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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들
황 순 원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 이 밤 안으로 아버지에게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바우는 씨돌이네 집 일간¹에서 같은 또래의 애들과 함께 가마닛날 새끼를 꼬다 말고 오줌 누러 가는 척 밖으로 나온다.
깜깜이다. 하늘에는 별도 없다. 아버지가 오늘 아침 어머니보고, 음력으로 며칠이냐고 묻던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스무엿새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혼잣말로, 그럼 오늘 초저녁에는 달이 없겠군 했다. 그런 오늘밤이 날씨까지 흐려 깜깜이다.
아버지는 아까 저녁 때 연거푸 담배를 몇 대 대통에 담아 피우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 앉았더니 어머니보고 불쑥 다시, 오늘이 분명 음력으로 스무엿새지? 하고 물었다. 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하기는 이런 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얼굴은 오늘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바로 며칠 전에만 해도 그렇게 의젓한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누구에게라 없이 분한 듯, 이놈의 세상은 또 속게만 매련이야, 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런 때의 아버지의 얼굴은 유난히 늙어 보인다. 이마의 주름살이 늘고 더 굵게 파인다. 정말 아버지의 주름살은 이런 때마다 늘고 굵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얼굴엔 어쩐지 오늘 안으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인다. 바우는 엊그제 어디선가 공출 관계로 많은 농사꾼이 붙들려갔다는 소문이 났을 때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던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바우는 그러니까 오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그게 어떠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바우의 눈앞에는 그 무서운 총대가 떠오른다.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린다. 바우가 집까지 와 보니 과연 안마당 어둠 속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봐라, 분명 무슨 일이 있지 않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린다.
구멍 난 곳마다 더덕더덕 붙인 창호지 안에 반딧불 같은 등잔불이 켜져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지금 안마당에 모인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누구누구이기는 고사하고 대체 몇 사람이나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짐작으로 여남은 될 것 같다.
바우는 문득 작년 가을 할머니가 돌아갔을 적 일이 생각난다. 그때도 동네 사람들은 안마당에 모여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때는 모인 사람들이 저렇게 사뭇 조심성 있게 수군거리진 않았다. 하기는 오늘밤 일어날 일이 할머니가 세상 떠난 것보다 더 큰일이니까. 할머니가 돌아갔을 때는 바우 자기도 어머니의 곡을 따라 울긴 했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언년이까지 따라 울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기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게 노상 흥이 나기도 했다. 그게 오늘밤은 조금도 그렇지가 않다.
저쪽 손톱이 타리만큼 바싹 담배를 빨다가 꽁다리를 던지는 사람은 거북이형이 분명하다. 그리고 거북이형이 담배꽁다리의 빨간 불티를 막 밟으려는 것을 가만있으라고 쭈그리고 앉으며 대통에 불티를 담는 사람은 또 개똥이 아버지가 분명하다. 불티가 개똥이 아버지 대통에 담기어 허공에 올라 개똥이 아버지의 입 키만큼에서 빨갛게 탔다 까무룩해졌다 하다가 이번에는 그것이 이편으로 떠오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모두들 헤어져 이리로 나오는 기색이다. 지금 자기가 예 있는 것을 저편에 알려서는 안 된다. 바우는 급히 잿간 쪽으로 피한다. 그러고는 정말 오줌을 누기 시작한다. 오줌을 다 누고도,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다 흩어져 간 뒤에도, 한참이나 바우는 그냥 오줌을 누는 체하고 섰다. 그러노라니 좀 전에 할머니 세상 떠났을 적 일을 생각한 뒤라 그런지, 그때 할머니를 입관하자 할머니가 베던 베개를 이 잿간 도리 틈에 찔러두었던 일이 생각났다. 바우는 이 자기를 끔찍이 귀애해주던 할머니의 베개가 왜 그렇게 꺼림칙하고 무섭던지 밤에는 아예 이 근처에 얼씬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보니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서워했다. 죽은 사람이 베던 베개쯤 무어냐. 내가 몇 살이기에 그런 걸 무서워할꼬. 이래봬도 열세 살인데. 아버지는 열네 살에 벌써 마루씨름을 했다던데. 그러면서도 바우는 그 베개 찔러두었던 걸 생각하면 오늘밤도 이 잿간에 혼자 있기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절로 빠른 걸음으로 집 쪽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여기 있기 꺼림해서가 아니고 지금 아버지가 무엇을 하나 어서 가보고 싶어서 이런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론 안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외양간에서 소가 씩씩거릴 뿐. 방에 들어가니 마침 아버지는 덧바지를 입고 있다. 틀림없이 어디 가려는 것이 분명하다. 어머니는 언년이를 재워놓고 등잔불 바특이 다가앉아 헌 옷을 깁고 있다가 고개도 안 들고 바우에게 왜 새끼 꼬러 가지 않느냐고 묻는다. 바우는 볏짚을 가지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고는 윗목 구석에 세워둔 잎 딴 볏짚을 가서 만지작거린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다. 어머니는 왜 자기보고만 새끼 꼬러 가지 않느냐고 하고, 아버지보고는 어디 가느냐 묻지 않는지 모르겠다. 혹은 내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아버지가 어디 간다는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머니는 저렇게 천연스레 앉아 있을 수 있을까.
하기는 바로 해방 전해 겨울 공출 때 아버지가 그 왜놈 순사에게 몹쓸 매를 맞은 뒤 충주로 붙들려갔을 적에도 밤마다 어머니는 저렇게 혼자 앉아 기움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가 붙들려간 걱정을 좀 가라앉혀보려는 듯이, 그리고 또 아버지가 밤중에 놓여나온대도 깨어 있다 맞으려는 듯이.
