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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의 비경 /이효웅 사진작가 |
김교수는 그 첫 번째 근거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울릉도나 독도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만약 우산국이 512년 이사부 정벌로 신라 영토에 편입됐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우산국에 대한 기록이 나와야 한다. 「지리지」에서 신라 시대 섬을 군현으로 설치한 경우는 남해군과 거제군을 들수 있다.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삼국통일로 신라의 영토가 된 鵠島(곡도·백령도)란 섬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지리지」에는 탐라국이나 우산국이 기록돼 있지 않다.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이 512년 이후 신라에 항복했지만, 신라의 영토 안에 편재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김교수의 주장이다.
따라서 512년 이사부의 정벌로 우산국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 귀복해 연합동맹을 구축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복속국가로 왕국의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 고대사회에서 공물 진상은 복속 또는 속국화를 의미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적대화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졌다. 이사부의 정벌은 우산국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게 아니라, 복속관계를 관철시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신라로서도 동해 한가운데 섬나라를 영토화해 직접 통치를 하기 어려웠으므로 우산국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김교수는 주장한다.
두 번째 근거는 고려사에 우산국의 명칭이 드러난다. 고려 현종때까지다.
① 芋陵島(우릉도)에서 白吉과 土豆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 백길에게 正位, 토두에게 正朝의 품계를 각각 주었다. (「고려사」 세기 태조 13년 8월) (서기 930년)
② 우산국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李元龜를 그곳에 파견하여 농기구를 주었다. (「고려사」 현종 9년 11월) (서기 1018년)
③ 우산국 백성들로서 일찍이 여진의 침략을 받고 망명하여 왔던 저들을 모두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사」 현종 10년 7월) (서기 1019년)
④ 도병마사가 여진에게서 약탈을 당하고 도망하여 온 우산국 백성들을 禮州(경북 영해)에 배치하고 관가에서 그들에게 식량을 주어 영구히 그 지방에 編戶로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고려사」 현종 13년 7월) (서기 1022년)
「고려사」 ①의 기사는 이사부의 정벌 기록 이후 418년이 지난 기록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병산전투(안동)에서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은 때였다. 우산국은 독자세력을 유지하면서 후삼국의 쟁패전을 나름대로 관찰하다가 판세가 급격하게 고려에 기울면서 고려에 공물을 바치며 조공국으로 입장을 확인했다는 것. 나라(國)라고 자처하지 않고 우릉도라는 명칭을 쓴 것은 반도의 주도권을 쥘 나라에 스스로를 낮춰 표현한 것이 기록에 남았다는 해석이다.
이에 고려는 우릉도 사신에게 정위, 정조의 품계를 주어 정치적 복속관계를 형성했다. 정위, 정조는 향리나 탐라의 왕족, 여진의 추장 등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수여하는 향직이다. 후삼국 통일을 목전에 둔 고려로서는 현실적으로 지배권을 확보하기 어려운 울릉도를 독립국가로 인정하며 복속관계를 맺는 것으로 타협했다는 해석이다.
②~④의 기사는 고려 현종때인 1018~1022년에 함경도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략했을때의 기록인데, 이때 우산국이라는 명칭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고려의 군현제가 완성되는 현종 9년을 전후한 시기에 우산국이 고려의 군현에 속해 있지 않은채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김교수는 주장한다.
고려 현종이후 우산국이라는 기록이 사라진다. 그러면 우산국은 언제, 어떻게 멸망했을까.
김호동 교수는 「고려사」에서 우산국 기록이 사라지는 고려 현종때 여진족의 침략에 의해 우산국이 멸망했을 것으로 보았다.
함경도는 고려때까지만 해도 여진족(동여진)의 땅이었다. 이곳의 여진족은 육상으로, 해상으로 고려를 침략,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은 일본 쓰시마 큐슈까지 침범해 일본에서는 刀伊賊(도이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동여진은 11세기초 고려의 동해안 북쪽 접경을 침범하기 시작해 울진까지 내려왔다. 고려의 동해안이 여진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됐고, 고려 조정은 ‘동북의 해적’을 막기 위해 동해안에 대규모 축성사업과 수군 및 함대 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동여진 해적들은 공격목표를 바꿔 울릉도와 일본을 침공했다.
1019년(현종 10년) 여진 해적이 50척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섬, 이키섬. 하카다등지를 침입해 큰 피해를 입힌다. 일본 조정은 사원에서 제사를 지내며 여진 해적을 물리치도록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 해적은 일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고려 동해안과 우산국을 거쳐가면서 노략질을 했고, 우산국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여진족의 침공으로 울릉도는 쑥대밭이 됐고, 그때부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게 됐다. 고려 의종 11년(1157)의 기록에는 “울릉도가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석불, 철종, 석탑’ 등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때 높은 수준의 불교문화를 갖고 있던 울릉도가 여진족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김호동교수는 현종때를 마지막으로 우산국의 명칭이 보이지 않고, 그후 우릉도 내지 울릉도라는 병칭이 보인다는 점에서 우산국의 멸망시기를 여진족의 침공으로 자립기반을 잃은 11세기초로 잡았다. 섬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육지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했고, 그 과정에서 우산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 조선시대 동해안 수군 포구 |
「고려사」 지리지에는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울릉도가 있으며, 울진현에 귀속해 있다”고 정리돼 있다. 이는 조선조 세종이 「고려사」를 편찬할때에 울릉도가 고려의 군현에 편재돼 있어 영토화했음을 보여준다.
김호동교수는 “삼국시대라는 인식의 틀을 깨, 탐라국·우산국·가야등의 역사를 포괄하는 고대사를 그려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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