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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 5, 29-29)
시골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그 끈질기고 왕성한 잡초들 사이로 여기저기 피어나는 청초하고 어여쁜 들꽃들이 있습니다. 나리꽃이며, 구철초며, 개망초며...
비싼 값의 씨앗을 따로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힘들게 허리 굽혀가며 모종을 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절기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사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셀수도 없이 많은 야생화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지만, 가끔 걸음을 멈추어 딱 한 송이 들꽃만을 바라봅니다. 그 자태가 얼마나 예쁜지, 그 작은 얼굴이 오목조목 갖출 것 다 갖추고,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각자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표정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때로 한심하고, 정말 못 나 보이고, 때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지만, 하느님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비슷하고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하느님 시선으로 바라보실 때는,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이 다 소중하고, 다 특별하며, 다 나름 사랑스럽습니다.
남은 날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섭리하시고 돌보아 주실 터인데, 미리 앞장서서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해야겠습니다.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오늘은 자비하신 주님의 충만한 현존 안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생각을 끊으면 걱정도 끊긴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 ‘마음속에서 걱정을 몰아내는 법’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강연을 많이 했던 데일 카네기가 더글라스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강연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글라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비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 비극은 다섯 살짜리 딸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아내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를 물고 참았습니다.
하늘은 또 하나의 생명을 선물해주었지만 그 아이도 역시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휴식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처방한 약을 먹어보고 여행도 떠나보았지만 그의 슬픔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친척들 중 한 조카아이가 자신에게 배를 만들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힘도 없었지만 더글라스는 조카를 위해 장난감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배를 만드는 동안 슬픔에서 잠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안의 작은 소일거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고쳐야 되는 목록이 무려 242개였고 2년 동안 자신의 손으로 모두 수리를 하였습니다.
“걱정할 틈이 없다.” 이 말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하루 18시간 일을 했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입니다.
전쟁 중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 온전히 뛰어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웅평 대위가 넘어올 때 진짜 전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 집이 미군 비행장 옆에 살았기 때문에 전투기들이 뜨고 사이렌과 방송이 나올 때
어머니는 전쟁 나면 어디로 찾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정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그 당시 저는 실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던 윈스턴 처칠보다 전쟁에 대한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전쟁은 나지 않았습니다.
걱정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은 마귀가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귀가 있는데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걱정을 하게 돼 있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으려면 생각을 접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됩니다.
대학에 떨어질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에 몰입하면 됩니다.
직장에서 잘릴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에 열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절대 잘리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하며 아무 일 안 하는 사람이 잘립니다. 걱정은 일이 잘되게 만들지 않고 그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걱정이 믿음이 되고 믿으면 믿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때 잘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던 같은 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은 왠지 잘릴 위험성 있는 것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잘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부 안 되면 누가 되겠어?’ 이 생각은 교만이라기보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리면 프란치스코처럼 살지 뭐.’라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니 크게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걱정해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일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대신 걱정하라고 맡겨버리라는 뜻입니다.
걱정은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나를 믿으면 생기는 것이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사로잡히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리고 안 돼봐야 별게 없습니다.
우리는 환상을 만들어놓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 그 사라지는 것을 잡기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장 크게 걱정하게 만드는 적은 자아입니다.
생각을 끊어야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이 세상입니다.
그것만 배워 가면 됩니다.
믿고 노력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6,24-34: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인간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용도가 사악하여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24절) 하신다. 이 재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력을 발휘하여 인간을 온통 지배한다. 이 마몬은 인간이 섬겨야 할 상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려야 할 종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재물에 압도되어 종이 될까 봐 제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마라.”(25절) 하신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해는 재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재물 때문에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그 재물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 하신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율법을 주셨고,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주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우리의 궁극적인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하므로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이 완전한 행위가 될 때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알맞을 때 얻게 된다. 열심히 선행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 하신 것이다. 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떤 야구선수가 한 기자와 인터뷰했습니다. 이 선수는 오랜 시간 야구를 한 베테랑이었는데, 기자는 관중석에서 상대 팀 팬들이 야유를 많이 보내지 않냐면서 이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 그런 말을 듣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기자는 그렇게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냐면서 다시 그 비법을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지는 겁니다.”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는 방법이 아닌 이기는 방법만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힘든 훈련도 이기기 위한 것이고, 이기기 위해 때로는 미신과 같은 징크스를 만들어 실천하기도 합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은 2만 개가 넘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역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야유에 흔들린다면 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야유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놀리거나 험담의 말, 부정적인 말 등…. 과연 이 말을 듣고 흔들린다면 삶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우리를 향해 하시는 따뜻한 말씀이었습니다. 걱정은 참으로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 자기 명예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각종 말과 행동에 대한 걱정도 너무나 큽니다. 이런 걱정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신 있게 살 수 없습니다. 이기는 삶이 아닌, 지는 삶입니다.
이기는 삶은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에 중심을 두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주님께 중심을 두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뜻에 중심을 두는 삶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영적인 부자와
육적이 부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강이 흐르고 있다네.
육적인 부자는
영적인 부자를
불편해하고
영적인 부자는
육적인 부자를
불편해한다네.
하느님과 재물이라는
경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함없이
갈등의 꽃이 피고진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삶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감사할 줄 모르면 그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슴에 하느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안에 무엇이 담겨있느냐에 따라
훌륭한 잔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 같은 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잔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비싸고 화려하지만 속이 빈 그릇보다는
오래되고 낡은 싸구려 잔이라도
그 안에 지금 내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들어있는 그릇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을 구분해 줍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마태 23,35 참조).>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4,17-25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