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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1월 5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11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인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6일 한효순(韓孝純)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부찰사(副察使)는 순천으로 돌아갔다.
10일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청정(淸正)이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서생포(西生浦)ㆍ두모포(豆毛浦)ㆍ죽도(竹島) 등의 옛 보루를 수리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좌수영으로부터 한산진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풍우를 만나 남해현(南海縣)에서 정박하는데, 정탐하는 배가 달려와 경상 좌수영이 소식을 보고하기를, “요시라(要時羅)가 사적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미 이달 10일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에 청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옛 병영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하였다.
○ 변방의 보고고 적병이 크게 이른 것을 알고 배신 권협(權悏)을 보내어 중국에 아뢰는 글을 가지고 가서 급함을 고하였다.
○ 도제찰사가 재촉하는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청야(淸野)하는 한 가지 일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관건인데, 어렵지 않은 일을 진작 거행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어 적간(摘奸)할 때에 각 고을 수령과 각 면의 도유사(都有司)와 이(里)의 유사 등을 군령에 종사하게 하여, 재삼 명령하여 말린 연후에 죽음을 받아도 한이 없도록 하라. 각처의 인민이 산성을 싫어하고 꺼려서 다른 고을로 옮겨 피한 자는 왜적에게 붙은 자이니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난 뒤에 보고할 일이다.
이상을 3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의논하여 호남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군사를 나누고, 광양 현감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와서 영남에 교부하게 하되, 담양ㆍ남원 등 산성이 있는 일곱 고을에는 군사의 징발을 제외하였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ㆍ장수ㆍ진안ㆍ임실ㆍ구례ㆍ곡성 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 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 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을 성내에 설치하여 장차 모두 아문의 관할로 들이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지어 가속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도체찰사는 단결을 위한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각도 각 관아에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수효가 많기를 기하고, 명망이 있어 아랫사람을 통제할 만한 자로써 주장(主將)을 삼고, 그 고을에 무사 및 수령의 군사 가운데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있는 자를 영장(領將)으로 정하여 각기 그 관아의 나장(羅將) 5인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고, 무릇 군무(軍務)에 관한 것은 영병장(領兵將)이 직접 체찰부에 보고하되, 문서는 관인(官人)에게 주어서 왕래하도록 하라. 전직 조관(朝官)이나 생원과 진사 중에서 물망이 있는 자를 도청유사로 선택해 정하여 고을에서 문서에 능한 2명을 불러 사환으로 삼도록 허락하라. 조련군으로 군적을 만든 외에 빠진 남정과 전직 조관과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ㆍ좌수(座首)ㆍ한량ㆍ재인ㆍ백정을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 없이 책을 만들어 별갑(別甲)으로 정하고, 조군(漕軍)ㆍ수군(水軍)으로 전에 도피한 자는 한량의 예에 의하여 소속시키고, 양반의 종은 3명에 1정(丁)을 취하고, 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그 아들을 취하고, 삼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두 아들을 취하고, 활과 화살을 각자가 준비하고, 화약과 조총은 관(官)에서 준비해 주고, 단결 훈련하여 죽음으로써 동맹하였다가 변방의 보고와 전령을 따라 즉시 거느리고 달려가되 일체 체찰부의 분부를 따르고, 원수(元帥) 이하는 절제하지 못한다. 운운.
이상을 3도에 관문으로 보내었다. 이때에 이원익이 초계(草溪)에 있으면서 진주(晉州)로 하여금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을 쌓게 하였다.
○ 밀양인 이대천(李大川)과 구례인 성진실(成眞實)이 장군이라 자칭하고 망령되이 선문(先文)을 내기를 김덕령의 일과 같이 하였으므로 체찰사가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사를 허락해 주고 충의로써 격려하였더니, 그 뒤에 속이고 망령된 것이 드러나 베임을 받았다.
28일 도원수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평행장(平行長)을 함양(咸陽)으로 청하여 잔치를 대접하게 하고, 인하여 청정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2월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이 수군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남원ㆍ광주가 더욱 태만하였으니, 청컨대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보여서 하나를 징계함으로써 백을 북돋우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부체찰사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체찰사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권율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도의 군사를 모은 것이 모두 2만 3천 6백인이었다. 장수를 정하여 적의 오는 길에 나누어 방어하게 하였다.
○ 원수(元帥)의 분부로 남원 판관 이덕회(李德恢)가 부(府)에 있는 총통(銃筒) 1천 자루를 대구에 가져다가 바쳤다.
11일 남원 부사 최염(崔濂)이 산성 별장 신호(申浩)와 더불어 7읍의 군사를 모아 산성을 지킬 절차를 준비하였다.
○ 명 나라에서 특별히 군사를 내고 은(銀)을 내어 두 번째 구제하기를 허락하므로 배신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병부(兵部)에서 태복시(太僕寺)를 시켜 마가은(馬價銀) 2천 냥을 지출하여 오는 배신에게 주어 스스로 초약(焇藥)을 사도록 하고, 차량(車輛)을 연도(沿途)에서 번갈아 보내주었다. 우첨도어사 도찰원군문(都察院軍門) 정4품양호(楊鎬)를 보내어 경리조선군무로 삼아서 조선으로 나오는데, 먼저 고시(告示)를 내어 군사를 금지시켰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또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어 먼저 적정을 탐지하게 하므로, 심유경이 중도에서 돌아와 서울에 이르렀다.
