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사랑 哀 '4회'

[이 로 운]

[은채의 지난이야기 - 下]

 “헉”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채 서 버렸다. 바로 올라오던 누군가는 성준이었다. 죽은 성준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눈을 비비고 봐도 성준이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가 살아오다니 말이 안돼, 정신차려 성은채. 너가 성준의 시신까지 확인했잖아’

 생각과는 달리 몸은 이미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핀란드행 비행기를 티켓팅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단 한번만, 성준을 만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너가 그 때 본 것은 오해였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거다’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를 따라 핀란드 비행기를 티켓팅해야만 했다.

 “핀란드행 티켓 아직 남아 있는 거 있죠?”

 “비지니스석 밖에 없는데..”

 “상관없어요. 그거라도 주세요”

 티켓팅을 하면서도 내 시선은 성준을 따라 쫓고 있었고, 진짜 성준은 맞는건지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성준이 맞는건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속 쌍커풀이 있는 눈, 오똑한 콧날, 도톰한 아랫입술. 누가 봐도 성준이었다. 고민할 새도 없이 나의 몸은 그를 따라 이미 핀란드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뒤를 쫓아왔다. 여기까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이렇게 그를 쫓아온 건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설사 그 사람이 진짜 성준이 아니라 할지라도, 너무나도 성준같은 그 사람을 향해 내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행 두 번째날 : 재회]

 민재는 눈을 떴다. 얼마나 잔 것일까. 항상 새벽 6시에 잠에서 깨는 습관 때문에 이곳에 와서도 어김없이 그 시간에 눈을 떴다.시차는 컨디션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벌써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잠이 완전하게 깨지 않은 퉁퉁 부은 눈으로 창 밖의 울창한 나무 숲을 보았다. 짙은 녹색의 숲에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제는 밤늦게 들어와 몰랐던 사실인데, 호텔뒤에 울창한 숲도 있었고 커다란 호수도 있었다. 어차피 잠은 더 못잘 것 같았고, 호수나 산책해야 겠다는 생각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아 참 담배’

 재킷에 담배를 아무렇게나 구겨 넣으며 방을 나섰다.
은채는 밤새 자리에서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곳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턱대고 와버린 자신의 모습이 무모했다. 단지 성준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 남자를 무작정 뒤 쫓아온 자신이 바보같았다. 대체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채로 이곳까지 따라오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남자에게 건넨 첫마디가 ‘차비가 없으니 돈 좀 빌려달라’ 였다니, 굉장히 촌스럽고 바보같아서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짐을 챙겨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으로 떠날 때 일주일치만 휴개를 낸 회사도 맘에 걸렸고, 지금쯤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도 신경이 쓰였다.

 시계는 새벽 5시를 넘어 6시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동이 터 왔다. 잠을 제대로 못자서 일까. 머리가 아파왔다. 창문을 열자 신선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꽤나 차가웠다. 고개를 들어 창문너머 멀리 보니 숲속의 그림같은 호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호수주위에서 몇몇 사람들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여긴 진짜 꽤 매력적인 나라임은 틀림없어'

 그 남자를 뒤쫓아 투숙하게 된 이 호텔 주변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풍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은채는 호수 주위를 산책하면서 언제 이곳을 떠날지 자세히 생각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방을 나섰다.

 민재는 호텔 뒤편을 돌아 작은 오솔길로 들어섰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자 나무들 사이로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방에서 내려다 볼때는 몰랐었는데, 호수의 크기가 상당했다. 호수주변을 걸어서 돌아보면 최소한 한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언제 어디서든 늘 친구가 되어주는 mp3에 벌써 손떼가 가득 묻었다. mp3 안에 든 곡들은 작년 그 사고 이후로 한번도 업데이트 하지 않았다. 해인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루마의 전집이 꽉 차 있는 mp3를 재생했다. 이루마의 'stay in memory'... 호수에 잔잔히 물결이 일었다. 안개가 얕게 깔린 호수가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연주곡과 참 잘어울렸다. 호수 주변에 가끔씩 있는 벤치에는 어제 밤새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젊은 남녀들이 널브러진 채 자고 있기도 했고 호수 주변길을 짧은 트레이닝 팬츠와 민소매로 달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호수 주변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긴 침엽수들이 이곳의 역사가 꽤 오래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오랜만에 숙취 없이 맞는 아침에 몸이 가뿐해 짐을 느꼈다. 더군다나 나무들이 뿜어대는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온몸으로 전해오는 흙길의 느낌이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호수 주변을 십오분쯤 돌았을까. 눈앞에 낯익은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만약 한국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몰랐지만 까만색 머리가 드문 이곳에서 앞에 앉아 있는 아시아 사람은 유독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어제 민재에게서 차비가 없다고 이야기 했던 그 여자였다. 눈앞의 벤치에서 담배를 피고있는 그 여자, 어제 그여자가 분명했다.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벤치 앞에 멈춰섰다.

 은채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성준이 자신을 떠나고 나서 시작한 담배였다. 싸한 박하향이 폐를 쓸어줄때면 머릿속에 잡 생각들도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래서 남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담배를 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힘껏 내 뱉았다. 앞에 깔려 있는 안개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다가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수없는 공포감이 엄습해서 서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였다. 너무 놀라 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자신도 모르게 인사가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안녕하세요”

 민재는 굳게 입을 다문채로 천천히 이어폰을 귀에서 떼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개인적인 인사를 해 본지가 오래되어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쉽게 말이 나왔다.

 “네..어제는?”

 “아 네..다행히 어제 지갑을 찾았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아참 어제 차비 드려야죠? 근데 어쩌죠? 지갑이 방에 있어서.  좀있다 드릴게요”

 “괜찮아요... 아무튼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민재가 담배를 하나 꺼냈다. 라이터를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라이터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민재를 보며 은채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이거요?”

 “네.., 고맙습니다”

 민재는 담배 한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어지러웠다. 호수 먼곳을 쳐다보았다. 비틀거릴뻔 했다. 오랜만에 담배를 피워서일까.

