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립산문의 예술경계(2021.11.24.)
김우정
한국학술정보(주)(2006)
최립은 성리학적 규범 사유에 충실한 글을 주로 썼으며 우의적이거나 해학적인 글을 그다지 남기지 않았다.
형식적인 측면을 제외할 때, 최립 산문의 이런 특징은 고문을 표방한 대부분의 한문산문에 공통된 특징이다. 따라서 최립 산문의 문학적 성격에 대한 고찰은 그에게 부여된 고문사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형식미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하기도 하다.
김우정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3년간의 연수과정을 수료했으며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연구원과 한한대사전 편찬실 전문연구원을 역임. 한중 한문산문의 상호 관계와 문학성을 해명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서문
21세기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선조들의 문집을 뒤적이며 그 속에 내재된 세계를 고구하는 고단한 작업을 지속하는 것은 온고이지신이라는 거룩한 명언을 실천하려는 형이하학적인 차원을 벗어나 그 무엇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도(斯道, 유교의 도덕)가 땅에 떨잊고 時俗이 급변하더라도 퇴락한 사당과 종가를 보수하고 지키면서 선조의 사상과 정신을 실천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종손과 종부가 있어야만 하듯이 학문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21세기에 한국학의 한 분야인 한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대처로 떠난 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며 종가를 지키는 종손과 종부의 의연한 사명과 올곧은 자존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오랜 세월 연구를 해도 빛이 나지 않고 남들이 알라주지도 않으며 돈이 되지도 않는 분야의 학문을 청춘을 바쳐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 김우정 박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도 오랜 세월 묵묵히 한 길을 걷고 있다. 내가 늘 곁에서 지켜보면서 한 편으로는 그 기개가 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였다.
그동안 각고면려(刻苦勉勵, 대단히 고생하여 힘써 정성을 들임)한 결과를 이번에 상재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립의 산문은 자신이 살던 당대는 물론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평단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산문은 천년 이래의 절조롯써 고문사를 창도했다는 칭예와, 고인의 자구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는 貶毁(폄훼)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상반된 평가는 최립의 문학은 일언지페지할 수 없는 다원적 다층적 세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원적 다층적 세계가 내재된 최립의 산문을 오랜 세월 동안 치밀하게 고구하여 그 전모를 규명한 것이 바로 이 최립 산문의 예술 경계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저본으로 하고, 보론적 성격을 띤 논문들을 더하여 펴낸 것으로 최립 문학의 이해는 물론 조선전기 산문사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저자는 연부역강하고 학문적 내공이 탄탄한 만큼 앞으로도 산문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후일 언제인가는 반드시 한국한문산문사를 간행하기를 바란다.
내가 저자의 석사박사학위 지도교수라는 학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저자와는 크고 작은 여러 인연이 있고 또한 학자로서 대성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문운동의 창도자였던 昌黎(창려)한유는 師說에서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못한 것도 아니며,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어진(나은)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도 30여년 동안 지켜온 정든 연구실을 비워주고 정년퇴직할 날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가 않다. 움베르토 에코는 사람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자녀를 남기는 것과 책을 쓰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선생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자기보다 나은 제자를 두는 것과 명저를 남가는 것이라고 말하련다. 이 세상 어느 스승인들 자기보다 나은 제자, 이른바 청출어람을 기다리지 않는 스승이 있겠는가? 이 말로써 서문을 대신한다.
2006년8월
단국대학교 대학원 원장실에서 김상홍
책머리에
93년 봄으로 기억된다. 커다란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부유하는 먼지를 투과하며 물결처럼 일렁이던 교탁 앞에서 서 계시던 은발의 선생님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4학년이던 나는 그날 한문학사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당신께서는 영조조의 문인인 황경원의 고문에 관해 언급하며 한문학 전공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도처에 산적해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병을 앓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교정을 떠나신 뒤론 그저 이따금 찾아 뵙고 안부나 여쭙는 것밖에 제가 된 도리를 못하고 있지만 그날의 강의는 이후 십수 년간의 내 학문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알면 알수록 어렵다고 했던가. 대학원과 서당을 동시에 오가던 무렵, 황경원의 고문을 연구해 보겠다던 막연한 계획은 고문이란 용어가 문학적 범주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속에서도 읽힐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하면서 정조의 문체정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황경원의 고문을 이해하기 위해 읽기 시작한 정조의 홍재전사가 석사학위논문이 되었고, 조선후기 고문사에서 정채로운 금자탑을 쌓은 여러 문인의 작품과 또 그에 대한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를 접하며 마침내 조선중기로까지 소급해 올라가게 되었다.