그때 바우 자기는 자다가 밤중에 몇 번 깨어 봐도 어머니는 그냥 저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밤 바우 자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봐야 한다. 바우는 볏짚 반 아롬을 옆구리에 끼고 문을 열고 나선다.
그새 아버지는 이미 사립문을 나섰을 줄 알았는데 연 문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지금 아버지가 토방 한옆에 올려놓은 지게에서 작대기를 집어 들고 사립문 쪽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주 늙은 노인의 뒷모양이었다.
해방 전해 겨울 그 몹쓸 매를 맞은 뒤부터 아버지는 허리를 잘 못 쓴다. 젊어 한창때에는 힘쓰고 씨름 잘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났던 아버지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때때로 동네 힘깨나 쓴다는 젊은이들보고, 먼저, 어디 씨름 한번 해보자고 하며 얼굴에 그 의젓한 웃음을 띠고 젊은이들의 허리춤을 잡는 것이었는데, 이 웃음이 확 퍼졌는가 하면 어느새 아버지는 홀떡 상대편의 배지기를 들어 메치곤 하는 것 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그 몹쓸 매에 허리를 상한 뒤부터는 통 움쩍을 못한다. 사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매질이었다. 말을 타고 공출 독려를 나왔던 그 코밑에 수염을 기른, 일견 점잖아 보이기 짝이 없는 왜순사는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로라도 그래야 한다는 듯이 아직 공출 미납이라는 바우 아버지의 멱살을 그러잡더니 다짜고짜로, 네놈이 공출은 아니 하고 씨름은 잘한다지? 어디 나하고 한번 해보자 하고는, 에잇 소리를 지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아버지를 유도라는 것으로 언 땅에다 이리 꼰지고 저리 꼰지고 했다. 아버지의 코와 입에서는 선지피가 흐르고, 그러자 왜순사는 제김에 독이 올라 나가넘어진 아버지의 허리 중동을 승마화 뒤꿈치로 마구 내리찧는 것이었다. 옆에서도 차마 치가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런 뒤에 왜순사는 혼자 잘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이끌고 충주로 들어갔다. 바우는 차마 오금이 자려 아버지가 끌려가는 것을 동구 밖까지도 따라가볼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의 모양이 씨돌이네 집 모퉁이를 돌아 뵈지 않게 된 지도 한참 만에야 바우는 갑자기 으아! 하고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자기가 가만 있은 것이 바보였다. 치를 떨고 보고만 있었다니 !
그러니까 오늘밤 자기는 집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함께 가야 한다. 바우는 아버지 지게 옆에 세워놓은 제 아기지게에다 볏짚을 내려놓고 제 작대기를 찾아 든다. 그리고 사립문을 나선다.
어두운 속에서도 아버지가 저만치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우는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새를 두고 뒤따른다. 아버지는 아랫동네로 해서 동구 밖을 나선다.
동구를 벗어나 그 길을 두어 마장쯤 가면 냇둑에 이르는데, 이 냇둑에 이르기 얼마큼 전 길목에 늙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아버지는 그 느티나무께로 가더니 서는 눈치다. 바우도 멈춰 선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는 아버지 혼자만이 아니고 여럿이 모여 서 있는 것이다. 가만가만 하는 소리지만 여럿의 말소리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처럼 무슨 작대기 같은 것을 하나씩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우는 문득 저렇게 아버지랑 동네 사람들이 지금 느티나무 밑에 모인 것은 바우가 생각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낟알 도둑을 잡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엔 오쟁이네 콩을 밤중에 누가 꺾어갔다더니 어제밤에는 또 개똥이네 밭에서도 잃었다는 소문이 났다. 이미 보리 양식마저 떨어져 굶는 집이 적지 않은 터라 남의 거건 말건 먼저 된 낟알을 가져다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 오늘밤 동네 사람들은 저렇게 몰래 숨었다가 낟알 도둑을 잡으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가 어머니보고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이냐고 물은 것도 밤에 달이 없어야 저렇게 몰래 숨었다가 도둑을 잡기 쉬우니까 그랬고. 그런데 느티나무 밑의 동네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 냇가로 내려간다. 혹은 시내 저편을 지키려는지도 모른다. 좌우간 따라가자. 바우는 느티나무 밑으로 가서 시내 쪽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사람마다 발을 뽑을 것 없이 제가 업어 건너겠다는 것은 오쟁이의 말소리다. 그 목이 밭고 아랫도리에 비겨 허리가 짧은, 그러나 몸집이 둥글게 옹글어 힘깨나 쓰는 오쟁이. 그러자 바우는 이 오쟁이에 대해서 동네 사람들이 하는 놀림말이 떠오른다. 오쟁이를 낳자, 오쟁이 아버지는 그렇게 하면 애가 속히 큰다는, 씨앗 담아두는 오쟁이 속에 넣어 벽에다 매달았더니 갓난애가 어찌나 기운차게 팔다리를 버둥거려대는지 그만 오쟁이가 못에서 벗겨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마침 거꾸로 떨어지지 않아 살아났지만 그때 되게 엉덩방아를 찧었기 때문에 목과 허리가 내려앉은 것이 영 굳어져 커서도 저렇게 목이 밭고 허리가 짧다는 것이다.
