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녀(妖女) 장록수(張綠水)
무오사화가 있은 것은 연산군이 등극한지 사년째 되는 해였으니, 연산군의
나이는 그때 스물세살이었다.
나이가 스물세살이면 색(色)에는 완전히 눈을 뜬 판이요, 게다가 무슨 일
이나 맘대로 하게 되었으니 그의 음탕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
었다. 이때 연산군은 왕비 신씨와 궁인 곽씨(郭氏) 이외에 따로 윤훤(尹
萱)의 딸을 맞아 숙의(淑儀)를 삼았다.
연산군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차츰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김효손(金孝孫)이란 사람은 자기 처매(妻妹)인 장록수
(張綠水)란 여자를 연산군에게 천거했다.
당시 장록수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자 종(婢)으로
있었다. 그녀는 성질이 영리하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기로 이름이 높
았으며, 그 목소리는 매우 맑고도 깨끗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기쁜 마음을 갖게 했다. 나이는 그때 삼십이며 연산군 보다도 몇 살 위이
지만 이팔의 소녀와도 같이 앳되게 보이고 아름다왔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한 번 만나보고 매우 마음에 흡족하였다. 곧 장록수를
맞아들여 숙원(淑媛)을 봉하였다. 연산군의 장록수에 대한 사랑은 날이 갈
수록 깊어만 갔다.
이후부터 임금이 조회에도 나아가지 않고 더욱이 경연은 물론 다른 대궐에
거동도 않고, 그저 장록수 옆에 있는 것이 가장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었
다. 이제 장록수의 옆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이만큼 사랑에 빠지고 말았
다.
임금이 장록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장록수는 차츰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임금을 조종하게 되었다. 임금은 마치 장록수 앞에서는 죽은 사자와도 같
이 온순할 뿐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노여웠다가도 장록수만 보면 웃음이
저절로 피오 올랐다. 따라서 장록수의 일거수 이투족(一擧手一投足)은 온
백성에게 영향 주는바가 컸다. 그때 벼슬자리를 얻으려든가 감투를 쓰려
든가 무슨 청할 일이 있으면 임금이나 조정 비변사(備邊司) 등에 청하기보
다 장록수에게 청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제일 빠른 길이었다.
이 때문에 장록수의 집 앞에는 인마(人馬)가 끊일 새 없었고 값비싼 물건
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장록수의 말 한 마디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
었고, 살 사람도 죽일 수 있어서, 그는 실로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록수의 부귀와 영화가 어찌나 극진했던지 그때의 사
람들은 아들 낳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딸 낳기를 원하여 다음과 같은 노
래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즉
張使天下父母心 ㅡ 장록수는 천하의 부모들 마음에
不重生男重生女 ㅡ 아들보다 딸을 더 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기쁘게 해줄 양으로 각 관청의 비자(婢子)나 여염집 딸
이라도 여덟살부터 열두살까지 얼굴 예쁘게 생긴 소녀들을 대궐로 들여다
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회에 참가케 하였다. 이밖에도 당시의 유명한
기생인 해금기(奚琴妓), 광한선(廣寒仙) 등 네 사람을 택하여 대궐로 불러
들이고, 또는 가야금, 아쟁牙箏) 잘타는 기생들도 각각 한 사람씩 불러들
였다.
이때부터 궁중에 곡연(曲宴)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고, 연산군은 하루도
취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연산군의 곁에는 늘 장록수가 앉아 있었다.
정사야 잘 되거나 못 되거나, 백성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연산군은 술이면
그만이요, 장록수면 그만이었다.
그때만 해도 창덕궁의 담이 낮아서 담 밖에서 대궐 안을 엿볼 수가 있었
다. 대궐 안에서 매일 연회가 벌어지고 노래소리에 춤을 추며 야단법석을
떨면 그것을 구경하느라고 담밖에는 수백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나중에는
잘한다 못한다하는 소리까지 군중들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실로
대궐 안의 체모에 손상되는 일이 많았다.
연산군은 당장에 도승지 이극균(李克均)을 불러 아래와 같은 어명을 내렸
다.
