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들은 새로운 정신을 찾아나서면서 수장된 고전을 뒤적였다.
인문학 열품은 이탈리아로 퍼져 나갔고, 이태리를 넘어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에 많은 학자나 예술가 등이 등장하나 생략합니다. 대표적으로
건축 – 부르넬레스키(두오모 성당 돔 건설자)
조각 – 기베르티, 도나텔로
회화 – 조토 ,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등등(이름 앞에 프라가 들어 가면 신부이다.)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이 사후세계에 관심을 가진다.(상업은 신의 아들이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방법을 찾아서 교회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돈이 많은 상인들은 오래 전에 지어진 성당이나 수도원에 투자했다. 댓가로 성인 곁에 묻히고자 했다.(성당이나 수도원은 성인의 무덤이다.)
교회는 많은 돈을 받고 예술가나 장인을 고용하여 성당을 꾸몄다.
르네상스 문화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전 유럽으로 퍼졌다.
교회와 부자의 탐욕이 손을 잡자 교회는 더욱 부패와 타락의 구덩이에
빠졌다.
수도원 운동은 부패의 반작용으로 나타나서, 활발하게 전개하여 스스로 개혁을 하기도 했다. 삶을 다잡아 주던 종교윤리가 실종되자 일반인들은 종교에서 멀어지고, 무신론자가 증가했다. 신앙이 쇠퇴하고 도덕성이 무너지자 교회도 개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덕성의 타락에는 신부들의 타락도 심각했다.
사제들은 돈벌이의 수단으로 거짓 성 유물을 선전하고(우리 성당에는 성 누구의 손이 보관되어 있다는 등), 가짜 기적을 일으키며,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의 부도덕한 행위가 많았다.
(죄 많은 서민의 입장에서 돈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
(시민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판매하는 기적의 유물 값도 돈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는 성직자의 간통, 성직 매매, 여러 탐욕스러운 행위 등이 많아서
’사탄에 사로잡힌 이‘라고 표현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1. 알렉산드르 6세(1492-1503)
부패, 악덕으로는 1위에 해당하는 교황이다. 앞에서 공부해서 생략합니다.
2. 율리우스 2세(1503-1513)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면서
면죄부 판매, 성직 매매 등을 했으나
미켈란젤로와 조각상 계약으로 유명하다.
3. 레오10세(1513-1521)
메디치 가 출신으로 메디치 가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힘썼다.
베드로 성당 개축을 하면서, 면죄부 판배, 성직 매매를 계속했다.
종교생활은 경건하게 했다.
루터를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서 종교개혁을 키웠다는 평도 듣는다.
이때는 칼 5세와 프랑스아즈 1세가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이다.
-> 프랑스아즈 1세와 가까웠으나, 칼 5세에게 돌아서자 프랑스아즈 1세가 침임했다.
(*라파엘이 그린 초상화가 있다.)
4. 클레멘스 7세(1523 – 1534)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레오 10세의 4촌 동생이다.
레오10세가 추기경을 시켰고, 1523년에 교황으로 선출
합스부르크 가(스페인)와 프랑스(프랑수아즈 1세)의 대립 때 칼5세 편을 들다.
칼5세가 로마로 진격하여 쑥대밭을 만들고
피렌체도 함락시켜(1530), 메디치 가를 쫓아내다.
칼 5세의 요구로 종교개혁자를 억압 – 루터는 독일 영주의 보호를 받았다.
(이때 영국의 헨리 8세의 이혼 문제가 있었다.)
종손녀 카트린느를 프랑스 앙리 2세(이때는 황태자)에 정략 결혼 시킴.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앙리 2세가 죽자 섭정을 하면서 수많은 신교도를 학살했다.
프랑스에 위그노 전쟁을 유발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지금도 프랑스인들은 그녀를 ’그년‘이라고 부르면서 저주를 퍼붓는다고 한다.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 ∼ 1498)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설교가·종교개혁가이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피렌체 시를 개혁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탈리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 사보나롤라는 1482년에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회에 파견되어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고, 그 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설교를 했다. 1490년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당시 지배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하고, 교회와 속세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피렌체를 몇 년 간 통치했다.
**시뇨리아 광장(장Piazza Della Signoria)에 있는 사보나롤라를 처형한것에 대한 기념판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입해 메디치가의 통치가 무너지자, 샤를 8세의 침략을 예언했던 사보나롤라의 권위가 높아졌다. 사보나롤라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망명 후에는 중간계급을 주체로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아 피렌체에 귀족 정치를 배격하고 신정 정치적 민주정을 도입하고, 종교개혁을 실현하려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1495년에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에게 로마에 와서 그가 주장하는 예언 능력을 보이라고 요청했다. 교황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에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사보나롤라는 1496년에 렌트에서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교황은 불복종의 죄를 물어 그를 파문했다.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교황도 무지하게 욕했다. 그래서 미운 털이 박혔다.)
사보나롤라는 시 당국에 굴복해 교회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화형당했다.
16세기 르네상스의 미술·문학·사상(思想)에 미친 영향은 크다.
(알렉산드르 6세는 최악의 부패 교황임으로, 사보나롤라가 교황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황은 자신을 비난한다고 파문한다.)
루터가 불을 붙인 종교개혁이 전 유럽에 들불이 되어서 퍼져나갔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엇다.
7. 프랑스의 이태리 침입
프랑스는 영국과 100년 전쟁에서 최종 승리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샤를 8세는 상비군을 거느린 유럽 최강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치루면서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왕실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이태리의 도시국가 간의 전쟁은 자신들이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용병을 고용하여 싸웠다. 큰 싸움이래도 용병의 수가 3000명을 넘지 않았다. 돈 받고 전쟁하는 자들이라서 열심히 싸우지도 않고, 서로 몸을 다치게 하지 않았고 ------. 그러나 상비군은 달랐다. 숫자도 엄청 많았고, 군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웠다. 전공을 세우면 귀족 작위를 얻는다. 상비군과 용병은 게임이 안 되었다.)
이태리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밀라노가 왕위 분쟁에 말려들자 프랑스에게 이태리 침입을 요청했다. 이때 나폴리 왕국도 왕위계승 문제로 시끄러웠다. 샤를 8세는 외갓집 족보로 따지고 따져서 자신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1495년에 프랑스 샤를 8세는 물밀 듯이 처내려 와서 나폴리를 점령했다.
도시 국가로 분산해 있던 이태리는 자신들이 외부의 침입에 허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시국들이 동맹을 맺고 샤를 8세를 공격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말시밀리안 1세도 혼인관계에 의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태리 동맹군을 지원하여, 샤를 8세는 프랑스로 밀려났다.
28세의 샤를 8세가 머리를 부딛혀 사망하자 루이 11세가 왕위에 올랐다.
신성로마제국은 스페인과 혼인을 맺으면서 합수브르그 가문을 만든다. (앞에서 상세히 공부했습니다.)
앞으로 프랑스 침입이 더 있으며, 프랑수와즈 1세 때는 레오나르드 다 빈치가 프랑스 궁전으로 옮겨 갑니다.
그러나 스페인이 관여함으로 프랑스는 밀려서 본국으로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