 “혼자...여행하시는 거에요?”

 은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러시구나...혼자서 여행할 수도 있죠 뭐.. 저도 혼자니깐..”

둘 사이 어색한 적막함이 흘렀다. 그 정적이 부담스러워 은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옮겨 앉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민재에게 내어 주었다.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 옆자리에 앉았다. 서로 앞의 호수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처에 머무시나 봐요?”

 “네....”

 “어디에요?”

 “저기....”

 민재가 나무에 가려져 꼭대기층만 보이는 호텔을 손으로 가르켰다. 은채는 화들짝 놀라는 척을 하며 맞받아쳤다.

 “우와 저도 저기 머무는데....”

 민재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울까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그럼 저는 먼저....”

 은채가 그런 민재를 보며 다급하게 따라 일어서며 이야기했다.

 “아침 식사....같이 하실래요?”

 잠시후, 레스토랑 안에 같은 테이블에 자리잡고 마주앉게 된 둘,이 호텔의 조식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얇게 자른 베이컨, 햄 몇 조각과 과일 그리고 바게트 빵. 식빵 몇 조각들. 은채와 민재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테이블에 앉았다. 민재가 접시에 스프를 담아와 먼저 수저로 한 입 뜨려는 순간, 은채가 이야기했다.

 “잠시만요. 후추”

 은채가  민재의 접시에 후추를 뿌렸다. 민재가 당황했다.

 “저는..후추 안좋아하는데...”

 “아....후추 안좋아하세요? 후추 좋아했는데..”

 “네?”

 “아니에요 제껀 아직 후추 안뿌렸으니깐 바꿔 먹어요”

 은채가 얼른 자신의 접시와 민재의 접시와 바꿨다. 몇 스푼을 뜨고 민재가 입을 열었다.

 “근데 여자 혼자 여행하는게 쉽지 않을텐데...여기에 뭐 아는사람이라도?”

 은채가 잠시 망설였다.

 '이유는 당신뿐인데...'

 “그냥 북유럽, 이시기에 다들 좋다고 다들 이야기 하니깐, 더 나이들면 혼자 여행 못다닐 것 같기도 하고,... 아참 그러고 보니 그 쪽  이름도 몰라요. 전 성은채에요.“

 “저는....이민재..에요..”

 “아..이민재....”

 역시 아니었구나. 은채의 실망하는 눈빛을 눈치챈 민재가 물었다.

 “왜요? 뭐 잘못 되었나요?”

 “아..아니에요..하하 여기 음식 좀 짜다..그쵸?”

 “네 그러네요”

 “나이는 몇 살이에요? 물어봐도 되요?저는 스물일곱이에요”

 “저는 서른 세살입니다”

 “아..그러시구나”

 “네..”

 은채는 민재와 대화를 풀어가는 것이 참 힘들다고 느꼈다. 은채가 열단어 이상 섞어서 문장 하나를 만들어 뱉어내면, 돌아오는 대답들은 기껏해야 단답형의 두세마디 뿐이었다. 답답했다.

 “원래 말씀이 없으신 편인가 봐요”

 “아뇨..오랜만에 대화를 하다보니..”

 “네?”

 “아니에요..원래 말이 없어요”

 “그러시구나...여기 이 나라 잘 아세요?”

 “아뇨...거의..아니 아예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겠네요”

 “우와, 저도 여기는 하나도 모르는데”

 “아..그래도 어떻게 혼자 여행을?”

 “뭐 민재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민재씨라 불러도 되죠?”

 “편하실대로 부르세요”

 “얼마나 머무르실 거에요? 여기?”

 “글쎄요..모르겠네요..”

 “음...그럼 그냥 자유여행이네요?”

 “네...”

 “오늘은 어디 여행가실꺼에요?”

 민재가 머뭇거렸다. 사실 오늘 어디 여행을 갈 껀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민재를 보며 은채가 입을 삐죽이며 이야기 했다.

 “걱정말아요, 같이 다니자고 이야기 안 할테니”

 “아..아니 저는 아직 여행을 어디 할지 정하지 않아서, 밥먹고 생각해 보죠”

 “그럼 오늘은 함께 움직이실래요?”

 은채는 입밖으로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내뱉어버린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아직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자고 이야기 해 버리다니,

 '저 사람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갑자기 말을 뱉어버린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민재는 망설였다. 누군가와 함께 어디를 가본적이 얼마만이던가, 잘 모르는 낯선 누군가와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 불편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냥  혼자가 좋았다.

 “아니요..혼자가 편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식사 다 하신 것 같은데 일어나시죠?”

방으로 돌아온 은채는 침대에 털썩 주저 앉으며 생각했다.

 ‘아.. 미쳤어..도대체 너는 부끄러움이란 것도 없는거야?’

 무턱대고 말을 내뱉은 자신의 모습과 민재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내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늘도 따라가보자.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며칠 더 있지 뭐'

 은채는 곧장 방을 나섰다. 저 사람에게 집착을 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지금은 그냥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하고 싶었다.

 오전에 민재는 오늘도 어제의 senate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의 그곳은 친구끼리가 아닌 가족끼리 모여 있었다. 민재는 손목시계에 표시된 요일을 보았다

 ‘아 오늘이 일요일이구나’

 어디선가 작은 공이 굴러와 민재의 발에 툭하고 부딪혔다. 공이 굴러온 방향을 보니 이제 갓 걸음을 떼기 시작한 여자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민재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민재가 웃으며 그 공을 다시 아이에게 굴려주자, 아이는 굴러오는 공은 신경쓰지도 않은채 민재에게 와락 안겨왔다. 아이의 품에서 나는 부드러운 비누향이 민재의 코를 간지럽혔다.

 한때 이렇게 아이를 안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있었다. 아이를 내려놓으며 아까 굴려준 공을 주워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아이는 민재의 볼에 입을 맞추고 다시 부모에게로 달려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부모가 부러워졌다.

 '나는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린 거겠지..'

