ‘영원사’도 서로 분풀이라도 하듯 부수고 불 질러 아까운 문화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근래에 옛 가람의 모습으로 복원을 했다지만 어찌 옛 모습일 수 있겠는가.
빨치산의 주무대인 ‘영원사’ 루트는 피아의 전투가 가장 심했던 곳으로, 지금도 계곡의 여러 곳에는 험난한 계곡과 능선을 따라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한 비트를 그대로 재생시켜 그때의 처참했던 참상을 일러주고 있다. 50년이 훌쩍 지난 오늘에도 아직 천도 되지 못한 원혼들은 나무 끝에 바람으로 매달려 내뿜는 습한 기운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나는 9천을 맴도는 유주,무주 고혼들을 위해 헌식하고 광명진언(光明眞言,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야 타야훔)을 읊조리며 이제는 서로들 원한의 고리를 풀고 부디 편히 쉬라고 기도한다.
계곡을 들어서면서부터 아무도 밟지 않은 신설(新雪)은 갓 빨아놓은 모시옷처럼 하얗다. 이불국토에 내 발자취를 남긴다는 게 그저 송구스러울 뿐이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의 촉감이 부드럽다.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가 정겹다. 얼마쯤 갔을까, 순백의 도화지 같은 새길에 나보다 먼저 지나간 녀석이 있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어린애 주먹만큼씩한 멧돼지 발자국. 배가 고파 마을 어귀를 어슬렁거리다가 늑장부린 나처럼 외로운 수퇘지임에 틀림없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은 능선에 이르니, 앞을 헤쳐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무섭다. 생명붙이들이 모두 잠든 산자락 거대한 능선에는 오직 눈뿐이다. 여름날의 꽃송이보다 더 곱고 화려한 눈꽃, 버릴 것 다 버려서 숲은 추린 뼈처럼 정갈하다. 어린애 팔뚝같은 가지에도 제 몸뚱이보다 두꺼운 눈살을 붙이고, 눈꽃은 햇살에 녹아 얼음꽃이 되었다가 안개에 덮여 서리꽃으로 피어난다.
눈 덮인 지리산의 주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서쪽 만복대에서 1백 리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저 멀리서 태산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한 겹, 또 한 겹, 모두 눈을 뒤집어 쓴 장엄한 저 봉우리들. 그 당당한 위용을 한눈에 조망하기 좋은 천길 단애 위에 일주문처럼 버티고 서있는 소나무 한그루, 지금은 비록 빛바랜 등걸만 남았지만, 이 송정(松亭)에서 암자에 들기 위해 모든 선객들은 가쁜 숨을 고르며 요동치는 마음을, 멀리서 들려오는 깊은 산속 풍경소리에 맡겼으리라. 이제 한 모롱이만 지나면 상무주다.
상무주(上無住).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머무름이 없는 자리. 머물 곳도 없는 진리의 자리에 자리하기 위해 일찍이 보조국사 지눌부터 2천3년 11월에 입적한 청화 큰스님까지 수많은 선객이 수행 정진 했던 곳으로, 금강산 마하연과 함께 한국 불교의 선맥을 이어온 청정 도량이다.
산들이 온몸으로 철벅철벅 걸어와 조복하고, 기암과 적송이 빚어낸 선경이 신선도 탐낼 듯 아름다운 곳, 그곳에 상무주암은 조촐한 모습으로 그림처럼 앉아있다. 누군가 큰 복을 지어 붉은 양철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앞면엔 큰 유리창을 달아 암자의 모습을 새롭게 꾸몄다. 지난 가을에 지어진 경내에서 가장 좋은 건물인 해우소는 햇빛에 반짝반짝 빛난다.
스물다섯 해 겨울을 이렇게 묵묵부답으로 홀로 앉아 있는, 이미 바위가 되어버린 도암 스님의 모습이 무겁다. 몇 해 전 추석, 암자에 들렀다가 스님이 손수 차려주신 점심 공양 대접을 받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후로도 몇 번을 부엌 맨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어머니 젖무덤같은 반야봉을 마주하며 함께 든 공양의 그 달콤함. 지눌 스님은 상무주에 든 지 삼년만에 대각을 이뤘다는데, 25년째 암자를 지키고 있는 스님 앞에 서면 오금이 저려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스님이 내준 자리를 차마 함께 할 수 없어 스님의 뒤에 앉아본다.
내 것이 무엇이며, 내 것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을 내 생각대로 사는 게 얼마나 될까?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쑥 뽑아내자 새로운 세상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다. 1천 2백 미터 고지에 붕 떠가는 나를 바라본다. 세찬바람 속에서도 벅찬 풍경으로 가슴 뜨끈해지는 이순간이 생의 전부라 해도 좋겠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여기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살고 싶다.
몸을 뒤채며 흘러가는 구름 틈으로 천왕봉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등줄기에 달라붙은 햇볕 한 줌이 따뜻하다. 근대 선지식의 선구자인 경봉(1892-1982) 큰스님의 선필로 쓴 상무주 현판과 염송설화 30권을 쓰다가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구곡각운대사의 필단(筆端)사리 삼층 석탑이 쓸쓸한 겨울 암자를 지키고 있다. 사흘만에 처음 든 객을 보내는 스님의 뒷모습도, 세월을 견디고 남은 사리탑위에도 본래대로 찬바람만 분다.
다시 누군가에 의해 산사의 적막이 깨어지기까지 눈과 바람, 해와 달과 별이 이 암자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필단 사리탑이 그 옛날 방광하여 세상을 놀래키듯 우리는 저산아래 어디쯤에서 돌탑이 되어 방광하는 불빛을 보고 상무주가 간밤에 불탔다고 얘기할 것이다. (끝)
(계간 선수필. 2006년상반기 수필 36편에 뽑힌 글) |
첫댓글 나는 현재 눈치보고 있는데 만만치 않을 듯 하네.ㅠ
알 대장 힘 빠지지않게 의견들 표명하세유~~~
아무래도 지리 종주는 무리일 듯. 근데 가고 싶기도 하다. 봄에 간 건 오래되어서리. 정 안되면 넷째주로 옮길까? 나는 어머니 뵈러 가는 거 둘째주에 가게 될 듯하니. 이번에는 셋째주가 연휴니 미루고 옮겨서 가도 될 것 같아. 셋째주로 간다면 아예 1박2일만 짜고...다들 3일 연속 빠지기는 어려울 거야.
나도 구미가 당기긴 하는데, 2박3일 통째로 가는 건 무리일 듯싶다. 지리산 종주를 여러 차례 해봤지만 보통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가면 끝이잖아. 대원사에서 치밭목산장 거쳐 천왕봉 가본 사람은 별로 없을 테고 나도 마찬가지네. 1박 2일로 대원사, 치밭목산장, 천왕봉, 중산리나 백무동 정도로 하면 어떨까.
구미가 무지 땡기고 이왕이면 알과 함께 비박도 좋을 듯 하긴한데...
참석해야할 결혼식도 있어 고민이 많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