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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믿음의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靑野
십계명(The Ten Commandment)
제 I 장 십계명의 유래
십계명의 유래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려면 아래와 같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여야 한다. 즉 그 계명은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이다. 이것들을 해결함 없이 그 문제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 이유는 오늘날 자유주의 비평가들 중에 단편 문서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이방의 법전의 영향을 받은 법전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제 1 절 십계명을 받은 연대
십계명을 받은 연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4-5개월이 지난 때였던 것 같다. 출애굽기 19장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3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고 했고, 또 19장 3절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밤낮 40일을 지냈다(출24:634:26, 신9:910:10).이상의 것을 가산하여 보면 출애굽기 제1년 5월 10일경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것 같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하는 날은 제1년 1월 1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출12:213:423:1534:1816:1).이 연대는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연대였다. 그러므로 그 연대로서는 우리가 그 계명을 받은 연대를 알기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제적인 연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정확한 연대(절대 연대)를 잡기가 곤란하다. 그 연대는 학자들의 학설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할레이(Henry H.Harlley)씨는 그의 저서 "성경핸드북"(Pocket Bible Handbook)에서 두 가지 학설을 제시하고 독자들의 취사 선택에 맡긴다. 즉 중요한 두 견해이다. 그것을 이하에 기록하면 "아멘호텝(애굽왕) 제2세 때(B,C1450-1420)혹은 메렌푸다 때(B.C.1235- 1220) 로 보는 것이다. 만약 출애굽이 아멘호텝 제2세의 치하에서 행하여졌다고 하면 도드모스 제3세는 이스라엘을 중합한 자로 되며 그의 자매는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 자매가 유명한 할셉슈트 여왕이다.
만약 출애굽기 메렌푸다의 치하였다고 하면 이스라엘의 대 압박자는 람세스 제2세로 그의 딸이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모세는 도드모세 제3세의 치하가 아니면 람세스 제2세 시대 그 어느 공주에 의하여 양육되었다1)"고 했다. 소안론 박사는 위의 양 학설에서 전자를 택했다. 그의 [구약사기]에 의하면 출애굽 연대를 주전 1491-1451년경으로 잡는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할레이씨와 소안론씨의 견해는 약 40년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2)
김윤근 박사는 위의 양자를 종합하여 주전 약 1450-1400년경으로 추론한다. 그는 그의 저서[구약 세계 역사]에서 고증을 들면서 면밀하고 학적인 자세로 취급하고 있다3) 본인의 소견도 할레이(H.H.Halley)와 김윤국 박사의 학설에 근거하여 주전 약 1450-1400년경, 즉 아멘호텝 제2세 시대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받은 연대는 확실하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연대를 가정한다면, 출애굽은 주전 약 1450년경으로 보며 이스라엘의 연호는 그 해가 제1년이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제1년 5월10일경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음으로 국제 연대(애굽)는 주전 1450년 5월 10일경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제 2 절 계명을 받은 장소
계명을 받은 장소에 대하여 학자들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성경에 의하면 시내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루비딤을 떠나 시내광야에 이르러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쳤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산 위에 불러 올리게 되었다(출19:2-3) 그 산은 출애굽기 19장 11절에 [시내산]으로 지적이 되어 있다. 그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그 산에서 모세는 40일 동안 지내면서 그 계명을 받았다.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출34:2-319:20 참조)고 했다. 그러면 이 산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 위치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엉거(Unger)박사는 "의심없이 시내산의 위치는 시내 반도에 있는 제벨 무사(Jebel Musa=모세의 산)이다. 이곳은 오늘날 성카덜린(St.Catherine) 수도원에 의하여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와디 화이란(Wadi Feiran = 화이란 계곡)의 오아시스의 근처에 있는 제벨 세발(Jebel Serbal)로 찬성하고 있다.4)
이상의 두 학설 중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엉거의 견해를 정당하고 유력하게 본다. 본인도 위의 의견에 같은 견해를 가진다. 그 이론에 대하여는 본인이 쓴 [구약 고고학]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제 3 절 계명을 주신 분
계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인간이 아니고 전능하신 유일신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먼저 이방인의 법전(Babylon 법전, 앗수르 법전 등)과 다른 증거이다. 이방인들의 신은 인간이 고안해 내고 생명이 없는 죽은 신이다. 즉 그것은 우상이요, 거짓신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요, 인간과 우주의 섭리와 통치자이시다. 그 하나님은 친히 두 석판에 글을 쓰시어 계명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그로 시내산에 올라오게 하였다. 그때 시내산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 휩싸여 있었다"(출20:21)."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갔다"(출20:21)고 기록했고, 시내산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출24:15-18). 그 증거는 "하나님의 산"이라 한 것이나, 또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문 것은 다 하나님이 그 산에 임하심"을 의미한다(출34:5,민11:25,출24:12,31:18,32:15-16,신5:22).그리고 여호와께서 두 석판에 계명, 즉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기록해서 모세에게 주었다(출 31:18). 이것들은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다(출 24:12,32:15-16, 신4:13,5:22,9:10, 고후3:3). 그러므로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요,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요 언약이다.
제 4 절 명하신 이
그 언약을 하나님께로부터 누가 받았는가? 그것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이가 누구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셨다(출24:12)",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셨다"(출32:15-16)고 했다.
모세라는 인물은 성경에 단 한 명 뿐이다. 성경에 동명 이인이 많이 있다. 즉 유다, 요한, 마리아, 예수아 등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하나뿐이다. 그는 출애굽기와 역대기서에 의하면 레위 지파에 속한 아므람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님은 요게벳이다. 어머님 요게벳은 신앙이 독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하고 그 말씀으로 자녀를 교육함에 유능한 여성인 것 같다. 그 증거는 모세만이 아니라 아론과 딸 미리암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 부모의 슬하에서 자란 모세가 왕 바로의 딸, 공주의 양자가 되었다. 그가 한번 실수로 그곳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에 갔다가 하나님을 뵙고, 사명을 받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중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것이다.
제 5 절 두 돌비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출24:12)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출31:18)이라고, 한 것을 보아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돌판은 둘이다. 그 두 돌판의 이름을 "증거판"이라고 했다(출32:15-16,신4:15,5:22,9:10,고후3:3).또 증거판을 "법판"이라고도 호칭했다. 그 증거판이 후에 "십계명"이라는 별명이 부쳐져 사용되었다(출34:28,신4:13,10:4). 증거판, 즉 법판은 양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즉 이 편과 저 편, 양편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첫번 두 증거판들을 깨어졌고(출32:18), 두 번째 받은 석판이 전승되었다. 또 그것이 법궤 속에 보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석판들과 두 번째 석판들의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석판 제조자의 차이 이다. 첫번 석판들은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거기에 친히 글을 쓰신 것이다. 두 번째 것은 모세가 첫번의 것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출34:1-2).
그러나 글을 쓰신 이는 다 하나님이었다. 또 두 돌비에 율법과 계명이 기록되었다(출24:12)고 했다. 이 계명은 십계명이고, 율법은 십계명에 근거한 하나님의 백성의 제법들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두 석판에 기록이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그 학설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 유대학자 필로(Philo)와 유대인들의 견해: 그들은 현재까지 십계명을 각각 5계명씩 두 돌비에 나누어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 근거는 출애굽기 32장 15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5) 즉 제1계명에서 제5계명까지가 첫째 돌비에 기록되어 있고, 또 제 6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가 둘째 돌비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2) 첫째 돌비에는 세 계명, 즉 제1계명에서 제3계명까지 기록이 되었다는 학설이다. 이 주장은 카토릭(Catholic)교회와 루터(Luther)교회에서 따르는 견해이다. 그들은 어거스틴(St.Augustione)의 이론에 근거하여 된 것으로 어거스틴은 신명기에 기준하여 세워 놓은 이론이다. 그러므로 신명기 (5:6-21)와 출애굽기(20:1-17)의 선택에 따라서 학설의 차이가 있게 된다.5)
(3) 이상의 학설에 반대하는 학자들 중에 대다수는 첫째 석판에는 제1계명에서 제 4계명까지 기록이 되었고, 또 둘째 석판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견해이다. 이 학설은 출애굽기 20장 1-17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학설은 각 교파의 유명한 학자들과 칼빈(Calvin)과 칼빈주의적 교단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십계명 그 자체가 두 부분으로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신륜이 나타나 있고,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인륜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 단어 면으로 볼 때도 이 이론이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이 학설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주전 1450년경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에 초청하시고, 그에게 친히 기록되어 주실 뿐 아니라 말씀으로 들려주어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과 계명은 모세의 작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후대에도 모세의 작으로 인정이 되었다. 그것은 구약에서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영(E.J.Young)박사는 신구약 나타난 모세 오경에 대한 칭호를 조사하여 아래와 같이 증거한다.
1) 구약에서 모세 5경의 칭호
(1) 율법: 수8:34,에스라10:3,느8:27:14,10:34-36,12:44,13:3,대하14:4,31:21,33:8
(2) 율법 책: 수1:8,8:34,왕하 22:8,느8:3.
(3) 모세의 율법:수8:31,23:6,왕하14:6,느8:1.
(4) 모세의 책: 에스라6:18,느13:1,대하25:4,35:12.
(5) 주의 율법: 에스라7:10,대상16:40,대하31:3,35:26.
(6) 하나님의 법: 느10:28-29.
(7) 하나님의 율법책: 수24:26,느8:16.
(8) 주의 율법책: 대하17:9,34:14.
(9) 그들의 하나님의 율법책: 느9:3.
(10)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책: 단9:11,13,말4:4.
성경 기자들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모세 오경을 "율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책"이라는 구조를 명시하고 인간적 저자는 "모세"인 것을 강조했다. 신적 저자는 "주"또는 "하나님"을 지적하고 있다.
2) 신약에서 모세 5경에 대한 칭호
(1) 율법책: 갈3:10.
(2) 모세의 책: 막12:26.
(3) 율법: 막 12:5,눅16:16,요7:19.
(4) 모세의 율법: 눅2:22,요7:22.
(5) 주의 율법: 눅2:23-24.
모세 5경의 저자는 神, 人 두 저자를 가지고 있다.7) 신적인 면에서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근본적인 저자이시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모세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요, 서기관이며 그는 편집한 것이 아니라 저자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고, 그것을 쓰기는 인간 모세가 썼다. 그러므로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영적인 면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명하시고 그것을 모세가 받아서 기록한 것이다.
제 II 장 십계명에 대한 학설
십계명에 대한 학설은 이렇다 할 뚜렷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성경과 신앙적인 학설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 성경과 바른 신학에서 떠난 학설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십계명 한 부분에 대해서보다도 율법 전체에 대하여 파괴 또는 이 설을 세워 파괴하거나 또는 독소를 풍기기 때문이다. 즉 구약 전체 39권에 대한 저자, 연대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반면에 이방신화의 영향이니, 또는 이방 법전의 영향과 인용이니, 아니면 비역사적이고, 저자의 비사실적 과장이니 한다. 즉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주자들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이것을 보통 학자들은 하등비평(Lower Criticism or Textual Criticism)과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이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양 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단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헛수고이고, 그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학설이 붕괴될 날도 눈앞에 다가와서 하나 하나 붕괴되고 있다. 그것은 "신구약 고고학"의 공헌이다. 이 "신구약 고고학"은 본인의 쓴 책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이하에 자유주의 학설을 살펴보고, 그후에 보수주의적 입장을 상고하여 보고자 한다.
* 하등비평 (Lower Criticism):성경의 본문을 비평적으로 연구하고, 또 비교 연구하여 저자의 손으로 된 원문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사본들을 연구하고 오류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문서설이 나오고 또 이방 법전 영향설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은 Pfeiffer, Driver, Wellhausen등이다.
*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이것은 성서를 문학적 비평(Literature Criticism)또는 역사적 비평(Historicial Criticism)이라고 한다. 그보다 고등비평은 문학적 소산의 기원 형태 및 가치에 관한 내부의 특질과 내용을 기초로 삼아 증명하여 발견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이성학파(Rationalistic School)와 복음주의 비평파(The Evangelical School of Criticism)가 있다. 이들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학자들이 거의 속하고 있다고 하겠다.
제 1 절 자유주의 학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비평을 가하고 있다. 그들의 비평의 대상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모세 오경이다. 모세의 오경은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모세의 저작권만 아니라 저작 연대, 저작 장소에 대하여도 부인을 당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감설도 부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하에 자유주의자들의 학설과 그들의 계보를 살펴보자!
1) 자유주의자들의 학설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 이 주석은 자유주의 첨단을 걷는 학자들이 집필한 주석이다. 이 주석은 모세 오경에 관한 주석 서문에서 문서설을 제창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문서설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문서설은 그릇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세 오경에 대하여 주장하는 문서설들은 세 그룹이 서로 다른 특성과 사상을 가지고 차이를 나타내는 법전들이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법전들 중의 첫째가 J.E를 포함한 것이라는 것이다(출20:23). 십계명을 비교하여 보면 알 수가 있다고 한다.
J. 는 영어의 Jehovah(여호와)라는 명칭의 약자이다. 즉 오경이 기록되기 전에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신에 관한 책들이 있었다고 하여 그 책, 그 문서의 이름을 J.라고 명칭한 것이다.
E.는 엘로힘의 약자이다. J문서와 같이 엘로힘이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하나님에 관한 문서가 있었는데 그 문서를 E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세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고, 어떤 수집가에 의하여 편찬되었다고 한다.
둘째, 법전은 P를 포함한 율법이다. 히브리종교, 종교 희생과 의식의 교훈과 관계된 것이다. 이것의 큰 부분은 출25장-31장, 출35장-40장, 레1장-16:17, 민1장-10장 18절, 15장 18절 이하-19장, 민25장 10절-36장이다. 즉 이것은 Priest Code이다.
