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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묵상글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사랑과 자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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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과 자유
우리 시대는 혼밥, 혼술의 혼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도 아니 혼족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혼자 사는 족속 또는 혼자 사는 가족이라는 뜻이지요.
제가 한심해하는 것은 신생아 수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는 인구 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 걱정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세태이니 아무 가정이라도 많아지면 좋겠다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성가정 운운하는 것이, 과연 통하는 얘기일지
의문이 들면서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패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성가정의 의미를 제대로 또 적극적으로 살아,
다시 말해 우리 가정을 먼저 복음화하여 온 가정을 복음화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가정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널리 풍기는 것이지요.
가능하다면 성가정 TV도 만들고 그럴 수 없다면
‘나 혼자 산다’는 프로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기존 평화방송에 마련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금을 모으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받아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고 홍보도 하는 사업도 벌이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많은 신자 가정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성가정을 모범 사례와 희망 공동체로 매체를 통해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가정이 모범이 될 성가정입니까?
그것은 삼위일체 공동체와 요셉, 마리아, 예수의 성가정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성령의 사랑이 가정의 중심이 되는 가정입니다.
방금 저는 성령의 사랑을 언급했는데
성령의 사랑을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다양한 가운데서 일치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일치가 조화를 이루고,
한마디로 사랑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유는 최고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인데
그러나 우리는 조화를 이루는 데 보통 실패하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보통은 자유를 선택하고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데 혼족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자유롭고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자유롭기를 자기가 바라는 만큼
상대에게도 자유를 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바라는 사랑을 하기에 실패합니다.
나는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너는 내가 바라는 너이길 바라는 겁니다.
꼭 대가를 바라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면 너도 나를 사랑하기를,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면 너도 그만큼은 사랑하기를,
내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너도 그런 사랑을 하기를,
내 사랑을 받은 만큼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어떤 때는 그 이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고약한 바람도 있습니다.
나만 사랑하기를,
내 곁에만 있기를 바라며 사랑의 구속을 하고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슬플 때는 위로가 되어주고,
내가 힘들 때는 힘이 되어주고,
만사 귀찮을 때는 적당히 거리를 떨어져 있어 주고,
내가 말할 때는 언제나 맞장구쳐 주고 수시로 사랑을 표현해주기를 바랍니다.
상대방도 슬프고 힘들 때가 있는데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라는 것이 모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성령의 사랑을
가족 서로 실천하는 성가정이 많아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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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여 이를 본받고자 제정된 축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축일의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도록 권고 하고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아 가정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가정은 인간의 보금자리이며 안전한 안식처요 친교를 이루는 근원적인 장소입니다. 가정은 요람이고 신앙인들에게 가정은 신앙을 깨우치는 가장 우선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주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은 인간 관계안에서 사랑의 경험이 솟아나는 첫번째 근원입니다. .
가정에서 어린이는 하느님을 알기전에 부모를 압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좋든 나쁘든 자신의 부모로부터 갖게 된 많은 개념적 지식과 정서적 반응에 의해 자신의 부모를 알아 보았던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어린이가 일생동안 하느님에 관한 것을 배우는 과정의 출발점이 되는 장소는 가정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 결손이 있게 되면 아이는 십중팔구 그 경험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그로 말미암아 비현실적인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또한 부모는 과잉보호나 무관심의 양극단에 편중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어린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나오는 결과이지만 특히 유년기에 부모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그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이가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하느님과 직접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부모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는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리적으로 전이는 어린이가 부모한테서 처음으로 체험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과 반응으로 하느님을 볼 때 일어납니다. 어린이는 부모한테서 처음 느꼈던 것을 하느님에게로 전이시킵니다. 어린이는 하느님을 알기전에 부모와 보호자를 압니다.
