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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살 까지 끝까지 살아서 원수의 핏줄이 무너지는 걸 본 조선시대 최고의 복수극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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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1468〕세조 악몽과 질병으로 단명(50세)
〔1438~1457〕1457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단명(향년 18세)
〔1450~1470〕 세조의 차남 예종 단명(향년19세)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잃은 정순왕후, 그 여인은 64년을 홀로 버티며 남편을 죽인 원수들의 핏줄이 하나씩 스러지는 것을 모두 지켜본 뒤에야 편안히 눈을 감았다.
바로 단종의 안해 정순왕후다. 그녀는 82세까지 살아남았다. 남편을 죽인 세조는 악몽과 지병으로 시달리다 죽었고, 그 아들들은 스무살도 못 넘기고 요절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가장 우아하고 처절한 복수로 끝까지 살아남은 한 여인의 숭고한 생존기,
1453년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의 칼날이 궁궐을 휩쓸며 김종서와 황보인 등 충신들의 목이 떨어졌다. 열두 살 어린왕 단종은 하루아침에 허수아비가 되었고 그의 곁에는 열두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 문종도 그가 태어나자 마자 잃은 어머니 현덕왕후도 없었다.
그 때 홀로 남겨진 소년 왕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1454년 열다섯 살 송씨가 열네 살 단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훗날 정순왕후로 불리게 될 이 소녀는 여산송씨의 딸이었다. 한살 연상의 왕비는 어린 왕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평생 단종만을 그리워했다는 사실이 그 3년의 무게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남편이 폐위되어 영월로 떠난 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볼 수 있는 동망봉에 올라 보이지 않는 남편을 향해 통곡했다.
1457년 열일곱살 단종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였다. 사약이 아니라 활줄로 목을 조여 타살했다는 설도 있다. 18살 정순왕후는 그 순간 미망인이되었고, 언젠가 함께 살리라고 믿었던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단종이 사랑했던 아내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으며, 이 다짐은 이후 64년간 한번도 흔들리지 않는다.
세조가 유화적으로 집과 재물을 주고자 했지만 그녀는 달콤한 유혹을 거절했다. 남편을 죽인 원수가 주는 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나라의 국모였던 정순왕후가 선택한 일은 염색업이었다. 도성안에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샘물이 있었는데 이 물로 자줏빛 천을 물들이며 그녀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원수에게 빌붙어 연명하느니 차라리 손에 염료를 묻히며 살겠다는 자존감이었다.
가련한 여인은 이제 손에 염료를 묻히는 철의 여인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그 무대는 궁궐이 아닌 시장바닥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순왕후의 꺾이지 않는 자존감에 감탄한 도성의 여인들이 하나 둘 그녀의 옷감을 사주기 시작했다. 조선판 여성 연대경제의 출발이었다. 이 작은 경제공동체가 그녀의 기구한 64년 생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궁궐에서 세조는 날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뱄었다고 하고 급기야 세조는 아무도 고칠 수 없는 피부병에 걸려 징글징글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 원인모를 피부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세조, 조카를 죽인 죄책감에 육신을 갉아먹는 듯 했다.
1457년에는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단종처럼 스무살도 되기 전에 급사했다.
세조의 둘째 예종은 재위 1년 만인 열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조의 직계 혈통은 연이어 꺾여나갔다.
복수를 위해 칼을 들지 않았어도 하늘이 대신 심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는 의경세자 아들 성종에게 넘어갔다. 세조의 직계가 아닌 방계로 왕통이 넘어간 것이다.
정순왕후의 긴 생존은 단순히 한많은 고난의 연속이 아니라 원수 가문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성종을 지나 연산군이 대통을 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윤석열 처럼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했는데 폭정과 사치가 극에 달하면서 백성들과 신하 모두의 원성을 샀다. 생모윤씨의 폐비사건을 안 이후에는 갑자사화를 일으켜 피바람을 몰고 왔으며 급기야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세조의 증손자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서 비참하게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다.
정순왕후는 이때 67세 였으니 남편이 죽은지 49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평생을 원수의 핏줄 아래서 살아왔던 그녀가 마침내 그 핏줄이 왕좌에서 쫒겨나는 것을 지켜본 것이다.
세조는 병마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었고 그 아들 둘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며 그 증손자는 폐위 당했다.
정순왕후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원수의 가문은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82세 인생은 그 자체로 가장 우아한 승리였다. 연산군이 쫒겨난 후에도 정순왕후는 15년을 더 살았다. 중종시대까지 살아남았으니 단종 사후 무려 다섯명의 왕이 바뀌는 세월을 버텨낸 셈이다. 그녀는 여전히 조용히 단종만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세상은 그녀를 잊어갔지만 그녀는 단 하루도 남편을 잊지 않았으며, 그 한결같음이야말로 세조가문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1521년 정순왕후는 여든 두살에 눈을 감았다. 남편단종이 세상을 떠난지 64년, 열여덟 살 미망인이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그녀는 단 한번도 권력과 권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원수의 돈을 거절하고 스스로 생계를 꾸렸으며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권력을 뺐겼어도 자존감은 빼았기지 않았고 남편을 잃었어도 남편에 대한 사랑은 잃지 않았다.
