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의 <M>은 혼란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감독의 불친절함이 낳은 악의적 혼란이 아닌, 보는 자가 채워주길 바라며 비워둔 자리에 의해 생긴 '의도된 혼란'이다.“꿈을 꾸었다. 누군가 내게 찾아와 물건을 건네줬다. 네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의심할 바 없이 <M>은 꿈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그 꿈의 주체는 분명치 않다. 이 영화가 보여준 이미지가 혼란스러운 것은 시선의 주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라기보다 '의도된 혼란'이다. 그 혼란 너머에 <M>과 우리가 만나는 접점이 존재한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죽음의 이미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시선은 '죽어 있는 미미의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우리는 빗물에 잠긴 낡은 사진들과 죽은 미미의 눈을 본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쯤에서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M>에서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는 미미가 꾸는 꿈일 수도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에 대한 미미의 미련이 만들어낸 꿈이라면, 이것은 '유령의 시선'이다. 이러한 탈인간화된 시선을 가정할 때, 역설적으로 <M>에서 민우와 은혜가 느끼는, 보이지 않는 시선의 주체는 규명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지배적인 이미지들의 원류 또한 유추 가능해진다.
민우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쫓는 실체 없는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은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머무는 아파트 공간은 민우가 때때로 배회하는 골목길만큼이나 어둡고 모호하다. 민우와 은혜는 그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끼고 매번 움츠러든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거울 이미지는 죽기 직전 미미가 최후로 봤을 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빗물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물속에 너울거리며 비치는 민우의 빛바랜 사진들이 이 모든 꿈의 시초일 수 있다. 미미가 쓰러진 바닥에 고인 물은 반들거리는 유리처럼 보인다. 이는 루팡 바의 반들거리는 스탠드 바와 술 진열장으로, 미미와 민우가 헤매고 다니는 골목 안에 놓인 거울로, 유리로 만들어진 듯한 민우의 아파트 공간 이미지로 연결된다.
미미가 기억하는 최후의 이미지인 비와 우산의 모티브는 더욱 확실하게 등장한다. 미미의 뒤를 쫓는 우산을 든 정체불명의 엄브렐러맨, 우산을 든 루팡이 그려진 루팡 바의 간판, 민우의 아파트 옷걸이에 걸린 엄브렐러맨의 모자와 옷, 우산. 중반부에 등장하는 민우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물, 후반부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가는 미미의 모습은 모두 미미의 마지막 의식의 편린에서 솟아나온 이미지들이다. 비 내리는 밤거리, 빗물에 비친 네온사인의 이미지는 불규칙적으로 번쩍이는 루팡 바의 간판, 그리고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이는 영화의 제목인 ‘M’의 네온사인을 닮은 타이포그래피와 연결된다.
내러티브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 영화에서 꿈의 주체는 당연히 민우다. 알맹이 없는 삶으로 인해 창작의 한계에 부딪힌 민우는 꿈속에서 잊어버렸던 첫사랑의 기억과 조우한다. 되풀이되는 민우가 꿈을 꾸고 깨어나는 장면으로 인해 이 영화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는 지워진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혹은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꿈속에서, 혹은 상상 속에서 미미는 민우의 창작욕구를 자극하는 뮤즈이며, 그가 점차 되살려내는 첫사랑의 기억은 어쩌면 가공된 것일지도 모른다. 민우가 질투심에 휩싸인 은혜에게 이야기하듯, 미미는 민우의 꿈속에 나타난 소설 속 여주인공일 수도 있다. 은혜가 민우에게 묵혔던 감정을 토로하고 격렬하게 사랑을 구하는 장면에서 미미와 은혜는 모습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겹친다. 어쩌면 미미는 은혜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민우가 떠올려낸 가공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민우와 미미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이야기가 민우의 소설이라면, <M>은 한 소설가가 꾼 백일몽, 혹은 영화 속 영화와 같은 액자구조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꿈꾸는 것은 민우 혹은 미미만이 아니다. 민우의 약혼녀 은혜도 꿈을 꾼다. 그녀의 꿈속에서 민우는 때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은혜를 쳐다보고 그 낯선 기운에 은혜는 공포에 질린다. 그녀 또한 꿈에서 깨어나서도 꿈과 현실을 온전히 구분해내지 못한다. 민우와 마찬가지로 은혜에게도 아파트는 때로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공간이다. 가장 현실적인 결말로 느껴지는 마지막 호텔 장면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공간 못지않게 비현실적이다. 동남아 휴양지 어디쯤으로 보이는 옥빛 바다, 그림처럼 음식이 담긴 카트를 끌고 등장하는 행복해 보이는 은혜, 그리고 풍경화처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정답게 백사장에 앉아 있는 둘의 모습은 너무 평화로워 보여서 기이하다. 이는 창작의 고통을 겪는 예술가를 연인으로 둔 평범한 여인의 몽상이 아닐까. 은혜는 민우를 미행하다 놓치고 지하철역에 나란히 서 있는 미미와 조우한다. 미미의 존재는 평생 자신의 뮤즈를 품고 살아갈 남자와 맺어지기로 결심한 여인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환영이 아닐까.