어떤 경우이든 어린이는 하느님을 주관적으로 인식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신앙의 핵심이 될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형성됩니다. 어린이의 인간적 발달과 종교적 발달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발판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잘 보살펴 주는 착하고 따뜻하고 애정이 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정의 최고통치자가 될 때 그 가정은 봉쇄수도원이되고 각자의 지위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수련장이 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각자가 직장과 사회에서 맡겨진 책무를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실행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수사와 수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 종교인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예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참다운 인간성을 지닌 사람은 하늘을 자기의 부모와 같이 섬기고 자기의 부모를 하늘과 같이 섬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이처럼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기도는 단순한 것이 좋다. 가장 단순한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그냥 단순하고 간절하게 ‘예수님 사랑’하고 마음으로 되뇔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오히려 두뇌를 피곤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정신을 사용하기에 자기 착각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기도는 호흡과 함께 ‘구세주 예수여 불쌍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 기도를 되풀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신이 하느님께 집중되고 하느님과 하나됨을 체험하게 된다. 기도 중에 가장 쉽고 빠르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야훼 하느님, 마라나타, 예수 사랑, 예수 평화, 압빠 하느님 등 하느님의 이름을 호흡과 함께 매일 같이 계속적으로 불러 보라. 여러분은 금방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감정이 치유됨을 발견할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이 깊어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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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집회서>(3,2-6,12-14)의 말씀과 <화답송>의 <시편>(128,1-5)의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는 온전한 부모 공경으로 이어지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콜로 3,12-21)은 세속적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을 보여줍니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와 가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아들 예수님의 봉헌을 통한 율법에 충실한 마리아와 요셉 가정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가정을 “성 가정”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주 특별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이나 혈육으로 맺어진 가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곧 ‘영’으로 맺어진 가족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육신의 남편과 아내 되기를 스스로를 포기함으로 맺어진 부부인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로 혈육으로 묶여있지 않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잃은 아들을 찾아 성전에 온 부모에게도, 소문을 듣고 말씀의 선포 현장으로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도,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도, 십자가 아래서도 어머니의 아들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혈육을 떠나 ‘영적인 성가정’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세례를 받은 ‘신앙인의 가정’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이 ‘성가정’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가족’을 이룰 때 모름지기 “성가정”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애착은 때로는 오히려 ‘영적인 가족’을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들이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이익을 도모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자애심’과 ‘이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인 배타적인 ‘가족 이기주의’를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족’은 동시에 벗어나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씀과 같이, 성모님은 ‘성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으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고,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 마리아, 요셉 사이에 그 어떤 다툼도 불평도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혹은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성가정이나, 성수도가정이 될 수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성가정이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성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란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거나 가난하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성가정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 2,35)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해줍니다. 곧 부모가 아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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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간직하시고, 나누며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우리 성당 주보는 성가정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 평화, 구원을 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면, 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충실히 하였고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 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의로운 아버지가 요셉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었으나,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으로 복되신 분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렇게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고,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상대를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좌지우지하려고 참견하면서 불화를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입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3-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콜로3,18-21)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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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이 무엇이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덕분에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있었고, 매주 부르클린 미사도 다닐 수 있었고, 좋아하는 산보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성지순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과달루페,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한 번도 가기 힘든 성지순례를 6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좋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팬데믹을 함께 했던 사제들이 있습니다. ME와 꾸르실료의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부르클린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행복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가정은 행복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지만 자칫하면 율법에 의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결혼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성사된 가정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했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탄생했습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 아기들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의 가정은 이집트로 피난 갔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 어렵게 성사된 혼인, 이집트로의 피난으로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가정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입니다. 성전을 지키던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아기는 세상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트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 아기의 어머니의 가슴은 예리한 칼로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시메온의 예언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 되던 해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갔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마리아가 ‘얘야! 우리가 너를 찾았단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제가 있어야 할 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삶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와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와 친척들을 만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어머니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이런 가정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 일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었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꿈에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맞습니다. 교회가 오늘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 모두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들 모두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정, 이웃을 돕는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주님의 사랑이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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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상 중에 ‘성가정상’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거나 만들 성물이지요. 이러한 성물을 보고 있자면 예수님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메온은 마리아의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누가 기분 좋겠습니까? 누가 그 자라에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시메온의 말은 정확한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쓰러지게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탐욕을 가진 이들, 하느님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삶을 평안히 살았던 이들, 사람들을 속이는 이들을 쓰러트리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으키셨습니다. 희망이 없는 이들을 일으키시고, 아픈 이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 또한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쓰러트리고 일으키는 과정 가운데 반대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자들 때문에 죽음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이것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가슴은 아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기리고 있는 성가정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참다운 가정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모순인가요?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고 예수님을 낳은 후부터 언제나 하느님께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 셨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고통과 아픔은 서로를 감싸 안아주게 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게 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게 합니다.