82세까지 산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살아여할 이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죽음 앞에서 남편 단종 곁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숙종때에 이르러서 숙종은 단종을 복위시키고 정순왕후의 무덤을 왕비의 격에 맞게 높여주었는데 그 이름이 사思릉이다. 평생 남편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고 단종의 장릉은 강원도 영월에 있다.
두 사람은 죽어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릉의 소나무를 영월 장릉 곁으로 옮겨 심어 정령송이라 불렀으니 정순왕후의 혼이 깃든 소나무가 남편 곁을 지킨다는 의미였다.
역사는 때로 잔인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결국 정의를 돌려준다.
정순왕후는 생전에 복권되지 않았지만 후대가 그녀의 지조를 기억하고 예우하고 있다.
반면에 세조의 후손들은 단명과 폐위로 핏줄이 끊겼으니 역사의 심판은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열여덟살 소녀는 여든두 살 노인이 되기까지 단 하루도 남편을 잊지 않았고 또 단 한번도 원수에게 무릎꿇지 않았다. 그녀는 역사의 승자였다.
한양도성 낙산공원 부근에서 동쪽으로 500미터쯤 가면, 현재의 종로구 창신동의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띈다.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란 뜻의, ‘자지동천(紫芝洞泉)’은 흰 옷감을 이곳에 넣으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단종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1454년(단종 2) 1월 정순왕후는 왕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단종의 왕비가 되었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의 지위인 남편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 사례였다. 『단종실록』에는 “근정문에 나아가서 효령대군 이보, 호조판서 조혜를 보내어 송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고 한 후,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비가 책봉을 받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왕비로 살아간 삶은 극히 짧았다. 1455년 윤6월 삼촌 수양대군의 압박을 받은 단종이 왕위를 내놓게 된 것이다. 단종이 상왕이 되면서,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16세의 나이, 조선 역사상 최연소 대비가 된 것이다. 이후의 삶은 단종의 수난과 그 궤적을 같이 한다. 1457년 6월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단종의 유배를 결정한다. 유배지는 서강을 앞에 두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였다. 이후에도 경상도 순흥의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 등 단종 복위 운동이 이어지자, 1457년 10월 21일 세조는 단종의 처형을 명했다.
비록 먼 곳으로 유배되긴 했지만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다가 들려온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사망 소식은 정순왕후를 좌절의 삶 속으로 빠지게 했다. 정순왕후는 평민으로 강등이 된 후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며 자지동천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아 외롭고 고달픈 삶을 이어 갔다. 동대문 근처에 여인시장이 형성된 것도 정순왕후와 관련이 깊다. “정순왕후가 정업원(淨業院)에 있을 때 채소의 공급은 동교에 사는 여인들이 시장을 열어 이루어졌다. 여인들의 채소 시장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경지략』은 기록하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정순왕후는 불교에 크게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에서 은퇴한 여인들이 자주 찾은 절인 정업원은 그녀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에 현재는 청룡사가 들어서 있으며, 이곳에 있는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란 의미의 우화루(雨花樓)는 눈물로 얼룩졌을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기억시켜 주고 있다. 청룡사 앞에는 1771년 영조가 이곳을 방문하고 친필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쓴 비석이 남아 있다. 정업원 인근 산봉우리는 정순왕후가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여 동망봉(東望峰)으로 불리는데, 영월 청령포의 망향탑과 묘한 짝을 이룬다.
정순왕후는 18세 때인 1457년 단종과 사별한 후 숱한 시련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64년을 더 살았고, 중종 때인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의 무덤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집안의 종중(宗中) 산이 있는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 부인의 묘로 조성되어 ‘노산군묘’로 불렸다. 숙종 대인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이 되면서, 정순왕후도 왕비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사릉(思陵)’이라는 무덤 이름에는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을 늘 생각했다는 뜻을 담았다.
자지동천 자리 옆에는 세종시대 청백리 재상으로 유명했던 유관(柳寬:1346~1433)의 비우당(庇雨堂)도 있다. 비우당의 '비(庇)'는 ‘덮다’는 뜻으로, 비 맞는 것을 겨우 피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관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치고 앉아 우산 없는 사람들을 걱정했다고 한 데서 집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서울시 여성역사 문화공간 ‘여담재’ 옆에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이 복원돼 있다.
훗날 비우당은 유관의 외후손이 되는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거처로 삼게 된다. 이수광의 호 ‘지봉(芝峯)’은 동대문 밖 상산(商山)의 산봉우리 이름을 따온 것으로, 그가 자랐던 비우당은 지봉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이수광은 외가 5대조인 유관과 부친의 청백리 정신을 계승하여 허름한 초가 비우당에 거처하는 것을 긍지로 삼았다고 한다. 비우당은 실학의 선구적 저술 『지봉유설』의 산실이기도 했다. 현재는 도심 속 아파트촌 사이에 위치하여 숨어있는 유적지가 되어버린 자지동천과 비우당에서 정순왕후와 이수광의 모습을 기억한다.

첫댓글 권력을 뺐겼어도 자존감은 빼았기지 않았고 남편을 잃었어도 남편에 대한 사랑은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