P.는 Priest의 약자이다. Priest는 Priest code 즉 제사장 법전의 약자를 따서 만든 것인데 전에 제사와 제사장의 규례에 관해서 기록된 문서들이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 문서를 수집한 자들이 그것을 오경에 넣어 편집했다고 한다.
셋째는 율법의 그룹이다. 이것은 부분적인 도덕 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다(레17:26). 이것은 학자들에게 "거룩의 법"(The Law of Holiness)이라고 하는 것으로 첫 자의 약호를 따라 H.로 표시한다"8)고 했다.
또 위의 책에서 신명기 5장 1-5절을 해석하고,5-11절까지를 다시 해석하면서 기록하기를 "5-11절은 근본적으로 십계명의 첫째 계명의 진화를 의미한다"9)고 했다. 이는 성경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성경은 점점 진화되어 오늘날의 성경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 히브리 기자들이 이방 신화의 단편들을 받아 그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가미하는 사상적 진화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 Pfeiffer(파이퍼)는 "오경 내에 율법에 열 개의 법전이 있었다."즉 언약 법전(출20:2223:19), 의식 법전 (출34:10-26, 22:27하-30[H.22:28하-29],23:2,15-17),12(원래는 10이였다고 함) 범주들(신12:-26:),거룩한 법전 혹은 p. 등등이다.10)이것들은 주전 400년경에 편집 간행된 것이라"11)고 했다. 또 그는 언약 법전과 의식 법전을 논하면서 그 근본 형식이 바벨론(Babylon), 하무라비(Hammurabi 약 1500 B.C) 법전과 앗수르 법전(약 1350 B.C)과 같은 종류이라12)고 했다.
그는 하무라비(Hammurabi)법전을 성경의 출애굽기와 신명기와 비교연구 하면서 은연중에 위의 두 책들이 하무라비 법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교훈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독자적인 것을 부정하고, 전대의 사회와 그 주위의 제국의 법전에 영향을 받아 만든 결정체이라13)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옛날 가나안의 법전과도 비교연구하며, 그것이 구약 율법에 준 영향에 대하여 밝혀 내려고 발광한다. 그 이유는 파이퍼(Pfeiffer)는 오경이 주전 400년경에 편집된 것으로 보며, 가나안 법전이 그 이전(1150-1050 B.C)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들이 서로 어떤 연락이 있지 않은가 살핀다.14) 그래서 그는 결국에 가서 상호 깊은 연락이 있는 것으로 단정하게 되었다.15)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십계명에 대하여서도 두 편집이 있었다고 본다. 그 첫째가 신명기적 편집(D.신5:6-21,<신5:6-28>)과 둘째는 제사장적 편집(출20:2-17)이다. 이것들은 서로 동기가 다르다. 후자는 의심없이 전자보다 후대의 것인데, 주전 500년 보다 이르지 못하다고 보고, 5세기 후반으로 본다.16) 그는 이상과 같은 비성서적이고, 비신앙적인 이론을 주장하며, 파괴적인 학설로 성경과 십계명을 대하고 있다.17)
또 근래에 한국에서 출판된 구약성서 개론에서도 이상에 열거한 파이퍼의 학설을 소화하지도 않고 액면 그대로 발표하고 있음을 보게된다.18)
이상의 자유주의 학자들과 그들의 학설은 암시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적극적이고 직설적인 학자는 케일(Kyle)이다. 그는 출애굽기를 고고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하면서 위에 논한 율법만 아니라 성막까지도 애굽적이라고 했다. 그 애굽적인 것은 바벨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그에 따르면 오경의 것은 바벨론과 애굽의 것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성경에는 오경의 모든 기자들의 근거를 말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도, 또 성막에 대하여서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연적이고 시대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바벨론 사람의 것이 아니고 애굽적이라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그 성막 자체를 나타내는 그 시대의 성막 문화가 증명한다. 이집트의 건축, 마당, 반 평민의 방(Semiprivate Apartment)과 일반인의 안방(Innerprivate Apartment)은 현재까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또 그 지경에서 유랑하고 있는 베드원(Bedwin)에게서와 오늘날 고고학의 발굴자들에 의하여 증명이 된다"19)고 했다.
"애굽의 것과 같다. 즉 성막(회막)의 기구와 제사장의 의상이 같다"20)고 했다. 그는 그것만 같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도 같다는 것이다, "또.. 이것들의 그 확실한 애굽의 특성은 바벨론의 것에 근원을 두어 후대에 세워진 것이라"21)고 했다.
2) 자유주의자들의 계보
자유주의자들의 계보를 찾는 것은 심히 어렵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자들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도 있었던 것 같다. 바울 사도는 헛된 철학으로 교인들을 유혹하고 교회를 어지럽힌 데 대하여 말씀했다. 그뿐 아니라 교부시대를 거쳐서 종교 개혁시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종교개혁 후에 나타난 자유주의자들을 들어보겠다. 종교개혁 후에 인문주의가 왕자에 앉은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때에 기독교 내에도 인문주의가 부식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날개 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그것이 표면화되기는 영국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1651년)의 레비탄(Leviathan)에서였다. 그는 필연적인 두뇌를 가지고 성경 연구에 발을 들여놓은 바 전통적인 성경관과 이론이 감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여기에 발을 맞추어 베네딕트 스피노자(Benedict Spinoza,1670년)는 그의 저서 "Tractatus Theologic-Politicus"에서 반 초자연주의 원리를 제창하고, 성경에 공격의 화살을 겨누었다. 이들보다 큰 파문을 일으킨 자는 카토릭(Catholic)의 사제였던 리챠드 시몬(Richard Simon 1678년)이다. 그는 그의 책 "Historic Critique du Vieux Testament"에서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고 연대에 대해서도 칼을 대어 장난을 했다. 시몬의 사업은 할레(Halle)에서 신학교수로 있던 J.E. 심러(J.E. Semler)의 작품에서 결실했다. 심러(Semler)는 1791년에 죽었는데 파괴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 다음에 특기할 인물은 죠콜후라이드 아이콘(JohGottfried Eichorm)이다. 그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비평주의 소수에 유동이 되었다. 제19세기에 들어서면서 18세기의 철학과 신학의 무능 때문에 성경이 진통을 겪는 때라고 하겠다. 구약성경을 본 위치에서 끌어내리어 인간의 어떤 책들과 같이 취급되고 경시되는 때이다. 특별히 오경 비평이 대두된 것이다. 그 인물들을 소개하면,
(1) 베테(Wilhelm Martin Lebrecht de Wette,1788-1847):그는 구약 책들의 전통적인 저작권을 대항하여 반대하고, 합리주의 견해를 가지고 논했다.
(2) 에발드(Heinrich Ewarld 1875):그는 베테(de Wette)와 같은 입장이다. 그는 베테의 단편설 (The Fragment Hypothesis)을 떠나서 보충설(The Supplementary Hypothesis)을 세웠다.
(3) 브레크(Friedrich Bleek 1793-1859):독일 본 대학 교수로서 보충설에 찬동한 학자이다.
(4) 드라이버(Samuel Polles Driver 1891):그는 총론에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는 웰 하우센(G.K.Wellhausen)학파를 따른 학자이다.
(5) 신문서설(TheNew Documentary Theory):여기에는 홉펠드(Hermann Hupfeld 1796-1866), 딜만(A.Dillmann 1823-1894)등이다. 이들은 전의 문서설을 뒤엎고, P.가 오경의 전체의 골격이요, 역사적인 기초로 믿고, P.E.S.D.의 문서설을 주창한 자들이다.
(6) 발달설(The Development Hypothesis):이것을 일명 웰하우센(Wellhaus -en)학설 이라고도 한다. 이 학설은 J.E.D.P.의 재료를 그 사상의 발달 순서에 따라 진화론적으로 연대를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 학자로서는 루이스(E.Reuss,1804-1891), 베이크(W.Vake), 그라프(H.Graf), 웰하우센(Julius Wellhausen) 등이다.
(7) 최신 문서설(The Newest Documentary Hypothesis): 이것은 발달설의 재검토라 할 수 있다. 발달설의 문서들을 검토하여 문서를 근원에 찾아 올라간다고 하여 J.문서를 J1 J2등으로 세분하였다. 또 새로운 문서설을 넣어 가장 원시적이었다고 했다. 학자로는 스멘트(R.Smend 1851-1913), 오토 아이스펠트 (Atto Eissfeldt 1877-), 그리고 요한네스 헴펠(Johannes Hempel)등이다. 특기할 것은 파이퍼(Robert H.Pfeiffer,1892-1958)이다. 그는 이태리에서 출생했고, 미국 뉴욕주 산보른 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했고, 대학교수로 일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모든 사상을 종합하여 학설을 세워 자유주의 대표자가 되었다.
제 2 절 보수주의 학설
이상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휴지화 시키려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려고 하고 학설의 칼로 갈기갈기 찢으려고 한다 그들은 구약의 문서설을 내세우고 저작자와 저작 연대를 모세와 그의 시대에서 끌어 내리고, 구약 율법의 근원을 바벨론에 두고 애굽의 것의 모방임을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사상의 오류이고, 억측에 불과했다.
물론 "근동에 모세의 그것보다 더욱 고대의 법전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하무라비 법전은 17세기 또는 18세기로부터 내려 왔다. 그러나 그것은 수세기 전부터 스메리아(Sumeria) 민족과 셈족의 (Semitic)법을 모아서 세련시킨 것 뿐이다. 지중해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들도 그들의 법들을 가졌었다. 실지로 그들은 천연 그대로의 법이든지 아니면 법학적인 큰 전통의 영향을 가진 법이든지 간에 있었다. 알트(Alt)와 다른 학자들이 지적함과 같이 모세의 법은 이 많은 것들과 유사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현저하게 큰 차이가 있다. 그 예로 성경의 히브리법은 두 가지의 유형의 특성이 있다. 즉 절대적(Apodictic = 필연적)인 법23)과 상대적(Casuistic = 결의론)인 법23)이 있다.
전자는 좋은 예로 십계명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특별한 경우에 전차없이 금지명령이나 또는 명령이 포함된 것으로 고대법에서 찾을 수 없는 독자적인 법이요, 다른 법의 근간이 되는 법이다.
결의론적(상대적)인 법은 경우에 따라서 개인의 처지에 따라서 특별한 법을 행하게 했다. 그것은 하무라비 법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히브리법도 이것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많은 가정적 법칙들을 따라 된 근 300여 조항들이 있다. 그 형식은 "만일 사람이 이와 같이..하면 그 때에 형벌은...같이 할 것이라"는 것이다(24)
"또 율법의 형식 외에도 모세의 율법은 분명히 윤리적이고, 영적인 음률이 탁월하게 들어 있다. 또 주의하여 보면 다른 법전들에게는 결여되어 잇는 자비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26) 또 이 율법은 시내산에서 행한 언약의 율법의 형태였다. 하나님께서 그 산상에서 모세와 주고 받은 언약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약서라고 할 수 있다(출20;23).우리는 그것을 "십계명"또는 "열의 말씀"이라고 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신명기의 계시와 영적인 부흥으로 신정사회와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수행함이 목적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의 법은 사회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었다. 신정사회의 표본이었다. 27)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은 가당치도 않다. 자유주의자들이 학설에 대한 비판 중에 귀한 책은 박형룡 박사가 쓴 "신학 난제 선평"이다. 그 책에 자유주의자들의 학설을 소개하고 그것을 잘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와 보수주의의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였다."28)
제 III 장 모세의 율법과 이방 법전
위에서 자유주의 학설과 그 학자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 학설로 보수주의적 학설을 소개했다. 이하에서도 모세의 율법과 이방인의 여러 법들과 비교하여 보겠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십계명이 애굽의 영향을 받았는가? 또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에 근거를 두었는가? 그뿐 아니라 헷 법전과 앗수르 법전과도 관계를 가졌는가? 이상의 모든 이론을 검토하여 보겠다.
보수주의에서는 오경이 모세의 유일한 저작이요, 이방 법전들과 전혀 무관하다고 믿고 있으며, 그 이방의 법전들과 전혀 무관하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오직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것이라 믿고 있다. 또 그 오경의 저작 연대도 주전 15세기경인 것에 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모세의 율법은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보다는 후대의 것이요, 헷과 앗수르 법전보다는 퍽 전대의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 사이에 끼인 모세의 율법을 그 전대와 그 후대의 법전들과 비교 연구하여 보는 것은 귀중하고 흥미 있는 일이다. 그 이유는 그 일로 인하여 자유주의 학설의 사실 여부를 알 수 있고, 또 보수주의 학설의 확실성을 재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1 절 언어적 차이
모세의 율법과 이방법전들 사이에는 언어적 차이가 매우 크다. 먼저 하무라비 법전은 고대 바벨론 어인 쐐기 글이었다. 앗수르 법전과 헷 법전들도 역시 그 민족의 언어로 기록했던 것이다. 그같이 모세의 율법도 예외 없이 모세가 속한 히브리 민족의 언어인 히브리어였다. 그러므로 모든 법전들이 그 민족과 국가에게 속한 자국어로 기록이 되었다. 이 사실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늘날 고고학이 발달되어 그 법전들의 사본들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여러 학자들이 거이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쐐기 글은 고대 바벨론 글이다. 그것을 일명 설형 문자(Cuniform Writing)라고 한다. 그 연대는 주전 18세기로 본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율법에 사용된 언어들의 문체와 구조인 것이다. 모세의 율법의 문체와 구조는 그 이전에 있던 하무라비(Hammurabi Code)법전과 그 후대인 헷(Hittite)과 앗수르 (Assirian)법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들의 원어적인 비교 연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이 있으므로 비교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또 그 성경의 많은 고대 사본들이 있으므로 매우 유리하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전과 헷과 앗수르 법전들은 그 원어 사본들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그것들이 있어도 그 언어 실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그 원어적인 비교 연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그 법전들의 번역판을 가지고 비교 연구하는 것이다. 그 번역판에도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번역판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이 얼마나 원문에 근사한 것인가? 라는 문제 때문이다.