○ 요시라(要時羅)가 우리 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만한 일이다.
15일 심유경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접반사 이광정(李光庭)과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따랐다.
22일 심유경이 영남 의령으로 향하였는데 접반사가 따라갔다.
○ 전라도민을 위유(慰諭)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멀리 있는 남도의 백성들아! 나의 말을 밝게 들어라. 임금답지 못한 내가 너희들 신민(臣民)의 위에 있어 위태로이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썩은 새끼줄이 끊어질 듯이 조심하였는데, 불행히 섬 오랑캐가 트집을 잡아 국가가 위급하게 되고, 전란이 오래 얽히어 아직까지 섬멸하지 못하여, 조종(祖宗) 2백년 동안 길렀던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끓는 물과 불 가운데 허덕이게 하였으니, 나의 덕이 없는 소치를 또 어디에 허물을 돌리리오. 아!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이가 없고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이가 없는 것이니, 임금과 백성은 한 몸이라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랴. 하늘이 전란을 내리신 이래로 너희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고, 너희들에게 일로 괴롭힌 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랴. 다만 내가 바다 도적에게 대하여 쌓인 원한과 깊은 노여움이 있어 노심초사하고 절치부심하여, 6년 동안 경영한 것이 오직 군사를 훈련하고 양식을 넉넉히 하여 수치를 씻고 흉한 놈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는데, 영남에는 적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어서 싸우려 해도 병사가 없고, 지키려 해도 양식이 없으니, 국가의 근본으로 믿을 것은 오직 호남 일대일 뿐이다. 영남과 인접하여 적의 침입을 받을 길이 한 군데만이 아니므로 방어의 긴요함과 운수(運輸)의 노고가 다른 도보다 백 배나 된다.
군사가 훈련되지 않았으니 속오(束伍)로 연습시키지 아니할 수 없고, 군량(軍粮)이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봄 조수가 밀려 올 때 적이 덤빌 염려가 있으니 산성 수축하는 것을 아니할 수 없고, 흉악한 꾀를 백 가지로 내어 곧장 쳐들어올 우려가 있으니 청야(淸野)하여 백성을 옮기는 것도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책사(冊使)가 왕래하는데 인부와 말의 징발이 끊이지 않고, 명 나라 장수를 접대하는데 갑작스러운 부역이 서로 이어졌거늘, 하물며 지금 적병이 다시 건너와서 몰래 옛 소굴을 점거하여 국사가 심히 급하여 화가 아침저녁에 있게 되었다. 장정을 뽑아서 전지로 가게 하고 양식을 운반하여 날마다 소비되는 것을 대어 주니, 어느 것인들 편안한 도리로써 백성을 부리는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는 자들이 나의 뜻을 바로 받들지 못하여 징발함이 질서가 없어 민간을 소란하게 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므로 도망하여 떠나는 백성이 날로 많아져 호남 수천 리의 땅이 소란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 원망과 호소가 하늘에 사무치고, 근심과 탄식이 길에 가득하니,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것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너희들이 집을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나의 잠자리가 편치 않고, 너희들의 배고품을 생각하니 나의 먹는 것이 맛이 없다. 애타는 생각으로 아픔이 내 몸에 있다. 아! 화란이 있다 해도 오늘보다 심한 것이 없었고, 살육의 참혹함이 오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어찌 다만 국가의 원수일 뿐이랴. 또한 너희 선비와 백성들의 원수이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분해 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성내어 한 번 보복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진실로 능히 동지를 규합하여 충의(忠義)로써 서로 격려하되, 혹은 날랜 군사를 모집하고 혹은 군량을 모아서, 모두 국가를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진다면 죽으러 온 적들이 하늘의 베임을 받을지 어찌 알리오. 명 나라 군사의 남북군 수십만이 연달아 나오고, 우리 나라 서북도의 정예한 군사도 이미 징집되어, 합세하여 남으로 내려가 일제히 용맹을 뽑낼 것이니, 너희 곰 같고 범 같은 장사들과 두 마음 가지지 않은 신하들은 전진하다가 죽는 것으로 영광을 여기고 퇴각하여 사는 것을 욕으로 여겨, 과감하고 굳세게 행하여 군공(軍功)을 이룩하라.