 씁쓸한 느낌이 들어 좀전에 아이가 입을 맞춘 자신의 오른쪽 볼을 손바닥으로 쓰다 듬었다.

 민재는 다시 어제의 그 항구로 발걸음을 향했다. 항구에는 작은 천막들이 줄을 지어 쳐져 있었다. 천막안을 기웃대보니 이것저것 잡다한 소품들을 팔기도 하고, 먹거리들을 팔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장날 같은 건가...'

 모자, 스카프를 파는 잡화 노점에서 회색베레모 하나를 샀다. 모자를 너무 좋아해서 언제나 외출을 할때면 모자부터 챙겨쓰던 해인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너부터 찾아가서 이거 선물로 줄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서만큼은 해인이 생각을 하지 않겠다 마음먹었지만, 역시 해인이를 떼어 놓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 보이는엄청나게 큰 성당이 햇빛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민재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도를 빼내 들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이라..’

 노점에서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한입 베어 물며 그 성당으로 걸음을 향했다.

 은채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호텔 프런트 뒤쪽에 숨어 있다가 민재의 뒤를 밟았다. 누군가의 뒤를, 그것도 절대 눈치 못채게 신경쓰며 걷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은채는 새로운 곳에 와서 관광도 못한채 이렇게 누군가의 뒤만 쫓아 다녀야 된다는 상황에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아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이람....’

 그러다가 갑자기 민재가 광장에서 왠 여자아이를 와락 안으며 몸을 은채쪽으로 돌리면서 하마터면 자신의 모습을 들킬 뻔 했다. 은채는 얼른 광장의 동상뒤로 몸을 숨기고 민재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 사람..대체 뭐 때문에 여기 혼자 왔을까, 멀쩡한 허우대에 혼자서 여행할 것 같지는 않고....’

 민재가 여기 도착하고 나서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을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걸로 봐서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은채는 민재 뒤를 밟고 있는 지금도 풍경들을 눈으로만 담기에 너무 아까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민재가 항구옆의 시장에 들어서자, 은채도 민재에게서 일정거리를 두며 시장에 들어섰다. 시장입구에서 바다의 풍경을 그려서 팔고있는 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캔버스위의 풍경화를 보자 성준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풍경화를 자랑하던 그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짜릿하게 아려왔다. 이미 시장을 빠져 나가버린 민재가  없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은채는 한참을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야에서 민재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에잇 결국 놓쳤네.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은채는 허탈한 마음으로 메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어제 호텔에서 구한 핀란드 여행가이드 북을 펼쳤다.

 ‘수오멘리나 섬?’

 이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오멘리나 섬이란 곳이 있었다. 주저없이 매표소에서 그 섬으로 가는 표를 사고, 배를 탔다.

 민재는 성당의 맨 윗 계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들이 빨리빨리 지나가고 항상 복잡하였었는데, 이 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여유로웠고 평화로웠다. 멀리 보이는 바다의 물결들이 햇살에 반사되어 여러 가닥의 금색줄을 만들었다. 그 금색줄 위에 떠 있는 작은배들의 모습들은 그 자체만으로 한폭의 그림이었다.

 민재는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이곳에 온 첫날 탔던 배와는 다른 큰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 배의 몸체에는 화려한 그림과 함께 수오멘리나 섬이라는 글이 쓰여있었다.

 '수오멘리나 섬? 여기서 멀리 있나...'

 궁금한 마음에 매표소에 물어보니, 가까운 곳에 있는 수오멘리나라는 섬을 왕복하는 배라고 했다. 민재는 잠깐 망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가는 표를 샀다. 어차피 지금 호텔로 돌아가밨자 할 일도 없고, 사람이 북적이는 시내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배에 올랐다. 이미 시간은 저녁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은채는 섬에서 내리자마자 섬 구석구석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예전에 작은 요새로 이용되었다는 이 섬에는 군데군데 작은 포들이 놓여있었다.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무리에 묻혀서 은채도 섬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민재는 늘 그렇듯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섬의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섬에는 아기자기한 작은 건물들이 참 많았다. 눈에만 담기에는 풍경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잠깐 들어 카메라에라도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속에 묻혀 걷다가 섬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바로 그 때 민재의 눈 앞에, 열심히 바다를 카메라로 찍어대고 있는 은채를 발견했다.

 “사진..찍는 거 좋아하나 봐요”

 은채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민재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 했다.

 “네? 아....여기서 만나네요...여행왔으니깐...사진이라도 많이 찍어야죠”

 은채는 민재를 만난 것이 너무 신기하고 반가워 함박 웃음을 보여줬다. 그렇게 은채의 밝은 미소를 보자 민재는 기분이 좋아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둘은 나란히 섬의 끝자락에 서서 바위들에 부딪혀서 부서지는 수많은 파도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참 이쁘죠?”

 민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밤 9시, 그러나 아직 해가 떠 있는 이곳에서 바라본 바다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이 섬을 찾은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그저 행복해 보였다.

 “네 진짜 이 섬은 너무 이쁘네요, 바다도 이쁘고..”

 “아니 풍경말고, 저기”

 민재가 손으로 가르키는 곳에는 머리가 하얗게 된 노부부가 손을 잡고 바위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네...좋아 보이네요..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대부분 저렇게 행복한 모습을 꿈꾸잖아요. 또 그렇게 되어야 되는거고..”

 “그렇죠...대부분 저런 모습을 꿈꾸죠..또 대부분은 그 꿈꾸던 생활을 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못하기도 하고...”

 “네?”

 은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재를 바라보았다.

 “아..아니에요..”

 민재는 그렇게 한참을 노부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은채에게 말했다.

 “아 참 지금 몇시죠?”

 “9시 좀 넘었어요”

 “큰일났다. 빨리가요. 곧 배가 끊겨요.”

 그러고 보니 주변에 아까 노부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올라온 언덕을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민재가 소리쳤다.

 "안되겠다. 뜁시다"

 은채는 카메라를 목에 건 채로 뛰려니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절로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은채를 바라보며 민재는 또다시 소리쳤다.

