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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이(쳣째아이)가 돌아와서 오랜만에 다모인 가족들이 도보여행을 떠났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이 충남 아산시에 있는 영인산휴양림으로가서 송년회 및 성탄파티를 하자고 해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거기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과 도보여행을 재작년 부터 해온 터여서 이번 겨울방학에도 시도하는 것이다.
다른 가족들은 늦은 저녁에나 올 수 있는 스케쥴이었기에 우리가 5~6시간 먼저 떠나면 같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작년의 경험으로 봐선 쉽게 가려니 했기 때문이다. 거리는 윤형이와 같이 매일 30km 씩 걸은것에 비교하면 다소 적은 20km정도 였다. 이번에도 아이들의 준비를 미리 챙기지 못했다. 여행의 효과가 반감되는 순간이었다.
하여간 아침의 준비가 늦어지고 한시는 되어서야 떠났다. 길잡이는 내가 했다. 평소 운동을 하던 코스와 같은 것이어서 평택시 현덕면 소재지인 인광리까지는 그대로 가면 된다. 현화리 아파트단지의 뒷길로 논사이로 난 농로로 같이 걸어간다. 5명의 한팀은 출발에서 부터 간격이 생긴다. 그러나 애초에 다섯이 한줄로 갈 수도 있지만 어차피 대화는 1대 1이 아닌가. 연형이(셋째아이)와 나, 아내와 윤형 은형이(둘째아이)가 한팀이 되었다.
연형이는 방과후학교(아이가 다니는 곳)에서 도보여행으로 자랑거리가 생겼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이 아빠와 가는 도보여생을 많이 부러워 했단다. 왜 부러워 했을까를 잠시 생각한다. 잘 모르겠다. 알것도 같지만 .... 그러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신나게 출발을 했다. 얼마 안돼 도착한 인광리에서 난 물어봤다.
"차가 조금 많이 다니지만 짧은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돌아가더라도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길로 갈까?"
어쩌면 뻔한 질문에 당연한 답이 나왔다.
" 차가 많이 안다니는 길"
39번 도로를 가로 질러 걸어간다. 광덕초교와 대안리 신왕리로 가는 길은 곧바르게 달려간다. 약간의 구릉이 있어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나 완전한 평야의 풍경은 멀리 있는 평택호나 아산만 바다까지 포함하여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한국에선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 속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한 발 만 떼어보면 다른 것이 보이는데 말이다.
가는 길에 재미있는 팻말이 보인다.
'교장선생님 마을'
난 이동네 이름의 유래를 들어서 알고 있다.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서 부터 교장선생님 집이었다. 부모님이 교장선생님이었으니까...그러나 옛날 참으로 오지였던 이곳은 교장선생님이 한분 사시면 그것이 마을의 랜드마크였던 것이다. 그것도 오랜 옛날이 아니라 얼마전의 일이고 그 해당 교장선생님께선 현존인물이라 알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아이들과 한나는 작지만 재미있어한다.
내가 초딩시절 평택은 교과서에서나 나온 대로 아는 아주 먼 곳이었다. 오히려 내가 당시 가본적이 있는 부산이나 경주 등 보다 마음속에선 훨씬 더 먼곳이었다.
난 교과서에서 경기평야의 일부를 이루어 쌀이 많이 생산 되고 토탄이 나오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토탄이 어떤 것인지는 나중에 더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른채 외웠던 토탄의 산지 평택이었다. 내가 이곳으로 와서 살면서 편린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토탄은 서부평택에서 많이 채취되어 연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그 토탄이 과거에 많이 생산되었던 황산리라는 동네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에게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함께 나오는 토탄에 관련한 이야기를 아는 지식을 동원하여 해본다.
" 이곳 황산리는 내가 어렸을 때 교과서에 나오는 토탄의 고장 평택의 그 중심이었단다. 불과 몇십년전 까지도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주연료로 이용되어 졌었지. 나이가 많은 분들은 그들이 경험한 토탄을 파내어 말려서 사용한 경험들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곤 하였지. 나중에는 그 토탄이 골프장에 잔디식재용 토양으로 팔려나가다 그것도 고갈이 되어 이제는 누구도 채취하지 않게 되었지. 드물지만 지금도 그때 토탄속에서 나온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분들이 있단다. 토탄은 신석기시대에 형성이 된 것으로 당시의 유물인 돌도끼 돌화살촉 돌로된 다른 기구들 토기그릇등이 그것이지."
그런 황산리 벌판을 지나고 있다.
아이는 어느새 은형이로 바뀌어 있다.
" 아빠 쉬었다 가자!"
얼마되지않았는데 벌써 휴식타령이다.
