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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실전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경향신문
서울 목공소 ---------- 양해기 굵은 팔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해 나무아래에 파묻은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껍질이 떨어져 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 테를 차례로 안아 낸다 얇은 나무판자에 땅-땅 못 총을 쏘아대는 사내의 얼굴이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땀은 가장 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 다닌 다 갈래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 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아이가 뛰어 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엮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문화일보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한국일보 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서울신문 아쿠아리우스 ---------- 최호일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 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 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부산일보 바뀐 신발 ----------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대구매일 우주물고기 ---------- 강경보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세계일보 불가리아 여인 ---------- 이윤설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를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동아일보 개기월식 ---------- 곽은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k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콘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 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 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레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조선일보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같아서 뼈째 씹어야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진주신문 봄날의 부처님 / 김애리나 쉿,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 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써 바람을 올라탈 준비를 하는 걸요 꽃가루 가득 실은 바람과 공중에서 한 바탕 구르다 주워 입지 못하고, 흘린 치마들이 노랗게 땅을 수놓는 걸요 화나셨어요 부처님? 왜 오롯이 눈은 내리깔고 침묵하셔요 이 봄에 관계하지 못한 生이란 울기만 하는걸요 보세요, 대웅전 계단 옆 고개 숙인 한 그루의 불두화를 향기 많은 꽃에 벌과 나비가 꼬여 열매를 맺는 모습은 수도승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여 성불코자 심었다는 불두화가 관계를 나누다 쓰러진 것들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어요 천년이 넘게 한 세상 굽어만 보시는 부처님 오늘처럼 법당에 둘이만 있는 날에는 당신 한번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 아시는지, 헛. 헛 기침하시네요 토라져 눈감으시네요 긴 손 뻗어 몇 날 며칠 불두화의 눈 감겨 주시니 아, 그제야 봄 저무네요 절름발로 지나가네요 ■동양일보 집 / 박순서 언 강을 떠나는 새는 내 눈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는다 나는 차마 관 뚜껑을 닫지 못한다 하루살이처럼 세상 휘저으며 여태껏 살아 나는 누구의 보금자리가 되었는가 언 강에도 새들의 집이 있고 꽃이 진 마른 대궁에도 봄볕의 집은 남아있다 내 눈 속의 새들아 이제 돌아갈 길일랑 잊어버려, 마지막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흐르다 흐르다 내 몸에 칭칭 감기어 안온한 보금자리에 머무름 같이 너 이제 날개를 묻으라 능선을 넘으면 내 무덤이 있다 낯선 바람에 끌려가다 부리로도 울지 못한 네 눈물이 있다 저기, 보아라 저승 가는 길목에 굶주린 까마귀가 까르륵 까르륵 빈 솥에 밥을 푸고 있지 않느냐 ■국제신문 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 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 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 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 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 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 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 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 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 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 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 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강원일보 -여행, 스무살의 열차 / 이병철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경인일보 해발 680m의 굴뚝새 / 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 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산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m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 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무등일보 이하를 펼치다 / 오장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편에서 울던 갈가마귀떼가 동편으로 분주했다 한점 