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둘인데 명퇴하라네요… 은행의 추락
올해 짐싼 은행원들 5000명… 지점은 5년새 1000개 사라져
화이트칼라의 대표 직종으로 꼽혔던 은행원들이 줄어들고 있다. 평균 연봉 1억원으로 여전히 다른 업종을 압도하는 고액 연봉을 받고 있지만, 비대면·디지털 시대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은행 지점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이 속속 등장하는 등 ‘빅테크’ 기업의 금융 진출이 늘어나면서 은행원들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최근 5년간 은행 지점은 약 1000곳이 문을 닫았고, 은행원은 10%나 줄어들었다. 은행들은 이렇게 빈자리에 IT 업무를 담당할 디지털 인재들을 채용하고 있다.
한 은행 임원은 “서울 강남에서 지점 한 곳을 운영하려면 점포 임차료 약 5억원에 직원 10여 명 인건비까지 합쳐 연간 20억원쯤은 들어간다”며 “지점들을 모두 안고 가면 인터넷은행과의 경쟁 등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희망퇴직을 할 경우 최대 7억원 정도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다. 또 자녀 대학 등록금 등에서도 혜택을 받는 조건이라 다른 업종에서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은행원의 추락’은 돌이킬 수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한 은행 직원은 “은행 입장에서는 그런 조건을 내걸더라도 은행원을 줄이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1980년생까지 희망퇴직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SC제일·한국씨티은행 등 7개 은행의 올해 희망퇴직자는 4888명으로 집계됐다. 여기에 우리은행이 20일부터 추가 신청을 받을 예정이라 올해 희망퇴직하는 은행원은 5000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지난 1월 희망퇴직을 통해 800명을 내보냈고, 신한은행은 1월(220명)과 7월(130명)에 두 차례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소매금융 사업을 국내에서 접기로 한 씨티은행은 2300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고, 은행 측은 이 중 1980명을 우선 대상으로 선정했다.
희망퇴직 대상 연령도 낮아지고 있다. 1960~70년대 출생자가 주된 대상이긴 하지만 농협·우리·하나은행은 만 40세를 갓 넘은 1980년생까지 희망퇴직 대상자로 정했다. 은행원들을 대거 내보내는 흐름이 지속되면서 은행원 숫자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작년 기준 은행권 임직원 수는 12만 2004명이다. 13만6353명이었던 2016년과 비교하면 4년 만에 10.5%(1만4349명) 감소했다.
◇은행 지점 5년간 1000개 사라져
은행들이 인력을 계속 줄이는 이유는 목 좋은 곳에 지점을 확보해 고객들을 끌어오는 전통적 영업 전략이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한 간부는 “은행 업무가 비대면 디지털화로 가는 속도가 지난해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빨라졌다”며 “기존 지점 단위 영업, 은행원들의 대면 서비스 등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디지털화를 앞당기면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지점을 폐쇄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국 은행 지점은 2012년 말 7835개로 정점이었으며, 이후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15년 말 7446개에서 올해 6월 말 6462개로 감소해 5년 반 남짓한 기간 984개가 감소했다.
대신 시중은행들은 앞다퉈 ‘온라인 화상 상담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 가장 앞서가는 신한은행의 경우 작년 11월부터 원격 상담용 ‘디지털 데스크’를 갖췄다. 스크린을 통해 마주 보는 은행 직원이 비대면으로 각종 예·적금 상품 가입을 안내해주고 대출 상담도 해준다. 현재 전국 73개 지점에 84대의 디지털 데스크가 있다. 다른 은행들도 추격에 나섰다. 지난 13일에는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이 각각 원격 화상 상담 창구를 동시에 열었다. 은행들은 거의 모든 창구 업무를 화상 상담으로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지점을 폐쇄하는 데 대해 “디지털 업무에 어두운 고령자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은행권에서는 “은행원을 두는 지점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8억7600만원, 8억3300만원… 은행들 상반기 ‘연봉킹’은 명퇴자
연공서열식 체계로 고연봉자 많아
“당장은 비용 들더라도 내보내야”
“아니 얼마나 퇴직금이 많길래 퇴직자 보수가 은행장보다 많아요?”
올해 상반기에 5억원 이상 고액 보수를 받은 임직원 명단이 반기보고서를 통해 공개된 지난 17일, 샐러리맨들의 화제는 단연 은행권 연봉 순위였다. 비금융기업에선 대부분 CEO(최고경영자)가 연봉 1위에 올랐다. 그런데 시중은행에선 명예퇴직자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했다.
1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은행의 경우 H조사역이 올해 상반기 8억3300만원을 받아 이 은행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은행에서 ‘조사역’은 임금피크제에 돌입한 직원 중 퇴직자들에게 부여되는 직급이다. 이어 2위(7억9500만원)부터 5위(7억8600만원)까지 상위 5걸이 모두 퇴직자였다. 퇴직 직전 이들은 모두 차장~부장급이었다. 이들이 받은 보수의 대부분은 퇴직금이었다. H조사역은 8억3300만원 중 7억8100만원(94%)이 퇴직금이었고, 이 중 명예퇴직금만 4억5400만원에 달했다. 반면 허인 KB국민은행장의 상반기 보수는 공시 기준(5억원 이상)에 미치지 못해 공개되지 않았다.
