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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프로야구 마코토 코브라스 유니폼을 입은 김대우. |
"오늘 그는 이전 2번의 부진을 이겨내고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다." 같은 날 대만프로야구팀 마코토 코브라스 팬사이트에 누군가 한국인 패전투수를 그렇게 평가했다. 비록 2군 경기에 뛰지만 대만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선수가 있다니 호기심이 날 법도 하다. 도대체 이 선수는 누구인가. 인적사항에 적혀 있는 이름은 김대우(23).
고교 최고 투수에서 평범한 대학선수로
광주일고는 2002년 5월 제57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경남고를 18-9로 크게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광주일고를 이끈 선수가 3학년 김대우였다. 김대우는 최고구속 145㎞의 강속구와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투수보다 타자로 성장하길 바라는 이들이 많았을 만큼 뛰어난 타자이기도 했다.
"좋은 투수였지만 초속에 비해 종속이 낮았고 공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다. 타자로서는 힘과 정확성을 함께 갖고 있었다." 김대우가 중학생일 때부터 지켜봤던 KIA 김경훈 스카우트팀장의 기억이다.
이름 앞에 '초고교급 선수' 라는 수식어를 달았던 김대우는 그러나 2003년 신인 1차 지명을 받지 못했다. KIA는 김대우 대신 광주일고 동기생인 고우석을 지명했다. 의외였다. 당시 야구계에는 "KIA가 김대우의 몸값 10억 원을 주기 싫어서 고우석을 선택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김경훈 팀장은 "당시 (김)대우가 이름값에서는 앞섰지만 직구 최고구속이 145km를 넘고 슬라이더 평균구속이 130km에 육박했던 고우석이 실력에서 앞선다는 게 스카우트팀의 결론이었다"며 "정신적인 면에서도 고우석이 성숙했다"고 말했다.
롯데가 2차 지명에서 1번으로 김대우를 지명했다. 롯데는 김대우의 영입을 위해 4억 5천만 원을 준비했다. KIA가 김대우에게 제시했다는 2억 5천만 원에 비해 2억 원이나 많은 돈이었다. 롯데가 그만한 계약금을 제시한 건 투자라기보다 모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계약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김대우를 끌어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윤동배 스카우트팀장은 "몇 번의 의견 조율을 거쳐 마지막 협상 때 김대우 측에게 '4억 5천만 원 이상으로는 도저히 계약금을 맞출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며 "그러나 김대우 측에서 5억 원을 제시하며 뜻을 굽히지 않아 협상이 결렬됐다"고 설명했다.
고려대 입학과 상무 입대
롯데 입단에 실패한 김대우는 2003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김대우 측은 입학 조건으로 "2년 재학, 해외진출 보장"을 내걸었다. 2년 동안 고려대에 다니는 조건으로 그 이후 진행되는 해외진출을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고려대는 재학 중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최희섭의 예를 들어 최대한 협조를 약속했다.
김대우는 2년간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그러나 김대우는 2년이 지난 뒤 해외진출이 아닌 상무행을 택했다. 당시 고려대 감독이었던 이종도 KBS 해설위원은 "(김)대우가 입대를 하면서 학교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야구선수들은 상무에 갈 때 학교의 추천서를 받는다. 추천서가 없으면 상무에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김대우가 학교에 알리지도 않고 상무에 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국가대표 경력이 있으면 학교의 추천서가 없어도 상무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대우가 알고 있었다." 이위원의 설명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대우는 어째서 자신의 계획대로 대학 입학 후 2년 뒤 해외진출을 하지 않고 상무행을 택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해외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것이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김대우는 100만 달러 이상의 대형투수도 아니었고 그만한 투수는 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올해 초 상무에서 제대한 김대우는 복학하려고 했다. LG 감독대행에서 물러난 뒤 고려대 사령탑을 맡은 양승호 감독은 김대우를 본 적이 없다. "하루는 대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복학을 할 테니 언제든 해외진출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아직 대우가 학생 신분 아니냐. 졸업하고 천천히 해외진출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얘기하며 그 요구를 거절했다."
복학을 하지 않은 김대우는 롯데에 연락을 했다. 그렇다고 김대우가 롯데에 입단하기 위해 전화를 한 건 아니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약 제111조(계약교섭권 보유기간)에 따르면 ‘1차 및 2차 지명한 선수에 대한 구단의 계약교섭권 보유기간은 다음 다음해 2차 지명일 7일 전까지’이다. 김대우는 자신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2차 지명권을 보유한 롯데의 지명 포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롯데가 김대우의 바람을 들어줄 리 없었다. 이후 김대우는 경기고와 한민대에서 두 차례 메이저리그 트라이아웃을 시도했으나 또 다시 실패했다.
마지막 선택, 대만
7월 5일 대만의 <천공뉴스>에 '한국 광주일고-고려대-상무 출신의 오른손투수 김대우가 자비를 들여 마코토 코브라스의 테스트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계약 여부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7월 6일 대만의 <중국시보>는 'KBO의 반발과 한국-대만 간 선수협정을 고려할 때 김대우의 마코토 입단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우의 대만행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KBO에서도 김대우가 대만에서 뛸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KBO 정금조 운영부장은 "CPBL이 '김대우가 대만프로야구에서 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우리 쪽에 '계약 사실을 늦게 알아 이런 일이 빚어졌다'고 사과했다"고 말했다. 정부장은 "만약 CPBL이 우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김대우를 뛰도록 한다면 상당한 문제가 될 것"이라며 "2군에서는 뛰었다고 해도 1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대우는 7월 8일 등번호 36번이 달린 모코토 유니폼을 입고 중신 2군과의 경기가 벌어지는 그라운드에 나타났다. 단순한 참관이었다면 모르지만 김대우는 2 1/3이닝을 던졌다. 나흘이 지난 7월 12일에도 라뉴 베어스 2군과의 경기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2이닝을 투구했다. 7월 18일 중신 2군과의 재대결에서는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한국-대만 야구협정에 따라 대만프로야구에서 뛸 수 없다던 김대우가 대만에서 투수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프로야구에서 뛰었던 대부분의 한국선수들은 프로 입단에 실패했거나 방출됐던 선수다. 그러나 김대우의 경우는 다르다. 2차 지명권이 살아 있는 선수가 지명권을 보유한 구단의 양해를 얻지 않고 대만프로야구팀에 입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CPBL은 김대우의 마코토 입단과 관련해 KBO에 선수 신분조회도 하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프로야구 사이에 맺어진 협정에 따르면 상대 나라 구단의 지명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이 있다. 김대우 파문은 한국과 대만프로야구 사이 국제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