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는 분들은 정말 희유한 인연이요
무량대복을 받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번 생을 마치고 더 이상 윤회없이 극락왕생하시기를..()...
견성한 도인들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무량수여래회
격음의 미혹[隔陰之迷]과 퇴전退轉의 위험성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그 답은 「믿음[信]·이해[解]·실천[行]·증득[證]」입니다. 불법(佛法)을 공부하는데 첫 걸음은 우선 불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켜야 하고, 계속해서 불법에서 제시하는 진제의 이치, 속제의 이치, 중제의 이치에 대하여 심도 있는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철저[徹悟: 확철대오]해지고 나면 다시 깨달은 바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하는데 수행이란 곧 지관과 정혜를 닦는 것입니다. 그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어느 한 단계에 이르면 혹업의 종자가 끊어지게 되는데, 혹업의 종자가 끊어지면 곧 증과(證果)를 하고 지혜가 개발되겠지요. 지금까지 전반적인 수행의 과정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말은 쉬운 것 같아도 실천을 하기에는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옛날의 조사스님과 대덕들을 보더라도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몇 십 개의 방석이 닳아 해어졌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일생을 바삐 보내면서 항상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조차 없지요. 이로부터 해오(解悟) 또한 우리들의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오(解悟)만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번뇌를 끊고 증오(證悟)를 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혹업을 끊는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끊어야 할 미혹(번뇌) 가운데 가장 거칠고 가장 기본적인 번뇌가 견ㆍ사번뇌(見思煩惱)입니다.
견사번뇌 가운데에서도 우선적으로 견혹을 끊어야 하는데 경론에서는「견혹을 끊는다는 것은 40리가 되는 폭류(瀑流)의 흐름을 단박에 끊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겁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일생에 일생을 이어 수행을 하면서 수없이 긴 시간이 지나야 겨우 견혹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시간이 길다보니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격음의 미혹[隔陰之迷]이 생기게 되지요.
우리들의 제8식은 앞의 오음신을 떠난 뒤에 중음신으로 형성되어 있다가 또다시 다음의 오음신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새로운 오음신이 형성된 후 전생에서 배우고 닦은 것들은 전부 흐릿해지고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러니 금생에서 반드시 불법을 만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들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설사 불법을 만나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생에서 배우고 닦은 것을 바로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영원히 초급반의 학생밖에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추운 겨울에 물을 끊이는데 물이 50℃쯤 되었을 때 불을 끄고는 조금 있다가 또다시 0℃에서부터 다시 끊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물을 끓이다 말다가 하니까 영원히 물이 끊을 기약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격음의 미혹」이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장애입니다.
이 「격음의 미혹」 때문에 수행의 시기를 놓친 사례들 중에서 고덕들이 가장 자주 드는 예로는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입니다. 소동파의 전생은 송나라 때 고승이신 사계(師戒) 선사인데 이 사계 선사의 높고 오묘한 깨달음의 경지에 대하여 그 분의 전기(傳記) 속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요.
다만 애석하게도 정혜(定慧)의 힘이 부족하여 그 생에서 견혹조차 끊지 못했기 때문에 「난심위」에서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어지러워지고 나니 다음 생에는 소동파로 태어났단 말이지요. 그런데 소동파의 다음 생은 누구였을까요?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두렵네요.
그리고 또 한분은 절강성에 있는 안탕(雁蕩)산의 수행승인데,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격음의 미혹」이 있고 나니 송나라의 간신인 진회(秦檜)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더욱 더 참혹합니다. 그러니 이처럼 「난심위」에서 타락을 하여 미혹에서 미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이것이야 말로 진실로 수행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인 것이지요.
그리고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큰 장애에는 「격음의 미혹」 외에도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퇴전」입니다.
이 퇴전은 모든 사람들이 수행을 할 때 항상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부처님 공부 1년이면 부처님은 눈앞에 계시고 부처님 공부 2년이면 부처님은 서천에 계시고 부처님 공부 3년이면 부처님은 구름과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걸음 내딛고 몇 걸음 물러나는 것이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들의 진실한 모습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격음의 미혹이 있고 또 쉽게 퇴전을 하기 때문에 중생들의 도업(道業)은 끊임없이 늦춰지고 해탈을 하려하나 아득하여 기약이 없는 것이지요.
정법시대에는 증과를 하신 분들이 수없이 많았고, 상법시대에도 깨닫고 증득을 하신 분들이 여전히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말법시대에 이르러 깨달은 자는 봉황의 깃털과 기린의 뿔과 같이 적고, 증득을 하신 분은 매우 드물고 희유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법시대에 처해있는 우리에게는 해탈의 희망이 전혀 없다는 말일까요? 답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법시대에는 정토염불법문을 의지해 생사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정토법문은 「이행도(易行道)」이며, 「특별한 첩경[特別捷徑]」의 법문이니까요.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정토법문을「특별한 첩경」이라고 했을까요?
첫째는, 마음을 깨닫고 번뇌를 끊을 필요 없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법문은 반드시 깨닫고[悟]·닦고[修]·끊고[斷]·증득[證]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성취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정토법문은 깨닫고 끊을 필요 없이 성취를 할 수 있으니, 어떻게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시간이 짧아 다겁 생이 아닌 금생에 성취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금생에서 정토를 닦아 설사 일년, 반년, 혹은 사흘, 닷새, 내지는 십념, 일념만이라도 성취를 할 수 있으니, 어떻게 첩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처럼 수승하고 특별할까요? 그것은 정토법문이 「이력(二力)」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 일반법문은 모두 자력(自力)에 의지하여 닦고 증득을 해야 하지만 정토법문은 부처님의 힘[佛力]이 추가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길고도 험난한 길을 만약 몸이 허약한 사람이 혼자서 끝까지 걸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태산을 등에 업고 북해(北海)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장사가 있어서 그 사람을 도와준다면 쉽고도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요.
ㅡ <정토도언淨土導言>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