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가해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 루카 11,1-4
축일 10월 8일 성 시메온(Simeon) 예언자
예언자직의 대상엔 제한이 없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란 책에 예언자직에 대한 이런 예가 나옵니다. 삼켜 버리게 되리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생겨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미치게 되리라고.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사는 산속 동굴에 커다란 물독을 갖다놓고, 죽을 때까지 마셔도 넉넉할 만큼 마실 물을 잔뜩 길어다 부었습니다. 새로 물이 솟아나 크고 작은 내와 못들을 채웠습니다. 몇 달 뒤, 예언자는 세상이 어떻게 됐나 살펴보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역시나 모두가 새로운 물을 마셔 미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를 공박하거나 아예 상종하려 들지조차 않았습니다. 혼자만 멀쩡한 그가 미웠던 것입니다. 물을 비축해 놓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며.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사귀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진 것입니다. 결국 또다시 평지로 내려간 예언자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딴판으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저장해 놓았던 물을 쏟아 버리고, 새 물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의 미치광이 짓에 한데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바오로 또한 약간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까지도 비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단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좋다고 결정을 내렸음에도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비판받지 않기 위해 은근슬쩍 할례 받지 않은 이방-그리스도인들과의 식사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오는 베드로의 그런 일관성 없는 행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교가 교황을 비판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판한다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 더 먼 사이일 수 있습니다. 가감 없이 건의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제는 목자이고 아버지입니다. 목자라도 위험하지만 않다면 양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하고 아버지라도 자녀의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가 양이 느끼는 풀 맛을 알 수 없고 아버지라 해도 아들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직은 물론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직무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며 당신의 삼중직무 (왕직, 사제직, 예언자직) 가운데 예언자직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암시하셨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직은 아랫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윗사람에게도 필요하다면 잘못하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직무, 즉 우리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렇게 직언을 해 주는 분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가게 지배인이나 일하는 사람들은 음식이 맛이 없을 때 자신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가장 고마운 손님들이라고 합니다. 밖에 나가서 맛이 없다고 하면 손님이 떨어지지만 자신들에게 말하면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나를 미워할까봐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사랑의 결핍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젖을 달라고 운다거나 필요한 학용품을 살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마땅히 요구해야 하는 것 또한 상대가 마땅해 해야 하는 의무를 상기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그 요구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상대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말을 해 주어야 할 의무는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축일 10월 8일 예언자 성 시메온(Simeon) 신분: 신약인물, 예언자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시므온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루카 2,25-32) 아기 예수와 시메온의 만남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주님이신 예수님과 만나며 진한 기쁨과 감동을 체험했을 것이다. 앞으로 루카 복음서에 나타난 ‘만남과 관계’를 중심으로 묵상하고자 한다. 등장하는 인물들과 예수님의 만남과 관계를 바라보며 우리와 그분의 만남도 새롭게 하고자 한다.
의인 시메온
예수님 탄생 40일 뒤 그의 부모는 그를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의 성전에 갔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장소로 아기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첫 출발지며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아기 구세주를 경배하였던 곳이다.
이 도시에 ‘들어줌, 성취’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시메온이 살고 있다. 성경 저자는 시메온을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25절)라고 표현한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며, ‘독실하다’ 함은 루카 복음에서 신앙인의 의무를 준수하는 데 특별히 신중함을 표현한다. 같은 표현을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부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루카 1,6). 이들의 공통점은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이들로 경신례에 성실하며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곧 이들은 주님의 가난한 이로서 ‘아나빔’의 신앙을 상징한다.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은 그 자신의 구원이 아닌 이스라엘의 위로, 곧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위로’는 고통이 전제되는 상황으로 구원과 해방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지파의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과 이민족의 억압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하심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의 만남에서 성경 저자는 세 번에 걸쳐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한다(25.26.27절). 성령은 일시적으로 잠시 오신 것이 아닌 시메온의 삶의 여정에 머물러 계시는 분으로, 능동적인 실재로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주셨으며 구세주를 만나도록 그의 영혼을 움직이셨고 그를 성전으로 이끄셨다. 그렇다면 시메온은 예언자인가? 성경 어디에도 그런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성령께서 먼저 시메온에게 주님을 뵐 것이라는 은총을 주셨고, 시메온은 그것을 희망하였다.
시메온은 희망하던 구세주를 성전에서 만난다. 시메온이 우연히 성전에 간 것이 아니라 성령께 이끌려 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때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아기 예수님 또한 율법을 이루고자 부모에 의해 성전에 오게 되었다. 곧 율법과 성령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을 만나도록 이끌었다.