 "좀만 힘내요. 카메라 이리줘요"

 민재는 은채에게 받아든 카메라를 자신의 목에 걸며, 은채의 손을 잡았다. 깜짝놀란 은채가 민재에게 잡힌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가득 주었다. 그런 은채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민재는

다급히 이야기 했다.

 "넘어지면 안되니깐..거의 다 왔어요"

 그렇게 둘은 손을 잡은채로 뛰기 시작했다. 은채는 기분이 이상했다. 서로 살을 맞닿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 손이 참 따뜻하다는 사실에 괜히 놀랐다. 그리고 가슴 속에 알수없는 묘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 이상했다.

 “헉..에고..좀만 천천히 가요”

 “안돼요..다 왔어요. 조금만..”

 배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그들은 소리치며 배를 잡았다.

 그리고 갑판에 오르자마자 방금의 뜀박질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무슨 음악을 그렇게 항상 들어요?”

 은채가 귀에 이어폰을 막 꽂으려던 민재에게 물었다.

 “아...그냥..연주곡 좋아해서....”

 민재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은채는 이어폰 한쪽을 민재에게 뺏다시피 해서 자신의 귀에다가 꽂았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연주를 듣던 은채가 말했다.  

 “이루마...좋아해요?”

 “네...”

 “이거 Spring rain 이잖아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노래인데..”

 민재는  이어폰을 꽂고 앉아 있는 은채에게 다시 이어폰을 뺏기도 뭣하고 해서 나머지 한쪽을 자신의 귀에 꽂았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이어폰을 한쪽씩 나누어 귀에 꽂은채 다시 헬싱키 항구로 돌아왔다.

 항구에 내리자 시계가 밤 11시를 가르키며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은채가 갑자기 민재를 돌아보며 이야기 했다.

 “우리 호텔까지 걸어가볼래요?”

 “네?”

 “날씨도 좋은데, 시간도 아깝고. 호텔 돌아가봐야 할 일도 없잖아 요. 네?”

 “그러죠 뭐...”

 둘은 말없이 걸었다. 은채가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 했다.

 "이야, 별이 쏟아질 것 같아요”

 민재가 은채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까만색 밤하늘에 노란색 점들이 촘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순간 민재가 소리를 질렀다.  

 “위험해요!”

 다급한 민재의 외침과 동시에 민재는 강한힘으로 은채를 자신쪽으로 잡아당겼다. 은채의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승용차가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은채를 너무 세게 잡아당긴 나머지 은채는 주차되어 있던 화물차의 백미러에 이마를 부딪혔다.

 “아!”

 은채가 인상을 찌뿌리며 이마를 부여 잡았다. 놀란 표정의 민재가 주저 앉아있는 은채의 이마를  살피며 이야기했다.

 “괜찮아요? 미안해요. 너무 급해서 세게 당겨버렸네”

 은채가 애써 웃으며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야기 했다.

 “네 괜찮아요. 큰일날 뻔 했네요..근데 힘이 진짜 쎄네요”

 많이 아플텐데도 밝게 웃는 은채의 모습에 민재는 더 미안해졌다.  다시 돌아온 호텔의 로비에서 둘은 마주보고 섰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민재가 부담스러워진 은채가 얼른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사이로 민재가 은채에게 이야기했다.

 “잘자요”

 “네 편히 쉬세요”

 문이 닫히기 직전, 은채가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민재는 침대에 누워 오늘일을 떠올렸다. 우연히 또 마주친 은채가 자꾸 생각났다. 아까 부딪힌 이마는 괜찮을지 얼굴에 혹시 멍이 들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에 빠져들었다.

 은채도 침대에 누워 오늘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연같은 필연으로 자꾸 만나게 되는 민재가 더 궁금해졌다. 좀전에 거울을 보니 아까 부딪힌 이마가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멍들면 안되는데...”

 자신의 상처가 걱정이 되면서도, 아까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민재를 생각하니 또다시 묘한 기분이 들어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여행 세번째날  : 핀란드 옛 수도 투르크에서]

 다음날 아침 민재는 또다시 아침 일찍 호수를 찾았다. 수면위로 짙게 깔린 안개가 맞은 편에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민재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루마의 'Loana' ..하얀 안개가 민재의 온몸을 감싸 돌아 꼭 구름위에 있는 것 같았다. 흘러나오는 음율들이 짙게 깔린 안개와 함께 금방 잠에서 깬 민재가 다시 몽롱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아까부터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호수 주위의 벤치를 지날 때 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그런 자신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호수쪽으로 시선을 둔 채 계속 걸었다. 호수위에 떠 있는 오리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자욱히 깔린 탓에 민재의 시선에 보였다, 안보였다를 반복하며 서로의 깃털을 부리로 쪼아대며 유유히 헤엄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묘한 부러움이 일었다.

 ‘오리조차도 저렇게 자기 짝과 행복하게 지내는데....’

 그 때 맞은편 안개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민재쪽으로 바싹 다가왔다. 민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맞은편에 오는 검은 그림자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이내 몸을 피하는 민재앞을 다시 가로 막았다. 그림자가 조금 더 가까워지고, 검은 그림자를 에워싸고 있는 안개가 살짝 걷혔다.

 은채였다. 민재가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깜작 놀랐네. 잘 잤어요?”

 “놀랐어요? 장난이 심했나? 하하  오늘은 안개가 너무 심하게 꼈네요”

 “네, 아예 앞이 안보이네요. 아참 어제 이마는?”

 “아..네..괜찮아요..좀 아프긴한데..”

 “어디 봐요”

 “아..아니에요”

 민재는 만류하는 은채를 무시한 채, 안개속에서 은채의 이마를 살피며 어제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아야"

 “아.미안해요.아프죠? 발갛게 부었네. 약은 발랐어요?”

 “아..아니에요 괜찮아요”

 “약 발라야 돼요. 멍들겠는데? 흠..좀 있다 약바릅시다”

 “네?”

 “좀있다 밥먹을 때 약 바르자구요”

 “네?”