우리 선왕(先王)과 너희 조상들이 서로 믿고 걱정하여 편안히 살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후세의 우리들이 어찌 선왕이 너희 조상을 위해 수고롭던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아! 일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정치는 실제의 혜택을 필요로 한다. 남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청야(淸野)에 대하여 말하니, 사세를 보아 처치하여 농사짓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왕궁에 숙직 호휘하는 군사들을 특별히 제번(除番)하여 방어에 전력하도록 하되, 군대에서 분발하여 국가에 공을 세운 자는 본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백성의 기대에 따르게 하노라. 또 생각하니, 역변(逆變) 이후에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 골짜기에 향기를 혼자 지니고, 아름다운 옥이 형산(荊山)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으니, 오늘날 사방에서 인물을 불러들여 일을 같이 해야 하는 본의가 아니므로 순찰사로 하여금 인재를 찾아서 기록하여 아뢰어 등용한 준비를 하도록 하였으니, 너희 선비와 백성들은 잘 헤아리도록 하라. 아! 유독부(劉督府)가 주둔한 이후로 호남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공급하느라 재물이 바닥나고 사역과 운반에 힘이 소진되어, 전답이 황폐하여 쑥대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느냐. 지금 봄날이 따뜻하여 농사 시작할 철이 닥쳤는데도, 쟁기를 잡고 호미를 쥔 백성들을 몰아다가 갑옷을 입히고 칼을 잡는 일을 시켜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지 못하게 하니, 불쌍하도다! 이 사람들이 어찌 나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널리 고유할 때를 당하여 부끄러워 낯이 뜨겁도다.
아! 윗사람이 하는 바가 아랫사람이 따르는 바이므로 감히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분함을 펼치노니,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어서 각기 충효의 마음을 굳게 하라. 운운.” 하였다.
○ 비변사에서는 남원(南原)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인데 만일 이 성을 버려서 적으로 하여금 들어와 점거하게 하면 각처의 산성이 소문만 듣고 붕궤될 것이라 하여,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성도 겸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 심유경이 의령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평행장(平行長)을 맞이하게 하니, 평행장이 단기(單騎)로 나와서 의론하고 돌아갔다. 심유경이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고 극력 말하니, 평행장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그대가 이미 아는 바이나, 청정(淸正)이 다시 나오자고 극력 주장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하리요. 운운.” 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황신(黃愼)을 심유경의 접반사로 삼았다.
○ 전란이 일어난 지 6년에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하여 한산도의 수졸이 열에 한둘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연변(沿邊) 시장에서 장사꾼을 함부로 잡아서 데리고 가는 폐단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 황제가 총병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서 선대(宣大)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양원(楊元)은 요동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은 밀운(密雲)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은 연유(延綏)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잇따라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특히 계요총독군문(薊遼總督軍門) 형개(邢玠)로 하여금 다 통솔하게 하고,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으로 하여금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호부 낭중 정5품(正五品)동한유(蕫漢儒)는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3월 황제가 또 어사 진효(陳效)에게 명하여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형군문(邢軍門)의 차관(差官)이 칙서를 받들고 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이르노라. 짐(朕)이 생각하건대, 그대 나라가 가까이 동번(東藩)에 있어 대대로 공순하였는데, 전년에 왜놈들이 그대 강토를 짓밟아 부수자 국왕이 의주로 파천해 와서 슬피 부르짖어 구원을 청하므로, 짐이 측은히 생각하여 특별히 문무 중신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려 동정(東征)하여 불에 타는 것을 구하고 빠진 사람을 건지듯 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에 그대의 온 나라가 오히려 굳게 지킬 뜻이 있어 천토(天討)를 함께 도우니, 다시 국토를 회복하고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왔으며, 왜놈들은 겁내어 도망하고 머리를 숙여 봉공(封貢)을 청하였다. 짐이 그대 국력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음을 생각하여 우선 그의 청을 좇은 것은 그대를 편안케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휴식하는 수년 동안에 백성을 교훈하고 군사를 연습시키지 아니하다가 교활한 왜놈이 두 번째 침입하자 장황히 아뢰어 천조(天朝)에 구원을 청하므로, 이에 다시 동정(東征)하게 되어 군사를 수고롭게 하며 군량을 운반하여 험한 땅에 깊이 들어가 그대를 위하여 방어하고 구원하니, 짐이 소국을 사랑하는 인(仁)과 환란을 구해주는 의(義)가 또한 지극하였소. 이에 어사 한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감시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보검 한자루를 군문에 하사하여, ‘장사가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먼저 목베고 뒤에 아뢰라.’ 하였으니, 그대 임금과 신하가 의당 온 나라가 노력하여 왕사(王師)를 도와서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 받아서 후회를 남기지 아니하도록 하오. 운운.” 하였다.
배신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사은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다만 《고사》에서는 이 칙서가 남원이 함락된 뒤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나는 문세(文勢)로 볼 때에 마땅히 이때에 있었을 것이므로 여기에 싣는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함께 영천(永川)에 머물면서 호남 출신들을 본도 조방장(助防將) 김언공(金彦恭)에게 소속시켜 진주의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22일 심유경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돌아와서 그대로 머무는데 접반사가 따랐다.
○ 청정이 다시 건너오자 내지(內地)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짐을 꾸리고 농사에는 뜻이 없고, 술과 고기로 날마다 놀이를 일삼았다. 감사가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기를, “가뭄이 잇따라서 파종할 시기를 놓쳤으며 양맥(兩麥)이 이미 말라서 어찌할 수 없는데, 무식한 어리석은 백성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이치에 밝은 선비들도 또한 장래에 대한 계책이 없이 곡식을 낭비하여 날마다 놀이로 일을 삼으니 앞일이 극히 염려된다. 이제부터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28일 심유경이 부의 남쪽 서원에 갔다 왔다.