여기서 사용한 번역판은 American Sunday School Union에서 출판한 George A. Barton 역인 [Archaeology and the Bible]이다. 우리들은 모세의 율법과 위의 이방 법전들과 서로 비교하여 보면 그것들 사이에는 전혀 무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은 그 특성이 금지령적 또는 귀납적 (Apodictic)이고, 명령적 또는 연역적 (Casuistic)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모세의 율법이 귀납적이고 연역적인 성격, 즉 Apodictic Casuistic 은 E.J. Young의 이론을 인용한 것이다. 이상의 두 단어는 모세의 율법과 이방 법전을 비교 연구하는데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은 Young박사의 공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은 문체와 구조와 특성에 있어서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 율법의 언어도 문체와 구조에 있어서 그 두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모세의 율법의 언어는 귀납적이고 연역적이다. 귀납적이란 십계명의 언어적 특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즉 명령을 말한다. 절대적인 명령형이다. 거기에는 금령과 명령이 포함되어 있어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성격을 가진 법이다.
다음에 연역적인 것이다. 그 문체와 구조는 모세의 율법에서만 아니라 하무라비 법전과 헷가 앗수르 법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보통 성질을 가진 법형이다. 그것을 예로 들면 '만일 사람이 ... 하면...할 것이다"라고 볼 수 있느니 보편적인 형식들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이 애굽이나 바벨론의 것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이는 자유주의 자들이 모세의 율법의 성격을 바로 깨닫지 못한 이유에 기인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의 연역적인 성격의 근거는 이방 법전들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귀납적이고 절대적인 율법의 성격에 근거한 것이다. 고로 모세의 율법의 두 특성은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만약 모세의 율법이 자유주의 자들의 이론대로 이방 법전들에게서 영향을 받거나, 그 근거를 거기에 두었다면 모세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두 특성, 즉 연역적인 면만 아니라 귀납적인 절대적인 특성들이 이방 법전들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절대적 특성이 이방 법전들에게는 없다. 이들과 모세 율법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제 2 절 역사적인 차이
우리는 두 번째로 모세의 율법과 이방법전들과의 차이를 연대적으로 비교 연구하여 보자! 위의 양자의 차이는 연대적인 면으로만 아니라 역사적인 내용을 보아서도 차이가 있고, 역사적인 지역을 비교하여 보아도 차이가 있다.
먼저 연대적으로 볼 때 양자는 수 백년의 차이가 있다. 학자들이 공인하는 것과 같이 하무라비 법전은 주전 20세기에서 17세기 사이의 것으로 고증하고 있다. 또 헷과 앗수르의 법전들도 주전 14세기에서 13세기로 추정한다. 이에 반하여 모세의 율법을 주전 15세기 중엽으로 고증이 된다.
이렇게 보면 연대적으로 모세의 율법은 하무라비 법전과 헷과 앗수르 법전 사이에 끼어 있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은 자유주의 자들의 학설대로 하면 하무라비 법전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그리고 헷과 앗수르 법전에 영향을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증거를 그 법전들과 역사적인 면을 들어 비교하여 보자!
1. 왕정시대
이방 법전들이 기록된 그 시대는 왕정시대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왕을 모시고 있고 왕의 통치를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법은 왕정에 대한 법이 많을 뿐 아니라 계급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보면 왕이나 왕정의 흔적이 없으며, 계급적인 차이가 별로 나타나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왕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통치자이시고, 하나님의 법이 국법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그 인물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임받아 그 법에 따라 다스리고 인도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은 백성으로 하나님께 향한 신앙과 그의 법에 절대적인 복종은 강조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애굽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을 세웠다. 그러나 근거가 없다. 애굽의 학문을 배운 모세는 애굽의 왕과 애굽의 왕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모세의 오경에 의하면 그 영향이 추호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모세는 율법을 기록할 때에 인위적이고, 세상적인 면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적이고 하나님께 들리어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볼 때에 느끼는 것은 이방의 것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특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아 모세의 율법은 독특하고 신비스럽다고 하겠다. 그 율법이 그렇게 타국의 법과 생활의 영향이 없이 지낸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때문이다.
2. 종 교
종교적인 면도 큰 차이가 있다. 바벨론만 아니라 애굽도 역시 다신론적이다. 그들의 법전은 그들의 다신론적인 신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모세의 율법은 유일신적이다. 그 유일신 그들이 애굽에 들어가기 전 그들의 조상들이 섬기던 그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그 자신 외에 다른 신을 인정치 않고, 다른 신들을 섬김을 허락치 않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이적과 능력에 의하여 구원받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그들의 종교생활의 중심은 제단이었다. 그 제단은 출애굽하여서는 성막으로 되었다. 물론 긴 여행 때문이라고 할런지 모르나 그들은 가나안에 정주 했을 때도 단일 제단(성막)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여러 제단과 제전들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방의 영향을 받았다면 종교적인 면에도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며, 그 영향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이 전혀 없다.
3. 사상과 생활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여 보면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또 그들은 이방 것에 대한 경멸과 질시를 한다. 또 자기들의 것에 대한 우월감만 아니라 절대시함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의 것을 그들 속에서 제거, 배격, 그리고 소멸하는 운동을 일삼아 왔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이방의 것을 진멸하고 소멸한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이 만약 이방인들의 사상과 생활에 자극을 받고 영향을 받았다면 그렇게 배타적이거나 또는 자기들의 것을 절대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볼 때 사상적으로나 생활적으로 독자적이고, 비타협적이고, 그리고 비융화 적이었다. 매우 이질적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몇 가지 면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보아도 크게 차이가 있음이 증명된다. 이방인들은 왕정시대였고, 이스라엘은 신정시대였다. 종교적으로 보아도 이방인들은 다신적이였으나 이스라엘은 유일신적이었다. 끝으로 그들의 사상과 생활도 정반대였으며 매우 이질적이었다.
제 3 절 내용적인 차이
위에서 언어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에 차이가 있음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용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클 것이다. 물론 그 많은 법조문 가운데 유사한 것이 없다고 하기에는 곤란하다. 특히 법 중에서는 유사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사상과 행습이 유사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우리들은 모세의 율법과 이방의 법전들을 비교하여 보겠다.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과 하무라비 법전을 비교하여 보고, 다음에 헷과 앗수르 법전과 비교하여 보겠다.
1. 하무라비 법전과 비교
하무라비 법전(Hammurabi Code)은 바벨론왕 하무라비 시대의 법전으로 고증이 된다. 하무라비왕은 바벨론(Babylon) 제국의 제6대 왕이다. 학자들은 고증에 의하여 그의 치세를 주전(B.C).1728-1680년경으로 잡는다. 그렇다면 그의 법전도 그 당시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 법전은 큰 비석인데 비석의 머리 부분에는 하무라비 왕이 자기가 섬기는 신인 태양신 앞에 서서 그 법전을 받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설형문자(Cuniform)로 된 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비석의 전후면에 기록된 법은 전면에 18행, 후면에 28행으로 되었는데 그 중에 5행은 마멸되어 알 수가 없다.29)
이 법전은 1901년 (A.D) 수사(Susa)에서 몰겐(de Morgan)과 쉬케이(Sche)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그 법전이 구약 성경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법 내용과 다소 유사성이 있다고 하여 Wellhausen(웰 하우젠)가 케일(Kyle)은 모세의 법이 하무라비 법전의 영향을 받았고, 거기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했다.30) 그들의 학설에 대하여 이상에 언급했다.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이론은 온당치 않다. 그 이유는 두 법이 질적인 면만 아니라 양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이것이 모세의 율법의 특성이요. 또한 내용이다. 또 모세의 율법은 연역적인 법이 귀납적인 법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 귀납적인 법은 소위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명령과 금령이 포함되어 있다. 그 법은 절대적이고 불변측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전은 이 율법과 매우 차이가 있다. 그 법전에는 연역적인 법, 즉 일반적인 법은 있으나 귀납적인 특수 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하무라비 법전을 보면 제1조부터 '만일 사람이....하면 그 때에 형벌은... 한다"고 한다. 그 법전은 가정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두 법은 그 법의 성질부터가 크게 차이가 있다. 그것에 따라서 내용의 차이도 있다. 그러면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 한가지 면인 상대적 법, 즉 연역적인 법과 하무라비 법전의 내용적인 차이를 살펴보자!
(1) 과수원 법
이 법은 구약 레위기 19장-23-25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제3년까지 먹지 말고 제4년에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5년에는 먹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무라비 법은 제60조에 "만약"어떤 사람이 과목을 정원지기로 들에 심게 하고 그 정원지기가 과목을 심을 수 있고 그것을 4년 동안 가꾸었다면 제5년에 과목의 소유자와 정원지기는 서로 그것을 분배할 것이라. 그리고 그것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그 문제는 전자와 비슷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양자는 매우 차이가 많다. 전자는 종교적이다. 즉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문제가 선행된다. 그러나 후자는 비종교적이고 비신앙적이다.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다. 또 전자는 자주적이고 비계급적이다. 그러나 후자는 의타적이고 계급적인 것이 짙게 나타나 있다.
(2) 간음 죄
레위기 20장 10절에 간음하는 여자와 남자는 둘 다 죽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이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은 제129조에서 '만약 어떤 사람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누웠다면 그들을 붙들어 매고 그리고 물에 그들을 던질 것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그 여자를 살릴 수도 있고, 또 왕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도 양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죄의 근절을 목적으로 하여 죄의 형벌이 막중하고, 그 형벌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전은 죄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형벌도 가볍다. 그리고 인간의 의사에 좌우되게 되어 있다.
(3) 의처증에 대한 해결 방법
민수기 5장 11-28절에 의하면 한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였든지 또는 아니하였든지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겼을 때에 그 둘이 제사장에게 가서 그것을 해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은 제131-132조에 의하면 "만일 한 사람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눕지 않았는데도 그 여자의 남편에게 의심을 받거든 그 여자는 사실이 아닌 것을 맹세할 수 있고, 친정에 돌려보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또 "만일 다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아내가 지목이 되었다면, 또 그 여자가 다른 사람과 같이 눕지 않았다면, 그 여자의 남편을 위하여 그 여자를 신성한 강물에 들어가서 빠지게 하라"고 했다.
위에서 본 바대로 양자는 큰 차이가 있지 않는가? 전자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데 반하여 후자는 인간적이고 감정적이다. 또 전자는 해결점을 찾아 나가나 후자는 해결점이 밝지 못하다.
(4) 성행위
레위기 20장 12절 이하에 나타난 성행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항목이 있다. 자부와의 관계, 남자와 남자와의 관계, 장모와의 관계, 짐승과의 관계 등이다. 그들은 다 가차없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전 제154조-157조에 의하면 "만일 한 사람이 그의 딸과 관계했다면 그 도시는 그 사람을 쫓아 낼 것이요, 만일 한 사람이 그의 아들을 장가 보내고, 자부와 관계했다면 그들을 붙잡고 그들을 묶어 물 속에 던지라"고 되었다. 그러므로 위 양자는 모든 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형벌의 경중의 차이와 죄와 악행에 대한 처방법이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면에 근본적이고 큰 차이가 있다.
(5) 변상문제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지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라고 레위기 24장 19-22절에 기록했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전은 제196조와 제 197조, 그리고 제200조에서 '만일 한 사람이 자유인의 아들의 눈을 상하였으면 그들은 그의 눈을 상할 것이요, 만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뼈를 상했으면 그들의 뼈를 상케 할 것이다"고 했다.종이나 은을 손상케 했을 때도 변상이나 보상케 했다.
우리는 위의 두 법의 차이는 여러 면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교적인 면, 사회적인 면, 물질과 생활적인 면에 근본적이고 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연구가들에게 더욱 참고하기 위하여 몇 곳을 예로 들면 출애굽기 21장11-21절에 하무라비 법전 제117조, 출애굽기 21장 15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175조, 출애굽기 21장 16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14조, 출애굽기 21장 22-25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209-213조, 출애굽기 21장28-36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250-252조, 출애굽기 22장 7-9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120조, 출애굽기 22장9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267조, 출애굽기 23장 1-3절과 하무라비 법전 제1-4 등등이다.31)
이상의 것들은 내용적인 차이가 크게 다르다. 그 이외의 것들은 내용이 다른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만약 이상에 비교한 것들이 같다고 가정하여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많은 법조문(모세의 율법(출애굽기-신명기))과 하무라비 법전 282조들) 가운데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고, 또 하나님의 자연 계시와 성령의 보통적인 역사가 필요한 인간에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다. 또 법은 환경과 생활과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거기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목적도 있기 때문에 유사하고 일치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과 하무라비 법전 사이에 일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또 유사한 곳이 몇 곳이 있다고 그것을 가지고 그 영향을 받았느니, 또는 그것에 근거하였느니 하는 것은 큰 과오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의심이 되는 것이다.
2. 헷 법전(Hittite Code)과의 비교
이 법전은 모세의 율법보다 수 백년 후대의 것이다. 이 헷 법전은 약 주전 1300년 이후로 추정이 된다. 헷 법전은 1906-1912년에 할투시스 또는 비가즈, 코이마 윈켈러(Heattusis. Baghaz,Koymar Winckler)에 의하여 발굴되었다.32)
어떤 학자는 그 법전의 연대를 주전 1200년경으로 잡는 분도 있다.33)
그러므로 헷 법전의 연대는 주전 1300년을 넘지 못하고 주전 1200년을 내려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전은 주전 1300년 이후로 보는 것이 원만하다고 하겠다.