이쪽 냇가에 사람의 기척이 없어진 뒤에야 바우는 냇둑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바우는 재게 말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정강이 위까지 걷어 올린 후 내를 건넌다. 발가락과 종아리가 제법 차다. 건너편에 닿자 바우는 잔디에다 쓱쓱 발을 문지른 후 신을 신고, 바짓가랑이는 채 내릴 겨를도 없이 앞선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을 찾아 뒤따른다.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거북이네 담배밭머리를 돌아 저만큼 가는 것을 알아낸다.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은 아무 말들이 없다. 발소리만이 들릴 뿐. 그것은 사람이 여럿 가는 것이 아니고 뒷사람은 앞사람을 묵묵히, 앞사람은 그 앞사람을 또 묵묵히 따라 마치 소들끼리 줄지어 밤길을 가는 것만 같다. 그것도 꼭 다른 소 아닌 황소들끼리.
바우는 재작년 가을에 아버지를 따라 충주에서 지금 자기네가 먹이는 황소를 사가지고 이 길을 돌아오던 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마스막재에서 저문 해가 한강에 이르니 아주 졌다. 강을 건널적에 송아지가 배를 안 타려고 해서 뱃사공과 자기는 고삐를 잡아당기고 아버지는 엉덩이를 떠밀어서야 겨우 배에 태웠다. 흰바윗골 동네로 들어가는 세어름길에 왔을 때에는 아주 밤이 되어 바우는 좀 무서웠다. 그날 밤은 오늘밤과는 달리 하늘에 별도 총총하고 초생달도 있어서 아주 깜깜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바우는 어른들한테서 들은 황소만 데리고 다니면 아무런 험한 곳도 무섭지 않다는 말을 생각하고, 지금 자기네가 데리고 가는 게 아직 송아지지만 황송아지라는 데 얼마큼 마음을 놓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동네 어른들이 몇 년 전에 어디선가 사실 있은 일이라고 하면서 한 이야기― 어떤 총각애가 저녁때 소먹이러 나갔는데 얼마 후에 소만 혼자 쁠에다 피투성이를 해가지
고 돌아온 것이다. 집안사람들은 필경 이놈의 소가 같이 갔던 애를 받아 죽인 거라고 한참 야단법석들을 하고 있는데 애가 돌아왔다. 받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다친 데 없었다. 그 애의 맡이, 소를 먹이며 서 있으려니까 별안간 소가 자기를 덮치기에 소한테 밟혀 죽는가 보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느 틈에 왔는지 호랑이 한 마리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소잔등을 넘어 다니며 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적마다 소도 이리저리 몸을 피해 들어가는데(여기서 이야기하던 어른은, 사실은 소가 피하느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호랑이를 면바로 받을 틈을 노리느라고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조금도 밟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소가 어떻게 호랑이를 받아 죽였는지 소가 달아나기에 보니까 호랑이는 배가 터져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이야기하던 어른은 으레 호랑이가 한번 쇠뿔에 닿기만 하는 날이면 소는 호랑이를 제기 차듯이 연달아 받아 창자를 해치고야 그만둔다는 말을 붙였다.) 이런 이야기가 떠올라 바우는 아무래도 자기네가 데리고 가는 소가 좀 큰 황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바우는, 이것도 옛말에 들은 호랑이란 놈은 사람이 잠을 자거나 길을 가거나 할 때 가운데 낀 사람을 가장 겁쟁이로 알고 먼저 물어간다는 말을 알고 있었으나, 자기는 아무래도 송아지 앞이나 아버지 뒤에 서기가 영 싫어 아버지와 송아지 새에 끼여 걷느라고 몇 번이나 송아지 뒷발통에 차였는지 모른다.
그때는 그래도 그런 황송아지라도 데리고 또 아버지와 함께였지만 오늘밤은 자기 혼자 이렇게 떨어져 걷는다. 참 오늘밤 같은 때 이제는 완전히 큰 소가 다 된 자기네 황소를 데리고 간다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할까. 그러나 지금 자기는 그때보다 두 살이나 더 나이를 멱지 않았느냐. 요맛 밤길을 무서워하다니. 더구나 이렇게 지게 작대기까지 들었는데. 그리고 고함 한마디면 자기 앞서가는 황소 같은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줄 텐데. 그러면서도 바우는 노상 무섭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앞선 동네 사람들과의 새를 줄이기 위해 걸음을 빨리한다.
그런데 낟알 도둑을 잡으러 가는 터면 이만쯤에서 어디 숨었다 볼 것 같은데? 동네 사람들이 부치는 밭들은 거의 다 지나치고 이제 얼마 가지 않아 흰바윗골로 들어가는 세어름길이 된다. 그러자 바우는 문득 동네 사람들이 도둑을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흰바윗골 사람들과 싸움을 하러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 해마다 논물 댈 시절에는 물 때문에 몇 번씩 있는 싸움. 누구의 이빨이 부러졌다, 누구의 머리가 터졌다 하는, 당장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무서운 싸움. 피차의 등 뒤에는 세도가 있는 지주들이 있어서 뒷일은 염려 말고 논물만 먼저 대도록 하라는 것이다. 올해는 흰바윗골 지주의 아들이 큰 벼슬을 하게 됐다는 소문이 나더니, 막 자기네 좋도록만 물을 대라는 호령이 내렸다. 그런 걸 얼마 전 이쪽 지주 김대통 영감의 맏손자가 이번에 서울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앉게 되면서부터 김 대통 영감은 저쪽 지주를 두고 괘씸한 놈이라고 이제 두고 보잔다더니, 그럼 그래서 혹 오늘밤 동네 사람들은 흰바윗골 사람들과 싸우러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있자. 흰바윗골 사람들과 싸움은 피차의 동네 대표들이 모여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의논이 됐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 앞선 동네 사람들은 흰바윗골로 들어가는 길과 충주로 가는 길이 갈린 세어름길에서 흰바윗골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충주로 가는 길을 잡아든다. 역시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은 자기가 맨 처음 짐작했던 일로 해서 충주로 가는 길인 것이다.
