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중심에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아니 낚였다.
요즘 백수인 관계로 시간이 넘쳐나 9편이나 되는 긴 드라마를 불과 이삼일 만에 완주할 수 있었는데 스피디한 극의 전개와 처음 접해보는 스토리의 긴박함, 그리고 예측 불허의 잔인한 결과에 놀라움이 더해져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스토리의 배경이 비현실적이니 작품성이나 등장인물의 연기, 작가나 감독의 의도 등을 살피려는 피곤한 시도는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흥미진진하게 시청했다.
드라마는 게임이 시작되고 탈락자가 생기면서 갑자기 악마적으로 돌변했다.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놀이를 돈과 목숨이 걸린 끔찍한 학살극으로 변질시킨 채 예고 없이 전개된 영문모를 잔인함은 연출의 과감함과 고화질 TV로 생생하게 극대화되었는데 극의 전개상 필요한 장면이었다 해도 매번 피 튀기는 살육의 장면은 끝까지 견디기 힘든 드라마의 방해요소로 느껴져 시청 중단도 고민해 볼 정도였다.
결국 끔찍한 많은 장면을 스킵 했지만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는 꼼짝없이 TV 앞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도록 재미졌기에 제대로 낚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작가는 수백 년 전 로마시대 굶주린 사자들과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검투사들의 역할을 드라마 속 게임 참가자들에게 전가하는 잔인한 계략을 짰으니 시청자는 TV로 위장된 현대판 콜로세움에서 극의 흐름상 꼭 필요한 관객의 역할을 졸지에 감당하게 된 것이었다.
며칠 후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우연히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드라마에 너무너무 감동을 받았다며 심지어 제2, 제3의 후속작까지 기대한다고 하였다.
그 드라마를 재미와 감동은 물론 철학적 의미까지 되새기며 보았다는 것이다.
헉! 감동이라니? 감동이라는 단어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는 것은 재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며 잠시 드라마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작가는 승자가 되어도 불명예스러울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잔혹한 게임에서 천신만고 끝에 승리한 한 남자를 통해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과연 품격과 양심이라는 가치를 선택할 수 있을지 시청자에게 묻고 싶었던 걸까?
동료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전광판에는 짧게나마 우정을 나누었던 동료들의 목숨 값이 숫자로 더해지고 그 금액만큼 쏟아 부어지는 현찰의 가시적 효과는 참가자들이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돈이라는 목표에만 집중하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유혹이 되었지만 신뢰와 배신이라는 이율배반적 상황, 즉 이웃이 죽어야 내가 살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생명의 대가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지옥에서 과연 인간이 얼마나 야비해질 수 있는지, 돈의 의미는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또 다른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드라마를 보았노라며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자신에게 이렇게 끔찍한 드라마를 추천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되물으며 드라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먼저 드라마 전체에 난무하는 어이없는 살인과 피, 승리를 위해 형제나 동료까지 죽여야 하는 고문 같은 상황이 너무도 부당했음에도 이런 학살극을 게임의 일부로 수용하는 듯한 참가자들의 비굴한 태도가 불편해 재미로 드라마를 보려던 자신을 몹시 힘들게 했다고 하였다.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정보를 오락용으로 거래하는 거대 악은 참가자들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도록 교묘한 덫을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포획된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게임 속 사냥감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주최 측의 물리적 힘에 압도되어 다른 이가 죽어야 내가 살수 있는 제로섬 게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겁하고 찌질한 존재로 그려졌다.
이것은 나약한 인간들이 폭력이나 불의에 길들여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너무나 압도적 힘과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될 때 인간은 아주 쉽게 저항을 포기한다고 하니까..
친구 역시 게임의 참가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너무도 괴로워 과연 이 드라마를 계속해서 시청할 것인지 고민했었다고 한다.
드라마 속 외국인 노동자의 입을 통해 고발된 임금 체불도 이젠 너무 흔한 사회악 중의 하나이다.
다른 이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흔들며 상대의 삶을 왜곡시키는 일은 임금체불뿐 아니라 관계의 어려움을 이용한 갑질과 권력남용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면화되는데 이 드라마에도 역시 누군가를 괴롭히며 왕따를 주동하는 찌질한 인간들과 그 사악함에 빌붙는 기생충 같은 무리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무리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 환경에 처해도 인간은 자신이 만만하게 여기는 상대를 짓밟으며 그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아주 못된 습성을 지녔나 보다.
이런 유의 악은 일상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니 당하는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주위 사람들은 악의 조력자 내지는 미필적 방관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악의 평범성’은 유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재판정에 선 독일 장교 ‘아이히만’이 단지 상부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충실했던 사람일 뿐 너무 평범하고 성실한 이웃의 모습이었으며 심지어 유태인에 대해 개인적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그녀의 책에 기술한 바 있었다.