적어도 <M>에서 이 모든 추론은 가능하며, 저마다 정당성을 가진다. <M>이 모든 이의 꿈의 조각을 불규칙적으로 이어놓은 브리콜라주(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닥치듯 모든 물건을 이용해 직접 만드는 예술’이라는 브리콜라주 개념을 사용해 사물을 ‘사고를 촉발하는 증거품’으로 설명했다)와 같다면, 이 혼돈의 끝은 결국 보는 자를 향해 있다. 어두운 골목길, 황량한 밤의 아파트, 한여름 숨 막히는 도시의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사람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처음으로 마주 잡은 순간들은 어쩌면 모두의 뇌리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이 아닌가.
이명세의 전작 <형사>가 퓨전 사극의 세계 속에서 판타지를 구현한 탓에 보는 이들을 판타지 드라마의 장벽 바깥에 뒀다면, <M>은 보다 자연스럽게 등장인물과 보는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있다. 슬픈 눈과 남순의 화려한 사랑의 칼부림이 아닌, 대낮의 커피 빈, 갑작스런 돌개바람, 문득 마주친 음습한 골목길의 어둠 말이다. 이러한 자잘한 일상의 조각들은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잊힌다. 그러나 그 일상의 기억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리 한 구석에 숨겨져 있다. 어떤 자극만 존재한다면, 순식간에 그 기억들이 불려 나올 수 있다. 그건 커피 빈에 얽힌 달콤한 추억일 수도 있고, 갑작스런 돌개바람에 의한 당혹감일 수도, 어두운 골목길을 흘깃 쳐다보았을 때의 막연한 공포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M>은 진정한 '인터랙티브 시네마'다. 학습을 통해 알고 있는 일관된 플롯의 강박을 일단 벗어던지기만 하면, 낯선 이미지들의 편린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매우 친숙한 이미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M>은 단순한 이야기를 다중적인 시선으로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잃어버린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유혹한다. 이것은 보는 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보는 이의 이야기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비어 있고 뒤틀린 지점들은 감독의 불친절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채워주길 바라며 의도적으로 비워둔 관객의 자리인 셈이다.
다중적인 시선, 다중적인 주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M>은 보는 이의 꿈으로 전이될 수 있다. 이러한 다중적인 주체의 시선을 단선적으로 따라가려 한다면 <M>은 그 비밀의 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민우와 미미가 조우하는 ‘루팡 바’의 마법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루팡 바에서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는 시공간의 장벽을 넘어 서로 조우한다. 현실 세계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십수 년 전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유령과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이어주는 끈은 ‘이야기’다. 민우는 미미에게 머릿속에 뱅뱅 돌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미미는 울고 웃으며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은 어떤 예술작품이 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에 대한 묘사일지도 모른다.
영화와 관객 또한 시공간을 넘어 사각의 스크린에서 조우한다. 루팡 바는 관객과 영화의 만남을 마침내 성사시키는 스크린, 혹은 극장의 다른 이름이다. 단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이곳이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는 장소라는 점이다. <M>은 관객과 영화의 진정한 만남을 요구하는 영화다. 다시 말해 <M>은 누군가의 첫사랑에 대해 들려주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들의 첫사랑을 환기시키는 영화다.
최은영(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