최립이 활동했던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은 한국산문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전기에 이르기까지 문필생활의 중심은 줄곧 한시에 있었다. 문학론이 곧 시론이고 시론이 곧 문학론이었던 당시에도 고문의 범주에서 논의할 만한 작품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문의 체제와 법식, 주제와 형식에 대한 의식적 자각의 결과물이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소박한 수준에 머문 것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이 개국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지식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관각문인들의 부섬하고 화미한 문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경향에 반발하여 출현한 것이 이른바 고문사창도로 일컬어지는 16세기 후반의 복고적 문풍으로, 최립은 그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고문의 문학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했던 최립은 당송문에 대한 치밀한 학습고 연찬은 물론 진한문의 체식까지 폭넓게 흡수하여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굴한 문체를 창출하였다. 한 편의 시를 짓기 위해 퇴고를 거듭했던 시인처럼 산문을 지을 때에도 일자일구도 천근하거나 범속하지 않아 옛날 작가들의 법도에 부합하도록 고심했으며, 초고를 세 번 네 번 고치지 않고는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글은 구두를 떼기 힘들만큼 난삽하여 요즘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낯선 것이었다. 때문에 최립의 글은 당대의 문장가들은 물론이고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평가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산문 비평이 대개 중국의 문장가와 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상기할 때, 최립에 대한 후인들의 관심은 매우 이례적이라 하겠는데, 흥미롭게도 그 비평의 내용이 극과 극을 오가고 있다. 이를테면 허균과 같은 이는 최립의 문장을 천년 이래의 절조라고 상찬하였는가 하면 남극관과 같은 이는 고인의 지구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였다. 이처럼 상반된 관점이 병존한다는 사실은 전범적 택스트의 범주와 학습 방법, 주제와 내용, 문체와 수사 등에 대한 시각차가 그만큼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거니와, 한편으로는 제가 비평만으로는 고문의 문학성을 온전히 이해할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최립 산문에 관한 연구는 한문산문 연구자들이 당면한 세 ㄱ지 문제-내재적 요인보다 외재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수용론적 시각 조선후기 몇몇 고문가의 시각에 의존한 비평 중심적 연구 경향 주제의 심오함이나 내용의 심각함으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고자하는 연구 풍토-에 대한 반성적 검토인 셈이다.
고문에 관한 논의는 산문에 관한 인식의 변화가 창작의 영역에서 실천적으로 모색된 17세기 이후 본격화하였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조선 문단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단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소위 당송팔가 복고파 당송파 등의 문학이 조선의 문단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그만큼 심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고문가들이 그저 중국의 이론과 작품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모방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이는 흔히 전후 칠자의 수용과 맞물려 이해되는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복고파의 이론이 신선한 지적 자극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주체적 관점에서의 비판과 대안적 창작 활동 또한 함께 진행되었다. 최립은 이와 같은 조선중기 문단의 경향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가로, 당시의 고문사가 전후칠자의 수용으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조선전기 이래 문단 내부의 점진적 전개 과정 속에서 탄생된 것임을 보여준다.
종래의 한문산문 연구는 대부분 심오한 주제와 심각한 내용을 담은 작품에 주목하여 그 사유양상과 문단의 경향, 문화적 담론을 읽어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 역시 문학 연구의 주요한 방법론인건 분면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풍토가 고착화할 경우 문학 작품의 가치는 역사와 철학의 범주 아래에서 그 의미를 지니게 되며, 문학성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우의나 풍자와 같은 의미지향적 요소에 치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수많은 고문가들의 관심사였던 문체나 수사는 외면한 채 주제나 내용만으로 문학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태도를 과연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문의 표현미를 확인하는 일은 방대한 독서량과 예민한 감각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몸 없는 마음이 있을 수 없고 마음 없는 몸이 있을 수 없듯이 고문은 내용과 형식이 한 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같은 문제의식 송에 집필된 이 책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인 간이 최립 산문 연구를 저본 삼아 자구나 문맥을 다듬고 보론적 성격을 지닌 논문 두 편을 덧붙인 것이다. 15세기 기서문의 양상과 윤근수 산문의 성격을 밝힌 이 두편의 논문은 최립 산문의 문예적 특성을 주제로 한 이 책의 제목과 직접 관계되지는 않지만, 이 시기를 전문적으로 다룬 몇 안 되는 논고일 뿐만 아니라 최립 산문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긴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보론으로 덧붙였다. 논지의 전개상 서로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별도의 맥락과 의미를 지닌 글이기에 생략 없이 전재하였다.
심각한 지적 담론이 각광받는 풍토에서 자칫 형식주의로 오해될 수도 있는 수사나 문체를 연구 주제로 삼는 데에는 많은 용기와 인내가 필요했다. 그리고 행간에 숨겨진 의미와 표현미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 해를 고심했지만, 과연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읽어냈는지 주저된다. 이처럼 설익은 글임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상재하는 것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연구자들의 질정을 구하고자 함이 한 가지 이유이고 학자로써 천상 지고가야 할 궁핍을 감내해준 부모님과 아내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함이 또 한지 이유이다. 돌이켜보건대, 93년 그날의 강의를 해주신 양곡 박천규 선생님과 학자 이전에 올곧은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신 고 청명 임창순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다. 늘 격려하고 질책해주신 설촌 김상홍 선생님과 정재철 선생님, 그밖에 공부를 하며 인연을 맺게 된 다른 여러 선생님들께도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06년 여름 유난히 긴 장마의 끝머리에
지양산재에서
저자 삼가 쓰다
Ⅰ 서론
Ⅱ 최립 산문의 유형별 특징
Ⅲ 최립의 도문관과 산문의식
1 본말일관의 도문관
2 산문의 전범과 규율에 관한 인식
Ⅳ 최립 산문의 수사
1 섬박하고 주밀한 인용과 변용
2 기발하고 논쟁적인 의론의 창출
3 간험하고 세련된 편장의 운용
Ⅴ 최립 산문의 문체
1 기: 일탈과 전도
2 간: 정련과 함축
3 고: 규범과 전형
Ⅵ 최립 산문의 주제의식
1 성리학적 사유체계의 문학적 형상화
2 신분적 질곡과 작가적 욕망의 투사
3 회화감평에 반영된 심미적 경계
1)기운생지와 사의전신
2)심신융회와 쾌요
3)회화감평의 문학적 전회
Ⅶ 최립 산문의 문학사적 위상
Ⅷ 결론
보론
15세기 기서문의 성격과 의의_괴애 사가 점필재를 중심으로
월정 윤근수 산문의 성격
참고문헌
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