"저기 가면 광덕분교 앞에 구멍가게가 있거든 거기가서 사먹으면서 쉬자."
조금이라도 더 가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대사로 받는다.
"구멍가게? 하하하하"
왜 그렇게 웃는지 안다.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일상속에서 많이 사용되어 졌었지만 지금은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나와 우리가족에게도 들어와 있다. 우리집 동네에도 얼마전에 있던 동네수퍼가 편의점으로 변신을 했다. 아이도 구멍가게라는 뜻은 알지만 잘 사용하지 않던 단어에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 은형아 여기 보렴. "
아스팔트의 표면에 있는 작은 구멍을 가르키면서
" 이 작은 구멍안에 가게가 있거든"
엉뚱한 비약에 다소 당황은 했지만 이내 받아친다.
" 그래 그안에 새우깡 하나 들어있어 팔고 있네."
우리네들의 달라진 일상은 바로 평상단어를 많이도 바꿔 놓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짧은 세월에 빠르게 변모하는 상황이 우리가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내가 살았던 과거가 너무나 생소하게 내앞에 서게되는 생경함을 자주 만나리라.
어느새 광덕분교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말 정문앞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조그만, 그래서 정겨운 '구멍가게'가 살포시있었다. 집이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나 60년대의 집에 70년대 새마을운동표 양철지붕으로 단장한 가게였다. 문 인듯한 물건(예전엔 정말 많이 본것이었는데...)에 색이 바랜 옛 비닐로 만들어져 있는 창 속으로 희미하게 여러가지 과장봉지들이 정겹게 보인다. 아이가 묻는다.
" 아빠 정말 가게야?"
" 그래 가게지."
우리는 한참을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아이가 자기가 평소에 보던 상표의 젤리봉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살거란다. 그 문인듯한 미닫이를 밀어본다. 심하게 뻑뻑하지 않게 문이 열린다. 우리의 생소한 등장에 60대 중반인 듯한 주인 아주머니는 자신의 가게에 대한 우리의 생경함에 자신없어 하는 표정으로 아무 대꾸없이 우리를 맞이한다. 불과 안중으로부터 7~8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의 동네의 가게인데도 우리는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간극을 느낀다. 대학시절 농활이나 답사여행시 도시의 아이들을 맞는 시골가게 주인들의 표정을 발견하였다.
어두운 실내는 도시적 삶에 익숙한 눈에는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와 적응이 안되는 망막이 되어 한참의 적응기를 필요로 하게 한다. 나 역시 시간여행을 떠나온 착각을 하게 한다.
분교장의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사이에 놓고 술레가 있는 어떤 놀이에 빠져있다. 4명의 아이들이 쳐다보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채 놀이에 빠져있다. 안중에서도 거의 보기어려운 풍경이다. 도시의 학교는 수업만 끝나면 바로 아무도 없어지는데.... 다들 사교육의 전투장으로 재집합하잖는가.
구진개로 향한다. 아산만이 방조제로 막아지기 전에는 충청남도 아산군과 평택군을 잇는 작은 항구이자 이곳 사람들이 입이 마르게 이야기하는 물반 고기반의 포구인 갈매기나루라는 뜻의 鳩津마을로 가는 길은 한쪽이 완전이 열려서인지 바람이 다소 차져서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거기서 갑자기 길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져서 길을 되돌려 바로 아산만 방조제로 연결되는 원기산이 보이는 쪽으로 길을 돌린다.
이 원기산이라는 동네는 내가 아는 여러사람이 사는 동네 다. 내가 처음 안중에 왔을때 많은 의지가 되었던 의료계선배 이강진 원장, 우리병원의 첫 치과위생사 조묘희선생, 내가 만들어준 틀니를 집어 던질 듯이 책상위에 놓으시던 이미 돌아가신 백00아저씨, 학교선생님과의 실랑이 속에 학생의 치아가 부러져서 부모와 교사의 갈등이 생겨 그 중재를 위해 여러번 집까지 방문했던 백00 학생등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기억속에 있는 그런 동네였다.
지나는 데 노인정에선 나의 총의치환자인 문아무개 아주머니의 정겨운 얼굴도 만날 수 있었다.
윤형이와는 길 한쪽편의 낮은 곳으로 밀어내려는 듯한 놀이가 계속되면 재미있는 도보가 계속되고 있다.