그 헷 법전을 사용하던 헷 족속은 가나안 족속으로 인정이 된다. 그들의 법전은 위에 기록한 하무라비 법전과 매우 근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무라비 법전이 모세의 율법과 비교 연구한 결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을 결론지었으므로 다시 하무라비 법전과 헷 법전이 관계가 없다는 것을 결론을 내리게 되면 헷 법전과 모세의 율법이 관계가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하에 하무라비 법전과 헷 법전을 연구하여 보자! 위의 하무라비 법전은 그 내용이 세밀하고 내용이 잘 짜여져 있으나, 헷 법전은 하무라비 법전만 못하다. 그와 반면에 죄의 형벌의 정도가 강하다고 생각이 된다. 또 전자인 하무라비 법전은 282조인데 반하여 후자인 헷 법전은 200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유사하다.
하무라비 법전과 헷 법전의 대조
구분 목차 하무라비법전 헷 법전
1 요법에 관하여 1-2 170
2 거짓 증거 2-3
3 재판 구역 5
4 도적질 6-13 93-97
5 유괴 14-20 110-114
6 강탈과 파괴 3-41
7 화재보상 25
8 군의 의무특전(세금수집) 26-41 50-56
9 농사법 42-58
10 원예 59-66 101-118
11 상업 가격법 100-107 101-186
12 순영법 가격법 112-116
13 예금 112-116
14 채무 117-119
15 곡식창고 120-121
16 예금손실 122-126 42-45
17 부녀강간 127 145-149 194-195
18 결혼 128-161 189-191
19 유업 162-184 26-30
20 양자 185-194 46-49
21 강간구타 195-209 1-18
22 복수법 210-214
23 의사 215-225
24 낙인법 226-227
25 건축책임 228-233
26 뱃사공의 책임 234-239
27 배사고 240
28 가축법 241-256 60-92
29 품삯 257-258 150-161
30 농기구 도난 259-260
31 목자의 법 261-267 265
32 동물과 사람의 값 268-277 57-59
33 중매매 278-281 19-24
34 주인법 282
35 의식법 164-169
36 부자연죄 187-188
이상의 도표에서 비교하여 본 것과 같이 양 법전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하무라비 법전과 헷 법전 사이에는 서로 없는 항목들이 있다. 그것은 생활과 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또 지리적인 여건도 있는 것 같다. 즉 바벨론과 헷 사이에는 오랫동안 서로 교류한 흔적이 있다. 그 이유는 헷이 거주하던 가나안은 바벨론과 소아시아와 애굽의 교역과 교통의 교차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깊은 관계 가운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헷 법전도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헷 족속들이 후대에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또 헷 법전이 모세의 율법과 무관하다고 생각이 된다. 그 이유는 첫째, 시대적인 면으로 볼 때 모세의 율법이 앞설 뿐 아니라, 둘째로, 출애굽 때 이스라엘은 승승장군과 같이 승자의 기백을 가진 이스라엘이 심리적으로 헷의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다. 또 그들은 배타적인 족속이다. 끝으로 위에서 하무라비 법전과 헷 법전을 비교하여 본 결과 유사하고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면 모세의 율법과는 무관하다.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은 하무라비 법전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또 마땅히 무관한 것이 진리일 것이다.
3. 앗수르 법전(Assyrian Code)
앗수르는 티글랏 필레셋 I세(1116-1078 B.C)이르러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그 명성을 세계에 떨쳤다. 그 때에 그 나라에 법전이 있었다. 그 법전이 소위 앗수르 법전이다. 학자들은 그 법전은 연대를 주전 1300-1200년경으로 본다.
그 법전의 성격은 위의 하무라비 법전과 헷 법전과 같이 상대적(Casuistic) 이다. 그러나 위의 두 법전과 이 앗수르 법전과의 차이는 그 구조와 내용인 것이다. 그 구조와 내용의 차이를 한 가지 예를 들면 A.토판(Tablet A)에서 제목을 "부녀에 관한 법률"이라 붙였다. 제1조에서 '만일 사람의 아내인 여자가 또는 사람의 딸이 신전에서 어떤 물건을 도적질하려고 제단에 들어가면 그들은 그 여자에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12조까지 여자가 단독으로 범할 수 있는 죄에 대한 형벌이 기록되어 있다.
또 제13조에서 제22조까지는 부부공동으로 범할 수 있는 죄에 대하여 기록했고, 제29조 이하에는 음행에 대하여, 또 부모에 대한 부부의 윤리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전개한 학설인 모세의 율법이 모세의 후대에 것이라든지 애굽의 영향을 받았고 바벨론의 것에 근거했다든지, 헷이나 앗수르의 법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조화나 융화가 될 수 없다.
제 IV 장 십계명 고찰
본 논제에서 모세의 율법의 중추요, 핵심인 십계명에 대하여 생각하겠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십계명 자체에 대한 고찰보다는 그 십계명을 중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십계명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들을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을 중심한 사상에 옥석이 있음과 그것을 가려내는 작업을 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금은 가장 귀한 보옥이 되는 십계명을 조각하고 닦아서 보석으로 제자리에 놓을 단계에 이른 것이다. 즉 십계명을 연구하고 그 속의 진리를 규명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십계명에 대한 명칭, 어학적 고찰, 그 내용과 해석을 시도하여 보자!
제 1 절 십계명의 명칭
성경에 "십계명"이란 명칭은 별로 없다. 그러나 오늘날은 "십계명"이라고 하면 잘 통한다. 이 명칭은 후시대에 적게 사용되다가 오늘날에는 널리 보급된 것이다. 이 십계명이란 명칭은 제17세기(A.D)에 웃서(Ussher) 대감독이 스코트랜드의 서남쪽에 있는 안원(Anwoth)에 있는 사무엘 루덜포드(Samuel Rutherford)집에 찾아갔을 때 이것을 지적했다. 그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목사의 부인이 그에게 이것을 물었다고 하며, 그 후에 요리 문답에 "십계명"이라고 했다고 전하여 내려온다.34)
이 "십계명"에 대한 성경적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증거판"(출32:15-16,신4:15,5:22,9:10,고후3:3).또 "증거 법판"(출31:18)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두 돌비"라고도 한 곳이 여러 곳에 있다)출31:18,24:12,33:15-16,신5:22).
신약에서는 "계명"(마19:17,엡6:2)이라고도 했다.
십계명에 대한 명칭이 다양하므로 다 기억하기 어렵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영적인 결합의 증거인 고로 "증거판"이라고 했고, 또 그 사건 자체는 언약의 역사인 고로 "언약의 말씀"이라 하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십계명의 내용을 보면 열 가지의 계명이 기록이 되어 있음으로 "십계명"이라 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므로 "그 말씀들"이라 하게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여기서 이상의 명칭들을 다 사용하여도 잘못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통일적인 사용의 유익을 위하여 "십계명"이라고 하겠다. 그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의 증거판으로써 십계명인 것이다.
제 2 절 십계명의 어의
먼저 계명이란 뜻은 가장 보편적인 말로 "명령, 지휘, 그리고 뜻대로 한다"(Commend)는 뜻과 "계명"(Commandment)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차와하)와 같은 형이다.(차와하) 는 문자적으로는 "세우다"(만들어서),"내어 놓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제일 먼저 창세기 2장 16절에 크게 사용되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이나 또는 사람의 법적 지령(Order)에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명사로 사용될 때에 (차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에(미)가 붙어서 (미추가)로 되었다. 그 뜻은 명령서(Precept), "교훈"이다. 한글역 성경에서는 금령이라고 했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명령이나 금령이라 하여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명령에 금령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령에 "....하라"는 명령만 아니라"....하지 말라"는 금령이 포함되어 있다. 즉 긍정적인 것 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 같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과 금령을 함의한 단어가 구약에 약 164회나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헬라어로 번역되기를 (엔토레, 엔톨로타이, 프롭타포)(엔토레)로 되었다"36) 그 중에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히 (엔토레)가 제일 많이 사용되었다. 그 단어가 약 60여회나 사용되었다. 그리고 (에피타게)가 사용되었는데 그리 많지 못하다. 그 성경은 롬 16:26,고전 7:67:25, 고후8:8, 딤전1:1, 딛1:3 등이다. 끝으로 (엔탈마)가 몇 곳에 사용되었는데 마 15:9,7:7 골2:22 등등이다.37)
(아말,"말하다")은 출애굽기 8장 27절 외에 다른 몇 곳에 사용되었는데 44회나 사용되어 있다. 그 뜻은 "명하다"로 번역이 되었다. 또(다발) 즉 "말하다"는 20여 회에 사용되었다. 이 (다발)은 主에 의하여서든지 또는 높은 특권이 있는 분에 의하여 말하여 진 것이 자연적으로 명령(Commandment)으로 간주되어 졌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명령이고, 사람이 그 명령을 듣는 것이 순종으로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말)은 욥기 9장 7절에 사용되었는데, 그곳에서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지 하시며, 별들을 봉사하며"라고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자연의 법과 그 법칙을 연기, 또는 중지 등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으로 표시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강한 바람은 일어났다"고 그 시편 107편 25절에 147편 25절에도 기록이 되었다.38)
(다발)은 출,34:28,신4:1310:4,수8:8,삼상,15:11,13,삼하12:9,대상28:21,대하31:5,
에스더 1:12,19,2:8,3:1,5:1,9:23,25, 39)에 있다. 이것은 위에 아말에 대하여 생각했다.
(페)는 창세기 45장 21절, 출애굽기 17장 1절 외에도 32회나 다른 곳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명령으로 번역이 되었다. 그것은 애굽 사람들의 어법인 것이 가능하다. 또 콥틱(Coptic)어에서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업"의 용법과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것은 욥 39:27,잠8:29,전8:2,애가1:18등에서 발견된다.
제 3 절 십계명의 내용
십계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제2장 제5절)에서 다소 언급했다. 그러나 이하에서 재론하며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출발한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 시내산 밑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귀중한 뜻과 섭리가 있었다. 그 일을 위하여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즉시 산 밑에 장막을 쳤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준비를 하고 백성들을 특별한 민족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받게 되었다(출19:4-9).그리고 그 후에 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하게 명령했다(출17:10-15). 이와 같은 배경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주어졌다. 그 법 중에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은 신명기 5장 6-12절에 극히 적은 변화를 가지고 반복이 되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에 의하면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E라고 하고, 그리고 그것은 E.의 본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오히려 후에 삽입(insertion)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신명기의 그것보다 후대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신명기적인 언어, 구조와 어법(Idioms)을 포함하고 그것은 모세의 속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은 신명기 보다 더욱 초기의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모세의 속성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신명기의 십계명은 모세에 의하여 일반 대중을 위해 쉬운 이야기로 다시 선포된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42)
(1) 신명기는 5장 12,15,16절에 너의 하나님 주께서 "너희에게 명하심과 같이"라는 참고 구절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에 신명기가 근본적인 것이라면 이와 같은 구절과 이런 방법이 적용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2) 신명기는 5:14절에서 수사적인 확대(Rhetorical Amplification)로 너희 소나, 너희 나귀나, 너의 어떤 짐승도... 말라(참고 신21:1618)가 포함되어 있다.
(3) 신명기적 십계명은 신명기의 특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제14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당한 압박을 말씀하고, 제15절에서 그 동기는 애굽에서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 제21절에서는 아내에 대한 기록이 가정(집)에 대한 문제 앞에 놓여 있다. 그 이유는 아내의 위치가 가장 귀한 것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은 신명기 5장을 유도하고 있는데, 출애굽기 20장이 근본적일 뿐 아니라 그것이 모세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 신명기의 특수한 성격의 표현이 파이퍼(Pfeiffer)의 말과 같이 십게명의 근원을 모세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43)
(가) 이사야 선지자시대 이전에 우상에 대한 자취와 악의가 있지 않으며 또 여기서부터 첫째 계명이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모세에게서 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거짓된 진화론적인 사색에 근거해 있다(참고 신8:11-17).
(가) 성수 안식은 광야에서 유목민의 의식일 수 없고, 또 안식일은 가나안 제도에 있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식일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발견이 되었다(창,2:2,3). 참고로 출애굽기 16장 23-29절을 보라! 44)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것이 모세에 의하여 먼저 기록이 되었고, 다음에 다시 백성에게 교훈하기 위하여 모세에 의하여 평이하게 기록된 것이다. 또 생각이 되는 것은 언약의 말씀, 즉 십계명은 하나님에 의하여 두 돌비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이다(출31:8). 출애굽기에 의하면 "율법"과 "계명"으로 불려 졌다. 그러나 성경은 두 돌비에 계명이 기록된 수와 구분에 대하여 확실한 선언도, 암시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1. 유대인 학자들의 견해
유대인 학자 필로(Philo)와 요세퍼스(Josephus)를 중심한 유대인 학자들과 제4세까지의 교부들과 현재 동방 교회와 개혁교회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십계명이 두 돌비에 각각 5개씩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 Table(첫째 비석)
(1) 다른 신들 (other gods)
(2) 다른 형상들(Images)
(3) 하나님의 이름(The name of God)
(4) 안식일(The Sabbath)
(5) 부모(parents)
2) Tabl(둘째 비석)
(1) 살인(Murder)
(2) 간음(Adultery)
(3) 도적질(Steel)
(4) 거짓증거
(5) 탐심(Covitiny)
그 근거는 출애굽기 32장 15절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 성구에 명시되어 있는 것 뿐이다. 또 19절에 보면 모세가 그것들을 던져 깨뜨린 것이다.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다시 전과 같이 두 돌비를 만들어 가지고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글을 써서 주신 것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45)
2. 어거스틴 (Augustine)을 중심으로 한 견해
첫째 돌비에는 3계명 즉 제1계명에서 제3계명까지가 기록이 되어 있었고, 둘째 돌비에서는 제4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가 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첫째 석판(돌비석)에서는
(1) 다른 신들
(2) 하나님의 이름
(3) 안식일
이상의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의무에 관한 것들이다.
(1) 부모
(2) 살인
(3) 간음
(4) 도적질
(5) 거짓 증거
(6) 이웃집을 탐함
(7) 이웃의 아내, 종들, 가축과 소유를 탐함.