 “아침은 먹어야 할 거 아니에요?”

 잠시 후 둘은 나란히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은채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아침을 먹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좀전에 민재가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테이블에 앉았다. 스프만 조금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돌아왔는데, 민재가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뜨는 곳에서도, 다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민재를 찾아 은채는 두리번 거렸다.

 ‘화장실에 갔나’

 은채는 먼저 스프를 한입 떠서 삼켰다. 입을 벌릴때마다 이마가 욱신거려 자신도 모르게 계속 인상이 구겨졌다. 다시 한입을 더 떠 넣으려고 하는 순간,  민재가 맞은편 좌석에 털썩 앉으며 이야기했다.

 “이리 와봐요”

 “네?”

 은채가 뭐라고 더 이야기 할 틈도 주지 않고 민재는 연고를 검지에 발라, 은채쪽으로 몸을 쑥 내밀어 이마에 연고를 발랐다. 민재의 손이 다시 이마에 닿자 은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야..”

 은채의 외침에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둘에게 시선을 주었다. 은채는 창피했지만, 민재는 그런 시선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안쓰러운 눈으로 조심스럽게 은채의 상처를 살폈다. 은채는 자신의 얼굴에 바싹 붙어있는 민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큰 눈,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아랫입술.

 '분명히 내가 알던 성준이와 똑같은데, 이 사람은 성준이 아니라니...'

 “좀만 참아요. 다 됐어요”

 민재는 냅킨에 자신의 손가락을 닦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은채를 바라보았다. 그런 민재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은채는 애써 웃으며 이야기 했다.

 “고마워요. 오늘 지나면 낫겠죠 뭐. 얼른 식사하세요”

은채는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고 방문에 등을 기댄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은채의 손에는  연고가 든 까만색 봉지가 들려 있었다.

 ‘뭐지, 이 기분은..분명히 저 사람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따라온건데..’

 은채는 자신도 설명하기 힘든, 지금의 이 이상한 기분에 여기까지 온 사실이 후회가 되려 했다. 샤워를 하면 이 이상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싶어 얼른 샤워실로 들어갔다. 민재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걱정을 해 본 것이  얼마만 이던가. 처음은  단순히 자신 때문에 생긴 은채의 상처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은채를 위해 약을 구하러 레스토랑을 뛰어 나가면서 ,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머리가 띵해졌다.

 ‘도대체 뭐지.. 이 기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책상위에 있던 지도를 집어들었다. 갑자기 오늘은 이 도시도 벗어나  멀리 떠나고 싶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민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안개는 걷혔지만, 먹구름이 잔뜩 끼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차역에서 핀란드의 옛수도인 투르크로 가는 기차표를 사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자꾸 주변을 두리번 거리게 되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예의 그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 기차에 올랐다.

 은채는 컨디션이 나빠져서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민재를 쫓아 기차역까지 왔다. 기차역 입구에서 좀전에 민재가 두리번 거리는 통에 깜짝 놀라 기둥 뒤에 숨다가 중심을 잃어 무릎도 땅에 찧었다.

 ‘오늘은 대체 왜 저렇게 계속 두리번 거리는거야...’

 민재가 표를 샀던 그 매표소로 가서 방금 동양남자가 사갔던 표가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보았다. 매표소의 여직원이 이상한 눈으로 은채를 바라봐서  민망해졌지만, 혹시나 민재를 놓쳐 버릴까봐 얼른 게이트를 빠져나가 기차에 몸을 실었다.

 평일이라 기차에 많은 사람들은 없었다. 민재는 지정 좌석인 1층에 앉아 있다가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너무 시끄러워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가족석처럼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초등학생 정도 되는 흑인 꼬마아이 둘이서 블록을 가지고 한참 장난을 치고 있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한 아이랑 눈이 마주치자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는데,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듯 그 아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카메라가 있었으면 사진에 담고 싶었다.

 '아참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겠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 나라에 입국하고 줄곧 꺼 놓았던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아이를 향해 핸드폰을 들이 밀었다. 그 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 왔다. 그리고 진동은 수초간 계속 연달아 울렸다. 문자가 오고 또 문자가 왔다. 서른통이 넘는 문자들이 쉴새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버지, 엄마, 엄마, 장모님, 장인어른, 장인어른, 장모님....'

먼저 아버지 문자를 열었다.

 '잘 도착은 했냐, 도착했으면 전화라도 한통 해주지, 엄마가 기다리는 눈치다'

장모님의 문자도 열었다.

 ‘거기 어때? 잘 도착한거지? 밥 꼭 먹고 다녀'

갑자기 잊고 있었던 부모님의 존재가 떠오르며,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해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반가운 기운의 [여보세요] 라는 말이 들려왔다.

 "어머님 저에요....네 다 괜찮아요..네 밥 꼭 챙겨먹고 있어요...다 나아질꺼에요.. 또 나아져야 되구요...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네...네...고맙습니다...죄송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통화도 끝냈을 때, 아까 블록으로 장난을 치고 있던 한 아이가 민재에게 달려왔다. 까만 머리의 민재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재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민재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게 뭐 없을까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까 승차직전에 사 놓은 쵸코바가 손에 잡혔다. 민재가 조심스럽게  쵸코바를 내밀자, 아이가 좋아서 냉큼 민재의 손에서 쵸코바를 건네받아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얼른 민재는 카메라에 담았다. 사실 민재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 그저 순진하고 순수한 아이들을 볼때면 영혼이 맑게 정화되는 듯 했다. 그 모습을 객차 구석에 앉아 지켜보던 은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잘못을 하고 왔기에 계속 부모님께 죄송하다, 고맙다, 얘기만 해대는 거지...'

 그러다가 민재에게 달려온 아이에게 초코바를 건네는 민재를 보았다, 아이에게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민재가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 참 순수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은채는 당최 민재라는 사람에 대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같은 열차 그리고 같은 객차에서 그렇게 은채와 민재는 투르크로 향하고 있었다. 삼십분 정도 지나자, 창밖으로 높은 건물들이 다 사라지고  푸른 언덕들만 계속되었다. 특히 많이 보이는 커다란 목장들의 통나무집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은채는 바깥에 풍경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요, 다 왔어요"

 은채는 잠든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깼다. 눈을 뜨자마자 민재의 얼굴이 보였다. 은채가 깜짝 놀라며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민재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이야기했다.