고통과 아픔은 누구나 어느 가정이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은 가정,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내 걱정만 해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면 다시금 성모님과 요셉 성인과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놓은 이분들의 마음을 담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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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을 떠나보냅니다.
우리는 상실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늘 무언가를 떠나보냅니다.
꼭 인생은 떠나보냄을 연습하는 과정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떠나보낼 때까지 말입니다.
이제 23년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젊음도 떠나보내고, 사랑도 떠나보내고, 건강도 떠나보내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어떻게 보내는 것이 잘 보내는 것인지 몸으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떠나보내는 연습이 되어 있어야
잘 만날 수 있고, 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즐겁기도, 힘겹기도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했던
23년을 잘 떠나보내고
24년을 잘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올 한해도 고생하셨습니다.
올 한해도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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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가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는 기타입니다. 지금도 강의 중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기타를 치면서 함께 성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 기타는 모두 6개의 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기타 줄을 잘 맞춰야 합니다. ‘E(미)-A(라)-D(레)-G(솔)-B(시)-E(미)’의 순서대로 음을 맞춰야 연주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만약 음 맞추는 것이 귀찮다고 또 음을 잘 모르겠다면서 아무렇게나 줄을 맞추면 어떨까요?
음이 잘 맞지 않는 기타, 또는 기타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의 기타에서는 좋은 소리가 날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불협화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리만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타’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타를 잡고 기타 줄을 튕기고 있는 사람 탓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미워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왜 자기에만 나쁜 것을 주시느냐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 나쁜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은 우리의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행동하지 않고 잘못된 생각만 하는 ‘나’의 잘못이 더 크지 않을까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이 자리에 시메온 예언자, 또 한나 라는 예언자의 모습을 봅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든 분은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 또 오랜 기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 모두 이 기다림의 끝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다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고, 그래서 영적 일치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다림 안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도 이 성가정에 함께할 수 있었음을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를 통해 꺠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탓하느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만을 바라보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고유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성가정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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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류가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조건 없는 사랑에서 나온다. 그 힘은 우리가 한계나 조건 제한 없이 무언가를 사랑할 때 발휘한다(토니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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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키엣 대주교님.