이제 겉은 외곬 충주로 잇닿았을 뿐. 이때 바우의 눈앞에는 그 무서운 총대가 떠올랐다. 뒤이어 그것이 어둠 속을 통해 쏜살같이 내리쳐졌다. 춘보의 어깻죽지 위로. 밀보리 공출이 미납된 탓이었다. 그러나 춘보는 첫 매에는 움쩍 안 했다. 오랜 세월 영양부족으로 희멀건 얼굴을 한 춘보는, 그러나 그 수다한 식솔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온 춘보는, 첫 매에는 움쩍 안 했다. 그 무서운 총대가 다시 내리쳐졌다. 이제 춘보는 쓰러지리라. 그리고 아버지가 허리를 상한 것처럼 춘보는 어깨를 못 쓰게 되리라. 매질하는 사내는 아무 대항 없는 춘보의 어깨를 다시금 내리쳤다. 춘보는 종내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춘보의 눈에 빛나는 게 있었다. 눈물이었다. 그러고는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꿈틀거리듯이. 이 꿈틀거림은 춘보의 몸에서만 아니고, 그때 모였던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서, 바우 자기의 몸에서도 일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뿐이었다. 사내는 이것도 전의 바우 자기 아버지처럼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춘보를 이끌고 충주로 들어갔다. 사실 그뒤로 춘보는 어깨를 잘 못 쓴다. 아버지가 허리를 잘 못 쓰듯이.
한강 둑에 이르렀다. 나루터 뱃사공과는 미리 얘기가 있었던 듯 동네 사람들은 지체 없이 하나 둘 배에 오르기 시작한다. 바우는 잠깐 걱정이 생겼다. 자기는 다음 배에 건너나, 이 배에 같이 건너나? 이 ˙배에 건너자니 동네 사람들이 자기가 따라오는 것을 알기 쉽겠고, 다음 배에 건너자니 동네 사람들과 자기 새가 너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더구나 강을 건너서부터는 익지 못한 고갯길이다. 너무 뒤떨어졌다가 동네 사람들을 잃으면 큰일이다.
바우는 첫 배에 같이 오르기로 한다. 혹시 동네 사람들에게 들킨다 해도 설마 여기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라고야 안 할 테지. 돌아가라면 누가 돌아가나. 그런데 배에서도 누구 하나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자기도 배 안의 사람을 누가 누군지 분간치 못한다. 아무도 말이 없다. 담배조차 피워 물지 않는다. 그저 어둠 속에서 배 젓는 소리만이 삐꺽삐꺽할 뿐이다. 바우는 그 삐꺽거리는 소리만을 듣고 있다. 바우는 전에 이 배를 타고 생각한 게 있었다. 이런 배를 타고 사나나달² 내려가면 서울이 된다지, 그 서울이라는 데를 한번 가봤으면 하고.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 같은 것은 나지 않고 그저 삐꺽 소리를 들으며, 유난히 강이 전보다 넓은 것 같다는 것에만 마음이 쓰인다.
건너편 언덕에 닿자 동네 사람들은 또 소처럼 말없이 겉을 걷기 시작한다. 바우는 다시 알맞게 새를 두고 뒤따른다.
이제 충주가 가까워온다는 생각에 바우의 눈앞에는 어둠 속을 통해 또다시 그 무서운 총대가 나타난다. 바우의 가슴은 자꾸만 떨린다. 그러면서 다시금 떠오르는 건 엊그제 어디선가 많은 농민이 붙들려갔다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바우는 어린 마음에드 그게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이런 바우니까,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오늘밤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충주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알 뿐만 아니라 바우는 어디까지나 아버지 편인 것이다.
그런데, 아, 큰일이다. 바우의 눈앞에는 그 무서운 총대 앞에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나가 쓰러지는 모양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그러는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의 눈에 빛나는 게 있었다. 눈물이었다. 그러고는 모두 꿈틀거린다. 마치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듯이. 그리고 모두 울부짖는다. 이대루 가단 아무래두 다 굶어죽을 목숨여. 누가 공출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여, 공평하게 해달라는 거지. 어떤 사람은 광 속에 쌀가마니를 가뜩 들이쌓아놓구 몰래 일본이나 다른 데루 팔아먹게 왜 내버려두느냐 말여. 밤낮 없는 사람만 들볶아댔자 뭐가 나올 거여.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다 죽을 목숨여. 이 울부짖음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 벌써부터 하던 말들이다.
바우는 어른들이 이런 말 하는 걸 들을 적마다 재작년 가을 자기가 아버지를 따라 소 살 돈을 빚내러 충주 김대통 영감네 집에 가서 본, 그 광 속에 치쌓인 낟알섬이 떠오름을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그 광문에 달린 어른들 주먹보다도 더 큰 시커면 자물쇠통도 함께.
지금도 바우의 눈앞에는 그 광 가득하던 낟알섬과 함께 광문에 달렸던 자물쇠통이 떠오른다. 좀처럼 해서는 열려지지 않을 것 같은 자물쇠통이다.
그러자 또 바우의 눈앞에는 쏜살같이 내리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물쇠통을 족친 것이 아니고, 바로 꿈틀거리는 아버지의 허리를 내리친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허리를 잘 못 쓰는 아버지가 대번에 쓰러진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를 내 등에 업어야 한다. 얼마 전에 자기는 가을나갔다 갑자기 허리증으로 움쩍 못하는 아버지를 업고 세 번 쉬어서 집까지 온 일이 있지 않느냐.