멀리보이는 평택호미술관의 피라미드모양을 이정표삼아 그리로 향한다. 그 미술관에선 마침 오늘까지가 전시기간인 만도기계 사진동호회의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에게 낯익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곳에선 흔하지 않은 고등학교후배의 차였다. 사진작가인 그는 얼마전에 어떤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여 축하를 한 기억이 있어 두리번거리는데 그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마침 전시회가 그날까지이고 시간도 한시간도 남지 않아 우리를 마지막 관객으로 문을 닫을 모양이다. 우리는 노인호후배작가의 설명으로 사진을 관람하는 도보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느끼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우연히 만난 도보여행중의 기쁜 소득이었다. 이 작가는 전에 자신이 나에게 한 약속을 기억해내곤 (사실 난 잃어버린 기억이었는데....)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선사받는 기쁨을 주어 한층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의 도보여행을 격려하는 후배를 뒤로하고 다시 걷기를 계속한다.
이미 어두워진 시간은 아산만 방조제위를 걷는 우리들을 깜깜한 밤으로 인도했다. 여기서부터는 국도를 걸어야 한다. 국도는 정말 도보여행자에겐 좋지 않은 길이다. 마치 끌어들일 듯한 힘의 큰차라도 옆을 지날땐 더욱 심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길이 좋디 않지만 방조제위로 걷기로 했다. 겨울 바람이 바다와 만난 이곳은 더욱 촙게 느껴진다. 한쪽은 바다고 한 쪽은 민물호수인 방조제위는 살을 애는 듯한 바람이 우리를 힘들게 하였다. 그리고 차를 타고 지날때는 그렇게 까지 길게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왜이리 가도가도 끝이 없는지.
많이 힘들게 건넜다. 그러나 많은 이야기와 공동으로 느끼는 느린 시간의 공유가 우리를 더욱 가깝게 하는 것이 도보여행의 매력이다.
첫댓글 멋진 시간의 여행이 되었겠구나. 가끔은 지나온듯한 시간을 거슬러가는여행도 필요하겠지. 아이들에게는 멋진 추억거리가 될거고.... 참 멋진 아빠, 머있는 가족이구나. 짝짝짝...
어이구~ 아조씨~고샹허셧수~!!! 그래도 그게 얼마나 큰 소득이냐~ 암튼 즐건 한주 되시게나~!!!
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이 있었다. 아이들, 특히 아들들한테 아빠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난 아빠가 아이들을 한명씩 데리고 단둘만의 여행을 해주기를 바라고 바랬었다. 하지만 가부장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남편은 경제적 책임을 지는게 자기의 도리를 다 하는거라고 생각 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난 아이가 6학년이 됐을 때 한명씩 데리고 단둘이 여행을 간적이 있었다. 그 것이 아이들에게 어떤 추억이 됐는지 말 수 없는 아이들은 얘기해 주지 않는다. 상훈이 글 읽으며 한마디로 부럽다!!!! 이 한마디! 아이들 어릴 때 더 많은 추억을 만들길... 여러가지로, 사회인으로써, 의사로써, 아들로써, 남편으로써, 아버지로써,
너의 행동은 항상 존경심을 갖게 해. 정말 좋은 추억 부럽고, 아이들에게 큰 자산이 되리라 믿어. 행복한 가정이루기를... 아니, 이미 행복한 상훈씨 가족... 홧팅이예요. 언젠가 내가 얘기했지? 교장선생님이랑 이사장님의 생활이 너를 그리 바르게 살도록 인도 했을거라고... 상훈씨 아이들도 반드시 멋진 사람, 멋진 인생 살거라고 믿어 마지 않으며....
토탄이라...... 그래서 평택에 송탄이란 도시이름도 생긴 것 아닐까? 상훈이의 긴글을 오래전에 열어보고는 길어서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이제사 읽는다. 상훈이 널 볼 때마다 난 많이 부끄럽단다. 내 삶이 참 말만 앞서는 그런 실행력이 부족한 삶이었음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주는 너란다. 내가 꿈꾸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네게 찬사와 격려를 함께 보낸다. 고마워 상훈아~~!!
이글을 올리고 이제야 들어와 본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글은 길어진다. 시간의 진행으로는 우리가 걸어가서 하루를 머문곳은 아직 멀은데 , 그리고 그다음날은 아이들과 천안과 아산에 걸쳐 있는 광덕산을 하루종일 걸어서 종단 과 일주했는데 그것까지는 엄두도 못냈다. 내가 큰아이와 두번째 도보여행을 할 때 아이는 도보여행의 좋은 점에 대해서 나에게 잘 설명해주었다. 한 열가지정도로 많았지 아마. 다 생각나지 않는다. 하여간 생각보다 많이 좋은 여행 방법이다. 아이들과 만 아니라 누구와도 괜찮다. 또 어디라도 좋다. 자연과 같이 가는 인간과 하나가 되는 즐거운 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