 "입가에 침부터 닦고"

 은채는 그 말에 놀라 손등으로 입을 쓰윽 훔쳤다. 창피스러웠다. 나쁜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른 민재를 피해서 열차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민재가 은채의 등 뒤로 바싹 다가왔다.

 "같이 가요."

 "네?"

 "어차피 약속있어 온 건 아닐거고.. 혼자 다니면 위험하잖아요. 또 소매치기 당하면 어쩌려고.."

 검은 구름이 뒤덮인 헬싱키와 달리 투르크는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걸으며 민재와 은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만 보며 걸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강줄기를 따라 강둑변에 젊은 연인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은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진짜 여기 왜 왔어요?"

 민재가 앞에만 시선을 두고 계속 걸으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몇초간 정적이 흐르고 민재가 입을 열었다.

 "그냥.. 기분전환 하고 싶어서요..그러는 은채씨는?"

 "저...저도..그래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상하리만큼 시내에 사람이 없었다. 가게들은 전부 영업중이었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꼭 죽은 도시 같아서 으스스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데 시내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어디선가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 함성이 점점 더 가까워 졌다. 길모퉁이를 돌자,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이 길 양옆으로 줄을 지어 비탈길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서서 무엇인가에 환호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와 있느라 거리가 텅텅비어 있었구나'

 은채와 민재는 무슨 마라톤이나 사이클 대회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길 양옆으로 늘어선 사람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잠시후 위에서부터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물체가 빠르게 내려왔다. 눈앞을 지나가는 그것은 애기들이나 탈 수 있을 법한 작은 무동력 자동차 였다. 그 자동차 안에는 초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가 타고 있었다. 길 양옆의 라인을 따라 서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자동차가 지나가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우와. 꼬마가 타고 있어요. 어떻게 이런 대회가 있지. 신기하다.”

은채가 신기한지 비탈길 꼭대기를 향해 발 뒷꿈치를 들어 시선을 돌리며 이야기했다. 자동차가 도착한 대기선에는 아이의 부모가 방금 무사히 도착한 아이를 끌어안아주며 환호했다.

 “이야 여기 사람들 진짜 가정적이다. 그쵸? 역시 다르네요. 여기는. 어?”

 은채가 이야기하며, 옆에 서있던 민재를 돌아보았을 때, 민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은채가 없어진 민재를 두리번 거리며 찾다가, 사람들의 틈을 벗어나는 민재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얼른 다시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갔다. 민재를 가까스로 따라잡은 은채는 민재의 표정을 살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이 어딘가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요? 저런거 안좋아해요? 아니면 어디 안좋아요?”

 은채의 물음에 민재는 그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민재는 그 날의 사고 이후로는 가족들의, 특히 작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행복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괜한 씁쓸함에 그 자리를 피했다. 은채는 그런 민재의 표정을 계속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저 배고파요. 뭐 좀 먹으면 안될까요?”

 둘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실내가 조금 더워 야외테이블에 자리잡고 마주 앉았다.

 “뭐 좋아해요? 뭐 먹을래요?”

 좀전까지 표정이 좋지 않던 민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안한 얼굴로 은채에게 이야기했다.

 ‘아까 더워서 그랬나.’

 은채는 대수롭지 않게 아까의 민재의 모습을 잊어버리며, 허기진 배를 뭘로 채울까 고민했다.

 “고르곤졸라. 나 피자 엄청 좋아해요”

 둘은 피자를 놓고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먹어요. 그리고.. 나 담배 하나 피워도 돼요?”

 “네. 그럼요 괜찮아요. 대신 나도 하나 필게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민재가 나이프로 피자 한 조각을 떠서 은채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접시에도 한조각을 올려놓고 한 입 먹으려고 할 때, 은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했다.

 “핫소스!. 핫소스 좋아하지 않아요? 달라 그래야겠다.”

 “아니, 나 피자에 핫소스 뿌리는 거 별로 안좋아해요, 은채씨 먹으려면 달라고 그러세요”

 “아..아니에요 저도 별로 안좋아해요”

 피자 한조각을 우걱 씹어먹자, 치즈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민재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 벌써 점심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앞에서 허겁지겁 피자를 먹는 은채의 모습에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먹어요. 체해요.”

 “아..네..하하 배가 고팠나봐요”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며, 민재가 물었다.

 “아니 근데 회사 다닌다 그러지 않았어요? 아직 여름휴가 기간도 아닌데, 여기 어떻게 왔어요? 휴가?“

 “네..여름휴가를 좀 당겨썼어요. 근데 계획에 없던 추가로 일정을 잡아서, 바로 돌아가야 돼요“

 “언제요?”

 그러고보니, 은채는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회사엔 어떻게 이야기 할지 대책이 없었다.

 “그러는 민재씨는 언제 돌아가요?”

 “글쎄요. 처음에는 세달 정도 계획했는데, 세달 동안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 전에 돌아갈까 생각중이에요”

 은채는 잠시 망설였다. 민재를 따라다니다가 세 달이나 여기 있다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일자리도 잃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민재 모르게 작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며 이야기했다.

  “전 이번 주말에 돌아가요”

  “아..그래요? 얼마 안남았네”

  민재는 괜한 아쉬움을 담배 한모금을 깊숙이 빨아 내 뿜는 걸로 대신했다.

 둘은 레스토랑을 나와 강둑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나란히 걸으며 살짝살짝 서로의 손이 닿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설레기도 했고 떨리기도 했다. 이런 민망한 적막이 싫어 은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왜 하필 핀란드로 왔어요?”

 사실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혼자서 그것도 이 멀리까지 왔다는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민재를 보면 뭔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민재의 대답은 싱거웠다.