"대궐 담장을 새로이 두 길 높이로 쌓아올리고 담장밖에 있는 민가(民家)
들은 모두 무너 버려라. 그리고 대궐 안이 내려다 보일만치 높은 곳에 있
는 복세암(福世庵), 인왕사(仁旺寺), 금강굴(金剛窟) 등도 모조리 철폐시
키고 또한 백악(白岳)이나 인왕산(仁旺山)이나 사직산(社稷山) 같은 데는
잡인(雜人)의 입산을 일체 엄금하라!"
기막힌 어명이었다. 곧 경복궁 담장밖에 있는 집들이 헐리고, 경복궁에 가
까이 있는 복세암, 인왕사, 금강굴 등도 철폐당하고 동시에 동소문(洞小
門) 밖 동구에는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잡인들의 북
문 밖 각 산에 올라 대궐 안을 바라보는 것을 엄금케 하였다. 이러한 것
이 모두 장록수라는 일개 요부와 음탕한 애욕을 즐기기 위해 내려진 명령
이었던 것이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연산군은 대궐 안에서 장록수와의 연락에도 염증이 생겼든지 하루는 내시
(宦官) 몇을 거느리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미행(微行)을 나온 일이 있었
다. 전부터 이 정업원은 늙은 후궁들이 살 곳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여생
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후궁이 나가 살게 되면 젊은 궁녀들도
몰래 빠져 나와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아서 이러한 여승들 중에는 뜻밖에도
미인이 섞여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자를 엽색(獵色)하려는 것이다.
연산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정업원에 나타났다. 법당 안에서는 여러
비구니들이 불경을 읽다가 불시에 나타난 임금을 보자 일제히 일어나 합장
하고
"상감마마 만수무강하사이다."
그러면 임금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러 비구니들은 어서 독경을 계속하라."
하고 옆에 서서 조용히 독경하고 있는 비구니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머리
에 곱게 접은 고깔을 쓰고 흰 손에는 염주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소곤소곤
독경하는 비구니들! 그 중에는 정말 아리따운, 매력 있는 젊은 비구니들
도 많이 있었다.
"...음..."
연산군은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연산군은 여러 비구니들 중에서 젊고 아
리따운 비구니들만 몇을 헤아려 보고
"자, 이제 모두들 물렀거라, 그리고 과인이 지적하는 다섯 명만 남아 있
으라."
연산군은 손을 들어 젊은 비구니 다섯명을 일일이 가리켰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라 할지라도 어명을 거역할 길은 없었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은 늙은 비구니들은 제각기 염불을 외우며 합장 배례를 하고 선
원(禪院)으로 사라져 갔다.
이날 연산군의 황음(荒淫)은 차마 눈을 뜨고서는 볼 수가 없도록 어지러웠
다. 일찌기 한사람 한사람의 여성을 상대로 음탕한 행동을 한일은 많았으
나, 일시에 여러 계집을 상대로 그토록 어지러운 행동을 취해 보기는 연산
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대궐로 돌아와 광한선과 또 놀아나니, 이때부터 연산군의 황음이 본
격적으로 심해지게 되었다.
한 번은 연산군의 계모인 왕대비 윤씨가 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창경궁(昌
慶宮) 안뜰에서 큰 잔치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정승(政丞), 사
헌부(司憲府), 승정원(承政院)의 고관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이날 왕대비
는 연회를 흥겹게 하기 위해 여기(女妓) 광한선, 내한매(耐寒梅) 등을 불
러 임금을 모시게 하였는데 연산군은 술이 취하자 왕대비를 비롯하여 여러
중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한매, 광한선의 두 기녀를 한품에 껴안고
"자, 모두들 이 어여쁜 기생의 이름을 시제(詩題)로 삼아서 시를 지어 보
아라."
하고 분부를 내렸다.
기생의 이름을 시제로 해서 중신들더러 시를 지으라니 그처럼 중신들을 모
욕하는 일은 없었다. 중신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감히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었다. 그러던 중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가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는 것은 중신들의 체면을 손상케 하는 분
부로 아룁니다."
하고 용감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이런 반대가 통할 리 없었다. 연산군은 끝내 고집을 부
려 중신들로 하여금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의 고집과 황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가지만, 조정에 중신이
많되 이제는 간언(諫言)을 올리려는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