하늘은 마냥 캄캄할 뿐, 별 하나 뵈지 않는다. 오늘 아버지가 혼잣말로, 오늘 초저녁에는 달이 없겠군, 한 말이, 아버지는 오늘밤 달이 있기를 바랐는지 없기를 바랐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자기로서는 이런 때 이지러지다 남은 달이라도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달이 없겠으면 별이라도 좀 총총해줬으면 오죽 좋으랴. 그러는데, 하니 저기 ,앞에 한 무더기의 별이 나타났다. 아, 참 곱다. 저기가 충주로구나. 밤의 충주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느새 마스막재까지 온 것이었다. 고개턱이라 여태껏 없던 밤바람이 동네 사람들을 따라가느라 홋훗해진 바우의 귀밑과 등을 스친다. 바우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제부터다, 하는 생각에 바우는 저도 모르게 삭대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런데 웬일일까. 동네 사람들은 곧장 충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왼편 쪽 남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이다. 모를 일이다. 좌우간 바우는 동네 사람들의 뒤를 따라 올라간다. 동네 사람들은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 눈치다. 바우도 한옆에 좀 떨어져 앉는다. 역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별안간 기침 소리가 두어 번 난다. 기침 소리로써 그것이 거북이 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그 기침 소리로써 거북이 형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 있다는 것과, 이쪽을 향하고 있지 않고 저쪽을 향하고 있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저쪽 어둠 속에서도 같은 마른기침 소리가 한 번 나더니, 누가 이리로 걸어오는 기척이 난다. 누구일까. 바우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자 거북이형 편에서도 마주 그리로 가는 것 같더니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싸움 목청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기네가 앉아 있는 이 남산에 자기네뿐이 아니고, 자기네와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와, 자기네처럼 앉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듯했다. 바우는 적이 마음이 든든해짐 을 느낀다.
더구나 별빛 같은 충주 거리의 전등불빛이 보여서 아까보다 낫다. 저기 왼편 한곳에 얼마큼 전등불이 모여 있는 곳이 정거장이리라. 기차 시간이 아닌지 기적 소리 하나 없다. 바우는 문득 그 기차를 타고 서울에 한번 가봤으면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거장 앞 큰길로 해서 충주 거리로 들어오는 버스 한 대가 눈앞에 떠오른다. 서울서 오는 버스다. 버스는 뒤에 뽀오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털럭털럭 달려온다. 버스는 거리 한곳에 와 멎는다. 사람들이 내린다. 꽤는 내린다. 고만한 속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일까. 기차보다도 이 버스를 한번 타고 털럭털럭 흔들리며 서울로 가봤으면.
참, 버스가 와 닿고 떠나는 곳이 어디쯤일까. 바우는 전등불이 켜 있는 충주 거리를 이쯤일까 저쯤일까 하고 눈짐작으로 짚어본다. 그러다가 바우는 문득 그것이 김대통 영감네 집 골목에서 두어 집 건너 맞은편 쪽이었으니, 저쯤 되리라고 딴 데보다 전등불이 총총한 곳에 눈을 멈춘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재작년 가을 아버지를 따라 소 사러 와서 들렀던 그 김대통 영감네의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 눈앞에 턱 나타난다.
그때 아버지는 우람스런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그 안에 김대통영감이라도 앉았는지 오른편 미닫이 쪽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바우도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그쪽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바우는 허리를 굽힐 때나 펼 때나 눈앞에서 미닫이의 유리알이 얼른거리는 것을 느꼈을 뿐, 그 도수장에 걸린 쓸개주머니 같다는 코(이것은 김대통 영감이 듣지 않는 데서 동네 사람들이 몰래 하는 말이다)와, 그 언제나 손에서 놓아보지 않는다는 크디큰 대통이 달린 담뱃대는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유리창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어서 그저 오늘 아버지가 나들이옷이라고 갈아입고 온 저고리 잔등의 자기 손바닥만 하게 기운 자리에다 눈을 주고 있었다. 이윽고 미닫이 안에서 바우가 덜컥 놀랄 만큼 그리고 미닫이 유리창이 쩌르렁 울리도록, 귀동아, 귀동아, 하고 누구를 부르는 김대통 영감의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중문 안에서 바우보다도 작은 아이 하나가 나와, 바우 아버지 손에서 치룽³을 받아가지고 안으로 들어간다. 미닫이 안 김대통영감에게는 밖의 자기네가 와 있다는 것과 자기네가 무엇을 가지고 왔다는 것까지 빤히 내다보이는가 보다.
아버지는 바우보고 밖에 있으라고 하고는 신발을 벗고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버선바닥을 턴다. 바우는 안에서 빤히 내다보이는 미닫이 앞을 떠나 지금 아이가 사라진 중문께로 간다. 미닫이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가 김대통 영감 있는 데로 들어간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김대통 영감한테서 빚을 내야만 그렇게 벼르던 송아지를 사갈 수 있다.
중문이 열리며 귀동이가 빈 치룽을 내다 준다. 열린 중문 틈으로 들여다보이는 안채는 온통 으리으리한 유리문들이었다. 이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처럼 침이 마르도록 이 집 얘기들을 했구나.
귀동이가,
“니 사는 데 감 많나?”
하고 말을 붙인다.
오늘 가져온 그 감을 보고 하는 말인가 본데 말투가 별나다.
바우가 고개를 끄덕이니까 귀동이는,
“우리 있는 데도 많다.”
하고 이어서 무슨 말을 하려 하는데, 중문 안 저쪽에서, 귀동아, 하고 여인의 목소리가 부른다.