위의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의무와 덕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Augustine) 에 의하여 세워진 학설인데 서방교회, 즉 카톨릭 교회와 루터교회에서 수락한다. 이 견해는 신명기 5장에 근거하여 세워진 학설이다.46)
3. 기독교의 견해
이 학설은 이상의 두 학설과는 달리 두 돌비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으되, 첫째 돌비에는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고, 둘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출애굽기 32장 15째에 근거를 두었다. 즉 히브리어 (와우)와 (싸메크), 다시 말하면 세투마(Setuma)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중심하여 분류하여 보면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윤리이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John Calvin)도 이 견해를 따른다.47)
그러므로 엄밀하고 냉정하게 숙고하여 보면 이상에 말한 두 학설보다 마지막 학설이 옳은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 내용이 무엇이냐에 문제가 있다. "이 기독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이 자유와 이 사실들을 조심하여 더욱 완전한 권리를 가지는 것과 율법 안에서 십계명의 도리에서 넘지 않고, 바른 회중들의 교육을 위한 분변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의 한 부분이 그리스도의 성취를 통하여 그것들이 폐지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진 바 하나님께 거룩한 뜻의 불변하는 규범으로서 교훈과 생활의 규칙을 위한 것으로 그들을 받아 드려야 한다. 48)
제 4 절 십계명 해석
이하의 해석은 출애굽기 20장을 근거로 하겠다. 십계명의 제재의 모든 근거는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출20:1). 이 은혜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계명을 준 것은 은혜에 근거하여 주신 것이다.
그 은혜는 받을 수 없는 자격자에게 주는 것이다. 즉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 즉 무자격자인 죄인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 선물은 무한한 섭리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을 받은 자를 하나님의 백성, 자녀, 또는 신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따라 거룩한 생활과 진실과 산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 요긴하다.49) 즉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사랑의 하나님이 되심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되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하심이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는 신약에 도성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그는 순종으로 완성하셨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는 구속 사역의 완성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택한 백성에게 임했다. 택한 백성은 신앙으로 보답이 된다고 하겠다. 그 신앙은 순종과 의뢰에 근거를 둔다. 이 순종과 의뢰, 양자는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 사랑은 십자가를 사랑함이다. 십자가로 율법을 완성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십자가를 통한 율법 완성이다. 즉 신앙이 율법의 중심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고로 참 신앙은 율법을 완성함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만족케 하신다. 이 큰 뜻을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함에서 나타났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함에 요인은 양의 희생이었다. 그 양은 장차 메시야를 통한 희생 구원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과 구원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출애굽기 20장 1절에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출29:46,레19:36,23:43,25:38,55,26:13). 또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다른 형의 선언이 11:44,18:2,4,30,19:4,10,25,34,20:7 등에 나타나 있다. 간단한 표현으로 "나는 여호와로다"는 말씀이 레위기 29장 12절, 16절, 18절 등에 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로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고귀한 속성을 암시하여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의 속성은 1) 그의 절대성과 자존성을 보여 주며, 2) 하나님의 불변성과 3) 그의 무한성만 아니라, 4) 하나님의 유일성도 나타내 준다. 또 5) 그는 구속자임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창조자, 섭리자, 구속자이시다(창17:7,출4:22,갈3:16,엡4:2-16! ).이상의 속성은 (1) 하나님의 영적, 생적, 인격적 속성과 (2)지성적 속성, (3)도덕적 속성, (4) 주권적 속성 (5) 유복적 속성 등이다.50)
이와 같은 속성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의 4계명까지인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인간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함은 후반의 6계명들이다. 인간과의 관계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근거는 사랑이다. 그 사랑의 실천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 계명의 완성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에 근거를 둔 자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곧 계명의 완성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시므로 성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율법을 지키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것이다.
제 1 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본문에서 "나 외에"에는 히브리어로 "알파니"이다. 여기의 "알"은 "나를 떠나서"라는 뜻이 있다(창48:2,시16:2). 또 "나에게"라는 뜻도 있다(창31:50,신19:9). 헬라어 성경인 70인역(LXX) 에는 "프레네무"로 되어 있다. 루터(Luther)는 "나의 옆에서"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성경 벌게이트(Vulgate)에서는 "내 앞에서"라고 했다. 이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 단어는 "또 나를 대항해서", "나를 반대해서"라는 뜻도 있다.
다음 단어의 "파니"는 출애굽기 23장 14절에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얼굴"이라고 번역했다. "여호와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인격적 존재로 있는 여호와이든지 또는 출애굽기 23장 20절21절에 기록됨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받은 "천사"이든지, 아니면 이사야 63장 9절에 기록됨과 같이 여호와의 얼굴이 천사라고 불려진 그 천사인 것 같다.51)
우리는 단수 '이행'은 신성의 의식에서 추상적인 명사와 같은 '엘로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또 복수 '악헤림'은 창세기 1장 14절에 나타난 것에 적응을 시킬 수 없다. 그리고 사, 언, 행으로 다신론이나 우상들을 말하고 경배하는(신8:11,17,19) 것을 금지할 뿐 아니라, 반면에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또 경배할 것을 명령하셨다(신6:5131710:1220). 52)
우리가 만일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그렇다고 그 사람을 사랑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자리에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이에도 지위, 재산, 명예 등이, 우리의[다른 신]이 될 수 있고,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53)
모든 계명들이 거의 금기 명령, 부정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죄와 악의 욕망의 존재를 필요 요건으로 하기 때문이다.54)
허쉘 포드박사는 그의 저서 "십계명 강해"에서 제1계명을 다음과 같이 강론하였는데 "헬라인들은 3만의 우상을 섬겼다. 이 우상들은 다수의 남편들과 아내들을 거느리고서 가장 부도덕한 생활 습관을 탐닉하였다.
바울이 아덴(Athens)에 갔을 때, 그는 구석구석마다 우상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에는 집귀신, 정원에는 정원 귀신, 밖에도 곳곳마다 우상이 있었다"고 했다. 어떤 인간들은 해, 달, 별들을 섬기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강, 숲, 날짐승, 바다의 고기까지도 숭배했다"고 했다. 그는 이것들을 "조잡한 우상 숭배"라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세련된 우상 숭배"를 들었는데, 그 우상숭배는
(1) 자연의 우상이다. 즉 하나님이 지은 자연을 하나님보다 더 위하고 사랑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골프장, 낚시터, 산으로 가는 것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나아가서 그 주인인 하나님을 잊고 그 하나님 대신에 자연을 경배하는 것이다.
(2) 건강의 우상인데, "건강은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다. 우리는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건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건강의 수여자인 하나님을 잊고 도의심이 약해지고 잘 발육된 근육과, 튼튼한 체격을 자랑한다든지 방탕한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3) 스포츠의 우상 : "확실히 각종의 운동경기를 정죄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동경기 관람을 즐겨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운동경기에는 광적으로 또 스포츠잡지는 열심히 탐독하지만 성경 읽기에는 대단히 소홀히 한다." 또 주일을 범하면서 운동관람이나, 하나님보다 스포츠를 더 사랑한다면 그 스포츠는 우상이요, 해로운 것이다.
(4) 과학과 문학의 우상 : 우리는 과학과 인간의 지혜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모든 과학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미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며, 인간의 학문, 인간의 지식, 그리고 인간의 지혜는 폐하나 오직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고 변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5) 쾌락의 우상 : "성경은 하나님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모든 광고나,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은 세상의 쾌락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며 우리 젊은이들에게 크게 공감을 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포기하고 쾌락의 신을 따른다. 나는 건전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는 쾌락은 은총보다는 인간의 인기를 더 좋아한다. 그는 인간들의 눈에 들도록 힘쓰는 한편 하나님의 세상 눈에 들도록 하는 데는 전혀 힘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 친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들을 종종 자행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상급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을 마땅히 섬겨야 할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훗날 하나님께서 "잘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며 그는 하늘에서 상급을 주실 것이다...
(6) 돈의 우상 : 돈이 그 자체로서는 유용한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인간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때 여러분은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많은 교회 성도들이 세상일에는 돈을 물 쓰듯 하지만 하나님의 사업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저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첫째 계명의 근본적인 교훈은 첫째는,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생활 위에 하나님의 절대권(Sovereignty)은 어떤 사람의 생활에도 첫째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나, 나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존재, 뜻, 인도가 첫째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제일 먼저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돈의 인색한 우상들이나, 어떤 교육이나, 지식도 있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거기에 모시어야 한다. 여기에 관한 귀한 학설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 계명은 우리가 순종하고 담담하여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 또 그 모든 것 보다 위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인 것을 말해 준다.55)
제 2 계명 우상에게 경배함을 금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6).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어떤 모양에도 절하거나, 또 마음에 위해서는 안 된다. 칼빈(John Calvin)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진실한 하나님이심을 첫째 계명에 선언한 후에 그는 다만 홀로 경배 받으실 분이심과 또 그는 그에게 드릴 합법한 예배를 정의하여 명령했다"고 했다. 유명한 주석가 카일(Keil)도 그의 주석에서 우상 2중 대격으로 해석되어진다. 언어학적 번역은 "하늘에 있는 바와 같은 것과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파샬에서 나온 폐셀은 나무나 돌에 새겨서 만든 어떤 모양이다. 그것은 "구약 고고학"에 기록된 가나안 종교들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사기 17장 3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낸 형상이나, 열왕기하 21장 7절에 나타낸 것과 같은 어떤 이방 신들의 모양이다.
다음에 투무낳는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보여 준 형상이다(민12:8,신4:125,욥 4:16,시17:5).56). 그 쉬운 예로 로마 카톨릭의 형상은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폐셀과 투무낳는 여호와의 상징적인 출현과 관계하므로 이해가 되어 진다.
"하늘에 있는 것"이란 천사들이나, 또 신명기 4장 19절에 따라서 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류들인 것 같이 생각된다.
"땅에 있는 것"이란 가축, 파충류(Reptiles),작거나 큰 동물들이다. 그리고 "물 속에 있는 것"이란 고기들과 수중 동물들이다. "땅 밑에 있는 것"이란 물에 붙여지고 있다. 신명기 4장 18절은 땅보다 낮은 곳에 살고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 모든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 종교적인 예배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음에 대한 경고이다. 그 이유는 5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아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5절에 나오는 "절하며 섬긴다"는 것은 "히쉬타카와"라고 했는데 기도로 하나님 앞에 굽히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 굽혀 예배하고 기도드릴 것을 헛된 형상들에게 굽혀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아발"은 희생을 드려 종교 의식을 행하여 예배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희생 제물을 드리고 종교 예식을 행하여 예배드리는 것이다.
5-6절은 우상의 두 가지 형상들을 금한다. "첫째는 우상 숭배(Idole-Latry) 와 둘째는 형상으로 영적 성질을 가지셨다. 그런데 그를 어떤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하여 예배를 드렸다든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변화시키는 것이나, 하나님의 실재를 다른 신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금하셨다"57)고 하셨다.
포드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그것은 모든 조각과 그림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각과 그림을 위해서 특정인에게 재능을 부여하셨고, 이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가 있다." 그 예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게 한 것이다. 성막에 그룹을 수놓은 것은 그 좋은 예가 아닌가? 후에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했다. 그 성전 안에 있는 정교한 장식품들을 잘 주시해 보면 그것은 활짝 핀 꽃송이들, 석류무늬, 종려나무, 수소, 사자들, 그리고 그룹들의 형상들로서 호화롭고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A)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것은 종교적 예배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것 앞에서도 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회에서든지 아니면 집에서든지 간에 항상 절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나는 나무로 된 십자가, 마리아상, 예수의 상처난 옆구리, 성자나 천사의 형상을 쳐다보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면전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나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는 어떤 형상도 원치 않는 것이다.B)
그 이유는 형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흐리게 하며, 형상 숭배는 곧 하나님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편 115:4-8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했다.C)
제 3 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함
어떤 성경 해석자는 제 3 계명을 해석하는 가운데 [주의 이름으로 사취하는 사기꾼들]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의 일면적인 해석이요, 바른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미드(Frank S.Mead)씨는 "이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큰 뜻을 나타낸다. 그 이름들은 이름을 붙인 바 그 사람들의 특성을 기록하고 있다. 아론(Aron)은 "불확실'을 의미했으며,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스데반은 "면류관"을 의미한다. 이 이름들이 얼마나 기술적이였는가! 그와 같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진실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했는데, 그 뜻은 "생명의 힘"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야외"라고 했는데 그 뜻은 "나는 지존자"다. 또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모든 이름들은 한 목적을 가졌다. 즉 하나님의 특성과 능력을 표현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또는 그의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 하나님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무서운 생각에 압도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사랑, 그 이름, 또는 그 능력 사용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했다.59)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과 하나님 자체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어떤 필요없이 무의미하게(가치 없게) 그리고 쓸데없이 거칠고, 무법하게 사용함을 금하고 있다. 가치 없고 쓸데없는 목적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함을 전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무법적 사용은 레위기 19장21절에 죄를 범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거짓 맹세뿐 아니라 평범한 생활의 교제에서 아무 보잘것 없는 맹세에 사용해서 안 된다.
허위와 거짓 말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든지, 저주, 마법과 요술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기원, 기도, 찬양과 감사와 예배에만, 또 거룩한 믿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용하여야 한다.60)
그렇지 않은 때나, 일과 목적에 사용할 때에 그것이 신성모독이 되고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은 제네바에서 그 시를 다스릴 때에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게 취급했다 한다. 그것이 옳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도 명심할 일들이다.