과연 익숙해졌다 해서 악이 용인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은 친구와 내가 늘 공분하는 주제이다.
드라마에는 자신들이 마치 죽음의 신이라도 된 듯 악의 적극적 소비자가 되어 미친 살인 쇼를 즐기는 또 다른 악의 축인 VIP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존재야말로 이 황당한 게임의 필요악 중 하나로 설명되고 있다.
그들은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향락에 지루해진 나머지 더 자극적 오락거리를 탐닉하는 극도로 타락한 존재가 되어 마침내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신이 되고 싶어진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깐부’라고 불리는 게임의 최종 결정권자이며 스폰서인 동료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그의 정체 고백은 주인공의 힘겨운 승리가 반드시 스스로 선택하고 사력을 다한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변수를 암시하는 것이기에 주인공의 최종 승리에는 운명이라는 또 다른 힘이 작용한 듯 보였고 참가자들의 목숨을 건 게임 참여는 그저 역할연기였을 뿐 운명론이 자기 할 일 한 것 아니냐는 것이 친구의 주장이었다.
열심히 노력해 자기의 힘으로 거머진 승리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운명론은 승자와 패자 모두의 노력을 단숨에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꽤 부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이 드라마의 시즌 2를 성급히 예견할 수 있는 이유는 아직 악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또 다른 악인의 정체가 아직도 베일에 싸인 채 드러나지 않았고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손에 쥐게 된 큰돈을 쓰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함으로써 다른 이의 생명과 바꾼 돈에 대한 예의, 혹은 양심이라는 가치에 대해 조금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려 하는 것 아닐까 하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한 이 드라마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나름 의미심장한 것이었기에 끔찍하기만 한 드라마가 아닌 웰 메이드 드라마였다는 것으로 유쾌한 결론을 내렸다.
아직 오징어 게임을 못 보신 분들 계시면 그 게임에 한번 낚여 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주의)) 이 글은 나이 들며 심술이 많아진 아줌마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교하지 못한 드라마 감상평이며 넷플릭스 시청률 세계 1위라는 자랑스러운 한국 드라마를 폄훼하려는 의도는커녕 너무도 자랑스러워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시청을 열심히 권유 중이라는 사실을 고지함.
또한 나와 내 친구는 드라마와 현실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며 그동안 그녀와 나는 책이나 드라마를 이렇게 사회고발 프로그램 시청하듯 파헤치고 잘근 잘근 씹으며 이해하는 걸 몹시 즐겨 왔다고도 할 수 있으니 우리의 설익은 추론으로 인해 혹시라도 뒤늦게 시청하실 분들의 즐거움이 방해받지 않으시기 바람…
만에 하나 드라마가 마음에 안 드신다 해도 그것은 제 탓이 아니니 컴플레인은 사양함….
첫댓글
아! 리아씨 오랫만 이네요. 반갑구요! 역시 첫 댓글 달아 주셨네요. 감사!!
오랫만에 올린 글 보고 반가웠어요!
글을 잘 쓰시는군요
드라마의 '결말'이 유쾌했다는 게 아니라 친구랑 대화중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말씀 입니다.
미리 말씀 드렸듯이 아줌마의 정교하지 못한 감상평 이니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필력 좋으시네요. 감상평 잘 읽었습니다.
전 1화랑 마지막화 30분정도만 보고 시청 중단 했습니다. 제 눈엔 전개가 상당히 느리고, 신파적 요소가 강하게 느껴져 시청하기 불편했어요.
잔인함은 시청중단한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머니게임인가 유튜버 전용진씨가 만든 프로그램(이것도 보지 않고 예고편 10초만 봄) 을 연상케 하더라고요. 돈 앞에서 이기적인 악마로 변해가는 모습이요.
차라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며 인간애를 느끼는 게 날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요즘 드라마들이 너무 쓸데없이 잔인한 장면이 남발되고 있다는 느낌 입니다.
다 보여줄 필요 없는 폭력들이 너무 자세히 묘사되는건 더 자극적 장면을 원하는 시청자들 때문 일까요?
저는 사람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궁금하기도 해서 드라마를 볼때는 인물을 분석하면서 자세히 보는 편 이예요.
물론 작가들이 만든 가상의 인물들 이지만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돈과 이기심 때문에 피폐해져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인생에서 뭐가 제일 중요한지 전혀 고민하지 않고 그냥 내키는대로 행동하며 사는것 같아요.
아직 한참 더 살아야 할텐데 이렇게 각박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운 생각마저 듭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