귀동이는 곧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좀 만에 다시 나오는데 작은 상에 국밥 두 그릇을 놓아가지고 나온다. 귀동이가 상을 들고 미닫이 앞까지 오니까 미닫이가 열리며 아버지가 나타난다. 그런데 아버지는 거기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 나오며 받는다. 방 안에서 김대통 영감의 목소리로, 들어와서들 먹지, 하는 말이 들려 나왔으나 아버지는, 아무 데서나 먹지유, 하고 상을 들고 바우 있는 데로 오더니 땅에 내려놓는다.
바우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다. 쌀밥이다. 자기네는 공출이라는 게 생기기 전에도 좀처럼 쌀밥은 먹지 못했지만 공출이 시작되면서부터는 통 구경도 못하던 쌀밥이다. 게다가 고깃점은 뵈지 않아도 국물도 고깃국물이 분명하다. 입에 넣기가 바쁘게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이런 것을 늘 해먹는 모양이다. 이렇게 당장 해내오는 것을 보니. 참 맛있다.
아버지가 자기 그릇의 밥을 한 술 떠서 바우 그릇에 덜어준다. 귀동이가 중문 밖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우는 귀동이 앞에서 좀 부끄럽다. 얼른 아버지보고, 싫어, 한다. 그렇지만 바우는 그것을 되 아버지 그릇에 떠 넣지는 못하고 그냥 먹는다. 아버지가 또 자기 그릇 속에서 집힌 듯 작은 고깃점을 하나 건져 바우 그릇에다 넣어준다. 바우는 좀더 크게, 싫다니까, 한다.
다 먹자 귀동이는 상을 들고 중문 안으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다시 사랑방으로 들어간다. 어서 아버지가 빚을 내가지고 나와 소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별안간 김대통 영감의 재떨이 두들기는 대통 소리가 크게 울려나왔다. 비위가 거슬릴 때면 무어나 두드리기를 잘 한다는데 아마 돈을 얻기는 틀리는가 보다.
중문으로 또다시 귀동이가 나온다. 귀동이는 바우에게로 오더니,
“니 멧 살이고?”
묻는다.
“열한 살.”
“열한 살? 난 열 살이다.”
귀동이는 사랑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느그 아부지가? 좋겄다.”
“니네 아부지 없니?”
“와 없노. 우리 집에 있다. 우리 집은 문갱(문경)인데, 문갱 아나?”
바우는 모른다고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경상도다. 우리 있는 데는…….”
하는데 중문 안에서 또 여인의 목소리로, 귀동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귀동이는 하던 말도 채 못하고 급히 안으로 들어간다. 바우는,
귀동이는 어째서 자기 아버지 어머니 있는 집에 있지 않고 여기 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귀동이가 들어간 중문 틈으로 고개를 기웃해 본다. 마침 안뜰 한옆 광으로부터 귀동이가 무엇이 가득 든 자루를 메고 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귀동이가 닫으려고 하는, 어른들의 주먹보다도 큰 자물쇠통이 달린 광문 안에 가득 쌓여 있는 낟알섬이 눈에 띄자 바우는 못 볼 것이나 본 것처럼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만다.
좀 있더니 귀동이가 얼굴에 웃음을 담고 다시 나온다. 양쪽 볼에 보조개가 파인다.
이번에는 바우가 먼저 묻는다.
“그른데 너 왜 여 와 있니?”
“이 집 할배가 울 아부지한테 심부름시킬 아 하나 달라 캐서 안 왔나. 우리가 이 집 땅을 부치거덩. 우리 집에선 내 한 입 없는 기어대라고. 내꺼정 식구가 말캉 아홉이다. 누 둘은 시집갔는데도…….”
“그래 너 집생각 안 나니?”
“와 안 나. 아부지보다 음마 생각이 더 난다. 내 올 때 큰길꺼정 따라오믄서 안 울었나. 집에서보다 묵기는 더 잘 묵지만 집에 가고 싶다. 그라지만 아부지가 집생각 말고 잘 있으라 카드라. ……우리 집 디에도 감나무밭이 있는데 아까 니가 가온 감보다 더 굵다, 그거를 가실에 따서…….”
이때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귀동이를 부른다. 귀동이는 또 하려던 말과 함께 웃음 띤 얼굴을 거두어가지고 곧 안으로 들어간다.
귀동이는 아무리 자기 아버지가 집생각 말고 잘 있으라고 했다지만 자꾸 집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이번에 나오면 그렇게 큰 감이 많은 집에 언제 가느냐고 물어보리라. 어서 귀동이가 나오면 좋겠다.
귀동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시 나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우한테 오는 게 아니고 심부름 갔다 오겠다고 하면서 대문께로 나간다.
조금 후에 미닫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아버지가 나온다. 수심스런 얼굴이다. 돈을 못 냈는가 보다. 그때 뒤에서 김대통 영감의 쩌르렁하는 목소리로, 이 사람이 서 푼 변이면 거저 얻어가는데 왜 그렇게 죽어가나? 하는 말소리가 들려 나왔다. 바우는 빚을 얻기는 얻었나 보다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저렇게 기운이 없을까.
아버지는 이쪽으로 와 보자기에 싼 빈 치룽을 집어 들면서 보자기 한귀에다 오른편 엄지손가락 끝에 묻은 붉은 물감 같은 것을 문지른다. 바우는 그것이 무엇이며 왜 그것이 아버지 손가락 끝에 묻었는지를 모른다.
아버지는 바우 자기를 데리고 미닫이 앞으로 다시 가 아까 올적처럼 허리를 굽힌다. 바우도 따라 했다. 그러면서 바우는 이번에는 이마 위에서 유리창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을 뿐, 미닫이 안에 있어야 할 김대통 영감은 보지 못한다.