제 4 계명 성수주일
제 4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 이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창세기 2장 3절에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와 그 만물을 창조하신 수에 제7일되는 날에 쉬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쉬셨고, 이날들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지킬 것을 사람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친히 오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영교의 날(창3:8)에 찾아 오셨고 또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고(창5:22),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셨고(창 7;1),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또 천사들도 나타내신 흔적이 되지 않다. 창세기 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킬 것을 직접 명령하지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명령하신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 당시에 악한 자들은 악행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한 거룩한 신앙생활의 흔적이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한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신앙의 선조들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쫓고 또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을 따라서 애굽에서 좇던 이방인의 생활에서 떠날 것을 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어떤이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바벨론(Babylon)사람들의 샤바트(Shabbatu)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니다. 그 날은 바벨론 사람들이 분노한 자기의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것과 같은 그런 날이 아니다.61)
그것은 창세기 2장 2절과 출애굽기 20장 8-11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만든 날이다. 또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교의 날이나, 그 명령을 보면 예외없이 사람과 짐승들이 이 날에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을 말씀했다. 그날에 쉬어야 할 것들은 두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자유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자손이다(너와 네 자손).
둘째, 그들의 종들과(남종과 여종)가축과 그들의 객들이다.
이 객들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거주하는 이방인 노동자들인 것 같다.
본문에 "네 문 안"라는 뜻은 "네 집안"이 아니고, 네 땅에 있는 도시나 마을이나 부락 안(신 5:1414:21)과 같은 뜻이다. 또 문(샤알)은 다만 마을을 들어가는 곳 또는 큰 마당과 궁전에 둘러 막는 담에 있는 대문에 적용된 것이지 결코 집이나 창고나 천막의 출입구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62) 그 좋은 예가 느헤미야 13장 15-22절에 나타나 있다. 안식일에 쉴 것이며(레23:2831), 다른 날에는 일할 것이 명령되었다. 다른 날에 노동과 사업과 상업은 할 것이다. 따라서 명령되었다. 다른 날에 노동과 사업과 상업은 할 것이다. 따라서 경작과 추수(34:21),술틀을 밟고 물건을 나르는 것(느13:15),무역(암8:5),식물을 파는 것(느13:15)을 안식일에 금했다. 또 만나를 주실 때도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고 전날에 안식일 것까지 거두어 들였다가 이날에 먹었다(출16:26). 이 날에 나무하는 자를 잡아 두었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처형했다(민15:32).이날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했다(출35:2).
그러므로 안식일의 의미는 하나님의 축복을 찾게 되고, 또 창조한 일주일의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창조의 역사가 일곱째 날에 그친 후에 하나님은 복을 주었고 창조한 세계를 신성하게 했다. 그 세계에 평화의 능력들로 채워 주셨고, 그 자신의 복된 안식으로 선한 세계를 만드셨다. 그의 거룩한 성질의 깨끗한 빛을 나누어주어 일어나게 했다(창2:3).그런 이유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켰고, 하나님이 행하셨던 그것을 본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하므로 하나님 자신을 따라 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즐기게 했고, 이 날에 그들이 그들의 일을 쉬고 모든 것을 그쳤다.63)
또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앞으로 올 일의 그림자였다(골2;10,히10:1). (1) 그리스도가 온 이후에 그리스도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마12:8)했고, 그의 사역 도중 안식일에 쉬었다. 그러나 영적인 일과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쉬었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안식 후 첫날 즉 주의 날에 부활하였다. 그의 구속 사역의 열매들을 세상에 심었다. 그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이날을 '주의 날'(큐리아케 헤메라)로 세웠다. 구속의 주님이 돌아와서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며 멸하시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까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을 지키는 날이다.64)
(1) 이날은 처음에 안식 후 첫날로 명명이 되었다(행20:7).그 날에 성도들은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전16:2). 요한은 그날을 "주의 날"이라 칭했고, 주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계1:10).또 천국의 영광을 보았다(계1:).65)
(2) 성령이 강림한 것은 일주일의 첫째 날에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이다.
(3) 주의 만찬은 언제나 일주일의 첫째 날에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 행했다.
(4) 바울은 일주일의 첫째 날에 우리의 헌금을 바치도록 하라고 말했다.
(5)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말했다.
일주일의 첫째 날인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초대교회(제1세기) 신자들에 의해서 준수되었다.
2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일주일의 첫째 날이 지켜져 왔다. 일요일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복음을 전해듣고 구원을 받아왔다. 일요일에 수백만의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이 하나님의 집을 찾아와서 거기서 평화와 안식을 얻어 왔다. 일요일에 수백만의 상한 심령들이 교회에 나아와 위로를 받아 왔다.4)
주일성수하는 방법
허쉘 포드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1) 안식일 취함으로서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라고 했고, (2) 예배를 드림으로서이다. 히브리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관습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며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자기의 창조사역에서 기쁨을 누렸다. 우리도 주의 날은 역시 하나님의 하신 일들에서 기쁨을 누리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이다.
(3)이웃에게 봉사함으로써 지킨다... "우리는 주일날 그의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한편 이웃에 대해서 자비행위를 베풀 수가 있다. 홍펠로우는 말하기를 ,"주일은 그 일주간을 한 덩어리로 묶는 황금고리다"라고 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한 날을 구별하여 택정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고 B) 했습니다.
제 5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는 이상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도리, 즉 신륜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럿은 모든 생활의 근본이요, 생의 근원과 원리와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그것은 근거로 해서 진행 할 인간의 상호생활에 필요한 인륜에 대하여 생각하겠다. 이하에서 사람이 사람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자.
미드(F.S.Mead)씨는 "다섯째 계명은 첫째 석판과 둘째 석판, 즉 두 부분에 다리의 역활로서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 계명을 지킨다면 그들은 모든 다른 계명들도 지키기 더욱 쉬운 것을 찾겠기 때문이다.66)고 했다.
유대인 사이에는 이 계명을 위한 두 가지 요건이 있었다. 그 첫째가 국민적 요건이다. 국민은 가정을 가지고 있다. 가정의 토대에서 쉬게 되고 또 크게는 가정의 머리도 된다. 가정에서 불순종은 국민으로서 불순종이다. 둘째 요건은 종교적 요건이다. 부모는 종교적 교사들이었다. 자녀들을 통하여 부모들의 종교를 영속시켰다. 즉 부모들의 신앙과 그 신앙의 근본이 되는 진리를 유업으로 받아 계속하여 후손에게 전승케 했다.
부모를 위한 존경의 결여는 곧 국민의 미래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었다67) 그러나 그것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제스(J.A.Hages)는 유대인의 생활의 일면을 보여 주나 반면에 비 국민적이고 비 종교적인 면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이 법은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신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에베소서 6장 1-4절은 유대적인 것보다는 이방적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1장 15절, 잠언 30장 17절에 부모에게 대항하는 악한 자식은 죽여야 한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악한 부모에 대하여는 법이 다스리고, 또 자식은 선의적인 항거와 선으로의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엡6:1-4). 그리고 "부모에게 힘써 자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부모를 존경할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68)
그 구체적인 행동을 하셀 포드박사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의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자."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바울의 이 말씀은 가정이나, 국가나, 교회 등 모든 경우의 권세에 다 대항하는 말이다. 하나님만인 절대 주권자이시다. 그러나 그는 상호인간 관계에서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의 주권을 부여하셨다. 이것은 특별히 부모님들의 경우에 해당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신적 권위로 덧입히셨다. 우리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이신 것이다. 에베소서 6:1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한다.4) 둘째는 필요할 때 부모님을 보살펴 드림으로 공경하자. 이것은 부모가 늙으신 때만이 아니라 부모가 병약하여 졌을 때이며, 그 외에도 부모가 자녀의 육적, 정신적, 물질적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고 붙들어 드리는 것이다.8) 이런 일은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 시대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인 시대에 더욱 필요한 교훈이요 진리인 줄 안다. 끝으로 부모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허셀 포드박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1) 부모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2) 부모들은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잘 인도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축복을 약속한다(출20:12,렘 35:19)고 했다.c)
제 6 계명 살인하지 말라
살인은 인류가 창조된 이후부터 있었다. 그 좋은 예가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이다. 그 살인은 범죄의 결과이다. 그 살인의 원인은 죄의 조작자인 마귀의 간악한 작용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보는 그 살인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크게 여기는 죄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도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살인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 전쟁에서의 살인은 자체방어이다. 그러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체 방어이든지 아니든지 살인은 살인이니 죄가 된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전쟁은 하나님의 섭리와 허락 가운데서 되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심히 많다.
우리는 그것 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에 근거하여 살인 문제와 죄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6계명이 보여 주는 진리도 살인이 있고 없음에 관한 문제 이전에 그 기본이 되는 진리인 인류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느냐 아니하느냐를 따지고 있다. 즉 인류의 생명에 손상과 파괴를 금하는 것 같다.69) 그러므로 인류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윤리의 근본이요. 하나님의 절대법이다. 그 이유는 생명의 창조와 관리자는 인간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만이 좌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의 한계 내에서 사람이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출19:12-21:12-1722:17-20). 그뿐 아니라 사탄도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해할 수가 없다(욥2:6).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에 의하여 좌우된다. 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그 생명을 좌우하고 손상시킬 때에 그것은 죄가 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가해지는 것이다. 이 살인에 관한 계명을 강론하는 허셀 포드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1. 이 계명에 포함되지 않은 경우들
(1) 하나님은 음식이나, 의류, 또는 다른 유용한 목적을 위한 동물의 살생을 금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창세기 9:3에 하나님은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도적을 죽이는 것을 금하지 않으신다.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흘린 죄가 없으나"(출22:2)라고 하였다. (3) 전쟁 중의 살인도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하여 포드박사는 첫째로, 우리는 한 국가의 시민으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 둘째로, 전쟁은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기 때문에 행복을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셋째는, 정당방위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어느 한 백성이 평화롭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있을 때 불신 국가가 침략한다면 그 선한 백성들은 자기의 생명과 자유와 가정과 자녀들과 교회를 위하여 싸워야만 한다. 끝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4) 사형제도는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 창세기 9;6절에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A) 말씀하였다.
2. 살인의 성경적 개념
(1) 직접 살인 --- 직접 살인의 뜻은 폭력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자살도 또한 살인의 일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망치고 있다. (2) 간접살인 --- 우리가 어떤 사람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간접적 행위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여 간접적인 살인을 범할 수 있으며 또 오늘의 술주정뱅이는 간접적 살인자들이다. 또한 여러분의 생활 방식에 의해서 사람을 죽일 경우도 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마땅한 의무를 게을리 함으로 해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는 자기의 잘못된 생활 습관에 의해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3) 살인하는 마음 --- 이 마음의 살인은 증오, 분노, 미움 등 정신적인 것이다.B)
3. 영혼을 살인하는 경우
(1) 이것은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지도 않고, 또 교회에도 데리고 가지 않았기에 결국은 언젠가 지옥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2) 이것은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은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불신 선생님과 불경한 교육의 영향으로 인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등지고 만 경우가 허다하다. (3) 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 자유주의 목사는 성경을 무시하고,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며, 천국, 지옥, 심판 사상을 비웃는다. 그래서 그를 따르고 그의 설교를 듣는고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올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영원히 멸망되고 말므로 그들의 영혼은 살해된 것이다.C)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뜻은 "개인적 청백"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 즉 "지상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인류 관계의 근거라고 생각이 된다."70)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남녀 관계가 올바르고, 개인이 청백하여 범법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간음"이란 남녀 관계에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性과 성적 충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을 죄악시하지 않으며 또 본래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성 관계에는 죄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목적을 위해서 성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충만케 할 목적으로 성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것임으로 우리가 성을 올바로 사용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된다. 그러나 그릇되게 사용하면 그것은 모든 남녀를 지옥으로 가게하고 마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성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다 그렇다, 결혼은 인류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물들 중의 하나이요. 그것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있었다. 가족 제도를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정하실 때 성생활에 어떤 규범을 두시고 올바로 사용하도록 하셨다.
창세기 2:24과 에베소서 5:21은 내용면에서 같은 구절들이다.A)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무슨 이유 때문일까?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 땅을 충만케하고, 성적 충동을 보호하고, 순결케 하기 위해서이다. 결혼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결혼은 최고의 인간 관계요, 짝을 맺어 준다. 결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서 되어진다.B) 이 결혼에 관한 귀한 길잡이는 월터 트로비쉬 목사의 저서인 "나는 너와 결혼하였다"는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잠 6:3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 자들과 모든 거짓 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參與)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c)고 했다.
이 "간음"이란 히브리어는 "나압"인데,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남자와 여자에게 적용이 되어 있다. 한 남편이 다른 남자의 아내와 성적인 교통을 한다든지, 또는 한 사람의 아내가 다른 여자의 남편과 성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남자나 또는 여자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에게 다 적용이 된다. 이 죄를 범했을 때 사형이다(레20:10)71). 또 미혼 남자가 유부녀와 성교했다든지, 또 미혼 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성교에도 적용되는 죄이다. 그도 사형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백성은 그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한 법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고, 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이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청결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윤리적인 면만 아니라 또 종교적인 면에서 청결을 도모하고, 사랑의 결합과 통일을 도모하여야 한다. 또 하나님의 법질서를 잘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땅 위에 나타내어야 한다. 계명에 의하면 간음은 자기의 몸과 가정에 대하여 범죄함이며, 사람의 인격만 아니라 사회에 대하여 범죄함이다.
그리고 끝으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외쳐 말하기를 "...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그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고 했다(창39:8-9). 또다윗이 밧세바에게 범죄 했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했다(시51:4).
