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 장에 가다
이 미 화
빛은 아직 저 멀리 있지만 시간의 기억은 어김없이 이 땅에 생명을 깨우려나보다. 가늘게 드러내는 부드러운 실빛 곡선은 산을 더듬어 흐른다. 절기, 동지를 보낸 아침이 훨씬 부지런해 진 것 같다. 금새, 말이 갈기털을 세우듯 산등성에 나무들이 갈기처럼 이어진 풍취가 늠름하고, 겨울 생명들이 반향의 빛 따라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새벽 정적을 깨우는 차 소리가 쾌청하다.
본래 장에 가는 사람들은 부지런해야한다. 새벽 네 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바다에서 올라오는 해를 볼 요량이었는데, 계산 착오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어쩐다? 주유도 할 겸 휴게소에 들러 해를 기다려 카메라에 담아보아도 좋을 듯하다. 장날은 뭐니, 뭐니 해도 그날의 날씨가 관건이 아니던가. 오늘 날씨는 검붉은 하늘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최상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청주에서 포항 장을 보러 간다면 특별한 별종이거나, 색다른 원인이 아니고서는 체험여행이라고 하겠지. 구룡포 장에 가는 이유인즉, 차츰 나올 것이고 설레임은 벌써 얄키한 바다냄새가 저 산을 넘어 내 코밑에까지 감돌고 있다.
마침, 와촌휴계소가 반긴다. 차를 쉬게 하고 하루 중 제일 냉기를 품은 공기 속에 섰다. 해를 품은 높은 미망迷妄을 향해 신기루 꿈을 꾸는 사람처럼 검은 암벽같이 높은 산줄기를 따라가는 카메라에 몰입하였다. ‘태어나도 좋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떠오르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바쁜 맘을 몰라주는 해가 더디기만 하다. 경이로움이 나를 두르는 해돋이 황홀감을 뒤로 하고 어둠을 벗은 낯선 사람들을 본다. 보석 같은 색을 지닌 바다 신비는 알바 아니라는 듯 비릿함이 진동하는 자젓거리를 헤집고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기고, 휘장 속에서 나오듯 또 다른 사람들 손에는 검은 봉다리가 무겁다. 아직 늦잠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시각이다. 여기 역시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부지런의 대명사 풍경이 있다. 고생에 절은 모습으로 푸성귀랑 바다미역 종류를 앞에 놓고 앉아있는 노인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게 뭐에요?’ “돗인기라” 먼저 봉지부터 꺼내드시는 것을 보고 그게 뭣이든 따질 일이 아니다. 꽁꽁 싸맨 목도리 속 얼굴에는 바닷바람이 배어 있었다. 금방 산 따끈한 국화빵 봉지를 내 놓았다. “우째 이런 아지매가 다 있노야” 옹기종기 심심치는 않으시려니, 건 내 주는 봉지를 들고 일어섰다.
‘싱싱한 이 비릿함’ 청주 농수산시장에서 맡아보던 냄새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작년 추석이었다. 마음먹고 도미며, 조기, 문어를 사서 베란다에 널어 말렸었다. 어찌된 일인지 조리를 하다 보니 상한 냄새가 나는 통에 다 버리게 되어 가족들한테 어찌나 민망하든지, 또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냉동 되었던 생선과 활어를 손질해 물기를 걷은 차이를 실감한 경험이다. 주문받은 생선이며 주렁주렁 묵직한 봉지가 늘어갔다.
장이 서는 곳은 구룡포읍 병포리 부근 해안 절벽에 구룡산맥이 흘러오다 멈춘 곳이라 하였다. 매서운 추위 속에 독도 앞바다에서 조업을 마친 대게잡이 어선들이 들어오는 선착장으로 가 보았다. 경매를 마친 노란 빈 상자들이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벌써 하루를 마친 부지런한 흔적이 바닥에 묻어 있다. 두 세 곳 간이상가에서 값비싼 문어가 부자 미식가를 다리고 있는 모양인지, 몇 십 만원 소리가 들려 거들떠 볼 수조차 없는 내 처지가 안쓰럽다. 언제인지는 값이 나가는 문어다리를 한번 먹어보리라. 입안이 씁쓸하다.
반도보다 작은 바다의 돌출부, 단조로운 해안선이 남으로 내려오다 유일하게 형성한 (곶)은 포항시 남구, 범의꼬리 호미虎尾란 별칭이 있다. 해맞이를 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서린 안내판들을 보노라니, 바다에 세워진 손은 일제가 박아 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상생 천년의 눈동자로 가장 동쪽인 이곳에서 해를 맞는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찬바람에 바다 빛깔은 진 청록색으로 잴 수 없을 만큼 깊은 천혜의 풍취를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그 깊고 너른 바다가 쏟아내는 눈보다 하얀 포말에 번잡했던 내 마음을 씻을 수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끝이 없을 것 같은 굽이굽이 해안도로를 따라 가노라니 틈새에 들어앉은 마을의 정취가 정겹다. 더 이상 찻길이 열리지 않은 것 같은 감포에 닿았다. 오늘은 하루가 더 길었었는지 모른다. 시장기를 더 참지 않아도 될 식당이 보였다. 먹는게 뭐 중요한가? 조금 전 생각이 바뀌었다. 청주까지 가야지. 중요한 요기를 챙겨주는 아주머니께 복을 빈다.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하는 '나'모든 인연으로 잠시 내게 존재하다 멀어지는 것을,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인연이 다하는 때가 있다. 하루 속에서 발견한 작은 집착들을 돌려놓을 시각이다.
“하루하루를 일생이라고 생각하라” 여한이 없는 일생, 구룡포 장날, 긴 하루였다.
첫댓글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부지런의 대명사 풍경이 있다.
고생에 절은 모습으로 푸성귀랑 바다미역 종류를 앞에 놓고 앉아있는 노인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좋은 여행을 하셨군요선생님. 흠..맛있는 거 많이 사오셨습니까? 감상 잘 하고 갑니다.
'하루하루를 일생이라고 생각하라'며 생활하시는 부지런한 선생님! 구룡포장에 다녀오셨군요.
좋은 글도 한 편 쓰셨구요. 감상 잘 하였습니다...
소박한 장터 풍경과 구룡포이야기 잘 감상했습니다.^^
구룡포 저에게도 군대의 추억이 있는 곳이랍니다. 간첩작전 하면 생각나는 곳이지요. 좋은 곳으로 여행을 하셨군요. 바닷가의 시장풍경은 인간미가 있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수준높은 글, 잘 읽었습니다. ~^_^~
여기 역시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부지런의 대명사 풍경이 있다.
고생에 절은 모습으로 푸성귀랑 바다미역 종류를 앞에 놓고 앉아있는 노인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