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
본 군은 고구려시대에 요은홀차(要隱忽次)라 하였는데 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양록군(陽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때에 양구현(陽口縣)으로 고쳐 춘주(春州) 지금의 춘천에 예속되었다. 그후 다시 양구(陽口)로 고치고 고려 제16대 예종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낭천(狼川)(지금의 화천) 감무가 겸임 하여 오다가 이 태조 2년(1393)에 각각 분리 되었고 태조 13년 (1404)에 현감(縣監)을 두게 되고 제26대 고종 32년(1895)에 강원도 양구군(陽口郡)이 되어 서면, 남면, 하동면, 서동면, 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 상동면의 9개면을 관할하였다.
그후 융희(隆熙)2년(1908)에는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어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서면과 서동면을 군내면 으로 남면과 하동면을 합하는 동시에 춘천군 북산 외면의 수산리를 병합하여 남면으로, 상동면을 동면을 고치고 그 나머지 면(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은 그대로 두어 7개면 85개리로 개편하였고 1917년 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됨에 다라 1941년 북면을 폐면하여 양구면과 방산면에 각각 분할 편입시켰고 1945년에 38도선이 생김에 따라 남면 일부를 제외하고 전지역이 공산치하에 강점되었으며 6.25사변후 수복되어 1954. 3월부터 군정을 펴오다가 동년 11월 17일 민간정부에 이양과 동시 수입면은 완충지대가 되고 해안면은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안지역이 다시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되면서 해안출장소가 되었고 1979년 5월 1일 양구면의 읍 승격으로 양구읍, 남면, 동면, 방산면의 4개 읍면을 이루었으며 1983년 2월 15일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됨으로서 5개읍면 77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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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
태백산맥의 여러 연봉들이 남북으로 종관하는데, 동단부는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을 연결하는 대암산맥이 남하하여 소양호에 접하고, 중앙부에는 비봉산맥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석산, 사명산을 연결하는 어은산맥이 있어 군 전체가 험준한 내륙 산간지역을 이룬다. 이들 연봉 사이에 수입천과 서천이 남류하다 파로호에 흘러들고, 서북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북한강으로 유입하며, 남단부에 소양강이 서류한다. 평야는 양구분지가 비교적 넓고, 그 밖에 하천유역에 곡저평야가 좁게 분포할 뿐이다.
지질은 대부분 시,원생대의 변성퇴적암 내지 화강편마암이나 동쪽의 해안분지는 중생대에 관입된 화강암의 침식분지이다. 토양은 대부분 잔적토이고 비옥한 충적토는 하천 주변에 좁게 분포할 뿐이다.
이 군은 태백산맥의 분수령을 점유하고 있어 한반도의 서부와 동부 식생계의 경계가 되므로 희귀한 동식물이 많다.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 잉어과에 속하는 어름치, 농어과에 속하는 황쏘가리, 딱새과에 속하는 쇠돌딱새 등이 있으며, 콩과인 개느삼과 다년초인 금강초롱 및 비로용담, 칼잎용담, 끈끈이주걱, 큰비단분취, 북통발, 장백제비꽃, 물이끼등 식물종들이 이에 속한다.
전쟁으로 인하여 대부분 삼림이 파괴되어 침엽수림의 분포가 적다.
호수로는 인공호인 파로호와 소양호가 있어 내수면어업이 활발하고 수상교통으로 이용되며 관광적 가치가 크다. 기후는 산간분지와 1,000m 이상의 고산지가 많아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기온 10.5℃, 8월평균기온 25.6℃, 1월 평균기온은 -6.6℃로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강수량은 974.5mm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적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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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
이 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소양강변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양구읍의 고대리지석묘군, 양구고대리2지구지석묘군, 양구공수리지석묘군과 동면 지석리에 1기, 남면 송우리에 2기, 남면 죽리에 5기 등이 있다. 송우리에서 발견된 석관내에서는 간돌칼, 간돌화살촉이 촐토되었고, 고대리의 고인돌 주위에서도 간돌도끼와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산성지로는 삼한시대에 쌓았다고 하는 남면 가오작리의 비봉산성지와 축성연대를 알 수 없는 양구읍 군량리의 노고성지가 있고, 봉수대는 남면 죽리, 심포리, 원리에 있었다.