양심과 믿음, 참된 봉헌
부모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살아가며 꼭 필요한 인성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귀절은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가정은 전인교육을 시키는 교육의 장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어린 예수님의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과 믿음, 도덕을 성장시키는 교육의 장이었습니다. 성가정에서 이루어진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양심에 대한 모범
마리아와 요셉은 당신 자녀를 스스로 봉헌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스스로 사람의 율법에 따르셨고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역시 스스로 사회의 규율을 따르셨습니다. 자녀를 봉헌한다는 것은 겸손이며 밝은 양심의 표현입니다. 누가 강요하고 통제해서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법을 지키고 따를 때 밝은 세상이 됩니다. 세상 모두가 양심을 따르고 자신의 의지를 지키며 살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밝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모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한 믿음과 신념이 필요합니다. 성가정이야말로 믿음의 가정에 대한 모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하셨고 그 뜻을 언제나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되새겼습니다. 성요셉 역시 마리아와 같이 살아야 함을 마음 깊이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주님께 순종하고 유일한 아들인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참된 봉헌의 모범
봉헌의 시작은 진실한 믿음과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성모님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쳤고 아브라함은 언덕 위에서 이삭을 바쳤습니다. 자신을 바치는 것과 자녀를 바치는 것은 다릅니다. 자녀를 봉헌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봉헌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과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녀는 곧 주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계획안에 들어가 주님의 사업을 완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양심과 믿음, 봉헌의 의미를 아는 것은 세상이 변할수록 더욱 필요한 교육이라는 생각이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보다 양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밝혀지지 않은 작은 의혹에도 의심을 하고, 나와 상관없는 의혹에도 동참하며 묘한 쾌락을 느끼는 세상입니다. 타인의 뒤에 서서 세상과 어느 특정인을 조롱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가족들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과 같은 양심과 믿음, 봉헌의 참의미를 되새기는 가정이된다면 우리는 현대의 새로운 예수님들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는 "인류의 미래는 각 가정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미래는 청소년들에 달려있고 그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가정이라는 주님의 정원에 주님께서 뿌려주신 사랑의 씨앗입니다. 가정이라는 밭이 아름답고 좋은 땅이라면 인류의 미래는 더 많은 것을 수확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가정 하나 하나가 나사렛의 성가정을 닮아 살아간다면 우리 가정 모두는 새로운 사회의 복음이 되고 현세의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나자렛의 예수, 마리아, 요셉이시어, 저희가 성가정을 닮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한 해를 보내며 지난 날을 돌아보면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시 오신 아기 예수님은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가야 할 힘을 주십니다.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았습니까?
2. 봉헌과 믿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3. 성가정의 사랑과 믿음, 봉헌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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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의 참 좋은 치유와 구원의 선물-
오늘은 2023년12월31일 마지막 날이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2023년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시작하여 2023년12월31일 성가정 축일로 한해를 마감하니 감개무량합니다. 불암산(佛巖山) 정상에 올라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만세!”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참 아름답고 고마운 성가정 축일입니다. 바로 제대앞에 아름답게 설치된 소박한 성탄구유 장식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물론 성가정 교회 공동체를, 더 나아가 하나의 인류 가정 성 가정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 싶습니다.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노래한 찬미가와 너무 잘 어울리는 제대앞 성가정 모습입니다.
“나자렛 오막살이 순박한 예배, 얼마나 감미로운 기억일런가.
나자렛 예수님의 고요한 생활, 그생활 기억하며 노래들하세.”
강론준비중 이어지는 5절까지 내용을 읽어보니 정말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성가정 공동체의 진수를 만난 듯 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야 말로 모든 교회 공동체의 원형임을 깨닫습니다. 흡사 혼돈에 빠진 세상 바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노아의 방주”같은 성가정 교회 공동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오늘 끊임없는 노래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자 얼마나 행복되리”
그러니 주님의 집, 성전에서 드리는 미사공동전례는 얼마나 행복된지요! 삭막한 인생 광야에 오아시스같은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주는 미사전례은총입니다. 공동체의 보금자리 품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공동체의 기초가 가정공동체요, 사람들이 날로 거칠어지고 사악해 지는 근본적 이유는 보금자리 가정 공동체의 파괴에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많이 가난했지만 가정집이 있었고 집에는 어김없이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이, 손길이, 품이 있었습니다. 가정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작금의 시대에 하느님께서 교회는 물론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온 인류를 품에 안아야할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 가정 공동체만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고 있는지요! 얼마전 스크랩한 두 기사내용을 소개합니다.
“가난의 늪에 빠진 한국 노인들. 한국 노인 빈곤율이 여전히 경제협력 개발기구 오이시디 회원국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기준 66살 노인 10명중 4명이 빈곤 상태였고, 나이가 많을수록 빈곤율도 더 높았다.”