○ 제독 마귀(麻貴)가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어 서울로 향하면서 먼저 절강(浙江) 유격장군 섭상(葉鱨)으로 하여금 조선에 이르러 군량을 독려하고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상이 서울에 도착하여 권려가(勸勵歌)를 지어 우리 나라 선비와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돌려 보였다. 첫머리에 서문이 있다.
근일에 바다 왜놈이 불법하게도 조선을 삼키고 물어뜯으므로 천조에서 속국을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켜 멀리 구원하여 평양을 이기고 개성을 부수어 왕경(王京)을 회복시키고, 깊이 들어왔던 모진 오랑캐를 모두 부산으로 쫓아서 흉악한 것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어 공덕이 가장 높았고, 그 뒤에 봉공(封貢)을 의론하고 싸움을 파하여 조금 휴식하기를 바라면서, 오히려 다시 물자를 대주고 부역에 고생하기를 해마다 잇따라 하여 날로 왜놈이 물러가기를 도모하여 본국을 편안케 하였으니, 돌보아 줌이 가장 후하였다. 그런데 지금 도망했던 왜놈들이 구렁이처럼 서리고 점거하여 정세를 헤아리기 어려워 번방(藩邦)에서 위급함을 고하니, 이치와 사세로 보아 반드시 구원해야 하겠기에 당사자가 이미 강한 군사 10만 명을 훈련하여 기회를 보아 나아가 구원하게 되었다. 다만 군사가 많아 양식이 부족하고, 전지(戰地)가 멀어 군사가 피로할까 염려하여, 먼저 본부(本府)에 통첩하여 국왕과 만나서 군사가 올 도로 변에 군량을 독촉하여 쌓아두고, 다시 국내에 전달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하였으니, 구원병이 이르거던 서로 의각(犄角)이 되고, 물러가서 스스로 지켜서 다시는 스스로 기운을 잃어 참혹한 화를 달게 받지 말라.
아! 조선이 이전에 왜란에 걸려 임금과 신하가 난을 피하여 방랑하고, 선비와 백성이 떠돌아 다니고, 집은 무너지고 타고, 부모와 형제가 살육되었는데, 우리 군사가 와서 구원하자 도처에서 공급하느라고 여러 번 소란을 겪어 천리가 분주하였다. 처음에는 전란으로 다음에는 흉년으로 젊은 이는 칼날에 죽고, 늙고 약한 이는 구렁에 버려져 동타(銅駝)가 가시덤불 속에 있고, 백골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니, 보기에 참혹하여 이마가 절로 찡그러져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근자에 이 나라에 이르러 낮에 길을 다녀 보면 격문을 가진 사신이 번갈아 달려, 공급하고 접대하는 것이 눈앞에 가득 찼고, 밤에 관성(館城)에 자면서 보면 급한 문서를 가지고 밤에 달려 시끄러움이 귀에 가득하여 피와 기름이 다 마르고, 닭과 개도 편안하지 못하니, 만나는 일마다 상심되어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없다. 조선이 무슨 연고로 이렇게 무거운 재앙을 만났는고! 특히 왜놈에게 얕보였기 때문에 업신여긴 바 되었고, 명 나라에 구원을 빌었기 때문에 소란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명 나라에서 군사와 말을 덜어 주고 금전을 대주며, 해마다 연달아 와서 노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고 더해 주었으니, 모두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우리 대군을 치르고 우리 공차(公差)를 응접하는 데 온갖 폐단이 생겨서 성내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저 왜놈 때문이다. 만약 천조에서 조선 때문이 아니고, 조선이 왜놈 때문이 아니었다면, 각기 일없이 편안한 것이니 어찌 전날과 오늘의 소란함이 있으리오. 그렇다면 조선이 아직도 스스로 강하여 왜놈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천조에 의뢰하고, 천조에서는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드디어 안으로는 군사와 양식을 손실하고, 밖으로는 소란이 더하게 된 것이니, 지금 만약 봉공이 성사되지 않고 왜놈이 다시 치성하면 구원병이 또 장차 올 것이다. 어찌 천조에서 먼 곳에 군사 쓰기를 좋아하며, 군사와 말이 밖에 와서 고생하기를 기뻐하랴마는 부득이한 것이다.