불교문화재로 양구읍 송청리의 심곡사는 87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서 6.25사변으로 불타고 목불상 3구가 남아 있었는데 수복 후 댕우전을 재전하여 불상을 봉안하였다. 현존사찰로는 양구읍 웅진리의 금강사, 선정사, 양구읍 정림리의 의선사 등이 있다.
양구읍 상리에 있는 양구향교는 1405년에 창건되었는데, 그 뒤 퇴락된 것을 1963년과 1972년에 수리하였다. 동면 후곡리의 서암사는 1587년에 건립된 것으로 6.25사변으로 불타자 1959년에 중건하였다. 양구읍 공리에 유인석 격전지가 있는데,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 유인석이 왜군과 격전하였던 곳으로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분묘로는 동면 덕곡리에 의병장 최도환묘가 있고, 비석으로는 동면 원당리의 애국지사 동창률 묘비와 방산면 송현리의 백석산지구전투전적비 등이 있다. 정자로는 양구읍 안대리 서천 옆에 세웠던 송암정지와 비봉산 산정의 봉황대가 있다.
이군 동쪽에 대암산, 대우산천연구보호구역이 있는데, 대암산 산정부의 늪지와 희귀한 동식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늪지는 한랭하고 습한 환경에서 형성된 고층습원으로 남한에서 유일한 것이며, 천연희귀동식물은 열목어, 어름치, 개느삼, 황쏘가리, 금강초롱, 산줄첨팔랑나비, 쇠솔딱새 등이 있다.
동면 팔랑리에는 수령 300년이 된 소나무와 방산면 현리 산악골에는 수령 500년이 된 소나무가 강원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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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
문헌상 기록으로는 1405년 비봉산 아래에 창건된 향교가 최초의 양구 교육기관 이었다. 그 뒤 이곳 향교는 1737년에 양구읍 하리로 이전하였다가 6.25사변 후 다시 상리 비봉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동면 후곡리에 있는 서암사는 준서원격으로 1587년에 현감 김현도의 덕행과 치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봉향하였으며, 한때 유림들의 시회장으로 이용되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11년의 양구보통학교가 최초였다. 이어 공립으로서 1913년 수입면 문등리의 일본어강습소가 1926년에 문등보통학교로, 동면 임당리의 일본어 강습소가 1921년에 임당보통학교로 각각 설립되었다. 사립으로는 남면 창2리에 창일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일본어 강습소에 불과하였다.
광복 전까지 계속 방산면의 장평 보통학교(1929년), 남면의 용화보통학교(1932년), 동면의 매동보통학교(1933년), 양구읍의 무룡보통학교(1935년)등이 신설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28년에 양구공립농민학교가 개교하여 초등교육을 마친 이들이 진학할 수 있었다.
1955년 양구중학교를 시발로 중등학교가 건립되었다. 사립학교로는 성애고아원생들의 진학을 위하여 성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운영난으로 폐교하였고, 영한중학교가 주샌프란시스코영사 주영한의 지원으로 1960년에 설립되어 21년간 유지되었다.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1966년에 개원한 양구문화원은 양록제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자료의 연구결과를 출판하여 향토문화의 계승과 개발에 공헌하고 있다.
종교현황은 현재 불교사찰 11개, 천도교교당 1개, 천주교성당 4개, 개신교교회 28개가 있다. 중요복지시설로는 탁아소가 7개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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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기줄싸움이 있다. 조선 중엽 김현도가 현감으로 왔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해마다 정월보름에 주민의 대동단결과 상무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관에서 권장하였다. 면단위로 할 때에는 각 동리를 남북으로 나누어서 하였으며, 군단위 때에는 동면, 남면, 해안면을 한 조로 하고 북면, 방산면, 수입면을 한 조로 하였다.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그해의 도로부역을 맡게 되어 있어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어 모든 마을사람들이 참가하는 놀이이다. 그러나 이 놀이는 1910년대까지는 대성황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가를 찾아볼 수 없고 초등학교 운동회 등에서나 볼 수 있다. | | |
설화민요 |
이 고장의 설화로는 지명유래담과 인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두가지 종류 가운데 지명설화가 인물설화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것은 양구의 지정적 조건이 궁벽한 협지인데다가 경색을 가지고 있는 곳이 많은 데에 연유한다.