 “글쎄요,...안 와봤던 곳이니깐..”

 “그럼 딴 데는 다 가봤어요? 하하”

 “그건...아니지만...”

 머쓱해하는 민재의 모습이 귀여워서 은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런 은채를 바라보며 민재 또한 미소지었다.

 돌아가는 기차안에서 둘은 나란히 앉았다. 은채는 한국에서 일본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된 과정을 생각하며, 너무나 피곤한 일정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민재도 한국에서의 지난 일년을 떠올리며, 여기에 오기까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했다. 어느새 잠든 은채의 머리가 민재의 어깨위로 기대왔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아직 한 참이나 어린 나인 것 같은데, 겁도없이 혼자 여행다니는 은채가 대단해 보였다. 밝은 사람 같았다. 그녀와 이야기하다 보면 밝은 기운을 전해 받는 것 같아 유쾌해졌다. 이마에 난 상처에 붙인 반창고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나쁜 꿈을 꾸는지 은채의 잠이 든 얼굴의 미간이 찌뿌려져 있었다. 갑자기 은채가 몸부림을 치며 자리에서 몸을 뒤틀더니 민재의 팔에 팔짱을 끼고 다시 편안한 표정으로 잠 들었다. 민재는 흠칫 놀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었다. 팔을 빼려고 최대한 조심해서 몸을 움직였는데, 어찌나 은채가 팔을 꽉 부여잡은건지 쉽게 팔이 빠지지 않았다. 힘을 주어 팔을 빼려하자 은채가 깰것 같았다.

 ‘휴...모르겠다..’

 오늘 너무 걸어서일까, 민재도 잠이 밀려와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서로에게 머리를 기댄 채 그들은 다시 헬싱키로 돌아오고 있었다.

 은채가 먼저 눈을 떴다. 복잡하고 힘든 꿈을 꿨다. 성준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나쁜년이라고 머리채를 잡고 은채를 쓰러트렸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성준이 나타나서 은채를 일으켜 꼬옥 안아주고 다시 예전처럼 행복한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눈을 떴다.  

 ‘꿈이었구나’

 자신이 민재에게 팔짱을 낀채로 민재의 어깨에 기대 자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른 민재에게서 팔을 뺐다. 아직 잠이 깨지 않은 민재가 몸부림을 치더니 이내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은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은채는 민재의 머리를 뿌리치려 하다가, 그냥 그렇게 두었다. 둘을 태운 열차는 어느새 헬싱키의 깜삐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행 네 번째날 : 복잡해지는 두마음]

 다음날 민재는 늦잠을 잤다.

‘어제 피곤했었나..’

 샤워를 하고 거울앞에 섰다. 몇일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거뭇했던 수염을 바라 보았다. 지저분했다. 면도기를 들었다. 수염이 꽤 길어 따끔거렸지만, 말끔하게 정리를 했다.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호텔을 나와 시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개가 가득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5분쯤 걸었을 때 우측편에 자전거 렌탈샾이 보였다. 민재는 어제 꽤 많이 걷다보니 빨리 지쳤던 것 같아서 오늘은 자전거로 다녀야겠다 생각했다. ID Card를 요구하는 점원에게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자전거를 가게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오랜만에 타보는 자전거가 익숙할까 싶었는데 금새 몸이 적응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호되게 자전거 타기를 배운 보람이 있었다. 가게에서 멀어지는 민재를 보며 은채도 자전거 렌탈샾으로 들어갔다.

 민재는  항구를 좌측에 두고 패달을 힘껏 밟았다. 10분정도 자전거를 밟으니 눈앞에 백사장이 펼쳐졌다.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양말을 벗었다. 백사장의 모래가 적당히 가열되어 있어 발끝으로부터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민재의 머리위로 수십마리의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좀전에 편의점에서 샀던 스낵을 꺼냈다. 민재는 백사장에 앉아 자신의 주변에 스낵을 뿌렸다. 그러자 금새 갈매기들이 날아들어 스낵을 쪼아 먹기 시작했다. 한 두 마리로 시작된 갈매기들의 움직임은 어느새 수십마리로 늘어나 민재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민재가 앉아 있는 자리를 빙 둘러 갈매기들이 앉아 있었다. 갈매기들이 마치 배고픔을 호소하듯 민재가 앉아 있는 자리로 차츰 차츰 죄여 오고 있었다. 그 때 몇 개의 스낵들이 날아들었다.

 “훠이 훠이. 날아가라”

 민재가 돌아보자 은채가 찡긋 윙크를 하며 갈매기들에게 스낵을 던져 내쫓고 있었다.

 파랗다 못해 청록색 빛을 띄고 있는 것을 바다를 앞에두고 야외 카페테리아에 민재와 은채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재가 의아해하며 이야기했다.

 “자꾸 마주치네요”

 “어머.. 뭐 내가 따라오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세요?”

 “아..아니..그런 뜻이 아니라..”

 “뭐 관광하는 목적이라면 코스가 비슷하지 않겠어요?”

 사실 은채는 힘이 들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드는 것에 여간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도 자전거 렌탈샵에서 먼저나온 민재를 따라오기 위해 죽어라 패달을 밟아 지금 당장 녹초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은채는 허기가 졌다. 주문한 훈제연어가 나오자 마자 허겁지겁 먹었다.

 “배고파요?”

 “네...빨리 허기가 지네요..이상하네...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근데 바다 진짜 이쁘지 않아요?”

 포크로 연어를 한입 베물어 씹으며 은채가 바다를 보면서 이야기 했다. 은채 이야기 대로 바다는 광활하고 아름다웠다. 멀리 크루저선이 떠가고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청록색의 바다는 한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조심해요!”

 민재의 소리침과 동시에, 갈매기가 날아와 은채가 한 입 베물다 만 포크의 연어조각을 채어 날아갔다.

 “힝.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아쉬워하는 은채의 그 모습에 민재는 웃음이 나왔다. 그런 민재를 보며 은채가 볼멘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아..아니 미안해요”

 “하나 더 시켜요. 다른걸로. 제가 사드릴게요. 애플파이 먹을래요?”