만약 조선 사람이 스스로 분발할 줄 알아서 서로 격려하여 각기 그 원수를 갚아서 성공하기를 도모한다면 나라에 남은 용맹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왜놈을 두려워하며, 천조에 구원을 청해 소란스러운 해를 가져오리오. 그렇지 않고 약하면 남의 업신여김을 부르고 구원을 청하여 분요가 생기는 일을 반드시 자초하게 될 것이다. 본부가 이번에 와서는 사정을 잘 알아 돌보아 주기에 힘쓰고, 절약하여 폐를 덜도록 애쓰고는 있지만 도움됨이 얼마이겠는가? 다만 원하기는 온 나라가 군사(軍事)를 알고, 사람마다 용감히 싸워서 포악한 것을 제거하고 난을 물리치어 서로 태평을 누려서 원망도 할 필요가 없고 덕도 볼 필요가 없게 된다면 이것이 큰 다행이 될 것이다. 가령 한꺼번에 스스로 강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구원병의 위세를 빌려 한 배에 타고 함께 건너는 것처럼 마음이 일치되어, 혹은 죽을 힘을 내고, 혹은 군량을 수송하여, 이 한 번의 노고를 각오하여 영원히 편안하기를 구하고, 조그마한 비용을 아끼지 말아서 큰 일을 성취하지 않으리오. 이렇게만 된다면 일본이 다시 침범함을 어찌 족히 염려하랴. 일본은 어떤 사람이며 조선은 어떤 사람인가? 양편 군사가 싸움을 하면 피차가 서로 맞설 것이니,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찌 장렬하게 죽는 것만 같으리오.
하물며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면 살 수도 있는 것이니, 어찌 범을 겁내듯 하고 솔개를 피하듯 하여 그들에게 살육을 달게 받으랴. 또 왜놈들이 대병(大兵)이 나와서 구원한다는 말을 듣고 선성(先聲)에 벌써 기운이 절로 꺾이었다. 우리 군사는 경략(經略)의 절제를 받들어 실로 전일의 폐단을 고쳤으니, 다만 해만 없을 뿐 아니라 공이 반드시 배나 되어 조선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조선은 미리 꾀를 같이 맞추고 기회를 당해 힘을 합하여 바다의 적을 소탕하여 조선을 영원히 편안케 하여, 천조에서 간절히 돌보아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고 전일의 분요스러운 사단도 없게 하라. 나의 속된 시가 운율에 맞지는 않지만 감히 뜻 있는 이를 위하여 노래 부르노니
조선은 본시 예의국이라 일컬어 / 朝鮮素稱禮義邦
군사를 천히 여기고 문장을 숭상하였다 / 羞稱武事尙文章
작년에 섬 오랑캐가 방자히 덤비어 / 當年島夷紛陸梁
모래 무너뜨리듯 대를 쪼개듯 평양에 들어왔네 / 崩沙破竹入平壤
국왕은 파천하여 풀밭에 있고 / 國君播越在草莽
왕자는 포로되어 일본으로 갔네 / 王子繫縲去扶桑
수도는 불에 타서 반이나 재가 되고 / 王京一炬半塵坱
벌거숭이 땅 천리에 눈앞이 참혹했네 / 赤地千里慘目光
추억하니 이가 갈려 원한이 깊은데 / 追思切齒恨何長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잊으랴 / 不共戴天讎豈忘
뜻은 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 無言有志力未遑
일은 사람이 힘을 다하기에 달렸으니 하늘이 돌보아줌이 있도다 / 事由人盡鑒由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면서 강한 오 나라를 다스렸고 / 君不見臥薪嘗膽治吳疆
창을 베개 삼고 벽돌을 운반하여 진 나라를 강하게 하였다는 것을 / 枕戈運甓輔晉强
또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장사가 성을 내자 흰 무지개가 길게 뻗쳤고 / 又不見壯士有怒白虹長
필부가 용감하면 뭇 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 匹夫敢勇衆難當
남아의 기절이 천지와 대등하니 / 男兒氣節等霄壤
7척의 몸뚱이로 마땅히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 七尺躬宜振紀網
분발하여 정치를 닦는 것은 묘당에서 힘쓸 것이요 / 發憤修政厲廟廊
군사를 모집하여 왕을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은 민간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 募戈勤王起郊荒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격려하면 / 同心上下相激昻
위엄과 무력이 절로 떨침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 竚看威武自奮揚
구원병이 강성하니 함께 급히 서둘러 / 援師洸洸共劻勷
왜적을 소탕하기를 양을 몰듯이 하리라 / 掃蕩倭賊如驅羊
나라를 어지럽히는 왕성한 기운이 정히 다함이 없으니 / 銅駝王氣正未央
문을 열고 호랑을 맞아들이듯 하지 말라 / 勿效開門揖虎狼
복숭아를 심고 가시나무를 심는 것이 과연 어느 것이 좋겠으며 / 種桃栽棘果孰良
기왓장이 되어 완전한 것과 옥이 되어 부서진 것이 어느 것이 향기롭겠는가 / 瓦全玉碎認誰香
예로부터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하였으니 / 一言終古可興邦
나는 이제 이 노래를 사대부들에게 부르노라 / 我今歌向大夫行
원컨대 맹렬한 장사가 사방에서 일어나 / 願得猛士起四方
길이 동해를 맑게 하여 파도가 일지 않기를 바라노라 / 永淸東海無波揚
하였다. 조선에서 등서(謄書)하여 각도에 돌려보였다.
○ 호조 판서 김수(金晬)를 충청ㆍ전라도에 보내어 대군의 군량을 징수하게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청정(淸正)이 두 번째 건너온 뒤에 인심이 흩어져서 편히 살 뜻이 없는데, 연해의 각 읍에는 격군(格軍)의 일 때문에 농사와 장사가 모두 폐지되고 도로가 통하지 못합니다. 하삼도(下三道) 중에 충청도가 더욱 심하여 이 봄철을 당하여 농기구를 지고 나오는 자가 드므니 어찌 수학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적이 없어도 스스로 패하는 형상입니다. 지금 호조 판서를 가게 하되 역시 이 뜻을 알고 가게 해서 농사를 권면하는 일과 아울러 잘 단속하고 삼가도록 말씀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김수가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갔다.