대문을 나왔다. 아버지는 그냥 수심스러운 얼굴로 서쪽에 기운 해를 쳐다보며, 소장 다 파했을 것 같다, 어서 가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안된 게 있다. 귀동이보고 간다는 말을 못하고 오는 게 안됐다. 귀동이도 심부름 갔다 돌아와서 자기를 찾을는지 모른다. 바우는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 보았으나 귀동이의 모양은 종내 뵈지 않는다. …………
바우는 저기 전등불이 빛나는 거리 그 김대통 영감네 집에 귀동이가 아직 있나 어쩌나 하고 궁금해진다. 바우는 그동안 몇 번 김대통 영감네 집에 다녀온 아버지에게 귀동이가 있더냐고 물었으나, 아버지는 번번이 모른다고 했다. 아마 어른들은 그런 덴 주의가 가지 않는 모양인지.’
어둠 속에서 오쟁이의 낮은 목소리로, 아직 열시가 멀었나, 하고 혼잣말같이 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다 됐을 텐데, 춘보의 떨리는 듯한 역시 나지막한 목소리다. 그러면 지금 동네 사람들은 열 시가 되기를 기다리는구나. 다시 아무도 말이 없다.
칙 칙, 누가 부싯돌을 긋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낮으나 급한 소리로 쉬쉬한다. 부싯돌을 긋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 담뱃불 같은 것도 붙여서는 안 되는가 보다.
바우는 목덜미와 아랫도리가 좀 춥다는 걸 느낀다. 길을 걷느라 땀기 있던 몸이 아주 식고 냉기가 스며든다. 바우는 아까 내를 건너면서 걷어 올렸던 바짓가랑이가 그새 풀려내린 것을 마저 훑어내려 발목을 가린다. 그리고 지게 작대기를 놓고 팔짱을 낀다.
바로 그때다. 별안간 저 아래 충주 거리의 전등불이 온통 꺼진 것은. 그리고 이 전등불 꺼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와짝 동네 사람들이 일어선 것은. 바우도 저도 모르게 제 작대기를 집어 들고 일어선다. 거북이형이 무어라고 하면서 앞장을 서는 눈치더니, 동네 사람들이 울울 밀려 내려간다. 성난 황소들 같다. 이 성난 황소들은 바우네 동네 사람들뿐만 아닌 듯했다. 아까 거북이형 이 누구와 만나 수군거리던 저쪽에서도, 그리고 좀더 저쪽에서도, 아니 이 남산 전체에, 틈틈이 자기네와 같은 사람들이 앉았다가 지금 충주 거리를 향해 내려가는 것으로 바우에게는 느껴졌다.
바우는 너무 갑작스러움에 잠시 떨리는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여기까지 와서…… 그제야 바우는 작대기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어른들의 뒤를 쫓아 내려가기 시작한다. 무엇엔가 자꾸 걸리고 헛짚어 퍽퍽 넘어진다. 빨리 따라가야 할 텐데. 그러나 바우는 앞선 어른들에게서 점점 처진다. 나중에는 어둠 속에 어른들이 영 뵈지 않게 되고 만다. 그래도 바우는
그냥 달린다.
충주 쪽은 막 캄캄이다. 좀 전까지 전등불이 켜져 있다 꺼져서 그런지 더 캄캄한 것 같다. 그런 속에 몇 개의 불빛이 빠르게 이쪽저쪽으로 달리며 보였다 가려졌다 한다. 자동차는 자동차 같은데 이상한 소리를 낸다. 바우의 가슴은 연방 떨린다.
톡 톡 무엇이 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우는 저도 모르게 오똑서고 만다. 그 무서운 총소리인 것 같다. 뒤이어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그 속에 쑤러져 넘어지는 아버지의 모양이 떠오른다. 큰일이다, 큰일이다, 왜 자기는 빨리 어른들을 쫓아가지 못했을까.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어둠 속에 확 불길이 일어난다. 아, 바우의 가슴속에서도 퍼뜩 불길이 일어남을 느낀다. 이런 바우의 가슴속에서는 또 뭇사람의 아우성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분명히 섞인. 그것이 차차 자기 가슴속에서가 아니고 저기 불길이 이는 곳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깨달아진다. 그러자 바우는 불길이 이는 쪽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불난 곳이 그리 먼 것 같지도 않다.
거리로 들어섰다. 바우는 숨이 찬데도 불길이 이는 곳을 향해 그냥 달린다. 불난 곳은 고대 같으면서도 그냥 저쪽이다. 여기저기 어둠 속에서들, 저 불난 곳이 어디냐고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과히 멀지 않은 곳에서 이번에는 총소리가 분명히 몇 방 들린다. 뒤이어 또 뭇사람의 아우성 소리가 들린다. 그 무서운 총대가 바우의 눈앞을 탁탁 막아선다. 그러나 어서 가자, 어서 가자.
바우는 큰거린 듯한 데로 들어선다. 여태껏보다 더 소란스러운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당와당 어둠 속을 달리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숨이 차 달리는 바우에게 이 큰거리가 그저 조용한 것 같기도 하다.
별안간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큰 불빛이 하나 쏜살같이 바우의 옆을 지나간다. 바우는 이 불빛 줄기 속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달리는 모양과, 그 그림자들이 삽시간에 커졌다 작아졌다 다시 커지면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바우는 자기가 지금 달리는 오른편에 불난 곳으로 질러갈 수 있을 듯한 골목이 하나 있는 것을 알아본다. 바우는 그 골목으로 꺾어든다.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바우는 무엇에 부딪혀 주저앉고 만다. 순간 부딪친 쪽에서도 어쿠쿠 소리를 지른다. 가마니를 진 사람이었다. 바우는 띵해가지고 가뜩이나 숨이 찬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다행히 저쪽 사람은 고꾸라지지는 않고 어둠 속에서, 눈깔이 삐었어? 한마디 소리를 꽥 지르고는 가던 길을 그냥 간다. 그제야 바우는 일어섰다.