제 8 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F.S. Mead는 이 계명은 "모든 일에 정직한 것을 말씀해 준다"고 해석 했다. 그 해석은 옳은 해석인 줄 안다. 정직함이 없을 때, 도적질하게 된다.72)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기를 제6계명에서 생명의 존엄과 보호자가 되기를, 제7계명에서 가정의 윤리를 지켜서 청결한 가정의 보호자가 되기를, 제8계명에서 재산의 보호자와 성실한자가 되기를 부탁하셨다.73) 성경은 우리에게 재물에 대한 두 가지 자세를 보여 준다. 즉 모든 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주장한다. 심지어 사람의 생명까지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 후쉴 포드박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1. 소유권 침해
(1) 재물의 절도 ---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절도이다. 그러나 유일한 절도는 아니다. 재산을 모으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선물을 받는 것, 노력에 의한 것, 그리고 절도에 의한 것 등이다. 이 중 처음 두 방법은 합법적이지만, 세 번째 방법은 위법이다.A) 여기서 합법적인 것은 제외하고 위법적인 것을 생각하여 보자. 위법적인 것은 '직접적인 강탈'에 의해서 도적질할 수가 있으며, 다음은 '직접적인 절도 행위'를 생각할 수가 있다. 셋째가 사기를 예로 볼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책인 성경은 저울추와 되에 대하여 몇 번 언급하고 있다(신25;13-15). 또 도박이나 정당한 빚을 갚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절도이다.B)
(2) 인격의 절도 --- 모든 사람은 자유 할 권리가 있다. 자유를 빼앗는 모든 노예제도는 절도이다. 지난 수년 동안에, 미국에는 많은 어린이 유괴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가장 악한 종류의 절도라 할 수 있다. 그 어린애가 그 부모로부터 도난 당한 것일 뿐 아니라, 행복과 마음의 평화마저 도난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c)
(3) 순결의 절도 --- 어떤 비열한 불한당은 순진한 소녀를 꾀어다가 정을 통해 버린다. 그 소녀는 그에게 홀린 나머지 그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게 되고 그는 그녀를 타락시켜 그녀의 모든 정조를 빼앗고, 그녀로 하여금 그늘진 인생을 살게 하여 흔히는 그녀의 일생을 망치게 하고 만다. 그것은 가장 비열한 종류의 절도가 아닐 수 없다.D)
(4) 평화와 행복의 절도 --- 우리는 게으름에 의해서 절도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가정의 행복을 도적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남자나 여자가 어떤 행복한 가정에 침입하여 모든 애교를 다 부려서 어떤 남편이나 아내의 애정을 도적질하고 그 가정을 파괴하며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고용주는 흔히 피 고용인들에게서 도적질한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악5:4). 반대로 피 고용인들이 고용주에게 도적질할 수도 있다.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서도 그만큼 일을 해 주지 않을 때 그들은 도적질을 하는 것이다.
(5) 명성의 절도 ---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명성을 해치는 말들을 들으실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지도 않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되풀이해 준다. 그렇게 해서 곧 그 얘기는 널리 퍼지게 되어 그의 명성은 도적질 당하고 만다.F)
(6) 성격의 절도 --- 세상은 많은 자녀들이 건전한 생활을 이룩해 가는 기회를 절도하고 있다. 우리 크리스찬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격을 세상이 도적질하지 못하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G)
(7) 신앙의 절도 --- "무신론자인 흄은 그의 어머니에게 자기의 무신론적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었다."H)
(8)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절도 --- 성경은 말씀한다. "너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힘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덜 행복한 자들을 돕는데 우리의 재물을 사용해야 할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돈을 벌어 가지고 자신만을 위하여 돈을 저축하거나 탕진하는 것은 죄된 것이다.I)
(9) 하나님께 대한 절도 ---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수 있습니까?"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은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느니라"였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가장 큰 절도죄이다.J)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 생시에 그것을 사용하게 빌려 준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닌 어떤 물건을 도적질했을 때, 사람에게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그는 실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된다.74) 또한 아모스 선지자에 의하면 은을 위하여 의인을 팔고(암2:6),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4:1), 또 부당한 세를 취하는 것(5:17)도 도적이라고 하였다.75)
Keil(카일) 박사도 다른 사람의 소유를 은밀하게 만이 아니라 드러내어 놓고, 옮기는 것을 금지했다76)고 했다. 또 Mead(미드)씨의 해석도 위의 해석과 대동소이하다. 조세광 박사는 그의 출애굽기 강해에서 "간사한 수단으로 남의 물건을 취하는 것도 도적이다"77)고 했다. 도적질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재물에 대하여 정직성을 잃어버리고 부정직하고 악하게 행하는 중에 빚어지는 죄악이다. 즉 마음과 행동에서 부정직하다.
제 9 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 9 계명은 [말의 성실]을 강조한다. 즉 이 계명에 나오는 히브리어 (빼) 와 함께 있는 (아낳)는 한 사람을 대하여 그 무엇을 대답하고 증거를 하는 것이다(창33:33).그 반면에 (가)는 증거가 아니고 증언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가 쉐켈)은 거짓 증거가 아니고 거짓 증인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증언만 가지고 되지 않고 그 증언에 대한 증명이 될만한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거짓 말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거짓이나, 찾을 수 없는 어떤 증거를 제시해서도 안 된다. 재판장 앞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결혼문제, 이웃 관계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거짓 증거를 해서 해독을 끼쳐서 안 된다(출23:1,민35:30,신17:6-19:1523:13). 78) 이런 문제는 레위기 19장 17-18절과 잠언 26장 19절에도 나타나 있는데 참고가 될 줄 생각한다.
사람의 혀는 악하여 타인의 허물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누가 타인을 시비할 때 입으로 사실을 과장하여 말하기 쉽다. 또 인간은 가끔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만을 잡아내여 말하기 쉽다. 그 좋은 예가 창세기 38장 34절에 나오는 유다이다. 그는 자기의 며느리 다말의 죄는 보았으나 자기의 실행과 죄는 보지 못했었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 앞에서 자기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허물을 보고 판단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에 와서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자를 끌고 나온 사람들을 보자. 그들이 어떠하였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없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지 못하고 정직성을 상실한 때문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사단은 [거짓말장이]요 모든 [거짓의 아비]라고 되어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그리스도는 진리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투쟁은 그리스도 대 사단, 즉 진리 대 거짓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내면적 성품을 드러내 보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완전히 의로우셨기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의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를 판단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말에 의하여 우리를 판단한다. 우리의 언어가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이 얼마간 있음을 알게 된다."A)
1. 이 계명에 대한 위반
(1) 법정에서의 위반 --- 법원은 재판을 시행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재판은 진리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법정에서의 모든 증거는 진실하여야 하고, 믿을 만해야 한다. 거짓 증거는 재판의 목적을 그르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증인석에서 거짓을 말하게 될 때 그는 다른 사람의 재산과 시간과 생명을 빼앗을 수가 있다.B)
(2) 직접적인 거짓말에 의한 위반 --- 무엇이 거짓말인가? 사전에 보면 그것은 [모든 종류의 고의적인 기만]이라고 했다. 여러분이 명백한 진리에 반대되는 어떤 말을 지어낼 때 여러분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직접적인 거짓말을 범하고 있다. 여러분이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기만코자 할 때 그것은 곧 거짓말이다.C)
(3) 험담과 비법에 의한 위반 --- 전갈은 그 꼬리에 독이 있고, 독사는 그 턱의 뒷부분에 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비방하는 자와 험담하는 자는 그의 독을 혀에 가지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혀로는 사람을 파멸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악하게 보신다.D)
(4) 악하고 간사한 말에 의한 위반 --- 아첨에 의한 위반, 침묵에 의한 위반, 부당한 비난에 의한 위반, 위선에 의한 위반,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위반 등이다.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위반은 과거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에게 헌신을 다짐했었다. 여러분은 그때 교회에 충실하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또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수입이 있게 되면 자신만을 위해서 써 버리고, 여러분의 약속을 잊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다.E)
제 10 계명 탐심을 물리치라
"이 계명은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그것은 행동 배후에 있는 행동을 조정하는 사상을 보여준다. 즉 성경은 마음을 취급하고 있다. 그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탐심은 기초적인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은 그 특성이 자기를 본위로 하는 죄악된 인간이다".80) 우리는 그 예를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자기를 본 위로 하는 가운데 죄가 세상에 크게 창궐했다.
1. 탐심에 대한 성경구절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7:21-23,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은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탐심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한 말이다. 한 면은 선한 것이며, 다른 한 면은 악한 면이다. 탐심은 어떤 것에 대한 욕구이다. 고로 그것이 선한 것일 수 있다. 이와 반면에 그것은 비율법적이고, 반신적이고, 또 비기독교적인 육욕의 갈망, 즉 이웃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악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허락에서 떠난 탐심을 증오한다. 이웃에게나 그 어떤 누구에게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탐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 탐 하는 것이 죄가 되는 때는 다음 두 가지, 즉 그것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대항하여 범죄하는 원인이 될 때, 그것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대항하여 범죄하는 원인이 되게 하거나 자신이 범죄하는 원인이 될 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계명에서 인간으로 자기 본위와 범죄의 요인이 되는 마음 속에 숨은 탐심을 축출하여야 하고 그것을 잘 다스려야 함을 원하신다.
2. 탐하는 자의 표시
1. 그의 생각이 온통 이 세상 것 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는 탐하는 것임. 2. 그의 대화가 이 세상에 대한 것 만일 경우, 그는 탐하는 자임. 3. 그의 영혼을 물질적인 것과 바꾸는 경우, 그는 탐하는 자임. 4. 그의 마음이 세상에 집착되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경우, 그는 탐하는 자임.4)
--------- 위에서는 십계명의 구약적 의미와 그 해석을 서술하였다. ----------
아래에서는 십계명에 대한 신약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제 IV 장 십계명 고찰
제 4 절 십계명 해석
신약 중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사상 가운데 나타난 십계명관을 고찰하겠다. 신약의 십계명관은 구약적 십계명의 의미를 보는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흔적이 매우 많다. 그러나 신약의 십계명은 구약의 가시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인정하면서 그 보다 더 영적이고, 신령한 면을 더욱 강조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은 구약의 해석을 크게 보완하고 참되고 깊은 진리를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마5:17)는 뜻이 여기에 적용되는 의미인 것이다. 구약의 예언은 메시야가 재림하여 구속사업을 성취하는 제사장적 사역에도 있으나 십계명의 근본 요소인 사랑의 윤리를 성취하는데 있다. 또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해석하여 가르치는 데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왕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메시야, 즉 예수그리스도의 신령한 왕국의 현장이다.81)
그러므로 십계명에 대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견해와 해석이 완전하고 그의 구속 사업에서 완성되었다.
1. 예수님의 십계명 해석.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십계명을 어떻게 구분하셨으며, 그 내용을 어떻게 본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두 돌비에 기록된 것으로 보셨다(마22:37-40). 예수님은 첫째, 돌비의 내용은 지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에 대하여 말씀했다고(마22:37-38)했고, 둘째, 돌비의 내용은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에 대하여(마22:39)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것에 대한 제목들은 마태복음 19장 18-19절에 명시된 것과 같다(막10:19,눅18:20). 또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지켜 행하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신 것이나, 유월절을 엄수하신 것이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 것은 그 좋은 예들이다. 그뿐 아니라 성전세를(The temple tax) 지불하신 것이나(마17;24), 율법대로 옷을 입으신 것(마9:2014:36)이나,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마8:4)이나, 성전의 참된 성질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마21:12,막11:16등)도 그 한 예증이다. 또한 모든 의(Rightousness)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 등등이다."82)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이 되는 계명을 잘 아심은 물론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지키셨다. 여기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라는 뜻은 예수님의 메이야적이고, 대속적인 사업, 즉 그의 고난과 죽음을 포함한 사업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신 사실은 가장 중요한 교훈인 것이다.83) 그것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다(마7:12). 즉 계명의 강령도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율법의 근거가 되는 계명의 핵심도 사랑이다. 그 사랑은 전에 기록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할 것과 이웃을 지성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위의 두 계율을 다 지켰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루신 것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마7:1222:4024:12,막12:34) 십자가에서 성취하셨다. 즉 사랑의 완성자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 사랑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앙으로, 즉 순종으로 접붙임을 받은 신자는 신앙의 힘으로 그 사랑을 영적으로 이룰 뿐만 아니라 성령안에서 성취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자신의 신앙과 행위의 척도요, 생활의 규범이다(막1:15,눅4:21). 이하에서 예수님의 십계명관과 그 해석을 상고하여 보자!
제 1 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예수님은 공생에 초기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신 후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 시험은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세 가지였다. 그 세 가지 중에 셋째 시험은 십계명 제1계명과 관계된 것이다. 마태복음 4장 8절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라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예수님으로 자기에게 경배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 마귀는 "만국"이란 상금을 놓고 예수를 미혹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케 하려 한 것이다. 제1계명을 범하게 하려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인간적인 권력욕과 세상의 영광욕을 일으켜서 자기에게 경배케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아무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경배"는 존경과 사랑과 충성을 결의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배는 경배자의 마음과 몸과 생활을 경배하는 대상에게 맡기어 그로 주장하게 하여 그의 지배하에서 오직 그에게만 존경, 사랑, 그리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배반, 또는 사랑, 그리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배반 또는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구속사업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사탄에게 경배하면 하나님께 반역함과 구속사업을 져버리는 죄가 될 뿐 아니라 사탄과 짝하고 사탄의 사업 동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했다. 본문에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것은 사탄의 간교한 계책을 단호히 끊어 버리고, 또 그를 향하여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공격함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사탄을 대항하라. 그리하면 그가 피하리라"고 했다. 또 그것은 사탄의 타협안을 일축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했다. "경배함"이라는 헬라어(프로쓰쿠네오)는 ▲와 ★의 합성어인데, ▲는".....을 향하여", 또 ★는 "입을 맞춘다"84)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경배함"이란 단어 "프로쓰쿠네오"는 "....을 향하여 입을 맞춘다"는 뜻이다. 즉 ....을 향하여 존경, 사랑, 그리고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마치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행한 모습이 진정한 경배의 모형이다.
또 "섬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라트레오"인데, "종"이란 단어 "라트리스"에서 온 것으로 섬기는 것이었으나, 그 말에서 "예배함"(롬9:4), 제물을 바침(히9;9) 등의 뜻으로 사용되게 되었다.85)
그러므로 그 뜻은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제사드리는 것이다. 즉 헌신과 희생적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을 말한다.
예수님은 위의 시험에서 제1계명을 이론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실질적인 면에서 승리의 개선을 하였다. 그는 우리의 모범적인 교수이다.