○ 대군의 선봉 부총병 양원(楊元)이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성 좌윤(漢城左尹) 민준(閔濬)과 예조 참판 정기원(鄭期遠)을 접반사로 삼았다.
○ 한효순(韓孝純)이 순천으로부터 한산도에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위로 하였다. 권율(權慄)이 진주로부터 순천으로 향하였다.
4월 호조 판서 김수(金晬)가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창고 곡식을 친히 검사하고, 창고의 문을 봉하고 인하여 사운(四韻) 한 편을 지어 사민(士民)에게 돌려보이기를
4월의 맑고 화창한 좋은 철이 돌아왔건만 / 四月淸和佳節回
10년 동안 말 타고 갑옷 입은 객의 마음 재촉하네 / 十年鞍甲客心催
온갖 꽃은 나무에 피어 사람을 맞아 웃고 / 雜花生樹迎人笑
좋은 비는 바람을 몰아 낯에 스쳐 오네 / 好雨驅風拂面來
쓸개를 맛본 지 여러 해라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으나 / 嘗膽多時能唾手
적을 평정할 계책이 없어 홀로 누각에 오르네 / 平戎無策獨登臺
군량이 부족하니 걱정이 적지 않은데 / 軍興食乏憂非細
가는 곳마다 눈썹 찡그리니 또한 가소롭네 / 到底嚬眉亦可咍
하였다. 이날 밤에 김수가 부(府)의 서쪽 주포촌(周浦村)에 나와 머물고, 이튿날 심유경을 맞아 용두정(龍頭亭)에서 연회를 갖고 전라 우도로 가서 관청 곡식을 검사하였다.
8일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본도의 감사(監使)ㆍ병사(兵使)가 모두 와서 모였다.
13일 권율이 영남으로 돌아갔다.
○ 임금이 이순신(李舜臣)의 공과 허물이 서로 똑같다고 하여 놓아주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원수부(元帥府)에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 시랑(侍郞) 손헌(孫憲)이, “심유경이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항상 강화한다는 것을 핑계로 자주 왕래하여 백성만 괴롭히니, 비록 전화(戰禍)를 해결한다 하나 실은 왜놈을 도우는 것이니, 먼저 심유경을 베어 죽여야 조선에 나갈 수 있겠다.” 하고, 차관(差官)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량 사정을 묻고 인하여 심유경이 왜놈을 도운 실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듣고 급히 체찰사ㆍ부체찰사ㆍ도원수 및 3도의 감사ㆍ병사를 남원으로 청하여 미리 답사(答辭)를 만들었다.
○ 양원(楊元)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오면서 우리 조정에 통첩하기를, “본부는 남원성을 지키겠으니 본고을의 태수는 대관(大官)으로 임명해 보내 주시오.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곧 문과통정(文科通政) 전 남도 병사 임현(任鉉)을 남원 부사로 삼았다.
○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눈이 멀어 다 죽었다. 계역(鷄疫)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 마귀(麻貴)가 모든 장수와 병마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왔는데, 접반사는 이조판서 장운익(張雲翼)이었다.
5월 문안사(問安使)를 남원에 보내어 심천사(沈天使)에게 문안하고, 5일에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였다.
○ 천사 심유경이 초청하므로 이원익(李元翼)ㆍ권율(權慄)ㆍ박홍로(朴弘老)가 모두 와서 모였다가, 이원익은 곡성으로 향하고 인하여 구례에 이르러 호남 출신의 군사들을 점검하여 제석당 산성으로 보내었다.
○ 대군의 군량을 준비하기 위하여 벼슬을 강제로 파니, 가선대부와 통정대부가 길에 이어졌고, 명목도 없는 세금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 양 총병의 중군 이신방(李新芳)이 먼저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접반사 정기원(鄭期遠)과 함께 남원에 도착하여 곧 본도 순찰사로 하여금 급히 각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수리하는 것을 맡게 하여 여장(女墻)을 고쳐 쌓기를 전보다 배나 높고 견고하게 하고, 또 명 나라 병사를 사역시켜 바깥 흙성을 쌓게 하되 기한을 정하고 역사를 독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 왜놈 요시라(要時羅)가 경상 우병사의 진에 이르러 병사에게 말하기를, “오는 가을 서울로 갈 때에 내가 사또를 위하여 이 진주의 길로 오겠소.” 하고는 곧 김해로 돌아갔는데, 막 영문 밖에 나가자 우리가 준 의관을 모두 벗어 땅에 던지고 갔다. 통분하다. 요시라놈이 간첩이 되어 전후에 우리를 그릇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든지, 이순신을 모함한 일 같은 것은 더욱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에 와서는 하는 바가 역시 이와 같이 멸시하는 데도 오히려 죽이지 못하고 임의로 왕래하도록 하였으니, 아! 나라에 사람이 없다.
