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7일 목요일
◑ 오늘의 말씀 묵상 ◑
※ Hallelujah!!
- 오늘도 참으로 복 된 목요일 새 아침이 시작 되었습니다만, ‘오미크론 코로나’ 최대1만명 시대를 강력한 기도로 잘 극복하고 이겨 냅시다.
-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가 많은 날씨에 건강하게 면역력 관리 잘해서 전염병에 걸리지 말고 잘 이겨 나가시기 바랍니다.
- 이 하루를 허락하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감사함으로 믿음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신실하게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또한 주어진 일터가 사명의 자리인 줄 알고 신실하게 복음을 삶으로 증거 하시길 축복합니다.
◑ 본 문 ◑
{ 고린도전서14장1-12절 }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 제 목 ◑◑◑◑
◗◗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행동하라!
◑◑◑ 본문 이해와 요약 ◑◑◑
◗ 14장에서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방언과 은사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거론하면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행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울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 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해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모른 일에 적당함과 질서를 좇아 행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전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일이 우선되고 더 가치 있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씀은 성령의 은사를 구하려는 성도들의 내적인 의도의 순수성을 촉구하는 권면입니다.
◈ 이제 14장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돕는다면, 먼저 1-5절에서 사도바울이 은사 중에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한편 6-19절에서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관점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할 것을 강조합니다.
- 또한 20-25절에서 전도와 교회의 질서를 위해 예언과 방언이 각각 필요함을 권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26-33절에서 교회는 언제나 질서 있게 방언과 예언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 한편 34-36절에서 옳은 일이 있더라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남편에게 권하라 라고 합니다.
- 그리고 37-40절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재 확인시켜주고 은사에 대한 최종 결론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 이제 본문을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우선 1절에서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리 위대한 것일지라도 죽은 은사입니다.
- 그리고 4절에서 죄의 본성을 억제하지 않으며 거룩한 은사도 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 한편 5절에서 예언의 은사는 모든 성도가 다 가져도 족한 은사입니다.
- 그리고 7절에서 우리는 성령에 사로잡힐 때 생명력을 지니게 됩니다.
- 한편 11절에서 성도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남용하는 것은 성도 상호간에 ‘이방인’을 대거 양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 결론적으로 성도는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은사를 활용하고 모든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오직 사랑과 덕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는 절제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 질서와 화평을 가르치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절대성이 어떻게 교회에서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 그래서 적당하게 하라는 가르침은 신앙의 원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실질적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 사랑의 정신을 떠나서는 어떠한 성도의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의 원리를 좇아 순종하며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묵상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은사에 덕을 세우면 존귀케 하신다. (고전14장11-12절)
◈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성도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남용하는 것은 성도 상호간에 ‘이방인’을 대거 양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지금까지 고린도전서12-14장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성령의 은사 문제에 대한 가르침인데, 13장에서는 사랑이 모든 은사 위에 뛰어남을 강력히 주장한 사도 바울은, 12장에 이어 다시 성령의 은사를 논하면서, 특히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던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바울은 바르게 세우기 위해 은사에 대해 말씀하면서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은사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은사가 방언과 예언의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 14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방언과 예언이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 고린도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대표기도를 할 때 너도 나도 방언으로 기도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몇 가지의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기에 예배의 대표기도 자리가 자신의 신령함을 자랑하는 경쟁의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11-12절을 살펴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외국인’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바르바로스’로 본래 ‘헬라인이 아닌 외국인’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 그러므로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야인’ 혹은 ‘이방인’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합니다.
- 그런데도 개역 성경이 ‘미개인’을 의미하는 야인이나 ‘이방인’으로 번역한 것은 당시 헬라인들이 헬라인이 아닌 혹은 헬라화하지 않은 모든 이방인을 야인 혹은 외국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방언이 상대방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하게 사용한다면, 비록 예수님의 보혈도 거듭난 한 형제와 같은 성도 사이에도 급격한 단절이 초래된다는 것입니다.
- 물론 이것은 비단 방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은사가 되었든 모든 성령의 은사 역시 본질을 벗어난 과도한 사용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불행이 초래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방인은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사람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한 피를 받고, 한 민족이며, 심지어 한 믿음을 가진 성도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이방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인식 없이 상식이 통하지 않게 살아갈 때 그들은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 이것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더 잘 알고 먼저 알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간에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합니까?
- 그래서 상조 회나, 계모임, 동창회 등을 통해 끈끈하게 서로를 엮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참으로 대단하게 시간과 물질로 투자하고 노력합니다.
-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우리가 서로를 모른다면 안 될 것이며,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잠언 25장 16절에서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하나님께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하는지? 그 은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사도바울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는지?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면 어떤 사람이 된다고 하는지? 방언의 은사 자가 이방인 즉 외국인을 만들면 교회의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방언의 은사가 어디에 유익이 있다고 보는지? 오늘 성령님은 방언과 예언 중에 어느 것을 더 원하시는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성도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남용하는 것은 성도 상호간에 ‘이방인’을 대거 양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에 덕을 세워야 존귀케 하십니다.
- 만일 성령께서 주신 거룩한 은사를 가지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면 되겠습니까?
- 사도 바울이 편지하기를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서 “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되 조심 없이 말라고 했겠습니까?
-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서 7장 31절에서 “세상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라고 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절제입니다.
- 그래서 절제는 아름다운 것이며, 절제는 사람과 사이를 가깝게 하며, 절제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줍니다.
-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는데 이 방언을 통하여 자랑이 되고 방언 기도를 공적으로 하게 된다면 ‘이방인’이 되기 쉬운데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 믿고 감사하며 어떤 남다른 재능이나 축복이나 장점으로 겸손히 절제하는 미덕을 세워야 존귀한 자가 됩니다.
- 고린도전서 9장 18절에서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라고 바울이 절제의 유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바울은 세상의 자랑이나 상을 기대하지 않았고 오직 복음을 값없이 전하며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신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므로 전혀 낯모르는 사람이라도 아주 가까운 사이로 만드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의 선한 역할로서 그 은사가 성령의 선물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기되 그 은사의 한계를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하고 특히 방언의 은사는 통역이 없이는 공적으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라며, 그것이 교회에서 사용되면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혼란만 가져올 뿐이며, 이방인과 외국인으로 만들뿐이며, 방언의 은사는 개인적인 기도의 깊은 자리와 발전을 위해 사용하시고 그것으로 자랑의 기회나 신앙의 수준이나 어떤 증거로 삼는 우를 범하지 않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기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