신한은행도 마찬가지다. 퇴직 직원인 C씨가 8억7600만원을 받아 이 은행 ‘연봉킹’이 됐는데, 2위(8억4800만원)부터 5위(8억1800만원)까지도 모두 퇴직자였다. 이들이 각각 받은 퇴직금은 7억원을 넘는다. 우리은행도 부장급 퇴직자들이 8억원 내외 보수를 받아 연봉 상위 다섯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하나은행에선 5억원 이상 보수를 받은 직원이 한 명도 없었는데, 올해 상반기에 명예퇴직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은행도 작년엔 연봉 상위 다섯 자리를 명퇴자들이 독차지했다.
은행권의 고액 퇴직금 관행이 이어지는 것은 강성 노조와 연공서열식 임금체계의 합작품이다. 임금피크 대상이 된 직원들을 내보내려면 거액의 퇴직금을 주고 명예퇴직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디지털 금융과 비대면 채널이 확산되면서 점점 은행원들이 할 일은 줄어들고 있지만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로 고임금을 받는 은행원들이 여전히 많다”며 “당장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명예퇴직이라는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점포는 줄고, 핀테크서 부르고… 은행권 퇴직금 역대 최대
금융권 인력 지각변동
2년 전 우리은행을 퇴직한 김진국(57)씨는 지난해 핀테크(IT를 접목한 금융) 업체 ‘8퍼센트’의 부동산금융부문 본부장으로 재취업했다. 30년간 은행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전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상담 업무 등을 맡고 있다. 동료들은 20~30대 IT 전문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은행 퇴직자들이 늘어나면서 핀테크 기업 등 다양한 방면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다.
11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들이 지급한 퇴직금 규모는 총 1조3338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온라인 뱅킹이 늘어나면서 은행들이 지점 통폐합에 나서고, 이에 따라 명예퇴직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 은행 부행장은 “지난해 은행 실적이 좋아 명예퇴직금 부담이 덜하니 조직 슬림화를 위해 인원 감축이 많았다”면서 “금융업 재편과 맞물려 인력 대이동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은행권 작년 퇴직금 1조 3000억, 역대 최대
은행의 퇴직금 규모는 지난 2015년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선 후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빅테크의 등장과 저금리·저성장 경제가 지속되며 먹거리를 찾기 어려워져 몸집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코로나 여파까지 겹쳐 창구에 손님들이 발길을 끊는 바람에 점포 이용객이 급감했다. 그 결과 2016년 5100여개에 달하던 국내 은행의 영업점 수는 작년 4613개로 10%(487개) 줄었다.
영업점이 줄면서 은행원도 줄었다. 국내 은행 임직원 수는 2016년 8만2332명에서 작년 7만6447명으로 4년 새 5000명 이상 줄었다. 연말 연초 희망퇴직제도를 정례화한 시중 5대 은행에서는 연초에만 총 2495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지난해 1737명보다 758명(44%) 급증했다.
희망 퇴직 급증은 아직까지는 후한 편인 퇴직 조건도 원인이다. 시중은행들이 희망퇴직 조건으로 최대 3년치 임금에 학자금과 전직지원금 등 후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챙겨줄 때 떠나자”는 은행원들도 많다는 것이다.
한 은행 직원은 “비대면 금융 확대로 필요 인원이 매년 줄어드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며 “비교적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퇴직 조건이 좋을 때 그만두고 제2의 도전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돈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에서는 지난해 15년 이상 근무한 만 40세 이상 55세 미만 직원 285명이 ‘준정년 특별퇴직(희망퇴직)’을 신청했다. 2019년에 퇴직한 김모씨의 경우는 퇴직하면서 12억원 넘게 받아 은행이 신고한 5억원 이상 보수자 상위 5인에 들었다. 일각에선 ‘퇴직 로또’라는 말까지 돈다.
◇핀테크 업체 등으로 이직 행렬
작년 9월 외국계 대형 은행에서 인터넷전문은행 토스로 이직한 40대 초반 김모씨는 현재 새 직장에 만족하며 일하고 있다. 김씨는 “상품을 기획하면 IT 개발자들이 신속하게 도와 결과가 나오는 등 의사결정이 기존 은행보다 매우 빠르다”며 “회사를 새싹에서 큰 나무로 키워가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도 보람되다”고 말했다.
금융권 신산업인 핀테크는 기존 은행권 인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핀테크 업체 뱅크샐러드 간부 직원은 “정확한 숫자를 밝히기 어렵지만 은행권 출신의 30~40대 지원이 많아지는 추세”라며 “IT 전문가의 경우 핀테크 기업의 수요가 많다”고 했다.
특히 올해 온라인 투자연계 금융업 등록을 앞두고 있는 P2P(대출 중개 핀테크) 업체들은 노하우 활용 차원에서 시중은행 퇴직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8퍼센트는 지난 2019년엔 4명, 작년엔 3명의 시중은행 출신을 채용했다. 올해도 추가 채용 예정이다.
전체 직원 40여명 가운데 4분의 1을 은행 출신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지점장 출신으로 이 회사에 입사한 박희용(60) 금융본부장은 “핀테크 기업에서는 젊은이들만 일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한데 은행의 경험을 활용할 여지가 많다”고 했다.
전국금융산업노조 한국씨티은행지부 노조원들이 지난 11월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씨티은행 본점 앞에서 '2021년 임단투 승리 및 소매금융 졸속 청산 반대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앞서 한국씨티은행은 지난달 25일 소비자금융 사업부문 단계적 폐지 결정을 했다. 이에 따라 은행은 노동조합과 협의를 거쳐 직원들의 희망퇴직을 진행하고, 잔류를 희망하는 소비자금융 소속 직원들에게는 은행 내 재배치 등을 통한 고용안정도 최대한 보장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2021.11.2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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