대정리전설, 몰구지전설, 상통석굴전설, 방산의 감사구렁이, 실학고개와 학조리전설, 방산의 김등매아가씨와 강선대전설, 소문치와 한씨부인, 잔바위와 등천선녀, 옥녀탄금대 등은 화소를 지명이나 지세에서 얻고 있는 예이다.
인물 설화로는 유교사회에서 생활규범으로 권장하였던 효행, 정절의 설화와 장수설화가 있다. 김현도현감의 효행설화, 열녀박씨와 송아현의 정렬설화가 있다. 장수설화는 장수와 용마에 얽혀 있는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설화와 다를바가 없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한국민요집에 채집되어 있는 편수가 13편이고 양구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10여편 있으나, 이 가운데 양구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민요 중에는 최근 작사되어 작사자까지 밝혀져 있는 것을 빼면 7, 8편이 된다. 양구는 강원도에서도 산이 많은 벽지로 산수가 민요의 소재로 된 것이 많을 법하나, 양구의 민요로 현전하는 가사 중 두드러진 것은 산수보다는 시사적인 것이나 사상성을 지니고 있는 민요가 의외로 많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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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교통 |
이 군의 산업은 농업이 중심이고 경지면적은 약 4,200ha이나 밭이 전체의 60%로 논보다 훨씬 많다. 주요농산물은 쌀, 콩 등의 잡곡이 생산되었으나 최근에는 약초재배와 고랭지기후의 특성을 이용하여 군납을 위한 채소의 재배면적이 증가하고 있으며, 잡곡류의 재배면적은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토지생산성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속하고 있다.
농업인구는 1979년까지는 매년 감소추세를 보여왔으나 1980년 이후 휴전선 부근의 경지개발과 고랭지채소재배가 활기를 띠면서 약간 증가하고 있다.
상업활동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구읍지에 의하면 이곳의 토산물인 자기, 고령토, 인삼, 오미자, 복령, 꿀, 송이버섯, 잣, 영양 등의 한약재와 특용작물이 거래되었다. 그러나 1941년에 만들어진 파로호와 1973년에 완공된 소양호로 양구군 대부분의 넓은 들이 담수되어 교통의 불편을 겪으면서 이 지역의 상업활동에 큰 지장을 주었다.
군내에서 개장되었던 곳은 읍내장으로 5, 10일에 상리장, 2, 7일에 동면의 만대장과 방산면의 장평장, 3, 8일에 유목정장, 4, 9일에 우망장 등이 있었다고 전하여지나 현재는 양구읍 상리장이 5, 10일에 열릴 뿐 그 밖의 장은 모두 없어졌다. 상리장은 현재 상설시장인 중앙시장이 되어 공산품과 일용잡화를 수시로 거래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장날이 되면 많은 농민들이 모여 농산물거래는 물론 일용품을 구입한다. 특히, 이곳의 쌀은 기름기가 흐르고 밥맛이 좋아 경기쌀에 뒤지지 않아 옛날에는 나라의 진상품으로 바쳤다.
교통은 산간지대이고 파로호와 소양호 및 산맥에 들러싸인 오지이므로 불편하다. 양구와 인제군 남면, 양구와 동면 사이에 국도가 지날 뿐 대부분 지역의 교통이 불편하다. 최근에는 소양호의 내륙수운을 이용하여 춘천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1983년에는 파로호에도 정기여객선이 운항되어 화천과 연결되었다. 호수 주변은 물론 군내의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관광객이 해마다 증가하여 교통량이 늘어나고 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