6월 양원(楊元)이 전주에 도착하자 중군이 달려가서 영접하였다.
○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 금오는 이때에 16세였다.
13일 양원이 전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중군과 민준(閔濬)이 따랐다. 총병이 용성관(龍城館)에 유진하고 심유경은 남정(南亭)으로 옮기었다.
19일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도로부터 바다에 내려가서 거제 견내량(巨濟見乃梁)의 적과 교전하였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安洪國)이 죽었다.
○ 양원이 심유경으로 하여금 의령으로 달려가서 행장을 만나 강화를 의논하고 인하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출발하여 영남으로 향하였다. 그날에 손시랑(孫侍郞)의 차관(差官)이 남원에 도착하여 심유경의 간 곳을 물으니, 양원이 사실대로 고하였다. 곧 차관과 함께 함양으로 향하여 27일에 의령에 도착하여 심유경을 잡아 돌아왔다.
○ 이원익이 호남 향병(鄕兵)을 본도 도사 김순명(金順命)에게 맡기어 복수병(復讎兵)이라 칭하고, 금성(金城)을 순찰하여 지키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
○ 제독 마귀(麻貴)가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을 시켜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전주성을 지키어 남원의 형세를 돕게 하였다.
7월 7일 양원이 친히 심유경을 압송하여 차관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 적의 배가 이달 초부터 잇따라 건너왔다.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나아가 탐지하게 하고, 8일에 수병(水兵) 여러 장수가 웅천 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하여 배 10여 척을 부수었다.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므로 퇴진하여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도착하여 접반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제도(諸道) 도순찰사 권율은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관문을 보내오. 8일에 수군 여러 장수가 부산 바다에서 시위(示威)하였는데,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이 큰 배 두 척으로 선봉이 되어 웅포(熊浦)에 이르러 갑자기 적을 만나 접전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소. 왜놈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달아나면서 빼앗은 군량 2백여 석을 배와 함께 불태우고, 또 1천여 척이 본토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우리 군사가 가로막으니 적병이 피해 갔소. 운운.” 하였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 제석당 산성을 파하고 그 군사를 수군에 이속(移屬)시켰는데 원수(元帥)의 분부였다.
○ 임금이 남쪽 변방에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선전관을 각진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독려하여 방어하게 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선전관이 수군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민준(閔濬)에게 고하기를, “8일에 수군이 접전하였는데 소득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였고, 또 적의 배가 바다 위에 가득 차서 국사가 망극하오. 운운.” 하였다.
16일 적병이 수군을 습격하여 통제사 원균이 죽었다. 처음에 원균이 원수(元帥)에게 곤장을 맞고는 분을 품고 물러나와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달려서 부산에 이르렀는데, 적선 1천여 척이 또 본토로부터 나왔다. 원균이 노 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져서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수령(水嶺)을 이미 지나서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천만의 수병이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오늘의 일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하였다. 원균이 듣고 드디어 배를 돌리게 하였으나 배가 역류를 넘느라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어,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이 동해로 표류하여 떠내려갔다. 원균이 여러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서 밤낮으로 노를 저어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이르렀는데, 적병은 우리 군사가 기세를 잃은 것을 알고 곧 신구(新舊) 병선 5백여 척을 동원하여 날 듯이 어지러이 추격하니 우리 군사는 또 영등포로 물러났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영등포에 도착하면 반드시 땔나무와 물을 구하려 상륙할 것을 예측하고 밤에 빠른 배 50여 척을 영등포로 보내어 상륙시켜 매복하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과연 그곳에 이르러 적이 조금 멀어지자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인들을 상륙시켜 땔나무와 물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데, 문득 포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며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 등이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급히 배를 끌고 물러나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하니, 적의 배가 많이 와서 셀 수도 없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바다는 어두워져 피차가 군사를 거두고 적을 엄중히 경계하여 아침이 되기만 기다렸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를 모아서 의론하기를,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 하였다. 배설(裴楔)이 팔을 걷어 붙이며 큰소리로,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이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라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소.” 하였다. 원균이 그 뜻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 하였다. 배설이 이에 제 배에 돌아가 은밀히 저에게 소속된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퇴각시킬 것을 꾀하였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鼻居舠) 10여 척으로 하여금 몰래 우리 배 사이를 뚫고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兵船) 5ㆍ6척으로 가만히 우리 진영의 복병선(伏兵船)을 둘러 쌓는데, 당수와 군사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복병선이 이미 적에게 불태워져 부서지자, 원균이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갑자기 각 배의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며 총탄이 쾅쾅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실색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이 와서 정탐한 것을 깨닫고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묘시에 적의 배가 가까이 포위하여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총알이 비오듯 하였다. 원균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내리고 접전하는데, 형세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휘감는 것 같아 감히 당적할 수 없었다. 배설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퇴각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다가 싸움이 한창일 때에 관하(管下) 12척과 더불어 달아났다. 원균이 힘을 지탱할 수 없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올리고 흩어져 달아나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오르니, 적병이 추격하여 내려와서 마구 죽였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ㆍ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기롱하였는데,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시를 짓기를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 閑山一島國南門
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 / 底事朝廷易將頻
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 不是元均初負國
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 / 元均之腹負元均
하였다. 표류하였던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은 그 뒤에 경상좌도에 돌아왔다.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써 원균이 그들의 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고.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 적병이 바다와 육지로 아울러 전진하여 살육하고 약탈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산도에 이르러 진막(鎭幕)을 불태우고 돌아가니, 한산도에서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당초에 수길(秀吉)이 금오(金吾)를 내어 보낼 때에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다만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 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생포(生捕)하기를 허락한다. 운운.” 하였으므로, 이번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죽이건 안 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연간에 본국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 도로 이순신(李舜臣)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시켰다. 이때에 이순신이 영남에서 원수(元帥)의 막하에 있었다.