몇 발 떼자 또 앞으로부터 누가 바우에게 다가오는데 어둠 속에 잘 보이지는 않으나 굳은 힘을 쓰는 것이 이 사람도 무슨 무거운 짐을 진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부딪치지 말아야지. 얼른 한쪽으로 비킨다. 그러면서 바우는 깜짝 놀란다. 지금 짐을 진 사람이 나온 집은, 막다른 곳에 자리잡은 바로 김대통 영감네 집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여길 왔을까. 너무나 뜻밖이었다. 가까이 가본다. 활짝 열린 대문과 중문을 지나, 안뜰에 촛불을 들고 비스듬히 광 쪽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바우가 여태껏 두 번 자기 동네에 온 것을 먼발치로 본 김 대통 영감이 틀림없었다.
“빨리빨리들 해라, 빨리들 해!……죽일 놈들 경찰서에 불을 질러?”
김대통 영감의 음성이긴 하나 옛날같이 위엄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숨죽인 다급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언제나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는 담뱃대만은 여전히 오른손에 들려 있었다. 그 대통이 허공에서 크게 흔들릴 때마다 촛불에 번뜩이곤 한다. 왼손에 든 촛불의 불자루도 꽤는 펄럭인다. 바람도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촛불이 또 전에 그렇게 으리으리하던, 그러나 지금은 그저 검기만 한 유리문에 비쳐 얼른거렸다.
김대통 영감이 앞을 좀 보려는 듯 촛불을 눈키 위에 올렸다 내렸다 한다. 그러는 촛불에 김대통 영감의 늘어진 콧잔등 한쪽이 빛난다.
“얘들아 좀 빨리들 해!”
더 큰 소리를 지른다.
광 쪽 어둠 속에서 또 가마니를 진 사나이가 김대통 영감의 앞을 지나 이리로 나온다.
그러는데 저쪽 어둠 속으로부터 웬 사람이 하나 김대통 영감에게로 조용히 다가와 불빛 속에 나타난다. 여인이었다.
“여보 이제 와서 괜히 이러다가……”
그러나 늙은 여인의 가는 말소리는 김대통 영감의 성난 목소리 때문에 끊기고 만다.
“잠자쿠 있어! 여자들이 뮐 안다구 참견여!”
늙은 여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어둠 속으로 되사라진다.
흔들리는 김대통 영감의 손에서 껌벅 촛불이 꺼진다. 바람이라도 분 듯이.
“얘 귀동아, 성냥 가져와. 죽일 놈들, 전기는 왜 끊어놓구…….”
귀동이가 여태 예 있었구나. 바우는 새로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귀동이! 그걸 자기는 예까지 와서 깜박 잊고 있었다니.
김 대통 영감 앞에서 성냥이 그어졌다. 그리고 성냥불빛에 나타난 것은 틀림없는 귀동이였다. 바우는, 귀동아, 하고 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그새 귀동이는 키도 꽤 컸고 밤이 돼서 그런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지금 귀동이의 얼굴엔 언젠가처럼 보조개가 패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귀동이의 얼굴은 떵거칠어져⁴ 있었다.
귀동이가 그은 성냥불에 촛불이 일단 켜졌는가 하자 다시 껌벅 꺼지고 만다.
“똑똑히 붙이지 못해?”
바우는 속으로 촛불이 꺼진 것은 귀동이의 잘못이 아닌데 한다.
다시 귀동이가 성냥불을 켰다. 흔들거리는 김 대통 영감의 손에 그래도 이번에는 불이 제대로 댕겨졌다.
그러자 김 대통 영감은 다시 어둠 속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어서 빨리들 해라, 빨리들!”
귀동이가 광 쪽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자기가 예 와 있다는 것도 모르고. 바우는 문득 다시 귀동이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가마니를 진 사람이 나와 또 바우 앞을 지난다.
더 가까이서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바우는 생각한다. 이렇게 낟알섬을 몰래 옮기는 걸 자기는 막아야 하지 않느냐고. 바우는 잠시 아버지 찾아갈 생각도 잊고 저도 모르게 작대기 쥔 땀 밴 손에 힘을 준다.
이때 좀 전에 가마니 진 사나이들이 사라진 쪽에서 몇인가 모두 짐을 진 채 잰걸음을 쳐 오더니 황급히 바우 앞을 잇따라 지나간다. 그리고 김대통 영감 촛불 가까이 이르자 앞선 사람이 숨찬 소리로, 큰일났세유, 이주임 나리 댁으루두 한 무리 몰려왔습니다,
하고는 김대통 영감의 말도 기다리지 않고 비틀비틀 광 쪽 어둠 속으로들 사라진다.
“아니, 그 댁에두?”
이런 입속말과 함께 김대통 영감의 저고리 소매가 자르르 떨린다. 그 크디큰 대통이 몇 번 촛불에 번뜩인다. 그러는 김대통 영감은 지금 자기가 들고 있는 촛불을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지 몰라하는 것 같았다.
김대통 영감은 비로소 생각난 듯 촛불을 입 앞에 당겨다가 헉헉거리는 입김으로 분다. 늘어진 코끝이 마지막으로 빛나고 껌벅 불빛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거기에는 다시는 그 흔들거리는 손도 그 크디큰 대통도 없었다.
-끝-
2016년 5월 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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