또 마가복음 12장 28-30절에서 서기관의 시험적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유일하신 분이시고 모든 생명을 주장하시는 영적이고 생명적이신 하나님이시고, 감히 누가 당할 수 없는 능력과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자신 전체를 드려 지성껏 섬기고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 2 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출애굽기 20장 4-6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이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귀한 교훈을 사마리아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다섯 남편을 두었던 여자 앞에서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4장 7-24절에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의 조상의 교훈의 권위를 최고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권위와 전통적인 권위를 뜻하는 것이다.
다음에 예배 처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제사하였던 것 같다. 또 이와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이 두 곳 중에 어느 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하였다. 그녀는 계속하여 질문하기를 "그 어느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까?"였다. 끝으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예배의식 문제에 대하여 질문도 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의식과 유대인들의 예배 의식이 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신(예수님이 속해 있는 유대나라)네 예배 의식이 정당한가, 아니면 우리(사마리아인의 예배 의식)의 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 여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NO", 즉 부정적이었으며, 가장 정당하고 참된 예배는 이런 예배라고 교훈했다. 즉 영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 예배를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라는 장소에 제한하여 계시지 않으시며, 또 자기의 육적 백성에게 교제의 특권을 주는 제한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그리고 물질로 된 성전이나, 형상이나, 의식이나, 그리고 협소한 종교적인 편견에 얽매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인종적 차별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시다. 누구든지 어디서나 겸허하고 회개하는 심령을 가질 때 그 하나님을 볼 수 있다".86)
"바른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랑의 교제이다."87)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고 했다.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과 자세는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가리킨다.
(1) 하나님은 종족적 편견을 초월한 존재이시다(요4:9)
(2) 그는 性을 초월하신 분이시다(요4:9)
(3) 그는 인간적인 수단을 초월하신 분이시다(요4:11)
(4) 그는 인간적 선조 이상의 분이시다(요4:12).
(5) 그는 인간의 수요 이상의 것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요4:12-14).
(6) 그는 인간의 가사를 초월하신 것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4;4)
(7) 그는 인간의 사기를 초월하여 아시는 전지자이시다(요4:18).
(8) 그는 공간을 초월하신 존재자이시다(요4:21)
(9) 그는 시간을 초월하신 존재자이시다(요4:23)
(10)그는 생리적인 욕구를 초월하신 분이시다(요4:32).
(11)그는 자기 본위적인 인간생활을 초월하신 분이시다(요4:34)
(12)그는 현재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들에게 [하나님 살아계신 말씀]이시다(요4:26).88)
제 3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
마태복음 5장 33-37절에 헛맹세를 하지 말 것과 맹세한 것은 주께 지키라고 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만 피하고 하는 맹세는 어떤 맹세든지 안 지켜도 허물이 아니라고 하는 풍습이 있었다"89)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한 맹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하지 않은 맹세도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한 맹세는 직접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의 성호에 간접적인 영향이 있으며, 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감정에 치우쳐 하나님의 성호를 불러도 안되고 또 남에게 욕이나 저주도 적극 금하는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 7장 5-8절에 보면 의식적인 경배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성호 모독이다. 이는 나를 인하여 타인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디도서 1장 16절에는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했다.
제 4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11)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는 제자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켰다. 누가복음 6장 6절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가복음 3장 1-6절에도 같은 기사가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이 보여 주는 것은 신령한 사업을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도 이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사상이 예수님의 사상과의 차이는 안식일에 행하는 일을 무조건 금하고 또 정죄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떠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셨다(눅 6:6-11). 그때에 유대인들은 이것을 보고 분내어 예수님을 해하려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의를 말씀하셨는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눅 6:914:3). 또 누가복음 6장 1절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자들과 같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항의할 때에 예수님은 그것을 변호하셨고, 안식일을 정의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막 2:28)고 하셨으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했다. 그 뜻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안식일을 대신하는 주일을 지키는 법은 그날이 주님의 날이니 만큼 예배를 위주로 하되 자비와 긍휼을 의미하는 활동과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이 된다."90)
또 요한복음 5장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나서 그 일로 박해하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셨다.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하여 보면 안식일은 주님의 날이다. 이 날은 주님께 예배하고, 또 선한 일과 생명을 구원하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일들을 할 것이 주님의 뜻이다.
제 5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예수님이 부모 공경에 대하여 취급하셨다. 예수님은 모세의 명령을 말씀하셨고, 그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해석과 범죄를 지적하셨다. 유대인들은 부모에게 할 일은 하지 않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 하면 된다는 것과 부모에게 마땅히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다. 즉 부모에게 할 일을 폐하고 부모에게 행할 공대를 무시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니 악한 것이 가득하여 그렇게 되었다(막 7:20-23)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의 일을 잘 돕고 잘 공대한 분이시다(눅 2:51-52). 그 예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어머님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 것은 부모 순종과 공경의 좋은 표본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1-4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다. 이 말씀들이 내포하고 있는 교훈은 하나님께 할 일은 하나님께 하고 부모에게 할 일은 부모에게 하시는 일을 잘 돕고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적인 것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까지 다 포함이 된다. 이것은 인륜의 최고의 덕이요 근본이다.
제 6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
예수님은 제 6 계명에 대하여 해석하실 때에 살인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대인적인 관계의 선하지 못한 것도 포함해서 말씀하셨다. 정신적이고 대인적인 관계에 있어서 선하지 못한 것은,
(1) 형제에게 노하는 자이다(마5:22). 신자는 자기와 같이 믿는 형제에게 증오를 발표하는 것은 역시 큰 죄임을 말한다.91)
(2)"라가"는 입으로 나타나는 욕설, 즉 악담이다.
(3) "미련한 놈"이라 함은 타인의 인격을 모독함이다. 이것은 아주 나쁜 욕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놈이란 내용을 가진 말이다.92)
(4) 형제에게 원망을 들음. 이것은 다른 신도의 것에 손해나 또는 오해를 해결하여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형제와 화목을 강조하고 있다(마5:24).
(5) 원수를 사랑함, 마태복음 5장 43-48절에 기록되었는데,
가) 원수의 실수를 용서.
가) 원수를 사랑.
가) 원수를 위해 기도.
가) 원수를 위해 축복을 비는 것 등이다.
요한일서 3장 15-18절에는 살인의 요소인 미움에서 초월하여 사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라는 적극적인 면을 제시한다.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
예수님은 제 7 계명을 외면적으로 실제적인 문제만 취급하신 것만 아니라 내면적이고 비실제적인 것의 동인이 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취급하셨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27-32절에 보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음행에는 두 가지면이 있다. 그 첫째 면은 외면적이고 실제적인 면이고, 그 둘째 면은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이것은 첫째 면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둘째 면인 정신적인 것, 즉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음행의 목적을 가지고 이성을 대하는 정신적인 자세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신명기 24장1-4절에 기록된 말씀을 회상하면서 음행의 연고 없이 하는 이혼은 불법적인 것이며, 또 이혼을 한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음행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사전에 정신적인 면에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다른 이에 대한 음욕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결혼을 위한 이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음행의 죄가 그의 속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요한복음 8장 3-11절에는 무리들이 현장에서 음행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주님에게 고소를 했는데 예수님은 그 문제를 잘 해결하셨다. 여기서 생각되는 것은 예수님은 육체적인 음행 못지 않게 정신적인 면을 더 중요시했다는 것, 그리고 마음에 범죄하고 그 죄를 깨닫지 못하는 철면피보다는 그 죄를 범하고 깨닫는 것,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타인을 정죄하려고 그 막중한 죄악을 범하는 그들보다는 차라리 범죄한 후에 회개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같이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이 중요하고 죄가 되나 그 보다는 정신적인 죄가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제 8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20:15)
예수님은 도적질에 관하여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으며 또 가롯유다에게도 말씀하신 것이 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마리아에게 대한 가롯유다의 그릇된 태도를 나무랐다. 사도요한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가롯유다는 도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돈궤를 맡고 거기에 넣어 두는 것을 훔쳐감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첫째, 그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값을 탐한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은30에 판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도적질한 자이고, 수전노이다. 그렇다고 이에 적합한 예수님의 교훈이 마가복음 12장 30-31절에 나타나 있는데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에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니라"고 했다.
이상의 주님의 말씀에서 깨닫는 진리는 대인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범하는 죄이고, 또 남의 눈을 피해서 훔치는 것도 도적질이 되지만 그보다도 약자의 것을 빼앗고 타인의 것에 대하여 탐심을 가지는 것도 도적질이 된다. 또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횡포를 행하는 것만 아니라 인간 생활에서 마음과 몸을 가지고 자기의 처지를 떠나 타인의 처지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딛 2:7-10).
제 9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3절에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12절에 근거하여 자기의 편견을 붙여서 꾸며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며 거짓된 것을 거짓되지 아니한 것 같이 가리워서는 안 되며, 진실한 신앙과 양심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 사랑에 근거하여서만 진실하게 말할 수 있으며, 바른 증거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2장 31절에 의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고 한 서기관의 지혜 있는 대답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에 찬성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의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를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다. 실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모든 면에서 유익과 덕을 끼쳐야 한다.
제 10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우리는 끝으로 탐심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자. 예수님은 이 탐심에 대하여 실질적인 교훈을 하여 주셨다. 즉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형에게 유업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고, 어떤 부자의 어리석음을 들어 교훈하여 주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결론을 내리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데(눅 12:22-29), 그 물질에 대하여 탐심을 품지 말고 반면에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고(마6:19-21),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 것이라(마6:33-34)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요소를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외면적이고 실제적인 것에 관하여 말씀했으나 그 보다 그것의 근거가 되는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들어 잘 교훈하셨다. 이 십계명을 지키고 행동함에 있어서도 그 근본이 되는 사랑, 즉 믿음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2. 사도들의 십계명관
사도들의 십계명관은 위에 생각한 예수님의 교훈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우고 익힌 바를 그대로 선포하였고 그대로 기록하여 주었다. 그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교훈하신 바를 기록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신앙과 사상이 서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십계명관은 예수님의 교훈과 같다고 하여도 잘못이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에 대한 참고 서적은 구레인 박사가 쓰고, 김규당 목사가 번역한 "조직신학" 상권을 참고하기를 바란다.93)
제 Ⅴ 장 결 론
그러므로 "십계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전체의 구속적 구조를 보여 준다. 종 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은 율법의 구성된 요소를, 그리고 다른 편은 십계명의 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의식적인 계명(Ceremonical Commandments)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신성한 운동의 처음과 나중을 서로 결합하여 준다. 즉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활동과 거룩한 합리인 국가와 신적 정체를 세우기 위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성격과 뜻에 적합하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 적절한 법과 생활의 요소들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94)
또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 모세에게 십계명의 특성을 보이고 깨우쳐 주어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벨하우젠(Wellhausen)이나, 킬(Kyle)이나, 파이퍼(Pfeiffer)나, 드라이버(Driver)의 이론과 같이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의 영향이나, 애굽, 헷과 앗수르 법전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어의적인 면이나, 영적이고 내용적인 면이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 모세의 법은 다른 모든 법에서 볼 수 없는 필연적인 법이 더 구성되어 있어 그것이 독특한 특성이다.
또 십계명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가 있다. "증거판"이라든지, "법판", 또는 "두 돌비", 또는 "그 말씀들"이라든지, 여러 칭호가 있으나, 성격상으로 보아 "십계명"이라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또 십계명이라 한 곳이 몇 곳 있다(출34:28,신4:13). 십계명은 두 돌비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첫 돌비에는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 둘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십계명의 해석은 구약에서는 외형적이고 육신적이고 실제적인 면인데 반하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사도들)은 내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면에 더욱 중점을 둔 것 같다. 즉 제1계명의 근본 진리를 기술하고 그 진리에 근거한 교훈을 찾아 해석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그 사랑이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말씀하셨다.
십계명의 실제적인 성격은 종교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외면적인 죄악만 말씀하고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거가 되는 근본적인 죄악의 연합체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인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악한 욕망이다."95)
그러므로 그 마음속에 자리잡은 악한 욕망을 주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중생함으로 새사람이 되어 그 계명을 이룰 수 있다. 즉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사랑을 실천함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음으로 계명을 범하고,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발휘하므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나타냄으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완수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계명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행함은 계명을 완수함이다. 주님이 율법을 완수한 것도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함에 의한 것이다. 우리도 대속하시므로 율법과 계명의 완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사랑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함에 있다. 또 그것은 언약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즉 하나님으로 같다. 시내산에서 설정하신 언약은 실질적으로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동일하며 그 형식도 매우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이 늘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지상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언약이 하늘에서 출발하여 천상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언약과 비교된 것이다.96)
그러므로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언약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 그 언약은 형식적인 외적인 면만 아니라 내용적 질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동시에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율법사들과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는 그 견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 깊고 신령적인 면에 충실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구약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셨다(눅 24:27)는 점이다. 이 원리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성경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도 된다.97)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만 보신 것이 아니라 사랑도 보신 것이다. 엄한 율법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가장 보배로운 은혜도 보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일면적인 교훈과 견해를 깨우치고 바른 교훈과 견해를 주시고 바른 교훈과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결합이 되어 있다"(요1:17). 십계명은 이 세상에서 "모든 도덕의 율법"(All Moral Law)과 "윤리적 이상들"(Ethical Ideals)의 근거로서 인정이 되고 있다.98)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은 율법의 핵심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기초이다."99)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교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기초였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자비를 보여 주셨다"100)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과 은혜와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통하여 관계(Regard)와 규정(Prinison)을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각 계명은 순종하고 지킬 때에 생명과 축복을 충만히 가져다 준다. 계명은 잔혹한 것이 아니고, 또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와 안전과 선한 존재를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그 최고의 자유와 안전(Liberty) 가운데서 생활의 넓이를 가지게 한다.101)
<출처: 아세아선교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