“국민 10명중 3명이 ‘나는 고독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설문 조사에서 답했다. ‘가족-친척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채 홀로 살다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시간이 흐른뒤에 발견되는 죽음’으로 정의되는 고독사가 남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사회가, 나라가 성가정 역할을 해야 할 시대가 도래한 것이요, 우리 가톨릭 교회가 성가정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줘야할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제가 개탄하고 혐오하는 우리의 병든 사회의 단면은 반려견들보다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성가정교회공동체에 반려견들도 속하지 않는가 하는 참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귀여운 아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려견들이 있다는 현실이 몹시 역겹고 불쾌합니다. 개는 개답게 키워야하지 않을끼요? 얼마전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읽은 두 말마디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인데 이제 교회는 명실공히 온 인류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할 시대에 돌입한 듯 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수 없다.”
성 치프리아누스의 말씀인데 이젠 모든 인류가 교회를 어머니로 삼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고 살아야할 시대에 돌입한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모두 한 성가정교회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어머니 성가정 교회 공동체인지요! 그렇다면 참 좋은 성가정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성향이 같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몇날은 살 수 있어도 평생 하느님 중심없이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모범인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공동체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도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 아드님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성전을 찾았으니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 자리에서 만난 시메온과 안나입니다. 시메온이 마리아 성모님에 대한 예언이 섬찍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인지요! 결코 온실속의 안락하고 편안한 온실같은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자 환상입니다. 문제없는 이상적 유토피아 공동체가 아니요 속된말로 참 팔자사나운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치유와 구원이 되는지요! 고통과 시련중인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바로 그중심 자리에 성모님이, 예수님이 계시고 바로 거기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향한 공동전례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비로소 성가정교회 공동체를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니 하느님의 총애 덕분입니다.
둘째, 사랑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의 아름다운 말씀에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 성립을 위한 대헌장같습니다. 말그대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리나오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를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입니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그리고 평화와 감사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평화, 감사 등 참 좋은 모든 덕목이 사랑안에 다 수렴됨을 봅니다.
새삼 사랑도 선택이자 부단한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사랑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값싼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은총과 더불어 주님 “사랑의 전사”로서 분투의 노력을 다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훈련에 결코 좌절함이 없도록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끝까지 온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서로의 구체적 관계에 충실한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최고의 그러나 미완의 예술작품이 공동체요, 공동체는 관계의 예술입니다. 부부간, 부모와 자녀간, 노부모와의 관계에 깨어 섬세하게 응답해야 함을 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혜로운 조언을 통해 일방적인 권위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쌍방향의 보완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부모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들의 기를 꺾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이며,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배려하는 사랑, 순종하는 사랑입니다. 새삼 순종의 사랑 역시 부단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영성훈련의 열매가 자유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죽을때까지 계속될 사랑의 훈련에 지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노부모를 대하는 집회서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가난의 늪에 빠진, 가난과 병마와 싸우는 불쌍한 한국 노인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지며,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한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비단 노부모뿐 아니라 사회 일반 노인들에 대한 자세도 이렇게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어린 자녀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노부모한테 잘한 분들치고 잘못된 자녀들을 제가 본적이 없습니다. 정말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가슴의 품은 날로 넓어져 모든 인류를 품에 안아야 할 것입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이니 말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충격도 잊지 못합니다. 2월달에 피정왔다가 다시 12월에 피정온 개신교 목사님입니다. 면담이지만 고백성사처럼 해달라기에 경청한 후 말씀처방전에 강복을 드렸고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복사본 책도 선물했습니다. 신자가 아니면서 미사신청을 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온세상, 온인류, 온피조물에 활짝 열려있는 위로와 구원, 치유의 “힐링(healing) 센터”와 같은 가톨릭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미사 참여보다 더 좋은 힐링도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전인적 치유의 구원과 더불어 이런 성가정 교회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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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여 성가정>
하느님 품듯
너를 품는 나와
하느님 품듯
나를 품는 네가
하느님 품에서
나와 너 너머
우리로
그리하여 성가정
나는 나이기에
네가 되고
너는 너이기에
내가 되어
너와 나 서로
따로 또 같이
우리로
그리하여 성가정
나는 나임에도
네가 되고
너는 너임에도
내가 되어
너와 나 사이
서로 허물어
우리로
그리하여 성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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