마침내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안는다. 아기를 보는 순간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방실방실 웃는 아기 예수님의 얼굴에서 고대하던 그리스도를 보는 시메온! 그분이 그의 희망을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심을 깨닫는다. 감격한 시메온의 마음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감격을 표현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29절). 이 고백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 15,15)과 야곱이 아들 요셉을 다시 찾았을 때 한 말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창세 46,30)를 생각하게 한다.
시메온의 찬미
아기 예수님이 주님이신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시메온은 기쁨에 겨워 찬미가를 부른다. 이 찬미는 5세기부터 교회의 성무일도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불리는 기쁨의 노래가 되었다.
찬미의 처음, 시메온은 주님을 부르며 자신은 종으로 표현한다. 이는 시메온이 얼마나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29절).
‘이제야’라는 표현은 시메온의 기다림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과 이제 메시아적 구원의 시간이 도달했음을 알려준다. 시메온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뵘으로 평화로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 평화는 이미 예수님 탄생 때 천사들이 선포한 평화이다(2,14).
다시 말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이 세상에 평화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시메온은 그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통해 이 평화(구원)를 보고 있다. 이제 시메온은 더 이상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그의 팔 안에 하느님의 위로, 곧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구원의 완전한 실현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다.)
시메온이 체험한 평화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즈카르야의 예언(루카 1,79)이 실현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시메온은 모든 이가 보기를 갈망(루카 3,6)하는 구원을 보았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30절). 도래한 메시아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시메온은 복이 있다. 루카 복음 10,23-2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준비된 것이다(31절.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 - 새 성경에는 ‘민족’으로, 200주년 성서는 ‘백성’으로, 공동번역 성서는 ‘만민’으로 표현하였다.). 루카는 백성(λαο?)이라는 단어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사용하고(사도 4,25), 이방인에게는 민족(εθνο?)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사도 15,14; 18,10). 이것은 32절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다른 민족(εθνο?)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λαο?)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루카는 31절에서 예외로 민족이라는 단어 자리에 백성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백성(루카 1,17)들을 향한 것으로, 곧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 모두를 포함한다 하겠다(이사 52,10; 에제 29,27).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메시아의 빛을 이방인들에게 비추어 당신을 알게 하며 그들을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이끄심을 알게 되었다(이사 49,6; 42,6).
이방인들을 위한 계시의 빛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광이다(이사 46,13).
시메온은 자신만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백성에게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구약이 준비하고 약속된 도달점이며, 구원의 역사 안에서 중심이시며,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형성된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 구원의 출발점이시다.
새김
이 복음말씀을 읽으면서 시메온이 많이도 부러웠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그의 올곧은 삶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러나 특히 더 부러웠던 것은 그의 삶의 여정에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의 삶을 이끌어오셨고, 그의 삶 마지막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뵙는 은총까지 주셨다.
하느님의 현존이 계시는 성전에서 성령께 이끌리어 한 아기로 오신 구세주를 뵙는다는 것! 오랜 시간 기다리고 열망하여 온 분이기에 결코 낯설지도 충격적이지도 않게 당신을 드러내신 구세주! 커다란 감격과 찬미로 응답하는 시메온!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그러나 누구나 시메온처럼 성령의 은총 안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열쇠는 은총을 받아들일 빈 그릇이라 여겨진다. 시메온은 그리스도를 뵙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깨어 준비하였기에 그 희망을 보았다. 내가 나 자신을 비우지 못할 때 그분은 내 안에 머물고 싶어도 내 삶 안에 역사하실 수가 없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본다. 빈 그릇을 준비한다면서 손 가득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움켜잡고 있지는 않은지! 차고 넘치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내가 넣은 것만 고집하지 않는지! 성탄시기를 보내면서도 이미 우리에게 와계신 분을 두고 다른 것을 찾고 있지 않는지!
우리의 하느님은 아마도 어린 시절 달리기를 할 때 출발선에 서서 ‘준비, 땅!’ 하는 소리에 뛰어가듯이 당신 은총을 준비하고 계시다가 빈 그릇을 내밀 때 얼른 달려오시는 분이 아닌가 싶다.
