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2일 보건의료노조 지도부가 잠정 합의를 하며 ‘산별 총파업’ 중단을 선언한 이후에도 서울대병원, 경북대병원, 광명성애병원에서는 지부별 파업이 계속됐다. 경상대병원은 6월 29일부터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이것은 보건의료노조 지도부가 보잘것없는 내용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산별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협약은 인력 충원에 대한 구체적 약속이 없고 격주 토요 근무와 생리휴가 무급화, 연월차 휴가 폐지 등 온전한 주5일제와는 거리가 멀다. 생리휴가 무급화를 수당으로 보상한다지만, 일부일 뿐이며 그나마 신규 직원에게는 적용되지도 않는다.
노조 조직력이 약한 중소병원에서 이번 합의는 생리휴가와 연·월차 휴가가 사라지고 인력 충원 없이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돈벌이
가장 큰 문제는 이번에 맺은 보건의료노조 산별 협약의 10장 2조이다. 10장 2조는 임금, 노동시간 단축, 연·월차 휴가 및 수당, 생리휴가에 대한 산별 협약은 “지부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에 우선하여 효력을 가지며, 동 협약 시행과 동시에 지부의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을 개정한다”고 돼 있다. 이것은 산별 협약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지부 단체협약을 끌어내린다는 말이다.
산별 교섭과 투쟁이 노동자들의 더 커다란 단결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상향 평준화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노동자, 기존 노동자와 신입 노동자 사이를 분열시키며 전체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하향 평준화하게 되는 셈이다.
사용자들의 기관지 격인 <의계신문>은 합의안에 대해 “노조가 사용자측의 강공에 밀려 끌려다[녔고] … 중노위 안은 한 마디로 사용자측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인데] … 노조가 한발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를 유지함으로써 합의에 이르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수원의료원장 박찬병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인내심을 발휘해 준 윤영규 위원장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민주노총 지도부는 “비록 완전 승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결된 조합원과 책임있는 지도부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새로운 승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6월 22일 성명서)며 불만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노무현의 직권중재 협박에 굴복해, 교섭의 내용보다 산별교섭이라는 형식에 매달려 불가피하지 않은 타협을 함으로써, “책임있는 지도부”로서 신뢰를 잃어버렸다. 산별 합의안의 문제점들은 “단결된 조합원”을 분열시키는 독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결과 투쟁보다 교섭과 양보에 치중하는 산별노조는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조합원들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서울대병원 지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은 고사하고 정규직 내의 단결조차 파괴하고 있는 산별 노사합의서를 단호히 거부”(6월 23일 <파업속보>)하며 1천여 명의 노동자가 한 달 가까이 흔들림 없는 파업을 계속하고 있다.
6월 22일 산별 잠정합의가 이뤄질 때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은 고려대로 달려가 조인식을 막으려 했다. 얼토당토않은 합의 이후, 이대로 투쟁을 끝낼 순 없다는 열기 속에 100여 명의 노동자가 새로 노조에 가입했다.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은 특히 의료 공공성을 위한 요구를 앞세우고 있다. 노동자들은 환자들에게 TV시청과 주차를 무료로 하고, 병실료가 싼 다인실을 늘리자고 요구한다.
“교대근무 시간을 줄이자고 하면 ‘6억 원 손해다’ 하고, 다인실을 늘리자고 하면 ‘35억 원 손해다’ 하고 모든 게 돈이 기준이다. 우리의 투쟁은 병원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자들에 맞서는 것이다.”
“경북대병원은 TV도 무료고 주차도 무료다. 돈 받고 TV 보여 주는 국립대병원은 여기밖에 없다.”(방사선종양학과 조합원)
매번 병원 투쟁의 선두에 서 온 “서울대병원은 항상 앞장서 싸워 온 전통과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무너지면 다른 지부들에도 타격이 클 것이기에 책임감을 갖고 싸우고 있다.”
무엇보다 “서울대병원은 분임 토의와 대의원 대회를 통해 의견이 밑으로부터 결정된다. 조합원들이 집행부를 움직인다.”
아래로부터 투쟁
한 조합원은 “산별 교섭은 최저 기준이 되고 이후 지부별 투쟁에서 더 따내야 하는데 그걸 막아놨다. 산별 노조가 오히려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셈이다.” 하고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를 비판했다.
“이 산별 협약을 받아들이면 내년에는 조합원이 5백 명밖에 안 모일 것이고 이어서 노조가 와해될 것”이라는 위기 의식에 노동자들은 투쟁을 늦추지 않고 있다.
노동부 장관 김대환은 “산별노조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제하지 못하는 보건의료노조 지도부에 불만을 토로했다.
서울대병원 측은 “산별 협약이 있는데 무슨 교섭이냐? 보건의료노조에 가서 말해라.”며 산별 협약을 핑계로 교섭을 회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노조 활동가에 따르면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서울대병원 파업이 보건의료노조 지도부에 반하는 파업이라고 보며 연대나 지지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심지어 보건의료단체연합이 서울대병원 파업 지지 기자회견을 하자 항의하기까지 했다.
조합원들도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산별 합의 이후 한 번도 오지 않았다. 하긴 무슨 낯으로 오겠냐.”고 말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뿐 아니라 민주노동당 지도부까지 이런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를 비판하지 않고 방어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서울대병원과 함께 산별 합의 이후에도 계속 파업을 벌여 온 경북대병원 노동자들은 7월 3일 비정규직 86명의 정규직화와 63명 인력충원이라는 승리를 쟁취했다. 재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던 지방공사의료원 노동자들도 생리휴가 수당 보전의 신입 사원 적용과 10퍼센트 인력충원의 요구를 이뤘다.
이런 선례가 확산되며 산별 협약 이상의 요구를 따내는 지부별 투쟁과 승리로 번져가고 있다.
이런 지부별 투쟁과 승리의 여파로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7월 14일 ‘2차 총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산별노조 시대에 산별노조 지도부가 노동자들의 바람을 거슬러 타협해 버렸을 때,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해 요구를 쟁취해야 한다는 교훈과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