 오후에는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헬싱키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저 패달을 밟으며 헬싱키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민재와 달리 은채는 연신 카메라를 찍어댔다. 둘이 나란히 자전거를 몰며 민재가 이야기했다.

 “뭐가 그리 찍을게 많아요?”

 “네 아쉽잖아요. 여기 언제 또 와보겠어요. 사진이 남는 거죠 뭐”

민재는 그런 은채의 젊은 20대의 에너지와 생각들이 부러웠다.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주면 안돼요? 지갑이 없어요”

 “하하.. 또 소매치기 당했어요?”

 “아니에요..사주기 싫음 됐어요”

 “하하 뭐 먹고 싶은데요?”

 “저기 초코민트, 미안.,,나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못 걷겠어요. 좀 사다 줘요”

 공원의 작은 가판대로 가서, 초코민트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와 은채에게 건넸다. 한입 베어문 은채가 입을 딱 벌리고 소리쳤다.

 “맛있다. 자!”

 아이스크림을 민재의 얼굴로 들이미는 은채의 행동에 민재는 당황스러웠다.

 “아..아니 나는 괜찮..”

 민재의 입으로 아이스크림이 쑤욱 들어왔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은채는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은채는 벤치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민재를 향해 이야기했다.

 “민재씨도 누워봐요”

 “네?”

 “나는 이쪽에서 누웠으니깐 그 쪽에서 누워보라구요”

 민재는 은채의 말대로 은채의 반대방향에서 누웠다. 서로의 머리가 맞닿았다. 은채가 조금 뭄을 더 움직이더니 민재의 왼쪽어깨를 베게 삼아 머리를 벴다. 민재가 깜짝 놀라 일어나려고 하자, 은채가 얼른 이야기 했다.

 “놀라지 말고 민재씨도 내 어깨를 베요”

 민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은채의 오른쪽 어깨를 벴다. 서로의 어깨를 벤 채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참 예뻐 보였다. 은채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이야기했다.

 “근데 왜 오늘은 아침에 호수 안나왔어요?”

 “어제 너무 피곤했는지, 늦잠 잤어요. 나 기다렸어요?”

 “아..아뇨. 내가 왜 민재씨를 기다려요. 그냥 그 시간에 계속 보였던 것 같던데, 안보여서...하늘 참 이쁘다 그쵸?”

 은채는 얼른 말을 딴데로 돌렸다. 민재는 가슴이 두근거려 어쩔 줄을 몰랐다. 바로 옆에 은채의 얼굴이 신경쓰여 난감했다. 이런 민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채는 계속 이야기했다.

 “진짜 이 나라, 살기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밤 8시가 되었는데도, 이렇게 밝잖아요”

 “백야니깐...”

 은채가 민재의 어깨를 베고 있는 채로 민재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이야기했다.

 “민재씨”

 민재의 볼에 은채의 숨결이 느껴졌다. 민재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그런 민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채는 한 번 더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은채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서로의 어깨를 벤 채로 얼굴을 마주했다. 오센치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서로가 내뱉는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씩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내뿜는 숨결을 감추려다 보니,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민재가 이 민망함이 어색해 얼른 말을 내뱉았다.

 “왜 불렀어요?”

 “그래도..지금 이 시간들이 즐겁지 않나 묻고 싶었어요”

 ‘네...즐겁네요..’

 묘한 기분에 이상했지만, 민재는 오랜만에 참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라는 이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왔다.

 “이마에 멍 들었어요. 안아파요? 어떻게 해요..아프겠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9시가 되자 은채가 민재에게 말했다.

 “우리 맥주 한잔만 마셔요. 오늘 너무 힘드네요”

 둘은 다시 호텔을 향해 어제의 깜삐역의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광장은 젊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우와 사람들 엄청 많네. 그리고 다들 미남 미녀에요. 그쵸?”

 “네..그러네요..”

 노천카페에 그들은 앉았다. 민재가 맥주잔에 맥주를 가득 담아 은채 앞에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아참 근데 민재씨는 무슨일 해요?”

 “저..작은 설계회사 다녔어요”

 “다녔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백수..”

 “아..그래서 이렇게 한가하게 여행을 다니는 거구나..하하..한가하다는 건 농담..저는 디자인해요. 한국컴퓨터 다녀요“

 “네...”

 너무 말 없는 민재가 답답해진 은채가 광장쪽을 가르키며 이야기 했다.

 “너무 말씀이 없어요. 재미없어. 저기 저 사람들 보세요. 각각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만 저렇게 재미나게 웃고 떠들며 살고 있잖아요. 저기 비보이들, 거리 연주자들.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면 무슨 목적이 있을텐데, 단순히 기분전환이 목적이라면 밝은 모습으로 기분전환을 해야죠,...네?”

 “네...맞아요..”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민재가 못마땅해진 은채는 앞에 있는 맥주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진짜 여기 이 도시 멋진 것 같아요. 저기 저 사람들 마음껏 즐기고 있잖아요. 그냥 아무런 구속도 없이.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아.”

 은채의 말대로 여기 광장에 모인 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춤을 추며 그저 오늘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밤 11시가 되자 노천카페의 사람들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맥주잔도 벌써 각자 네 잔씩이나 비웠다.

 “자 우리 일어납시다.”

 “왜요. 이제 겨우 세잔째인데”

 “아니에요, 틀렸어요 네잔째에요. 은채씨 많이 먹은 것 같아요”

민재는 은채를 부축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은채가 민재의 손을 뿌리치며 이야기했다.

 “저 안취했거든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재는 얼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 비 내린다”

 은채는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방울 두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채씨, 내가 우산 사올게요. 잠시만”

 우산을 사려고 달려 나가려는 민재의 팔을 은채가 잡았다. 민재가 은채를 돌아보았다. 은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 맞으면 시원할 것 같애”

 은채가 가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은채씨, 은채씨!”

[굿모닝호텔]

작가님에 노고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