○ 양원(楊元)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돌아와 적세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에게 수리하는 역사를 독촉하였다.
○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아병(牙兵) 정옥수(鄭玉壽)를 시켜 가만히 창원 지경에 들어가서 적을 정탐하게 하였더니, 적의 패(牌)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정옥수가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금오(金吾) 등이 길을 갈라 올라온다는 글이었다. 그 글에, “8월 3일에 각 진에서 출발하여 수륙 다섯 길로 전진하여 바로 대명(大明)을 침범하기로 하는데, 청정(淸正)은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밀양을 거쳐 초계ㆍ거창으로 향하고, 윤직무(允直茂)는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김해ㆍ창원을 거쳐 진주로 향하고, 성친(盛親) 등은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남해ㆍ흥양을 거쳐 나주ㆍ영산포(榮山浦)로 향하고,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의홍(義弘)은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거제ㆍ남해를 거쳐 구례(求禮)로 향하고, 정성(正成)ㆍ갑비수(甲斐守) 등은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광양ㆍ순천ㆍ구례를 거쳐 15일에 모두 남원ㆍ전주에 모이도록 하는데, 전장(戰將)이 27명이요, 군사가 60만 명으로 혹은 충청도로 향하고, 혹은 서울로 향하고, 혹은 경상좌도를 거쳐 도로 내려오도록 한다. 운운.” 하였다. 적의 선성(先聲)이 비록 허장(虛張)한 데 가까우나 마침내 그들이 거친 길을 보면 이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뒤에 호남 각 고을에 바둑처럼 널려진 것이 거의 50여 둔(屯)에 이르고, 도로 경상좌도로 내려온 것과 연해(沿海)에 먼저 주둔한 것이 몇 진(陣)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패에 쓰인 숫자가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 조방장 김언공(金彦恭)이 호남 군사를 거느리고 한산도로 가다가 길에서 수군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퇴각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권율이 김언공으로 하여금 섬진강에서 가로 막게 하였더니 거느린 무사(武士)들이 본도가 급하다 하여 모두 장수를 버리고 돌아왔다. 권율이 듣고 김언공을 잡아다가 신문하였다.
○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경상좌도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지키고, 진주 목사 등으로 정개 산성(鼎盖山城)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으로 안음(安陰)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지키게 하고, 우병사로 악견 산성(岳堅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순천에 나아가 진을 쳤다.
○ 남원의 교룡 산성(蛟龍山城)을 파하였다.
○ 호조 판서 김수(金晬)가 우도로부터 도로 남원에 이르러 주포(周浦)에 머물렀는데, 조정에서 또 호조 참판 이광정(李光庭)을 남원으로 보내어 힘을 합하여 군량을 주선하게 하였다.
○ 양원(楊元)은 민준이 연로하다고 하여 서울로 돌려보냈다.
○ 곽재우(郭再祐)가 영산(靈山) 화왕 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이때에 곽재우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었다.
8월 3일 적병이 대거 수륙으로 함께 전진하는데, 밀양ㆍ김해ㆍ진해ㆍ거제의 길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다. 금오(金吾)는 대장으로서 부산에 머물렀다.
4일 여러 갈래의 적이 이미 내지(內地)에 들어와서 행장 등 선봉은 사천ㆍ남해 등지에 분탕질을 하고, 청정 등은 이미 초계ㆍ함안을 통과하고, 이튿날 의홍 등의 군사는 곤양(昆陽)의 금오산(金鰲山)과 노량(露梁) 등지에 배를 대고 산중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선봉이 하동을 지나 진주ㆍ섬진으로 들어왔다. 진주 목사는 정개 산성을 버리고 우병사는 악견 산성을 버렸다. 갑비수(甲裴守) 등 적병이 광양(光陽)으로 향하니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퇴각하여 옥과(玉果)로 향하였다.
6일 적선이 나아와 악양(岳陽)에 정박하였는데, 영남 바다로부터 5ㆍ60리 사이에 배가 가득 차서 마치 바다가 물이 없는 듯하였다. 척후(斥候)의 정탐이 이미 끊어져 소식을 알 수 없어서 남원부에서 하인 양제(梁齊) 등 다섯 사람을 시켜 달려가 적의 경계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삽암(揷岩)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고는 곧 돌아와 적의 형세를 보고하였다.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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