멀리 갈대밭에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오랜 슬픔같은 그의 아쟁이 등뒤에서 먹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의 두 눈 속으로 노을이 설핏 지고 있었다 낯선 그의 발자국 소리로하여 야트막한 강 언저리에서 몇몇 물고기들이 물밑으로 잠수하곤 하였다 미세하게 출렁이는 강물과 함께 그의 아쟁도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그의 산발한 머리카락과 어깨를 잘 익은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쟁을 풀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아쟁만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쟁의 가는 현이 아주 낮게 동심원을 그리자 강물에 한 발을 담그고 있던 풀들이 춤을 추었다 갈대들이 불타올랐다 그의 모든 현들이 몸을 놓아버렸을 때, 일곱 마리의 용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마른 번개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지상으로 일제히 꽂히고 있었다 동편에서 분주했던 갈가마귀떼가 그의 앞에서 무작정 내려앉고 있었다 강물 깊숙히 잠수했던 물고기들이 차례차례 물길을 차고오르며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현 사이사이로 은빛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며 수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대전일보 금이 간 거울 / 정용화 얼어있던 호수에 금이 갔다 그 틈새로 햇빛이 기웃거리자 은비늘 하나가 반짝 빛났다 그동안 얼음 속에서 은어 한 마리 살고 있었나보다 어둠에 익숙해진 지느러미 출구를 찾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 속을 헤엄친다 넓게 퍼져 가는 물무늬 한순간 세상이 출렁거린다 질긴 가죽도 없이 깊고 넓은 어둠 속에서 너를 지켜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픔 속에서 반짝임이 나온다 반짝이는 모든 것은 오랜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 금이 간다는 것은 또다는 세상으로의 통로다 깊이 잠들어 있는 호수 속에서 물살을 헤치고 길이 꿈틀거린다 ■한라일보 개성집 / 김명희 내 유년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누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둘러댈 붉은 변명들을 입 안 한 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도.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 가볍게 스치었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전북중앙일보 숭어 / 심인숙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뛴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 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 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죽 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던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빨래줄에 걸린 이불호청사이로 달빛이 든다. 보초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다. 좁은 수돗 가에서 미끈한 숭어들이 비늘을 떼고 있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같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깔깔,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 간다.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다.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영남일보 봉제동 삽화 / 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전북도민일보 바람 들어 좋은 날 / 김광희 도마 위에 퍼덕이는 순풍씨는요 한 마리 바다여 입이 댓 발 나온 분녀가 단칼에 기절시키고 바닥만 긴 미주구리* 아랫도릴 올려쳤거든요 성난 파도로 일어서던 비늘이 날 무딘 칼날에 힘없이 쓰러지데요 두터운 파고를 한 숨에 쓰윽 떠냈어요 대추씨 만한 부레 저렇게 작은 꿈 가지고 태양 향해 펄떡였던가 봐요 물컹한 가문에 뼈대라도 세우려는지 발라낸 뼈에서 활시위처럼 탱탱한 시간이 꽉 찼어요 가실 삼켰던지 살 속 깊이 박혔네요 바람 부는 데로 출렁였던 것은 고통의 몸부림이었던가 천 날 만 날 바람 들락였을 허파는 다 녹아 없어지고 참빗 같은 아가미에 그 바람 걸렀던 것 같아요 어딜 쏘다녔던지 얼룩진 상처 비릿한데 바다 깊은 심장 속에서 헤엄치는 분녀 꼬들꼬들 바다를 씹는 달디단 성찬 차려 황홀한 순풍씨, 쇠주 한 잔 받으셔 *미주구리: 물가자미의 경상도 사투리 ■전북일보 북어 / 기명숙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 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 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꽁치 / 기명숙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 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 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 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 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 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불교신문 눈발 날리는 마당 / 김운영 눈발 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으면요 마른 저녁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데요 발목 잃어버린 눈발은요 땅에 닿지도 못하구요 약한 한숨처럼 담벼락 위 아버지의 여윈 어깨 위 에도 말이지요 관절 절룩거리면서 아버지 뒤란으로 가시더니요 불쏘시개 송구나무 가마솥 물 끓이는데요 등겨같은 닭털이 공중에 몇 날아다녔나요? 오래오래 눈발이 아버지 빈 어깨에 배꽃처럼 쌓이면요 오래오래 가마솥 연기 마음의 暴政(장작불) 몸 밖으로 서서히 증발되고 있으면요 아버지 사발에 담아 안방에 어머니에게요 아버지 붉은 동맥 모세혈관 풀어 어머니에게 비는 견고한 용서 닭백숙의 용서를 말이지요 살과 뼈 허물어지는 解産처럼 맑은 국물 눈물 말이지요 어머니가 밤새 소리없이 우시는 날에는요 다음날 말없는 닭백숙 한 그릇 눈발 날리는 마당에서 말이지요. |
첫댓글 주옥같은 글이 지만.. 한번에는 ..다..못..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