기도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고 그의 삶을 이끄신 성령이시여, 제 삶을 당신께 의탁하오니 순간순간마다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달으며 의롭게 살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예수의 봉헌(루카 2,22-35)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사도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율법에 관한 깊은 이해를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그분의 천주성을 감안하면 하느님의 영이 그분의 첫 번째 교육자이겠지만, 인성을 두고 말할 때는 그분의 부모였음에 틀림없다. 루가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의 출생 때부터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경건한 이들이었다고 증언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정한 대로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에 아기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베풀었다. 할례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어미의 태를 처음 열고 나온 맏배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성전 돈으로 다섯 세겔(이십 데나리온)을 성전이나 지방 회당의 사제에게 바쳐야 하는데, 지금 우리 돈으로 치자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백만 원 정도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첫아들을 낳아 기르는 경우, 본디 하느님 차지인 그 아이를 잠시 빌려 기르는 셈이다.
할례를 베풀 때는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예수님의 부모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지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그분의 맡은 바 소명과 이루신 위업에 잘 들어맞는다. 다음은 루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봉헌 이야기이다.
2. 22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산모의 정결례와 속죄에 관한 규정은 레위 12,1-8에 잘 나와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시적 생리 개념 탓에, 아이를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다고 믿었다. 곧 출산 때에 생명과 관련하여 신비적 힘으로 여겨진 피를 쏟게 되면, 이 피의 상실로 산모가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부정은 산모의 윤리적 과오와 관계없지만, 일정한 정화기간과 정화예식을 거쳐야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다.
남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 산모는 7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33일이 지나야 정화되는데, 이 40일 동안 집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여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 두 주 동안 부정하고 정화기간도 두 배(66일)로 늘어나 80일 동안 외출 금지다. 이런 차별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가부장제도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정화기간이 끝나면 산모는 자신과 아이를 위하여 정결예물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예물로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에게 바쳐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된다. 요셉과 마리아도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했으니, 그분들이 가난한 계층에 속하였음에 틀림없다.
정결예식과 속죄예식은 산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이 예식에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엘카나가 부인 한나를 데리고 들어간 것과 같다. 이 밖에도 예수의 봉헌 이야기와 사무엘의 봉헌 이야기가 같은 점은 예언자 시므온과 사무엘, 여예언자 안나와 한나가 히브리말로 같은 뜻을 지녔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사무엘처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는 뜻이고, 안나는 한나의 그리스말 음역으로서 “은총”을 말한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곧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 기다려왔다고 되어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성령이 그 안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이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임을 알아보았다.
예루살렘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간절히 고대하던 시므온에게 그 이름이 시사하듯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주신 것이다. 시므온은 아기를 두 손에 받아 안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그러면서 그가 아기를 두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은 그대로 예언이 된다.
나자렛 예수의 공적인 삶은 평탄치가 못하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뜻을 감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겠지만,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려다 반대의 표적이 되신다(사도 28,26-28 참조). 그리고 그분의 예리한 통찰력 앞에서 반대자들의 속마음이 속속 드러난다(루카 5,22; 6,8; 24,38 참조).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처럼 분명하고 철저한 삶은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달려 찢기시는 것이 그분의 최후 운명이다.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도 십자가에 달린 아들 예수의 고통을 보며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듯 상처를 입을 것이다(요한 19,25 참조).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기 때문이다.
시므온의 말을 들으면서 요셉과 마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우선 시므온이 예수를 손에 안고 이 아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아기의 부모로서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스러운 그의 말을 ‘놀라워하였다’(공동번역의 “감격하였다”는 그리스말 원문과 약간 거리가 있어서, 원문에 가깝게 옮겼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 소식을 전했을 때도 마리아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루카 l,31-35). 또 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알렸을 때, 목동들이 보인 반응도 같았다(루카 2,11-14). 그 다음에 시므온이 아기가 장차 겪게 될 험난한 운명을 예언하였을 때, 그 부모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관해서는 루카 복음서에 아무 말이 없지만, 루카가 성모님에 대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을 법하다(루카 l,29; 2,19.51).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봉헌 이야기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경건하고 소박한 믿음을 담담하게 전해준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아내의 정결예식과 속죄예식에 함께 동행해 주었다. 가난하였지만, 나름대로 간소한 예물을 바치며 율법의 규정대로 모든 예식을 충실하게 치렀다(루카 2,39). 아들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아들이므로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렸다. 그리고 시므온에게서 한편으로 아들의 중요한 사명에 관하여 들으면서 놀라워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아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어머니 마리아의 경우에는 아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시므온의 말을 듣고 나서, 아들의 삶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일생을 두고 되새겼을 것이다.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에는 전통적으로 각 교구나 수도원에서 서품식이나 허원식이 거행된다. 위에 소개된 본문은 이날의 복음으로서 하느님께 속한 아들딸을 잠시 맡아 기르다가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는 부모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잘 가르쳐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